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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조문정공(趙文正公)의 난죽시화첩(蘭竹詩畫帖)♣고(故) 의병장(義兵將) 증(贈) 이조 판서 중봉(重峯) 조 선생 헌(趙先生憲)의 신도비명 병서[金尙憲, 淸陰先生集卷之二十八 / 碑銘 四首]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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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八 / 儒學

趙憲 碑銘[金尙憲]

고(故) 의병장(義兵將) 증(贈) 이조 판서 중봉(重峯) 조 선생 헌(趙先生憲)의 신도비명 병서[DCI]ITKC_BT_0299A_0290_010_0030_2008_005_XML DCI복사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한 지 200년이 지나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충효와 절의와 학문을 겸비한 선비가 한 분 나오셨으니, 바로 중봉 선생 휘(諱) 헌이시다. 선생의 성씨는 조씨(趙氏)이며, 여식(汝式)은 자이고, 중봉은 호이다.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문주(文冑)라는 분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분의 후예이다. 휘 천주(天柱)에 이르러서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안주(安州)에서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다. 휘 공(珙)에 이르러서는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졌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환(環)이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유일(遺逸)로 특별히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제수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에까지 올랐으니, 이분이 바로 선생의 5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황(璜)이고, 할아버지의 휘는 세우(世佑)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휘는 응지(應祉)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차순달(車順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39)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자품이 출중하였으며 의표가 엄연하였으니, 긴 귀와 큰 키에 눈이 별같이 빛났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온순한 데다가 주관이 순실하고 확고하였다. 집은 본디 농사를 지었는데,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는 일이 없이 일거수일투족을 오직 어버이의 명령에 따라 하면서 부지런히 힘써 행하고, 평상시에는 서책만 읽고 쓸데없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므로, 같은 또래 아이들이 모두 두렵게 여기어 예의 없이 함부로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막 강보(襁褓)를 면하면서부터 벌써 어버이를 섬기는 예의를 알아서 부모님의 명령이 있으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대답하였으며, 모든 일을 공경히 받들어 행하였다. 어릴 적에 어머님을 여의고 계모에게 온갖 학대를 받았는데도 선생은 효성을 다하여 계모가 기뻐하여 사랑하게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항상 격앙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하늘이 남아로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하였는바, 스스로 자임함이 중하기가 이와 같았다.

선생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엄동설한에도 제대로 의복을 입지 못하고 신발을 신지 못한 채 걸어서 멀리 떨어진 스승에게 배우러 다녔다. 그런데도 아무리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도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땔나무를 베어다 어버이의 방에 불을 때면서 그 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 평소에 행하는 언행이나 남들과 더불어 강론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학문과 힘써 행하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님이 없었다. 《대학(大學)》을 읽다가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해야 한다.〔爲人子止於孝 爲人臣止於敬〕”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두세 번을 거듭해서 읽으면서 그 뜻을 깊이 음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요순(堯舜)이나 탕무(湯武)의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으며,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가르침이 아니면 배우지 않았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에서 임시로 일을 맡아보다가 정주 교수(定州敎授)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 지 3년 만에 선비의 풍습이 크게 변하였다. 얼마 뒤에는 파주 교수(坡州敎授)로 옮겨졌는데,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니, 우계 선생이 장석(丈席)을 피하고 사제(師弟)의 예로써 대우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 선조5)에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승진되었다. 상께서 관례에 따라 불사(佛寺)에 향(香)을 내리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불가함을 극렬하게 아뢰었다. 이 때문에 상이 크게 노하여 선생을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는데, 구원해 주는 사람이 있어 단지 관직만 삭탈하였다. 이로부터 곧다는 명성이 조정에 진동하였다. 오랜 뒤에야 다시 교서관 저작(校書館著作)에 승진되었다가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경사(京師)에 갔다. 그곳에서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문묘(文廟)에 배향된 위차(位次)가 잘못되었음을 논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환국한 다음에는 명나라의 문화와 제도 가운데에서 당시에 본받을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들어 말하였는데, 개연히 우리나라를 동주(東周)로 만들 뜻이 있었다. 이어 우리나라 사현(四賢)이 도(道)를 보호한 공이 있음에도 기리어서 존숭하는 예를 거행할 겨를이 없었음에 대해 말하고, 그 밖에 변통하고 시행하여야만 할 것에 대해 말하였는데, 법도에 착착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상께서 풍속과 습관이 명나라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채택해 시행하지 않았다. 선생은 물러 나와서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예착(枘鑿)처럼 맞지 않을 것이라 여겨 끝내 올리지 않았다.

박사(博士)로 승진되었다가 호조와 예조 두 조의 좌랑과 전적(典籍),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겨울에 통진 현감(通津縣監)에 제수되어 오래된 폐단을 모두 말끔히 개혁하니, 온 경내가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내노(內奴) 가운데 법을 어기고 방자하게 구는 자가 있으므로 곤장을 쳐 죽였다. 이로 인해 의금부에서 심문을 당하고 마침내 부평(富平)으로 정배(定配)되었다.

무인년(1578, 선조11)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의 본댁과 적소(謫所)와의 거리는 수십 리밖에 안 되었지만, 법에 얽매여서 장례를 치르러 가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니, 듣는 사람들이 따라서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삼년상을 마치고 배소(配所)에서 풀려 나와서는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을 해주(海州)로 찾아가서 뵌 다음 스승으로 섬겼다. 다시 호서(湖西)로 가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빈소(殯所)에 조문하였다.

신사년(1581)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에 제수되었다. 여기에서 상소하여 민폐가 되고 있는 연산조(燕山朝) 때 만들어진 공안(貢案)을 개혁하기를 청하니, 상께서 너그러이 답하였으나 채택해 쓰지는 않았다. 그때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전라도 관찰사로 오게 되었는데, 선생이 처음에는 서로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헐뜯는 말을 잘못 듣고는 그의 막하(幕下)에 있기가 싫어서 병을 핑계 대고 사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율곡과 제현(諸賢)들의 권고로 인해 드디어 금석지교를 맺었다.

임오년(1582)에 종묘서 영(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가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다시 외직을 자원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었다. 상소를 올려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外賊)을 물리치는 계책에 대해 극력 진달하고,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을 정표(旌表)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왕자(王子)의 제택(第宅)이 제도보다 지나침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고을의 치적이 제일간다고 소문났다. 선생을 좋아하지 않고 있던 자가 선생에 대해 논계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사람은 얻기가 쉽지 않다.” 하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율곡은 이미 죽었으며, 당론(黨論)은 더욱 치열해졌다. 선생은 세도(世道)가 날로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서울에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아 옥천(沃川)의 안읍현(安邑縣)으로 이사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19)에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개정하여 각 도에 제독(提督)을 창설하고 그들로 하여금 인재를 교육하여 양성하는 책임을 전담하게 하였다. 선생은 공주 제독(公州提督)에 차임되어 부임하게 되자, 인재를 양성하는 규례를 높이 게시하여 약조를 엄하게 정해 놓은 다음 자신이 솔선수범하니, 그 소문을 듣고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선생은 비록 권세가 없는 한산한 지위에 있었으나, 조정의 시비(是非)가 뒤바뀌어 사우(師友)들이 무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이에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임금이 어진 사람과 친하고 착한 사람을 벗 삼아 일찍부터 수양하시면 천하가 교화되어 명령을 내리지 아니하여도 백성들이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정치가 백왕(百王)들 가운데 으뜸이 된 이유입니다. 말세에 내려와서는 이 학문이 밝지 못하므로 위에서는 평소에 가르칠 줄을 모르고 아래에서는 기만하고 은폐하기를 일삼았습니다. 이에 천하가 진번(陳蕃)과 이응(李膺)의 어짊을 아는데도 남을 헐뜯는 참소가 행해져 당고(黨錮)로 모두 죽였으며, 사마광(司馬光)과 조여우(趙汝愚)의 충성을 알면서도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하여 비방하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까지도 아울러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진 이를 내쫓고 간사한 자를 총애하기를 빠르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재앙을 부르고 외구(外寇)를 불러와 어지러운 자들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군신과 부자의 도를 알게 된 것은 유현(儒賢)들이 쏟아져 나온 데 힘입은 것입니다. 먼저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가 이학(理學)을 밝혀 위급한 고려 말기의 국운을 연장시키고, 이어 우리 조선조의 문명을 창설하였습니다. 김종직(金宗直)과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등이 실로 도학을 밝혔으며,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하여 씀으로써 백성들의 습속이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비록 참소로 인한 해를 입었으나, 대대로 훌륭한 분이 있어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우뚝하니 솟아 뽑히지 않는 산악과 같은 기상이 있었습니다.

이언적(李彦迪)과 권벌(權橃)과 김안국(金安國)과 송인수(宋麟壽)와 백인걸(白仁傑) 등 제현(諸賢)의 바른말과 곧은 붓은 공론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니 사화(士禍)로 참혹하게 죽이지만 않았다면 선비들이 많고 성하기가 반드시 문왕(文王)이 이들 때문에 편안했던 것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오직 사화가 혹심함으로 말미암아 성수침(成守琛)과 성운(成運) 등이 모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이황(李滉)이 예안(禮安)에 물러가 살았고, 서경덕(徐敬德)이 화담(花潭)에 숨었고, 김인후(金麟厚)와 조식(曺植)과 이항(李恒)이 멀리 도망가서 궁벽한 곳에 숨어 살았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을사사화(乙巳士禍)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로부터 부형(父兄)이 자신들의 자제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모두 학문 하는 것을 경계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당론이 없어져 권간(權奸)들이 뜻을 폈는데, 그에 따른 재화(災禍)가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에 이르러서는 극심하였습니다. 임신년(1572, 선조5) 이이(李珥)의 상소는 간사한 싹을 미리 내다본 것으로, 깊은 우려와 긴 탄식은 한 글자 한 구절이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정철(鄭澈)은 기대승(奇大升)에게 배웠고, 기대승은 이황에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이는 친히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조광조의 도덕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모유(謀猷)와 기개는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정충(精忠)과 격렬(激烈)은 위로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크게 임용되었습니다. 정철의 맑은 명철함과 곧은 절개를 이이가 중하게 여겨 같이 벼슬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그런데 보합(輔合)하는 책임은 또 박순(朴淳)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박순이 이이와 정철을 천거한 것은 정승의 직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임무였습니다. 이이의 경우에는 계옥(啓沃)하는 즈음에 엄하고 자중하는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으므로 힘써 성혼(成渾)을 천거하였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쇠미해진 말세의 풍속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의 문하에 들어오는 선비는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한 가지 선(善)만 있으면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저 유성룡(柳成龍), 김응남(金應南), 이발(李潑) 같은 무리도 어찌 일찍이 청반(淸班)에 끼어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오직 빨리 발탁하여 주지 않았다 하여 홀연히 반기를 들고 나와 산 사람은 몰아내기를 꾀하고 죽은 사람은 추악하게 헐뜯어, 위로는 경상(卿相)으로부터 아래로는 미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몸을 용납할 곳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어찌 일찍이 군자가 정치를 하는데 한때의 현인과 충신을 못살게 굴어서 살 곳을 잃게 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섬기는 분이 세 사람 있으니, 이이와 성혼과 이지함입니다. 이 세 사람이 성취한 학문은 비록 각각 다르지만, 그 맑은 마음에 욕심이 적고 지극한 행실이 세상에 모범이 됨은 모두 똑같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세 사람이 신에게 가르친 바로써 선비들을 가르치고자 하였는데, 간사한 말이 성행하자 신을 이이나 성혼의 무리라 하여 대부분이 몸을 돌려 달아났으며, 헐뜯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하여 욕됨이 스승과 벗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신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선생의 상소가 올려진 지 열흘이 지나도록 비답(批答)이 내려지지 않았다. 선생이 재차 사(邪)와 정(正)을 분별할 것에 대하여 명확하고 간절하게 아뢰었다. 그러자 상의 비답에 이르기를, “구언(求言)으로 인해 올린 그대의 상소는 참으로 아름답다.” 하였으며, 해당 관서에 명하여 회답하게 하였다. 이에 간사한 무리들의 헐뜯는 참소가 곳곳에서 일어나 선생을 원수와 같이 여기고 모두 설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께서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글을 지어 선성(先聖)을 하직하고는 또다시 상소를 올려 정적(鄭賊)의 흉패함을 후예(后羿)와 한착(寒浞)에게 비하여서 조정에 전하여 올려 주기를 바랐으나, 관찰사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옥천(沃川)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들어앉아 학문을 강론하면서 앞으로는 그와 같은 생활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때 왜국(倭國)의 추장(酋長)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그 주군(主君)인 원씨(源氏)를 살해하고 사신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엿보았다. 그러나 온 조정 사람들이 감히 이를 물리치고 거절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아, 신하가 임금을 쫓아내는 것은 인륜의 일대 변괴로서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바입니다. 나라를 빼앗으려는 자에 대해 비록 창을 잡고 가서 목을 베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차마 사신을 교환하여 그 성세를 도와서야 되겠습니까.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으나 의(義)를 주창하여 절교를 통고하자는 의논이 없으니, 이러고서도 나라에 대신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관찰사가 또 위에 올리지 않았다.

선생은 걸어서 대궐 앞에 나아가 앞서 아뢰지 못한 세 통의 상소를 아울러 올리면서 세 가지 일로써 왜국의 사신에게 다짐을 받고서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세 가지 일 중에 첫 번째는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합하였으니, 일본은 그 참호(僭號)를 빨리 버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우리나라를 배신하고 왜적들의 향도(嚮導)가 된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왜인은 욕심이 너무 많아 만족할 줄을 모르니, 세폐(歲幣)의 숫자를 줄이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치고 있으니 쫓아내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논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크게 노하여 그 소장을 불태워 버리라고 명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기축년(1589, 선조22) 여름에 또 선생이 도끼를 지고 대궐 앞에 나아가 엎드린 채 조정 정사의 득실에 대해 극언하면서, 성학(聖學)을 밝히고, 형벌을 덜고, 사치를 경계하고, 기욕(嗜慾)을 억제하고, 세액을 견감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현사(賢邪)의 분별에 대하여 논하였다. 대개 선생은 우계와 율곡 두 현인을 독실하게 믿어서 매양 이들을 배척하는 사람은 모두 소인이라 여겼고 존숭하는 사람은 모두 군자라고 여겼으므로, 의논을 발하여 내는 즈음에 가끔 중도를 잃는 때가 있었다. 이 때문에 원수들이 빙 둘러 서 있으면서 심지어는 머물러 살고 있는 곳까지 조사하여 발붙이고 살 곳이 없게까지 하였으며, 친구들도 대부분 문전에서 거절하고 만나 주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선생을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으나, 상께서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옥당에서 올린 차자를 인하여 비로소 길주(吉州)의 영동역(嶺東驛)으로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으며, 의금부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이졸(吏卒)들이 서로 더불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분같이 충직한 분이 도리어 이런 화에 걸린단 말인가.” 하였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지 않은 것을 잘 알 수 있다.

선생은 옥천에서부터 걸어서 고개를 넘어갔는데, 2000여 리를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갔는바, 비록 다리에서 피가 흐른 채서산(蔡西山)의 고생이라도 이보다는 더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사기(辭氣)가 조금도 꺾인 적이 없었다. 그 당시에 고개 북쪽에는 여역(癘疫)이 아주 심하게 돌아, 지나가는 자들 중에 죽는 자가 열에 대여섯은 되었는데, 선생의 동생과 두 종 역시 모두 여역에 걸려 죽었다. 선생은 비록 지극히 애통하여 상심하긴 했지만 또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는 가운데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혹 친히 병자가 있는 집에 가서 약을 주어 구제해 주기도 하였는데, 끝내 아무런 탈이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생의 바른 기운에 여귀(厲鬼) 역시 전염시키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풍신수길이 재차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하면서 우리나라의 향도 몇 명을 보내었으며, 현소(玄蘇) 등이 와서 공물을 바쳤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기쁜 얼굴을 하고 서로 축하하면서 장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을 보내어 사례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또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예로부터 승부의 형세가 어찌 한갓 군사력의 강약으로만 결정되었겠습니까.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시켜 의리에 맞는 말을 하자 소릉(召陵)의 군사가 싸우지 않고서도 맹서를 하였고,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동공(董公)의 말을 들어 군사를 출동시킴에 명분이 있게 하자,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서 슬피 노래 부르면서 자살하였습니다. 대개 몸에 시역(弑逆)을 한 죄를 지고 있을 경우에는 천지가 용납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였는데, 관찰사가 재삼 물리쳤다.

이때 마침 정여립(鄭汝立)이 모반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자살하였으며, 그의 일당들이 복주(伏誅)되었다. 그러자 호남의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선생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상께서 이르기를, “당초에 유배를 보낸 것은 실로 나의 뜻이 아니었다.” 하고는, 곧바로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전조(銓曹)에서 전적(典籍)에 의망하자, 상께서 전교하기를, “이 사람은 가볍게 써서는 안 된다.” 하였다. 전조에서 상의 뜻을 오인하고는 예조 정랑으로 고쳐서 의망하자, 상께서 대로하여 전조의 장(長)으로 있는 홍성민(洪聖民)을 외직으로 내쫓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대궐 아래로 나아가 석고대죄하였다. 그러자 도성 안의 선비와 백성들이 둘러서서 보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조공(趙公)을 탄생시킨 것은 사직(社稷)을 위해서다.” 하였다.

이해에 조정에서 마침내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였으며, 풍신수길 역시 현소 등을 보내어 사례하면서 군사를 크게 출동시켜 명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에 상하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백의(白衣)를 입고 올라와 대궐로 나아가 오랑캐의 사신을 참수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안위와 성패는 단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오직 오랑캐의 사신을 참수하고 중국 조정에 속히 아뢰어서 적의 사지를 유구국(琉球國) 등 여러 나라에 보내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분노하여 이 적들을 대비하게끔 기약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만약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가 적들과 공모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죄를 캐묻는다면, 성상께서는 장차 무슨 수로 잘못을 사죄할 것이며, 신민들은 장차 무슨 수로 죽음을 면하겠습니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까지 뭉뚱그려 오랑캐가 되었다고 할 것이니,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치욕을 당함이 역시 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파천(播遷)을 하는 날에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왜적을 인도하여 중국을 침범할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또 아뢰기를,

“왜적들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한결같이 집어삼켜 먹으려는 계획을 하고 있으니, 화심(禍心)을 속에 감추고 있음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왜적의 사신을 접대하기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여, 호서와 영남의 각 고을에서는 모두 이민(吏民)을 거느리고 원역(院驛)까지 나아가 맞이하면서 방비하는 일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가령 왜국의 사신들이 우리나라의 장수와 관리들을 대하기를 천한 종처럼 대하는데도 예의로써 책하는 말은 감히 한마디도 못 하게 된다면, 어찌 통곡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사람 중에 육가(陸賈)는 얼굴빛을 바르게 함으로써 두 다리를 뻗고 기대어 앉아 있는 위타(尉陀)의 거만한 태도를 굴복시켰고, 범중엄(范仲淹)은 국서(國書)를 불사름으로써 패만스러운 이원호(李元昊)의 거만함을 꺾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 김성일(金誠一)의 무리들은 양곡(糧穀) 1000석(石)을 싣고 국악(國樂)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왜적들을 즐겁게 하며, 겸하여 옛날에 헌원씨(軒轅氏)가 치우(蚩尤)를 격파할 때 쓰던 기구까지 모두 왜놈들에게 넘겨주었단 말입니까. 이들은 공의(公議)가 혹 격심해질까 두려워 이에 풍신수길이 진짜 반역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착(寒浞)도 과연 순신(純臣)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한 번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연초(燕楚)의 길바닥에서 죽더라도 자공(子貢)이 유세(遊說)하여 제후(諸侯)의 군대로 하여금 오나라를 무찌르고 노나라를 보존하게 한 것을 배우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성상께서 신을 살게 하여 주신 은덕을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될 것이고, 하늘이 남아대장부를 낸 뜻에도 저절로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니, 만일 기꺼이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면 신에게 부절(符節) 하나를 빌려 주소서. 그럴 경우 사신 행렬의 끄트머리에 끼어 서쪽으로 달려가 현소의 머리를 명나라 조정에 바치고 신포서(申包胥)의 통곡을 본받아 함으로써, 우리 전하의 심사를 밝혀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명나라 황제께서 불쌍하게 여겨 주신다면 말을 빌려 남쪽 변방으로 달려가 적의 사지(四肢)를 남양(南洋)의 모든 나라에 나누어 주어 기필코 이 왜놈들로 하여금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신이야 비록 길바닥에서 죽게 되더라도 신의 늙은 어미는 왜적들에게 포로가 되는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상소를 올린 지 3일이 지나도록 비답이 내려지지 아니하였다. 이에 선생은 주춧돌에 이마를 찧어 피가 얼굴에 흘러내렸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선생께서 괜히 자신을 괴롭게만 하는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말하기를, “내년에 산골짜기로 피난을 가게 되어서는 반드시 내가 한 말을 떠올릴 것이다.” 하였다.

또 명나라에 아뢰는 글과 유구(琉球)와 대마도(對馬島)와 일본(日本) 등의 유민(遺民)들을 깨우치는 글 및 왜사(倭使) 현소를 목 벨 죄목(罪目)과 영남과 호남의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 등을 지어 올렸다. 그 대개는 먼저 올린 상소와 같았으나 말은 더욱더 간절하였는데, 정원에서는 선생의 말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간원에서 승정원이 소장을 막고 올리지 않았다 하여 승지를 파직하라고 계청하였으나, 상께서 단지 추고만 하라고 명할 뿐이었다. 선생은 나랏일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는 시골집으로 되돌아가 천장만을 쳐다보면서 길게 탄식할 뿐이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2월에 부인 신씨(辛氏)가 죽어 갈장(渴葬)을 치르고는 3월에 김포(金浦)에 있는 선영(先塋)에 가서 성묘하면서 앞으로 난리가 있을 것이므로 오래도록 찾아뵙지 못할 것이라고 고하였다. 4월 신묘일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와 잇달아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며칠 사이에 조령(鳥嶺)을 넘으니,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선생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청주(淸州)로 가서 이우(李瑀) 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태평을 누린 지 오래되어 백성들이 군대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탓에 허둥지둥하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몰라 수습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다시 옥천(沃川)으로 돌아가 문인(門人)들과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은 다음 보은(報恩)으로 오는 길을 막고 힘껏 싸워서 물리쳤다. 이로부터 왜적들이 감히 이 길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였다.

순찰사(巡察使) 윤선각(尹先覺)이 병사와 백성들이 의병에 많이 호응하게 되면 관군(官軍)에 불리할 것이라고 여겨 다방면으로 저해하였다. 선생은 문인들과 함께 행재소로 가고자 하여 순찰사를 찾아보고 군신의 대의(大義)를 극력 말한 다음, 함께 일을 하기를 청하였는데, 며칠 만에 의병에 응모한 사람이 거의 1000명이나 되었다. 그러자 안세헌(安世獻)이라는 자가 순찰사를 꾀어 말하기를, “공은 한 도의 대장으로서 일찍이 조그마한 공로도 세우지 못하였는데, 조헌은 쫓겨나 폐해져 있던 중에 일어나 공보다 먼저 말채찍을 잡았으니, 그가 만약 뜻을 얻게 된다면 상께서는 반드시 공이 머뭇거린 죄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순찰사가 그 말을 그럴듯하다고 여겨 열읍(列邑)에 공문을 보내 의병의 부모와 처자식을 잡아 가두라고 하였으며, 또 선생에게 군사를 지원한 수령들까지 모두 처벌하였다. 그러자 이미 모여들었던 군졸들까지도 도로 흩어져 버려 선생이 글을 보내 따지자 순찰사가 글을 보고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선생은 주장(主將)의 뜻을 이미 거슬렀기 때문에 함께 일하기가 어렵다고 여겨 드디어 호우(湖右) 지방으로 갔다. 본래부터 선생을 경모해 오던 몇몇 선비들과 힘을 합쳐 관군의 군적(軍籍)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장정들을 모집하여 1000여 명을 얻어 깃발을 세우고 호령을 발하여 기세를 드높이면서 제압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드디어 홍주(洪州)에서 회덕(懷德)으로 왔다.

이때 적병들이 청주(淸州)에 주둔해 있었는데,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의 군대가 잇달아 무너지고 승장(僧將) 영규(靈圭)만이 홀로 왜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선생은 급히 청주로 달려가 방어사를 재촉하여 진군하라고 하고 영규와 군대를 연합해서 서문(西門)을 공격하였는데, 몸소 화살과 총탄을 무릅쓰고 싸움을 독려하매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써 싸웠다. 그러자 왜병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 성으로 들어갔다. 선생이 우리 군대를 정비하여 곧바로 성 안으로 쳐들어가려고 할 때 갑자기 서북쪽으로부터 소낙비가 쏟아져서 하늘과 땅이 컴컴해지자 사졸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이것을 본 선생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이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했는데,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는, 징을 울려 군사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이날 밤에 왜적들은 시체를 불태우고 몰래 북문(北門)을 통해서 도망쳤다.

이로부터 호우 지방의 여러 왜적들이 소문을 듣고서 놀라 싸우지도 않은 채 모두 달아났다. 이때 적진 중에 있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전하기를, “왜적들이 서로 의병장의 용병(用兵)은 순찰사나 조방장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그 날카로움을 당해 낼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하였다. 선생은 청주의 왜적들을 격파한 뒤에 상소를 지어 문인 전승업(全承業)을 시켜 행재소로 가서 올리게 하였는데,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당나라 현종(玄宗)이 거의 천하를 잃을 뻔하였으나 진현례(陳玄禮)의 간언을 받아들여 창졸간에도 사사로운 은정을 끊고 법을 바로잡아 양국충(楊國忠)의 머리를 베어 창끝에 꿰고 이임보(李林甫)의 관(棺)을 쪼개어 시신에 매질을 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민심이 흔쾌하게 복종하여 나라를 생각하고 충신과 의사가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할 수 있었으니,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가 공을 성취하는 것이 병에 든 물을 거꾸로 세워 쏟듯이 쉬웠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송나라 고종(高宗)은 강좌(江左)를 보존하고 있었음에도 이강(李綱)과 장준(張浚)의 말을 듣지 않고 언제나 왕백언(汪伯彦)과 황잠선(黃潛善)과 진회(秦檜)의 무리를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택(宗澤)과 악비(岳飛)가 장차 하북(河北) 지방을 평정할 가망이 있었는데도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하였으며, 심지어는 조서를 위조하여 악비를 살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효종(孝宗) 같은 현명한 임금도 통일하는 공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유성룡(柳成龍)이 화친을 주장하여 왜적을 불러들인 것은 진회의 간사함보다도 더 심하고, 이산해(李山海)가 현인을 죽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는 이임보(李林甫)와 다름이 없으며, 김공량(金公諒)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楊國忠)보다도 심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당파 사람들로 하여금 요직에 도사리고 앉아 있게 해 어진 사람이 진출하는 길을 막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민심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또 순찰사와 더불어 화합하지 못하였으므로 순찰사가 겉으로는 좋게 말하였으나 실제로는 방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이 근왕(勤王)하러 가기로 뜻을 결정한 것을 알고는 선생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는 공과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소인배의 말로 인하여 조금 틈이 생겼습니다. 내가 이미 이를 뉘우치고 있으니, 앞으로는 맹세코 공과 더불어 사생을 같이할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금산(錦山)에 있는 왜적들이 장차 양호(兩湖) 지방을 침략하려고 한다 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뒤를 끊으려고 하는 금산의 왜적을 쳐부수고 나서 근왕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모든 부장(副將)들도 금산의 왜적을 먼저 격멸하자고 하였다. 선생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서 공주(公州)로 돌아갔다. 그런데 공의 휘하 사람들이 순찰사에 의해 갇히자 점점 흩어져 달아났으므로 단지 700명의 의사만이 선생을 따라가고자 하였다.

8월 16일에 선생은 군대를 이동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금산의 왜적은 모두 정예병일 뿐만 아니라 그 숫자가 수만 명이나 되니 가벼이 큰 적을 쳐서는 안 됩니다.” 하자, 선생은 그 말을 듣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군부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이(利)와 불리(不利)를 논하겠는가. 임금이 치욕을 당하게 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한 번의 죽음이 있음만을 알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승장 영규와 더불어 합세하여 진군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생은 호남 순찰사(湖南巡察使) 권율(權慄)과 더불어 8월 18일을 기하여 합동으로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권율이 편지를 보내어 날짜를 연기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군대는 이미 금산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있었다. 왜적들이 우리 군대의 후원군이 없음을 정탐해 알고는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역습하여 왔다. 선생은 군령(軍令)을 내려 말하기를, “오늘 단지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든 살든 진격하든 후퇴하든 간에 의(義)라는 한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사졸들이 모두 그 명령에 따라 온 힘을 다하여 한참 동안을 싸웠다. 왜적을 세 차례나 패배시켜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우리 군대의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해마저 져서 어두워지자 사졸들의 얼굴빛에 핏기가 없어졌는데도 선생은 의기가 태연하여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였다.

왜적들이 온 힘을 다 쏟아 공격하여 드디어 장막 안으로 쳐들어왔다. 부관 몇 사람이 선생을 구하려고 탈출하기를 극력 요청하자 선생은 웃으며 말의 안장을 풀고 말하기를, “이곳이 내가 순절할 장소이다. 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난에 임하였다가 도망쳐 달아나 구차스럽게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북채를 잡아 북을 치니, 군사들이 앞 다투어 죽음을 향해 나아가서 맨주먹으로 싸우면서도 오히려 그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700명 가운데 한 사람도 도망쳐서 살아난 자가 없었다.

왜적들 역시 많은 숫자가 죽었으므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진으로 돌아갔는데, 통곡 소리가 들판을 뒤덮었으며 시신을 쌓아놓고 불태우자 3일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드디어 무주(茂朱)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과 모두 한꺼번에 도망쳤다. 이로 인해 호서 지방이 비로소 온전할 수 있었으니, 왜란이 일어난 뒤로 왜적을 격파하고 방어한 공로 가운데 이보다 더 큰 공로는 없었다.

다음 날 선생의 아우인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선생의 시신을 찾아보니 선생은 대장기(大將旗) 아래에서 전사하였는데, 장수와 사졸들이 서로 겹친 채로 그 주위에 빙 둘러 죽어 있었다. 조범이 선생의 시신을 들쳐 업고 옥천으로 돌아가 빈렴(殯斂)을 하였는데, 돌아간 지 나흘이나 지났는데도 얼굴빛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으며 부릅뜬 눈과 치솟은 수염에서는 노기(怒氣)가 뿜어져 나와 사람들이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 수 없었다.

선생의 큰아들인 조완기(趙完基)는 외모가 훤칠하고 아름다웠다. 금산의 싸움에서 패할 때 일부러 화려한 관복을 입고 선생 대신 죽으려고 하여 왜적들이 주장(主將)으로 잘못 알고는 사지를 찢어 죽였다.

선생은 《주역》의 점술에 아주 능하였다. 임진년 4월에 동남쪽에서 우레가 울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하늘의 북소리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밤에는 천문을 살펴보다가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더니, 한참 뒤에는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화(禍)가 행조(行朝)에 미쳤는 줄 알았는데, 다시금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으로 가신 두 왕자께서 필시 적중에 빠졌겠구나.” 하였다. 문인들이 이를 기록해 두었는데, 그 뒤에 보니 과연 바로 그 날짜였다. 선생은 식견과 사려에 있어서도 촛불에 비춰보고 숫자로 헤아리는 것과 같이 밝아서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반드시 천리와 인심의 정도(正道)에 근거를 두고 시무(時務)와 사의(事宜)의 변칙(變則)을 참고하였는바, 이는 실로 추산하거나 억측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이 처음 의병을 일으키자 행조에서는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제수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는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春秋館事)를 추증하였다. 아울러 조완기에게 정표(旌表)를 내렸으며, 조완도(趙完堵)에게는 태릉 참봉(泰陵參奉)을 제수하는 동시에 매달 봉록을 내려 주었다. 광해(光海)가 세자로 책봉되어서는 둘째 아들 조완제(趙完堤)를 불러 본 다음 쌀과 베를 내려 주었고, 시종신을 보내어 선생의 사당에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자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고 또 조세도 경감시켜 주었다.

갑진년(1604, 선조37)에는 선왕(先王)께서 증직(贈職)을 더하여 선고(先考)와 선생에게 모두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뒤에 사우(祠宇)를 세워 주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표충사(表忠祠)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금상(今上)께서 즉위한 다음에는 경연(經筵)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조완도를 강음 현감(江陰縣監)에 제수하였다. 아, 나라에서 목숨을 바쳐 임금을 섬긴 신하에게 보답하는 도리가 이에 이르러서 참으로 유감이 없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또한 어찌 이미 죽은 분에게야 미칠 수 있겠는가.

부인(夫人) 신씨(辛氏)는 영월군인(寧越郡人)이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선생의 묏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해 10월 경인일에 안읍현(安邑縣)의 미산(薇山)에 있는 유좌(酉坐)의 산등성이로 이장하였는데, 부인을 합장하였다.

공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완기(完基)로 후사는 없다. 완도(完堵)와 완제(完堤)와 완배(完培) 및 두 딸은 모두 측실 소생이다. 완도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鎭)이고 딸은 장응상(張應祥)에게 시집갔다. 완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빈(鑌)과 순(錞)이고 딸은 김추(金樞)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아직 어리다. 완배는 3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박취현(朴就賢)에게, 차녀는 이승담(李承聃)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아직 어리다. 외손인 김여량(金汝亮)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여옥(金汝玉)은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율곡 선생이 말하기를, “여식(汝式)은 매번 요순(堯舜)의 정치를 끝내 회복하고야 말 것이라고 하니, 소요를 일으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즉 숙련되기를 기다린 뒤에 크게 써야 한다.” 하였으며, 우계 선생은 말하기를, “여식의 학문이 일취월장하니, 몹시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율곡이 일찍 작고하여 선생의 학문이 진취된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아, 선생의 순일하고 강건한 자질을 가지고 스승과 벗의 지도를 받아서 날로 고명하고 정대한 경지로 나아갔다면, 그 성취를 어찌 헤아릴 수가 있었겠는가. 세상에 논하는 자들이 혹 선생에 대해 난에 임하여 절개를 세운 일개 의사(義士)일 뿐이라고만 하는데, 저들이 어찌 선생을 제대로 안 것이라고 하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착한 마음 내려줄 적에 / 惟帝降衷

중화라고 하여 많이 주진 않았고 / 不以華而豊

오랑캐라 하여 적게 주진 않았네 / 不以夷而嗇

선생께선 하늘에서 준 것 받아서 / 先生受之

효성으로 아들 된 자 법을 삼았고 / 孝爲子法

충성으로 신하 된 자 법을 삼았네 / 忠爲臣法

이와 같은 맘 똑같이 갖고 있는 자 / 同此心者

어느 누가 흠앙하여 감복 안 하랴 / 孰不欽服

일을 보면 만 가지로 서로 다르나 / 事有萬殊

이치 보면 혹 한 가지가 아니랴 / 理或不一

산마루의 저 구름은 쉽게 걷히나 / 嶽雲易開

임금 지닌 총명 되레 흐리어지네 / 宸聰猶惑

드센 고기 길을 들일 수가 있지만 / 暴魚能馴

간사한 맘 고치기란 아주 힘드네 / 奸心難革

용사의 해 돌아오던 바로 그해에 / 龍蛇之歲

하늘과 땅 온통 서로 뒤엎어졌네 / 天地反覆

선생께선 자기 자신 한 몸 가지고 / 先生一身

홀로 사람 법도 온통 자임하였네 / 獨任人極

왜놈 사신 참수하란 말을 올리자 / 危言斬使

위와 아래 사람 모두 실색하였네 / 上下失色

피눈물로 군사들과 맹서를 하매 / 泣血誓衆

의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네 / 義士雲合

상당에서 왜놈들과 전투를 하매 / 試戰上黨

오랑캐들 혼이 모두 달아났다네 / 雕題褫魄

급보 보내 승리했단 소식 전하자 / 飛章告捷

온 조정의 신하 모두 경하하였네 / 滿廷擧笏

다시금 또 금산 향해 내달려 가매 / 再赴錦役

마치 화살 날아가듯 걸음 빨랐네 / 如矢斯翼

사람들은 용감하게 적 죽이는데 / 人勇殺賊

하늘에서 악한 자를 도와주었네 / 天方厚惡

구름 짙어 저녁 해를 가리었거니 / 雲埋短日

군사들은 화살이 다 떨어졌다네 / 士乏寸鐵

부자간에 서로 크게 고함을 치자 / 父子奮號

하늘 따라 울었으며 산 쪼개졌네 / 天咷岳坼

선생께서 싸우다가 돌아가시자 / 先生之死

사람들은 자신 위해 애석해하네 / 人爲身惜

선생께서 싸우다가 돌아가시매 / 先生之死

나는 나라 위하여서 애석해하네 / 我惜爲國

아주 옛날 전씨 따른 그 무리들은 / 昔田氏徒

함께 따라 죽은 자가 오백이었네 / 從死五百

지금 여기 금산에서 순국한 분은 / 今玆殉義

오백 명을 더 넘어서 칠백 명이네 / 五者至七

아름답고 훌륭하다 선생이시여 / 懿哉先生

만고토록 그 장렬함 길이 빛나리 / 萬古烈烈

묘소 앞의 비석에다 이름 새기매 / 垂名龜石

큰 문장가 아니라서 맘 부끄럽네 / 愧非鴻筆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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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養育人才二百年, 至宣祖朝, 有忠孝節義學問兼備之士一人焉, 重峰先生諱憲是也。 先生趙姓, 汝式字, 重峰號也。 高麗時, 有兵部尙書文胄, 先生其後也。 至上將軍天柱, 紅巾之亂, 效節於安州。 至珙封銀川君。 入本朝, 有諱環, 受知我世宗, 以遺逸特授京畿都事, 至通政、羅州牧使, 是爲五世祖。 曾祖諱璜, 祖諱世佑, 皆不仕。 考諱應祉, 贈吏曹判書, 娶車順達女, 嘉靖甲辰生先生。

資稟絶人, 儀表儼然, 大耳長身, 目如朗星。 天性孝順, 秉執純固。 家本田農, 不隨群兒爲戲, 動止惟父命, 俛焉孶孶。 居平佔畢, 目不有身外事, 同輩莊事, 未敢有以狎進者。 纔免襁褓, 已知事親之禮, 父母有命, 必跪而對, 每事敬以將之。 少失所恃, 失愛於繼母, 終致底豫。 稍長嗜學, 常激昂自誦曰: “天生男子, 豈偶然哉?” 其自任之重如此。 家甚貧, 隆冬盛寒, 衣履盡弊。 徒步從, 不避風雪。 歸則親自負薪, 爲親搆火, 映火讀書。 日用言爲, 與人講論, 無非爲己力行之事。 至《大學》“爲人子止於孝、爲人臣止於敬”, 未嘗不三復玩味, 非堯、舜、湯、武則不言, 非孔、孟、程、朱則不學。

丁卯, 登文科, 隷校書館權知, 除定敎授, 居三年, 士風丕變。 移坡州, 詣牛溪成先生請學, 先生爲遜席, 不以師弟之禮待之。 壬申, 陞本館正字。 上因故例, 降香佛寺, 先生上疏極言不可。 上怒將致辟, 有救者, 止削官, 直聲振朝廷。 久之, 陞著作, 以質正官如京師, 上書禮部, 論聖廡從祀位次之失, 見者歎服。 還朝, 條擧中朝文物制度可法於時者, 慨然有東之志。 仍及我朝四賢衛道有功, 未遑褒崇之禮, 其他變通施措之宜, 無不鑿鑿中窾。 上以風俗習氣之不同, 未見採施。 先生退搆萬言疏, 以枘鑿不合, 竟不果上。 陞博士, 轉拜戶・禮二曹佐郞、典籍、監察。 冬, 出爲通津縣監, 剗革宿瘼, 一境按堵。 內奴有犯法橫恣者, 杖殺之。 逮問金吾, 竟配富平。 戊寅, 丁外艱, 先生家去配所不滿數十里, 以法不敢奔喪, 朝暮哭擗, 聞者莫不感泣。 喪畢, 往拜栗谷李先生於海州, 遂執摳衣之禮。 又哭李土亭之菡於湖西。 辛巳, 拜工曹佐郞, 出爲全羅都事, 上疏請革燕山朝貢案爲民弊者, 上優答而不能用。 鄭松江澈爲本道方伯, 先生始未相識, 誤聞毁言, 不欲居幕下, 移疾欲辭去。 已而聽栗谷諸賢之言, 遂爲金石交。 壬午, 爲宗廟令, 以親老乞外, 得報。 上疏極陳修攘之策, 請立魯山、燕山後, 旌表成三問等, 禁王子第宅之過制者。 未幾, 以治最聞, 不悅者論啓, 上曰: “如此人不易得。” 不允。 時栗谷已歿, 黨議愈激。 先生見世道日非, 不欲近在畿輔, 移居沃川之安邑縣。 丙戌, 朝廷修定學制, 創設各道提督, 俾專敎養。 先生差赴公州, 大揭造士之規, 嚴其條約, 以身先之, 聞風遠至者甚衆。 先生雖居散地, 見朝廷是非顚倒, 痛師友受誣, 上疏言: 君上親賢友善, 預養於早, 則天下化之, 不令而從, 所以唐虞、三代之治卓冠百王者也。 降自叔季, 此學不明, 上不知素敎, 下有以欺蔽。 天下知陳蕃、李之賢, 而讒說殄行, 盡殲黨錮; 知司馬光、趙汝愚之忠, 而道學僞學之謗, 幷棄程、朱。 逐賢寵邪, 如恐不亟, 召災速寇, 與亂同事。 徂玆東土所賴以知君臣父子之道者, 儒賢輩出。 先有李穡、鄭夢周講明理學, 用延麗季之危急, 繼肇我國之文明。 金宗直、金宏弼、鄭汝昌寔倡道學。 趙光祖登庸, 民俗幾變, 雖被讒害, 代有善人, 跲而復起, 屹然有山岳不拔之氣。 李彦迪、權橃、金安國、宋麟壽、白仁傑諸賢危言直筆, 公議昭昭, 倘無銷鑠斬伐之禍, 則濟濟之盛必隣於文王之以寧矣。 惟其士禍甚酷, 成守琛、成運皆隱而不出, 李滉退居禮安, 徐敬遯于花潭, 金麟厚、曺植、李恒之幽棲遠遁, 莫非乙巳之禍有以激之也。

自是父兄敎其子弟者, 咸以學問爲戒, 朝無讜議, 權奸肆志, 其禍至於元衡、李芑極矣。 李珥壬申之疏, 逆睹奸萌, 隱憂浩歎, 無一字一句不出於愛君之誠。 鄭澈則學於奇大升, 而大升則學於李滉, 珥則親承警咳於李滉, 又慕光祖道德, 謀猷氣槪, 有自來矣。 精忠激烈, 上感宸衷, 蒙被器使。 澈之淸明直節, 珥甚重之, 期與同升, 而輔合之責又在朴淳, 淳之擧珥薦澈, 乃是相識之當務。 珥則以爲啓沃之際, 不可無嚴憚自重之士, 故力薦成渾。 此人不諒衰末之俗, 造門之士無間賢愚, 人有一善, 若己有之。 若柳成龍、金應南、李潑之徒, 何嘗不列于淸班哉? 惟其汲引不亟, 則赤幟忽立, 生謀斥逐, 死加醜詆, 上自卿相, 下至韋布, 無地容身。 曷嘗有君子爲政而剝一時忠賢, 皆使失所哉? 臣於斯世所師者三人, 李珥、成渾、李之菡也。 三人學問所就, 雖各不同, 其淸心寡欲, 至行範世則同。 臣嘗欲以三人之所以敎臣者敎士, 而邪說盛行, 聞臣是珥、渾之徒, 類多反走, 詬罵之言四面而起。 緣臣無狀, 辱及師友, 臣實慙恧。

疏奏十日不下。 先生再陳邪正之分, 辭益剴切。 聖批求言陳疏, 良用嘉焉, 令所司回啓。 於是奸讒幷起, 仇視先生, 皆欲得以甘心, 上皆不聽。 丁亥, 以文辭先聖, 又上疏論賊凶悖, 比之羿、浞, 冀以轉達於朝, 方伯不受。 退還沃川, 杜門講學, 若將終身。 時倭酋秀吉弑其主源氏, 遣使來覘我國, 擧朝無敢以斥絶爲言者。 先生上疏曰: “嗚呼! 臣逐其君, 人倫之大變, 天地之所不容。 謀國者終不能提戈往誅, 其忍與交使, 助其聲勢乎? 仄聞屢日, 未聞有倡義告絶之議, 是可謂國有大臣乎?” 方伯亦不轉聞。 先生徒步詣闕, 竝前未達三疏, 請以三事備訊而後許之。 其一大明一統, 日僭號, 不可不亟去也; 二我國鄕導反噬之人, 使不可不刷致也; 三彼奴無厭, 歲幣之數, 不可不減定也。 又論李山海之誤國, 不可不黜。 上大怒, 命焚其疏, 先生遂退歸。 己丑夏, 先生又持斧伏闕, 極言朝廷得失, 請明聖學, 省刑罰, 戒奢侈, 節嗜慾, 蠲租賦。 且論賢邪之分。 蓋先生篤信牛、栗二賢, 每以擯斥者盡爲小人, 尊崇者盡爲君子。 論議奮發, 時有不中, 以至讎怨堵立, 至於按治居停, 使無容接, 而親舊亦多拒門不見。 兩司交章請竄, 上久不允。 後因玉堂陳箚, 始命配吉州嶺東。 命下, 金吾吏卒相與嘆曰: “此公之忠直, 反遭此禍耶?” 於此可見人心之不昧也。 先生自沃川徒步踰嶺, 二千餘里, 備嘗困極, 雖蔡西山脚爲流血, 亦不過是也。 先生辭氣未嘗少挫。 嶺北厲疫方熾, 所經死者十常五六, 先生之弟與二奴皆死。 先生雖極傷痛, 亦無憂怖之色, 端坐於四隣積屍之中。 或親至病家, 投藥救活, 而終無恙, 人謂先生正氣, 厲鬼亦不能染也。

辛卯, 秀吉再使求和, 以我國鄕導者數人爲解送, 玄蘇等來獻。 朝廷動色相賀, 將遣黃允吉、金誠一等回謝。 先生聞之, 又上疏曰: “自古勝負之勢, 豈徒以兵之强弱乎? 齊桓用管仲仗義執言, 則召之師不戰而致盟; 漢祖聽董公師出有名, 則垓下之敗, 悲歌自刎。 蓋身負弑逆之罪, 天地所不容也。” 方伯再三却之。 會鄭汝立謀反, 事覺自殺, 黨與伏誅。 湖南士人上疏訟先生。 上曰: “當初之竄, 實非予意。” 卽命放之。 銓司擬典籍, 傳曰: “此人不可輕用。” 銓司誤認上意, 改擬禮曹正郞, 上大怒, 黜銓長洪聖民爲慶尙監司。 先生聞之, 卽赴闕下, 席藁待罪。 城中士庶聚觀, 嘆息曰: “天生趙公, 爲社稷也。”

是歲, 朝廷竟遣信使, 秀吉亦送玄蘇等回謝, 聲言大擧犯上國, 上下莫知所措。 先生自沃白衣詣闕, 請斬虜使曰: “臣竊料今日安危成敗, 只在呼吸。 惟有斬虜使, 飛奏天朝, 分致賊肢于琉球諸國, 期使天下同怒, 以備此賊。 若天朝疑我國與賊連謀, 興師問罪, 聖主將何以謝過? 臣民將何以免死乎? 假使不然, 謂我淪胥爲夷, 堂堂禮義之國, 不亦羞辱之甚乎?” 至壬辰播越之日, 中朝人謂我國導倭犯順, 豈不痛哉? 又曰: “賊之於我國, 一以呑噬爲計, 其包藏禍心極矣。 而待賊使無異華使, 湖、嶺各邑盡率吏民, 出候院驛, 不顧防備之事。 使其奴倭驕我將吏如賤隷, 不敢一言責以禮義, 則豈非可謂痛哭者也? 古人如陸賈正色而屈尉佗之箕踞, 范仲淹焚書而折昊之悖慢。 曷嘗如誠一之輩載糧千石, 持國樂娛賊, 兼使軒轅破蚩尤之具, 悉爲虜人之所得乎? 此輩懼公議之或激, 則乃謂秀吉非眞叛逆, 是可以寒浞爲純臣乎?” 又曰: “等是一死。 寧死燕、楚之路, 以學子貢之遊說, 使諸侯之師擣吳之虛而存我魯國, 則聖主活臣之恩, 庶幾小報, 而天生男子之意, 亦可自副矣。 如無肯行之人, 則臣假一節, 備末介西馳, 以玄蘇頭獻天朝, 效包胥之哭, 以明我王心事。 幸蒙皇上矜憐, 則借馬南陲, 分致賊肢于南洋諸國, 期使此賊不容於覆載, 則雖死道路, 亦可以脫臣老母於俘徒之辱矣。”疏入三日不報。 先生叩首石礎, 血流被面。 或譏其自苦, 先生曰: “明年竄山谷, 必思吾言矣。” 又自草奏文及諭琉球、對馬、日本遺民等書與斬玄蘇罪目及嶺、湖備倭之策。 大槪如前疏, 而語益加切。 政院以先生言爲不祥, 不納, 諫垣以壅蔽請罷承旨, 只命推考。 先生知國事無可奈何, 退歸田廬, 仰屋長吁而已。

壬辰二月, 夫人辛氏歿, 渴葬。 三月, 省先隴於金浦, 告以將亂永辭。 四月辛卯, 賊渡海長驅, 連陷釜山、東萊, 數日已踰鳥嶺, 大駕西幸。 先生聞變, 卽往淸州, 與李等謀起義兵。 時昇平日久, 民不識兵革, 蒼黃失措, 不可收拾。 乃還沃川, 與門人等募得鄕兵數百, 遮截報恩之路, 力戰却之。 自是賊不敢由是路而西。 巡察使尹先覺以兵民多應義旅, 不利官軍, 多方沮撓之。 先生與門人等欲赴行在, 見巡察力言君臣大義, 巡察請與同事。 數日內應募者近千人, 有安世獻者說巡察曰: “公爲一道大將, 曾無尺寸之功。 趙某奮起放廢之中, 先公着鞭, 彼若得志, 必治公逗留之罪。” 巡察然之, 移文列邑, 囚繫義兵之父母妻孥, 又繫治守令之以軍屬先生者, 以此旣集者還散。 先生以書責之, 巡察見書大不悅。 先生以爲旣忤主將, 難與有爲。 遂往湖, 若干士友之素慕先生者, 招募不籍於官軍者, 得千有餘人。 建旗發號, 以聲勢控制, 人心乃安。 遂自洪州直抵懷德。 是時賊方據淸州, 防禦、助防等軍相繼奔潰, 獨僧將靈圭與賊相持。 先生急向淸州, 促防禦使進軍, 與靈圭合, 進薄西門, 親冒矢石, 士皆致死。 賊大衄, 退走入保。 我將軍登城, 忽有驟雨從西北來, 天地晦冥, 士皆懍慄。 先生歎曰: “古人云成敗在天, 信然。” 乃鳴金小退。 是夜賊焚其屍, 從北門潛去。 自是湖諸賊望風皆走。 時有自賊中來者傳言“賊相謂曰: ‘義將行師, 非巡察防禦比, 其鋒不可當也。’” 破賊之後, 拜疏, 使門人全承業齎赴行在, 曰: “臣聞唐玄宗幾失天下, 而能用陳玄禮之諫, 倉卒之中, 割恩正法, 國忠斷頭注槊, 林甫斲棺鞭屍。 故民心冾然思唐, 忠臣義士得盡其力, 李、郭成功, 如建瓴然。 宋之高宗雖有江左, 不用李綱、張浚之言, 常使汪、黃、秦檜之徒不離左右, 故宗澤、岳飛將有迭平河北之望, 而沮抑多端, 至於矯詔殺之。 賢如孝宗, 亦未能成混一之功。 今之主和招寇, 甚於檜奸; 戕賢誤國, 甚於林甫; 積怨市里, 甚於國。 迄保首領, 使其黨盤據要津, 以防賢路, 將何以慰民心而振士氣乎?” 先生又與巡察使不合, 外爲好言, 實欲沮之。 知先生決意勤王, 見先生曰: “吾始與公相歡也, 今有細人之言, 小不相能。 吾已悔之, 今則矢與公死生以之。 今聞錦山賊將侵軼兩湖, 不如同討錦賊之議後者。 然後勤王未晩也。” 諸將佐亦言先滅錦山諸賊, 先生以爲然, 乃還公州。 公之麾下多被巡察所囚, 稍稍散去, 只有七百義士願從先生。 以八月十六日, 移軍向錦山, 或言錦賊皆精銳, 數且數萬, 不可輕嘗大敵。 先生泣誓曰: “君父安在, 敢言利鈍? 主辱臣死, 吾知一死而已。” 遂與靈圭聯兵以進。 曾與湖南巡察權慄約, 以十八日齊擧協攻, 權移書改期, 而先生已抵錦郡之十里。 賊詗知兵無後繼, 乘未備而逆之。 先生令曰: “今日只有一死。 死生進退, 無愧‘義’字!” 士皆唯命, 力戰良久, 賊三北幾潰。 我兵矢盡, 無可爲, 會日且入, 吏士無人色, 先生意氣自若, 督戰益急。 賊悉銳攻之, 遂入帳下, 有裨數人欲脫先生, 力請跳出。 先生笑解馬鞍曰: “此吾殉節地。 丈夫死則已, 不可臨亂苟免。” 遂援桴鼓之, 士爭趨死, 至張空拳相搏, 而猶不離次, 七百人無一逃生者。 賊死者亦過當, 勢遂大挫, 收餘兵還陣, 哭聲振野, 乃積屍焚之, 火三日不滅。 遂與茂朱諸屯賊皆遁, 湖西賴以得全。 自兵興以來, 摧破沮遏之功未有過此者也。 翌日, 先生之弟範冒死求屍, 見先生死於大將旗下, 而將士相與枕藉環其側。 範負屍還, 殯沃川, 至是蓋四日, 而顔色若生, 張目掀髥, 怒氣勃勃, 人不覺其死已久也。 長子完基, 狀貌魁偉, 兵敗, 故華其冠服, 求代先生死, 賊認爲主將而矺之。

先生深於《易》占。 壬辰四月, 聞東南有聲如雷, 大驚曰: “此天鼓也。” 嘗夜觀天文, 北向拜哭, 已而仰天嘆曰: “吾以爲禍及行朝, 更察之, 二王子入北者必陷於賊乎?” 門人志之, 果皆其日也。 至於識見思慮, 若燭照數計, 無不吻合者, 必本於天理人心之正, 參以時務事宜之變, 實非推測臆料之比也。 初, 先生之始起兵也, 行朝遙拜奉常僉正, 及歿, 追贈吏曹參判、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竝表完基, 錄完堵爲泰陵參奉, 月廩其家。 光海之爲世子也, 召見仲子完堤, 賜米布, 遣從官致祭, 復役減租。 甲辰, 先王加贈其考, 與先生竝爲吏曹判書。 後聽建祠宇, 賜額曰表忠, 俾祀于春秋。 今上卽位, 用筵臣議, 拜完堵爲江陰縣監。 嗚呼! 國家酬報死事之臣, 至此而可謂無憾矣。 然亦何及於旣往也?

夫人辛氏, 寧越郡人。 丙子, 以先生宅兆不利, 十月庚寅, 移厝于安邑縣薇山酉坐之原, 夫人合窆焉。 有一子卽完基, 無后。 完堵、完堤、完培及二女皆側出。 完堵一子鎭, 女適張應祥。 完堤二男曰鑌、錞。 女適金樞, 次幼。 完培生三女: 長適朴就賢, 次適李承聃, 次幼。 外孫金汝亮, 文科; 汝玉, 司馬。

嘗聞栗谷先生曰: “汝式每以唐虞可卒復, 未免騷擾。 俟其練達可大用。” 牛溪先生曰: “汝式之學, 日就月將, 甚可畏也。” 蓋栗谷早歿, 未及見先生學問長進也。 嗚呼! 先生以純一剛健之資, 輔以師友淵源, 日造高明正大之域, 則其所成就, 豈可量哉? 世之論者或以先生爲臨亂效節一義士, 彼烏足以知之? 銘曰:

惟帝降衷, 不以華而豐, 不以夷而嗇。

先生受之, 孝爲子法, 忠爲臣法。

同此心者, 孰不欽服? 事有萬殊, 理或不一。

嶽雲易開, 宸聰猶惑。 暴魚能馴, 奸心難革。

龍蛇之歲, 天地反覆。 先生一身, 獨任人極。

危言斬使, 上下失色。 泣血誓衆, 義士雲合。

試戰上黨, 雕題褫魄。 飛章告捷, 滿廷擧笏。

再赴錦役, 如矢斯翼。 人勇殺賊, 天方厚惡。

雲埋短日, 士乏寸鐵。 父子奮號, 天咷岳坼。

先生之死, 人爲身惜。 先生之死, 我惜爲國。

昔田氏徒, 從死五百。 今玆殉義, 五者至七。

懿哉先生! 萬古烈烈。 垂名龜石, 愧非鴻筆。

 

[주-D001] 佑 : 底本에는 “佐”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2] 師 : 底本에는 “臥”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3] 道 : 底本에는 “朝”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4] 汝 : 底本에는 “如”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宋史・趙汝愚列傳》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5] 講 : 底本에는 “搆”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6] 琛 : 底本에는 “㻠”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7] 萌 : 底本에는 “崩”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8] 責 : 《重峰集・神道碑銘》에는 “策”으로 되어 있다.[주-D009] 二 : 《重峰集・神道碑銘》에는 “數”로 되어 있다.

[주-D010] 交 : 底本에는 “文”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宋子大全・重峰趙先生行狀》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1] 敗 : 底本에는 “覇”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宋子大全・重峰趙先生行狀》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2] 稷 : 底本에는 “禝”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3] 淪 : 底本에는 “論”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4] 如 : 底本에는 “加”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5] 防 : 底本에는 없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補充하였다.

[주-D016] 懍 : 底本에는 “懷”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17] 綱 : 底本에는 “網”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8] 離 : 底本에는 “雖”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19] 之 : 底本에는 앞에 “之”가 더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削除하였다.

[주-D020] 裨 : 《重峰集・神道碑銘》에는 앞에 “偏”이 더 있고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는 앞에 “褊”이 더 있다.[주-D021] 援 : 底本에는 “授”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22] 測 : 底本에는 “側”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23] 租 : 底本에는 “祖”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24] 生 : 《重峰集・神道碑銘》에는 뒤에 “一男”이 더 있다.

[주-D025] 玉 : 底本에는 “王”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26] 聞 : 底本에는 “問”으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27] 矢 : 底本에는 “夭”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28] 天 : 底本에는 “夭”로 되어 있다. 《重峰集・神道碑銘》 및 《淸陰集・故義兵將贈吏曹判書重峰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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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陰先生集卷之三十九 / 題跋 十七首

●題趙靜菴先生蘭竹畫屛詩後 a077_59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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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德中。姜葵亭㶏畜一屛。上寫蘭竹。靜菴趙先生。就題五言絶句八首。其家寶傳。至萬曆壬辰。沒於兵火。趙平澤守倫。追記得七章而忘其一。先生曾孫婦柳孺人。聞而愴慕。計費捐貲。命其子察訪松年。俾復舊觀。求敍其事。嗚呼。觀於此詩。先生平日毓德進學之功。夷險一節之志。亦可知矣。聖人所謂修辭立誠者。豈不然乎。其可敬也。夫當先生際遇之隆。群賢彙進。擧世同好。而幽貞卒萎。高節衆猜之句。遽發於吟詠。慨然有感物傷時之歎。豈見微知著。將有不可得而違者歟。抑世道反覆。君子少而小人多。自古而然歟。其又可悲也已。舊畫尹彥直筆。今所作李澄云。崇禎丙子日南至。安東金尙憲識。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1

 

♣조문정공(趙文正公)의 난죽시화첩(蘭竹詩畫帖)♣

●人生本自靜 淸整乃其眞 穩毓馨香德 何殊草與人.

人生本自靜(인생본자정) 인생은 본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니

淸整乃其眞(청정내기진) 맑고 바른 것이 그 본질이다.

穩毓馨香德(온육형향덕) 안정되게 길러야 꽃다운 향기가 크니

何殊草與人(하수초여인) 어찌 풀과 사람이 다르리.

●崖懸蘭亦倒 石阻竹從疏 苦節同夷險 危香郁自如.

崖懸蘭亦倒(애현란역도) 언덕에 매달린 난초 또한 거꾸로 인데,

石阻竹從疏(석조죽종소) 돌에 막힌 대나무가 트인 곳을 좇네.

苦節同夷險(고절동이험) 굳은 절개는 평탄커나 험하거나 한가지인데,

危香郁自如(위향욱자여) 향기가 위태로워도 침착하고 태연함이 가득하네.

●筍生俄茁葉 稚長却成竹 觀物做工夫 如斯期進學.

筍生俄茁葉(순생아줄엽) 죽순이 나더니 곧 잎이 자라고

稚長却成竹(치장각성죽) 어린 게 자라 다시 대나무가 되네.

觀物做工夫(관물주공부) 사물을 보는 것을 학문 닦는 일로 삼으니

如斯期進學(여사기진학) 이 같이 하여 학문의 진보를 바라네.

●嫩質托巖隈 孤根依雲壑 倩描寓逸懷 擬取幽潛德.

嫩質托巖隈(눈질탁암외) 연약한 몸을 바위 모퉁이에 의탁하고

孤根依雲壑(고근의운학) 외로운 뿌리는 구름 이는 골짜기에 의지하네.

倩描寓逸懷(천묘우일회) 예쁘게 그려 빼어난 마음을 부치니

擬取幽潛德(의취유잠덕) 숨어 잠겨있는 덕을 가진 듯하네.

●南巡飄不返 哭帝喪英皇 血染成斑竹 淚沾漾碧湘.

南巡飄不返(남순표불반)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표연히 돌아오지 않으니

哭帝喪英皇(곡제상영황) 여영과 아황은 임금을 잃고 슬피 우네.

血染成班竹(혈염성반죽) 피로 물들여 반점의 대나무가 되었고

淚霑漾碧湘(누점양벽상) 눈물이 적셔 푸른 상강(湘江)에 출렁이네.

●數竿蒙瞽雨 葉葉下垂垂 天意雖同潤 幽貞恐卒萎.

數竿蒙瞽雨(수간몽고우) 대 줄기 몇 개가 무분별하게 비 맞더니

葉葉下垂垂(엽엽하수수) 잎들이 점점 아래로 늘어지네.

天意雖同潤(천의수동윤) 하늘의 뜻은 같이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지만

幽貞恐卒萎(유정공졸위) 숨은 절개가 마침내 시들까 두렵네.

●幽芳誰共賞 高節衆同猜 所以隱君子 孤懷倚此開.

幽芳誰共賞(유방수공상) 그윽한 향기를 누구와 함께 감상할까?

高節衆同猜(고절중동시) 높은 절개를 무리들이 함께 시기하네.

所以隱君子(소이은군자) 그런 까닭에 은거하는 군자는

孤懷倚此開(고회의차개) 외로움을 품으며 이렇게 피는 것에 의지한다네.

 

청음집 제39권 / 제발(題跋) 17수(十七首)

●조정암(趙靜菴) 선생이 난죽화병(蘭竹畵屛)에 쓴 시 뒤에 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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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正德) 연간에 규정(葵亭) 강은(姜㶏)이 병풍 한 폭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위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고 정암 조 선생에게 가지고 가서 오언절구 8수를 받아 와 집안의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병화(兵火)에 없어졌다. 평택(平澤)의 수령으로 있는 조수륜(趙守倫)이 뒤에 7장(章)의 시는 기억해 냈으나 한 수는 잊어버렸다. 그러자 선생의 증손부(曾孫婦)인 유 유인(柳孺人)이 그 말을 듣고는 슬퍼하고 사모하면서 재산을 털어 비용을 마련한 다음, 그의 아들 찰방(察訪) 조송년(趙松年)에게 명하여 예전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도록 하고는 나에게 그 일에 대해 서술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아, 이 시에서 보면 선생이 평소에 덕을 기르고 학문을 진보시킨 공과 험하거나 평탄하거나 절개를 한결같이 했던 뜻을 역시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성인께서 이른바 ‘수사입성(修辭立誠)’이란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공경할 만한 것이다.

무릇 선생께서 크게 임금에게 인정을 받을 즈음에는 여러 현인들이 모두 조정에 진출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함께 좋아하였으나, “그윽한 절개는 끝내 시들었다.〔幽貞卒萎〕”라는 구절과 “높은 절개는 뭇사람들이 시기하였다.〔高節衆猜〕”라는 구절을 갑작스럽게 시를 읊는 사이에 발하여 개연히 사물에 느껍고 시대를 상심하는 탄식이 있었다. 이것이 어찌 기미를 보고서 드러날 것을 알아 장차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도는 반복되는바 군자는 적고 소인은 많았던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그러니 또한 슬퍼할 만한 일인 것이다.

옛날의 그림은 윤언직(尹彦直)이 그린 것이고, 지금의 그림은 이징(李澄)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숭정 병자년(1636, 인조14) 동지에 안동 김상헌은 지(識)한다.

 

[주-D001] 규정(葵亭) 강은(姜㶏) :

1492~1552.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청로(淸老), 호는 규정이다. 1519년(중종14)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임용되었으나,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방(罷榜)되었다. 명종조에 전적(典籍)에 올랐으나 사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종이 죽자 매일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으로 꿇어앉아 울었으며 노후에는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주-D002] 수사입성(修辭立誠) :

글을 지음에 있어서 진실한 의도를 표현해야지 거짓으로 꾸민 들뜬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주-D003] 그윽한……구절 :

조정암의 〈제강청로은난죽병팔수(題姜淸老㶏蘭竹屛八首)〉 시에 나오는 구절인데, 그 시는 한국문집총간 22집에 수록된 《정암집(靜菴集)》 권1에 실려 있으며, 8수 가운데 1수는 잃어버려 7수만 실려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人生本自靜 淸整乃其眞 穩毓馨香德 何殊草與人. 崖懸蘭亦倒 石阻竹從疏 苦節同夷險 危香郁自如. 筍生俄茁葉 稚長却成竹 觀物做工夫 如斯期進學. 嫩質托巖隈 孤根依雲壑 倩描寓逸懷 擬取幽潛德. 南巡飄不返 哭帝喪英皇 血染成斑竹 淚沾漾碧湘. 數竿蒙瞽雨 葉葉下垂垂 天意雖同潤 幽貞恐卒萎. 幽芳誰共賞 高節衆同猜 所以隱君子 孤懷倚此開.”

[주-D004] 이징(李澄) :

1581~? 조선 중기의 화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함(子涵)이며, 호는 허주(虛舟)이다. 16세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인 이경윤(李慶胤)의 서자이며, 화원(畵員)으로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허균(許筠)은 이징을 평하여 산수와 인물과 영모(翎毛)와 초충(草蟲)에 모두 능하여 이정(李楨) 사후의 ‘본국제일수(本國第一手)’라고 칭하는 등 당시에 가장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로 평가하였다. 대표작으로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와 노안도(蘆雁圖) 등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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