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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경선과 천리장성의 진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는 가장 성공한 '교육백년지대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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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설 한국사를 배우면서 아쉬웠던 점은 고대사와 중세사가 늘 좁은 한반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한때 광활한 만주를 차지했던 고조선과 고구려가 있었지만 고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일부 역사 사료를 제외하면 우리의 고대사를 올바로 공부하고 이해하기는 매우 부족하다. 특히 고조선은 실제 역사라기보다는 신화로 치부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영토는 한반도에 머물렀다. 고려의 국경선도 한반도 북쪽 허리를 조금 넘었을 뿐이다.
▲ 고려의 국경 구글 어스로 본 한반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두 개로 갈라진 한반도와 한때 선조들이 드넓은 만주를 호령했던 만주가 보인다. ⓒ 김인철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류가 있더라도 연구 사료가 부족했거나 사소한 영역일 것이다. 무엇보다 역사는 학자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은 인터넷과 유튜브 등 역사에 접근하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자료를 확인할수록 사실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역사에 의문이 들었다. 고대사와 중세사,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되는 부분들이 많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일까?
우리 고대사 연구에서 '한사군'의 위치 비정(比定)은 매우 중요하다. 한사군은 BC 108년 중국 한무제가 고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조선 강역에 설치했다는 네 개의 군 <낙랑군, 현도, 진번, 임둔>과 속현을 말한다. 특히 낙랑군의 위치는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 사이에서 '역사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사항이다.
▲ 한사군 위치비정 중국의 <한서><지리지>, <후한서><군국지>에 기록된 한사군 위치. 평양 일대가 아닌 고대 요동 근처에 설치되었다. ⓒ 이덕일
강단사학계는 한사군이 북한의 평양 일대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평양 일대에서 발견되는 당시의 유물이다. 하지만 재야사학자들과 일부 강단 사학자 <윤한택,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들은 한사군이 중국 요동 일대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한사군의 위치는 당시 작성된 사료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서> <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등 중국의 고대 사료는 낙랑군이 모두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를 집필한 역사학자인 신채호 선생도 한사군의 평양 설치를 부정한다.
이 전쟁은 위 씨가 멸망한 기원전 108년에 시작하여 기원전 82년에 종결되었다. 한나라가 패배함에 따라 한사군 설치의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래서 진번. 임둔군의 설치를 포기하고 현토. 낙랑군을 요동 군내에 임시로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p.196>
한사군 위치 비정(比定)이 중요한 이유는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까지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인솔교사로 청소년 열다섯 명과 간도와 연해주 일대를 돌며 역사여행을 다녀왔다. 유적지중 한 곳이 발해 궁궐터인 '상경 용천부'였다.
▲ 발해 궁궐터 상경 용천부 발해 궁궐터 상경 용천부 : 발해 5경 중 하나다.
상경 용천부는 발해의 옛 수도인 5경 중 하나다. 이곳은 발해의 정치 중심지였다. 발해 유적은 가로 세로 4킬로미터인 거대한 성곽 터만 남아 있었다. 흔적만 남아 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인솔교사와 학생들은 그 거대한 궁궐터 규모에 압도되었다. 발해국 역사유물관 안에는 한자로 된 안내문이 있었다. 한자를 잘 모르는 나를 위해 여행사 가이드가 안내문을 해석해주었는데 '발해는 중국의 한 지방정권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역사 현장에서 두 눈으로 목격하자 마음이 불편했다. 티베트의 서남공정, 위구르의 서북공정 등 중국이 자국 내 소수민족의 역사를 지우고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목적은 분명하다. 영토다. 동북공정도 마찬가지다. 고금을 통틀어 영토 문제는 국가의 본능이다. 현재 영토가 과거 자국 영토가 아니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도덕보다는 힘의 논리다. 가까운 시일에 북쪽에서 급변 사태가 발생할 경우 중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까? 북한 일대가 자국의 영토였다는 점을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할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
고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다. 일연의 삼국유사도 있지만 사대주의와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삼국사기 또한 사대주의 비판을 받지만 사료 가치는 훌륭하다. 삼국사기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사항은 초기 기록이다. 재야사학자들은 주류 사학자들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모두 삼국사기를 부인하고 일본서기를 추종해야 한다고 우긴다.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p.53>
이상한 점은 삼국사기의 기록 전체가 아닌 초기 기록만 부정한다. 왜 그럴까? 그 주장의 핵심은 가야의 건국 시기다. 가야의 건국이 BC 47년임을 부정하고 4세기 이후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에 한반도 남쪽 지방(가야, 가락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와 두 개의 국경
학교에서 배웠던 고려의 천리장성은 한반도 북쪽의 허리를 절반 잘라놓은 형태였다. 드넓은 만주를 호령했던 고조선과 고구려에 비하면 고려는 한반도의 북쪽 일부와 남쪽만 차지하는 소국이다. 하지만 재야사학자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고 주장한다. 우선 <압록강> 입구에서 <도련포>까지 이어지는 지형은 산맥이 많아서 그곳에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해당 지역에서 천리장성을 알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 고려의 국경. ⓒ 윤한택
위 사진 두 장은 윤한택 교수가 쓴 책 '고려 국경에서 평화를 묻는다'에 삽입된 고려의 국경이다. 왼쪽 그림은 현재 인식되고 있는 천리장성과 강동 6주의 위치를 나타내고, 오른쪽 그림은 사료 고증에 의한 천리장성과 강동 6주의 위치를 나타낸다.
역사 사료를 살펴봐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천리장성의 위치는 맞지 않다. 고려사-지리지를 살펴보면 '고려는 서북으로 당 이래 압록을 경계로 했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대개 서북으로는 고구려에 다다르지 못했으나 동북으로는 그것을 넘어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의 국경선이 서북으로는 현재의 압록강, 동북으로는 현재 북한의 원산만이라는 점과는 다르다.
●미디어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하고 있는가?
BC 993년 서희 장군이 거란 소손령 장군과의 담판으로 확보한 강동 6주의 정확한 위치 비정(比定)도 논란이다. 지난해 9월 27(일) 일 MBC의 '선을 넘는 녀석들'에선 고려시대 외교관이었던 서희 장군과 거란 소손녕 장군과의 강동 6주 담판이 방영되었다.
▲ 고려 국경 지난 9월 27일 mbc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방송된 서희 이야기에서 고려의 국경이 나온 지도 ⓒ 김인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고려 <천리장성>의 위치와 <강동 6주>의 위치를 여전히 강단 사학자들의 주장을 담은 지도를 활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공중파 방송이기에 기존의 역사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제작진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 두 사안은 최근 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영역이다. 최소한 고려 국경과 강동 6주 위치에 관하여 다른 주장도 있다는 사실을 명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개인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공간은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찬 가지로 한 국가의 영토는 민족의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서 찬란했던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중세사를 반도의 좁은 사관으로 묶으려 했던 것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 이후 제대로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결과가 현재의 역사교육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왜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학창 시절 나는 조상의 전통과 문화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양에 비해서 낡고 초라했고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학창 시절의 잘못된 교육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물론 기존의 역사 교육은 모두 잘못되었고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모두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사는 고정불변이 아니기에 의문이 생기면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합리적이라면 수정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옛 부터 기록을 중시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된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대사와 중세를 살펴볼 역사적 사료들이 매우 부족하다. 고려 국경이 한반도 북쪽이 아니라 중국의 요동 일대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소설 등 많은 것들을 다시 쓰고 제작할 것이다. 그 결과는 후손들의 심리적 영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먼 장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가장 성공한 '백년지대계'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역사 교육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윤한택, 고려 국경에서 평화를 묻는다.
-단채 신채호(김종성 옮김), 조선상고사
-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우리 안의 식민사관(일제감점기:이병도국민반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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