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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淸陰先生集序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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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陰先生集序

●朝天錄序[李康先] a077_003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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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聞奉皇華之使者。嘗有有懷靡及之心。以故爰諏諮度。卽其所歷之境地。所遇之情形。山川城郭。無不可發爲文章而煥其志氣。要以厪上國之思。懷耿光之想。而寔與於冠裳玉帛之會者。蓋難其人。方今聖天子在上。運正當午。文泉甫壯。凡夫楮卿墨客與夫騷人羽士一吟一詠。無不足以翔洽大化。鼓吹休明。頃有朝鮮使君金。偶出其所著朝天錄。閱之。識趣高邁。襟懷寥廓。有工部之深思而不湮於排鬱。有謫仙之瀟灑而不流於狂肆。有五柳之澹蕩而不淪於寂寞。至其音律之鏗鏘。對偶之金石。大有聲振林木。響遏行雲之致。其所以鼓吹我文明之化。而光寵其主之休命者。豈淺鮮哉。余故樂爲之敍。益以見聖世維新之治。窮荒絶域。擧爲聲名文物之鄕。而況隷在屬國之下者乎。他日重譯之朝。余當以是編爲券。 天啓丁卯歲仲春日。禮部署部事左侍郞兼翰林院侍讀學士李康先。書於嘉樹軒之署中。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1

 

●조천록 서(朝天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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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듣건대 황화(皇華)의 사명(使命)을 받드는 자는 일찍이 미치지 못할 듯한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널리 묻고 방문하기를 꾀한다고 한다. 그러니 거쳐 가는 지역이나 만나게 되는 정형(情形)에 대해서 산천이나 성곽 등을 모두 드러내어 문장을 지어서 그 뜻과 기운을 밝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상국(上國)을 두루 둘러볼 생각과 광영(光榮)을 그리는 생각을 가지고 관상(冠裳)이나 옥백(玉帛)의 회합에 참가할 수 있는 자는 대개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운 법이다. 현재 성천자(聖天子)께서 위에 계시어 운수가 바로 한창인 때를 당한지라 문천(文泉)이 크게 장대해졌는바, 무릇 저경(楮卿)이나 묵객(墨客) 및 소인(騷人)이나 우사(羽士)가 한번 읊고 한번 노래함이 큰 교화를 두루 펴고 아름다움을 고취시키는 데 족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지난번에 조선의 사군(使君) 김상헌(金尙憲)이 우연히 자신이 지은 조천록(朝天錄)을 꺼내어서 보여 주었는데, 읽어 보매 식견과 지취가 고매하고 흉금과 회포가 시원스러워 두공부(杜工部)의 깊은 생각이 있으면서도 울적한 데에 빠져들지 않았고, 이적선(李謫仙)의 시원스러움이 있으면서도 방자한 데로는 흐르지 않았으며, 도오류(陶五柳)의 담박함이 있으면서도 적막한 데에는 빠져들지 않았다.

음률(音律)이 악기(樂器)가 울리는 듯하고 대우(對偶)가 금석(金石)과 같이 단단한 데에 이르러서는 소리가 숲 속을 진동시키고 메아리가 구름까지 닿는 아취가 크게 있었다. 그러니 우리 중국 문명의 교화에 고취되어 그 나라 임금의 휴명(休命)을 빛나게 한 것이 어찌 얕고 적겠는가. 내가 그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서문을 지어서 더욱더 거룩한 세상의 유신(維新)의 다스림을 드러내었다. 궁벽한 곳에 있는 먼 나라까지도 모두 문물이 뛰어난 나라가 되었는데, 더구나 속국(屬國)의 아래에 끼어 있는 조선과 같은 나라이겠는가. 이 뒷날에 먼 외방에서 사신이 조회하러 오면 나는 마땅히 이 편(編)을 시권(詩卷)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 5 ) 중춘일(仲春日)에 예부서부사좌시랑 겸 한림원시독학사(禮部署部事左侍郞兼翰林院侍讀學士) 이강선(李康先)은 가수헌(嘉樹軒) 안에서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6

 

●朝天錄序[張延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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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賝貢我 天朝職方。令由遼左楡關入。自建酋蠢動。壅閼弗通。陪臣春秋有事。浮海方達登萊。是漢樓船將軍楊僕所開路也。于是朝鮮行人。爲東海之波臣。余里輪蹄孔集。冠薹笠者踵錯于廷矣。丙寅冬。余方杜門讀禮。使臣金子叔度偶遊余日涉園。得識余仲子萬選。比事竢還轅時。已改歲春暮。則捃摭其廷次馮弔唫慨及入都後早 朝讌會之什。彙爲一冊。總名曰朝天錄。因萬選乞言于余。行人有辭。何可違也。夫朝鮮箕子舊封。襲冠帶以藩諸華。無守忠孝。入 天朝尤爲暱就。丁酉中患于倭。我 神祖皇帝遣重臣。經略其地。倭是以不得逞志于鮮人。是我之成也。今建莤自寧遠挫衂。狡焉寇掠。江東鐵山不守。羽報狎至。叔度聞之。自烏蠻邱中上書。 天子哀其意。爲檄寧遠撫臣便宜行事。速以偏師尾其後。鮮人自可恃以無恐。而借箸之臣猶鰓鰓過計。懼奴滅之無時焉。昔延陵吳季子聘魯。請觀六代之樂。歌二南歌二雅。歌邶鄘衛。歌三歌豳歌魏歌唐歌頌。皆有嘆美。獨至陳則曰國無主。其能久。至鄭則曰細已甚。民弗堪。至秦則曰是謂夏聲。能夏則大。其辯十三國之興亡。如指諸掌如數白黑者。此何也。古樂章皆詩也。詩之爲敎。發乎性情。止乎義禮。如天籟之鳴。自然而然。小而一身之動定。大而世運之升降。靡不由之。三百篇之旨。大抵如此。札蓋審音精微窈渺。非淺見拘迂之儒所能測也。余鹵莾。識不逮札如何瀟然。讀叔度詩。見其事有所感。情有所會。神與景合。氣從意暢。亢不傷調。抑不病格。有優柔之韻。無衰颯之音。使世有精識如札其人者采而歌之。必將曰美哉。其箕子之舊乎。況其請捄一書。痛切回 天。不減包胥之哭。余卜其國有人。未有患也。叔度歸報命。其宣述 聖天子懷遠洪恩。君臣益自振厲。練兵秣馬。與寧遠撫臣掎角。殲此惡奴。通復舊貢道。車書一家而後朝食焉。豈不休哉。遂序而畀旃。天啓七年歲次丁卯初夏。濟南黃山居士張延登濟美父題。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1

 

●조천록 서(朝天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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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이 우리 천조(天朝)의 직방(職方)에 토산물을 조공으로 바침에 있어서 요동(遼東)의 유관(楡關)을 경유해서 들어오게 하였는데, 건추(建酋)가 준동한 뒤로는 길이 막히어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배신(陪臣)이 봄가을로 천자를 조회하는 일이 있을 때는 바닷길을 이용하여야만 비로소 등래(登萊)에 도달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한(漢)나라의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열어 놓은 길이다. 이에 조선의 사신이 동해(東海)의 바닷길을 따라 배를 타고 건너는 파신(波臣)이 되었으므로,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수레와 말이 많이 모여들고, 사신의 옷을 차려입은 자들이 길에 가득하게 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 2) 겨울에 내가 바야흐로 문을 잠그고 예서(禮書)를 읽고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 김숙도(金叔度)가 우연히 우리 집의 정원인 일섭원(日涉園)을 거닐다 나의 둘째 아들인 장만선(張萬選)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사신의 일을 마치고 수레의 끌채를 돌려 되돌아갈 무렵에는 이미 해가 바뀌어 늦은 봄이 되었을 때였다. 사신으로서 머무는 곳마다 옛날의 사물을 보고 느끼는 심정이나 비분강개하는 마음을 읊은 시 및 도성에 들어간 뒤에 조회하고 연회하면서 지은 시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는 이름을 조천록(朝天錄)이라 하였으며, 만선(萬選)을 통하여 나에게 서문(序文)을 써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니 사신의 부탁을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저 조선은 옛날에 기자(箕子)가 봉해진 나라로 예의(禮儀)와 문물이 뛰어났으며, 우리 중화(中華)의 울타리가 되어 대대로 충효를 지켜 왔다. 그러므로 천자에게 조회하러 들어오면 더욱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정유년(1597, 선조 30)에 왜구의 환란이 있자 우리 신종(神宗) 황제께서는 중신(重臣)을 보내어 그곳을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왜구가 조선 사람들을 제멋대로 해치지 못하였으니, 이 나라는 우리가 이루어 준 것이다.

지금 건추(建酋)가 중국을 넘보다가 영원(寧遠)에서 꺾이어 패한 뒤에 교활하게 도적질과 노략질을 하였는데, 조선의 강동(江東)과 철산(鐵山)을 지켜내지 못하였다는 변방의 급보가 이르자, 숙도(叔度)가 그 소식을 듣고는 오만관(烏蠻館)에 있으면서 글을 올렸다. 이에 천자께서 그 뜻을 불쌍히 여겨 영원의 무신(撫臣)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편의대로 일을 행하도록 하였으며, 속히 군대를 파견해 오랑캐의 후미를 치게 하였다. 이때 조선 사람들은 스스로 이를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차저(借箸)하는 신하들은 오히려 겁을 집어먹고는 지나치게 염려하여 오랑캐들을 멸할 때가 없을까 두려워하였다.

옛날에 연릉(延陵)의 오계자(吳季子)가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육대(六代)의 음악을 듣기를 청하였는데, 주남(周南)과 소남(召南),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를 노래하고, 패풍(邶風)ㆍ용풍(鄘風)ㆍ위풍(衛風)을 노래하고, 왕풍(王風)ㆍ빈풍(豳風)ㆍ위풍(魏風)ㆍ당풍(唐風)ㆍ주송(周頌)ㆍ노송(魯頌)ㆍ상송(商頌)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는 모두 찬미하였으나, 유독 진풍(陳風)에 이르러서는 “나라에 임금이 없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였고, 정풍(鄭風)에 이르러서는 “가혹함이 너무 심하니 백성들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진풍(秦風)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하(夏)나라의 음악인가? 능히 하나라와 같이 한다면 강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열세 나라의 흥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 위에 놓고 가리키는 것과 같았고 흑백(黑白)을 헤아리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옛날의 악장(樂章)은 모두 시로 이루어졌다. 시의 가르침은 성정(性情)에서 발하여 의례(義禮)에서 그치는바, 천뢰(天籟)의 울음과 같아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작게는 일신(一身)의 동정(動定)과 크게는 세운(世運)의 승강(升降)이 시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시경》에 나오는 300편 시의 종지(宗旨)가 대저 이와 같다. 계찰(季札)은 대개 음(音)을 살핌이 정미하고 오묘하여 천박한 견해를 가진 오활한 선비가 능히 헤아릴 수 없는 바였다.

못난 나는 아주 어리석어서 식견이 계찰에 미치지 못함이 아득히 멀리 있는 은하수와 같다. 그러나 숙도(叔度)의 시를 읽어 보니, 일에 감응하는 바가 있고 정에 합치되는 점이 있었다. 정신이 경물과 더불어 합치되고 기운이 뜻에 따라서 펴졌으며, 높이 올라갔으나 조화를 해치지 않고 억제했으나 격식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너그럽고 온화한 운(韻)이 있고 시들고 처지는 음(音)이 없었다. 그런즉 이 세상에 계찰과 같이 정미하게 아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로 하여금 숙도의 시를 골라 노래하게 한다면, 반드시 장차 “아름답구나, 기자(箕子)의 옛 풍조가 있도다.”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편지가 아주 통절하여 천자의 마음을 돌렸으니, 신포서(申包胥)의 통곡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데이겠는가. 나는 조선에 인재가 있어서 환란이 없을 것임을 점쳐 알았다.

숙도는 본국으로 돌아가 복명(復命)하면서 성천자(聖天子)께서 먼 곳에 있는 나라를 품어 주는 크나큰 은혜를 진달할 것이다. 그리고는 군신 간에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군대를 훈련하고 말을 먹인 다음, 영원(寧遠)의 무신(撫臣)과 더불어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이 흉악한 무리들을 섬멸해서 옛날의 공도(貢道)를 다시 통하게 해 문물이 하나로 통일되게 한 이후에 아침밥을 먹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에 드디어 서문을 써서 사신 편에 부친다.

천계(天啓) 7년 정묘년(1627, 인조 5 ) 초여름에 제남(濟南)의 황산(黃山)에 사는 거사(居士) 장연등(張延登) 제미보(濟美父)는 제(題)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6

 

●淸陰草稿自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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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年九歲。始學于家庭。逮事外王父林塘相國。獲承警咳。伯氏仙源先生,堂兄休庵先生勤加提誨。稍稍知向方。十六謁尹文敬公請益。又游玄軒申公,月沙李公,西坰柳公之門。以廣所聞。與鶴谷洪公,東岳李子敏,竹陰趙怡叔,谿谷張持國相切劘。通籍蘭臺石渠。探金匱之藏。窺寶笈之祕。亦嘗祗役耽羅。左符楡塞。价擯龍灣。間出東南。上金剛道鳥嶺。浮舟渤澥。歷靑,齊,燕,趙之墟。以盪其胸。接遇中朝諸老先生。粗聞緖論。雖不敢自謂有所得。而其浸灌淵源。蓋亦有所從來矣。顧其才品凡短。讀書甚少。且多爲人所強。發華摛藻。不能盡如其思。自視鮮有當意者。烏足與論於不朽之盛事也。聊置巾箱中。以志雕篆之悔焉。

崇禎丙子杪秋。書于石室書齋。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1

 

●청음초고 자서(淸陰草稿自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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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집안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외할아버지인 임당(林塘) 상국(相國)을 섬기며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자 큰형님인 선원(仙源)선생과 당형(堂兄)인 휴암(休庵)선생이 부지런히 가르쳐 주어 점차 나아갈 바를 알게 되었다. 그 뒤 열여섯 살 때 윤 문경공(尹文敬公)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고, 또 현헌 신공(玄軒申公 신흠(申欽) ), 월사 이공(月沙李公 이정귀(李廷龜) ), 서경 유공(西坰柳公 유근(柳根) )의 문하에서 노닐면서 들은 바를 더 넓혔으며, 학곡 홍공(鶴谷洪公 홍서봉(洪瑞鳳) ), 동악(東岳) 이자민(李子敏 이안눌(李安訥) ), 죽음(竹陰) 조이숙(趙怡叔 조희일(趙希逸) ), 계곡(谿谷) 장지국(張持國 장유(張維) ) 등과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난대(蘭臺)와 석거(石渠)를 출입하면서는 금궤(金匱) 안의 장서를 펼쳐 보고 보급(寶笈) 안의 비서(秘書)를 엿보았다.

또한 일찍이 탐라(耽羅)에 어사(御史)로 가고, 유새(楡塞)에서 관원으로 있고, 용만(龍灣)에 영접사(迎接使)로 갔으며, 그러는 사이에 간간이 동쪽과 남쪽 지방으로 나가 금강산(金剛山)에 올라가고 조령(鳥嶺)을 넘었다. 또 발해(渤澥)에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가 청주(靑州)와 제주(齊州)와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옛터를 거치면서 가슴속을 시원하게 하였으며, 중국의 여러 노선생(老先生)들을 만나보고서 대충이나마 서론(緖論)을 들었다. 이에 비록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다고는 감히 하지 못하겠으나, 그 연원(淵源)에 젖어듦은 대개 말미암은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재주가 부족하고 글을 읽은 것이 적으며, 게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억눌림을 당한 것이 많았던 탓에, 글을 지으면서 나의 생각대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던바, 내 스스로 보기에도 마음에 드는 것이 드물다. 그러니 어찌 족히 영원토록 썩지 않을 성대한 일을 논할 수 있겠는가. 애오라지 책상자 속에 넣어 두고 글을 지은 데 대한 후회스러운 마음만을 기록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 14) 초추(杪秋 9월 )에 석실서재(石室書齋)에서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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