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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속집 제11권 / 지리고(地理考) 11
고려(高麗) 2
성읍(城邑)
○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개주(開州)라고도 하고, 송악군(松嶽郡)이라고도 하고,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왕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서 사는데, 이곳을 개성부(開城府)라고 한다. 큰 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세웠으며 성벽을 쌓았는데,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한다. 백성들이 사는 집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었고, 크기가 단지 두어 칸에 지나지 않으며, 기와로 지붕을 이은 집은 겨우 10분의 2쯤 된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국성(國城)은 삼면이 산을 등지고 있는데, 북쪽이 가장 높고 가파르다. 시내가 있어서 굽이굽이 성안을 관통하여 흐르는데, 서남쪽이 하류이므로 조금 넓고 평평하다. 성은 둘레가 20여 리이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서 쌓았으나 형세는 튼튼하고 장엄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당(唐)나라 이전에는 평양에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고려는 여러 대에 걸쳐 겪은 병란에 징계되어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지금의 왕성은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바,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둘레가 60리인데,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 지형에 따라 쌓았다. 성 밖에는 참호(塹壕)가 없고, 여장(女牆)을 만들지 않았다. 줄지어 잇닿은 집들은 행랑채와 같은 모습으로,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성에는 비록 병기(兵器)를 설치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는 하였으나, 산의 형세에 따라서 성을 쌓은 탓에 전체가 견고하지는 않다. 이에 낮은 곳의 경우는 적을 막아 낼 수 없는바,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능히 지켜 내지 못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받았음으로 도읍을 세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형세를 살펴보아 장구한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곳을 택한 다음에 자리 잡는다. 한(漢)나라 말기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도읍을 옮겼고, 후위(後魏)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에 도읍하였다. 당나라 이적(李勣)이 평양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점차 동쪽으로 도망쳐 옮겨 가 살았는데, 어디에 도읍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당나라 말기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바로 지금 도읍한 곳이다. 이곳은 대개 전에 개주(開州)였던 곳으로, 지금도 개성부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은 북쪽으로 숭산(嵩山)에 의지하였는데, 숭산은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 내려오다가 산등성이에 이르러서 점차 나뉘어져 두 줄기가 되어 서로를 감고 돌았는바, 음양가들은 그것을 일러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줄기라고 한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商)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으면 흥성하는데, 건(乾)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卦)이다. 뻗어 내린 등성이가 서북쪽[亥方]으로 나갔으며,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정남쪽으로 돌아 나와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았다. 그 형상이 마치 물동이를 엎어 놓은 것 같은데, 이 산이 따라서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바깥에 또 하나의 안산이 있는데, 높이가 배는 높으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丙]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壬]에 있다. 물은 숭산 뒤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곧게 북방[子位]으로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艮方]에 이르러 꾸불꾸불 흘러서 성안으로 들어온다. 광화문(廣化門)을 지나면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서 빠져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金)이 되는데, 금의 가장 좋은 방위는 동남쪽[巳]이므로,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마치 청룡(靑龍)이 시냇물을 마시는 형상과 같다. 그러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오래도록 역년(歷年)을 누리면서 항시 성조(聖朝)의 속국(屬國)이 됨 직하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임금이 되어 숭악(崧岳)으로 천도한 자는 성이 왕씨(王氏)이고 이름이 건(建)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조선의 국성(國城)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려에서 주(州)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이 있어서 험고하다고 일컬어지는데, 숭악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천우(天祐) 초에 애꾸눈의 승려인 궁예(躬乂) -삼가 살펴보건대, 궁예(弓裔)의 잘못된 표기이다.- 가 이곳에 웅거하였다. 주량(朱梁) 정명(貞明) 5년(919)에 회남(淮南)의 양융연(楊隆演)에게 들어와 조공하였다. 후당(後唐) 청태(淸泰) 말기에 왕건(王建)이 궁예를 시해하고 대신 임금이 되어 그대로 이곳에 도읍하고는 동경(東京)이라고 일렀는데, 개경(開京)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개성부라고 한다. ○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의 서북쪽에 있다. 《요사(遼史)》 지리지에, “본디 예(濊), 맥(貊)의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경주(慶州)를 두었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가 되었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이 되었으며, 요나라 말기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혹은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도경》을 보면 군(郡)은 개주의 동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성부는 신라 때에는 송악군(松嶽郡)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2년(919)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가 되었다. 광종 때 개성부로 고쳤고 지금은 그대로 따랐다. 《송사》에서 이른 바 촉막군은 바로 송악군의 음이 변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개주가 바로 개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두 개의 주로 나누고서 또다시 요나라의 개주를 억지로 끌어다 붙였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요나라의 개주는 지금의 봉황성(鳳凰城) 등지로, 촉막군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 승천부(昇天府)
《원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5년(1268) 7월에 조서를 내려 도통령(都統領)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의 국왕이 승천부(昇天府)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대개 군사를 사열하고 배 만드는 일에 대해 효유하기 위해 간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승천부는 지금의 풍덕부(豐德府)이다.
이상은 경기(京畿)에 예속되었다.
○ 양주(楊州)ㆍ광주(廣州)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양주(楊州), 광주(廣州), 영주(永州) 세 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양주는 신라 때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양주로 고쳤다가 뒤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는데, 지금의 경성(京城)이다. 광주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영주는 지금의 경상도 영천군(永川郡)인데, 고려 때 영주로 칭한 곳이 과연 이 경상도 영주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상고할 수가 없다.
○ 풍양현(豐壤縣)
《명시종(明詩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운흘(趙云仡)은 고려 풍양현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풍양은 지금 양주(楊州)에 병합되었다.
○ 당성군(唐城郡)
《원사》 홍복원열전(洪福源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복원은, 그 선조는 중국 사람으로, 자손 대대로 삼한(三韓)에서 귀하게 되었는데, 사는 곳을 당성(唐城)이라고 이름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당성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이다.
○ 강화현(江華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화도는 개주성(開州城)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원나라 때 고려 왕 왕식(王植)의 서족(庶族)인 승화후(承化侯)가 이곳에 거주하였다. 《고려도경》을 보면 지금 강화부(江華府)가 있는데, 대개 섬 이름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강화는 지금도 그대로 따랐다.
○ 처인현(處仁縣)
《원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 4년(1232)에 살례탑(撒禮搭)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살례탑이 왕경의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처인현은 지금의 용인현(龍仁縣)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인성은 전주(全州)의 서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주의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송나라 소정(紹定) 6년(1233)에 몽고의 임금 와활태(窩闊台)가 장수 살례탑을 파견하여 고려를 공격하게 하자, 살례탑이 국성(國城)의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주(竹州)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김구용(金九容)이 글을 올려서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하는 것을 저지하였다가 죽주로 유배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주는 지금의 죽산부(竹山府)이다.
○ 삼각산성(三角山城)ㆍ양근현(楊根縣)ㆍ천룡산성(天龍山城)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헌종(憲宗) 3년(1253)에 종왕(宗王) 야호(耶虎)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하여 삼각산, 양근, 천룡 등의 성을 함락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삼각산의 중흥동(中興洞)에 옛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9417척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삼각산성은 아마도 이것인 듯하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고종 40년(1253) -원나라 헌종 3년- 10월 기유에 몽고의 군사가 양근성(楊根城)을 포위하였으며, 갑인에 천룡산성을 공격하였는데,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이 항복하였다. 그러니 천룡산성은 여주(驪州)의 근처 지역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여지승람》에서 “천룡산이 충주(忠州)에서 서쪽으로 4, 5십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양근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안성현(安城縣)
《원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정동성(征東省)은 충청주도권과사(忠淸州道勸課使)를 거느린다.” 하였다. ○ 세기에 이르기를, “헌종 5년(1255)에 차라대(箚剌䚟)가 고려를 정벌하여 안성, 충주 등의 성을 함락시켰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충주와 청주 및 안성은 지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홍주(洪州)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홍주산(洪州山)은 자운섬(紫雲苫)에서 동남쪽으로 수백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주(州)가 그 아래에 세워져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홍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한산현(韓山縣)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이색(李穡)은 여러 관직을 거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이상은 양광도(楊廣道)에 예속되었다.
○ 경주(慶州)ㆍ상주(尙州)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동성은 경상주도권과사를 거느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경주와 상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영일현(迎日縣)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영일현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일은 바로 연일(延日)의 잘못된 표기이다. 연일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김주(金州)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18년(1281) 11월에 고려국의 김주(金州) 등지에 변진만호부(邊鎭萬戶府)를 설치하여 일본(日本)을 억눌러 제압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주는 바로 김해부(金海府)이다.
○ 동래현(東萊縣)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정추(鄭樞)는 충민왕(忠愍王) 때 폄관(貶官)되어 동래 현령(東萊縣令)이 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래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의안군(義安郡)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 8년(1271)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이어 고려국왕 왕창(王昌)에게 명하여 고려의 의안군에 주둔해 있으면서 후원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의안은 지금의 창원부(昌原府)이다.
○ 합포현(合浦縣)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 22년(1285)에 칙서를 내려 강회(江淮) 지방에 있는 쌀 100만 석을 조운(漕運)하되, 바다를 건너 싣고 가서 고려의 합포(合浦)에 쌓아 두고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포는 지금 창원에 병합되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포는, 《고려도경》을 보면 진주(晉州) 남쪽에 있는바, 바로 진강(晉江)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원나라 지원 22년에 일본을 정벌하기로 의논하고는 칙령을 내려 강회 지방의 쌀 수백만 석을 조운하여 고려의 김포에 쌓아 두게 하고, 이어 동경(東京) 및 고려로 하여금 각각 1만 석의 곡식을 저축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으며, 다음 해 8월에 모두 김포에 모이게 하였는데, 끝내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원사》에 월포(月浦)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포는 바로 합포의 잘못된 표기이다.
○ 거제현(巨濟縣)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 18년(1281)에 일본행성(日本行省)의 신하가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대군(大軍)은 현재 거제도(巨濟島)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니, 섬 사람이 말하기를, ‘태재부(太宰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예전에 수군(戍軍)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징발되어 싸우러 나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비어 있는 틈을 타 쳐들어가서 유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거제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안동부(安東府)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김구용(金九容)은 안동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동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경산부(京山府)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이숭인(李崇仁)은 경산부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경산은 지금의 성주(星州)이다.
○ 강주(康州)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속군(屬郡)에 강주(康州)가 있는데, 고려에서 남쪽으로 5000리 되는 곳에 있으면서 명주(明州)와 마주 보고 있다. 강주의 이웃 군을 무주(武州)라고 한다. 귤과 유자가 생산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강주(康州)와 무주(武州)는 모두 신라 때의 주 이름이다. 고려 때 강주는 진주(晉州)로 고쳤는데, 지금은 그대로 따랐으며, 무주는 광주(光州)로 고쳤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에 나온다.
이상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 전주(全州)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동성(征東省)은 전라주도권과사(全羅州道勸課使)를 거느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금마군(金馬郡)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강역총론 삼경조(疆域總論三京條)에 나온다.
○ 남원부(南原府)
《경의고(經義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이정(李靖)은 문종 때 지남원 부사(知南原府事)가 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원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나주(羅州)ㆍ승주(昇州) -승주(勝州)로 되어 있는 데도 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송(王誦)이 졸하고 그의 동생인 왕순(王詢) -삼가 살펴보건대, 현종(顯宗)이다.- 이 국사를 임시로 맡아 처리하였다. 거란이 고려를 습격하자 왕순이 승라주(昇羅州)로 옮겨 가서 피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나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으며, 승주는 지금의 순천부(順天府)이다.
《요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開泰) 2년(1013) -고려 현종 4년- 에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이 말하기를,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남쪽에도 2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승주(勝州)는 바로 《송사》에서 말한 승주(昇州)가 와전된 것이다.
○ 광주(光州)ㆍ현봉성(玄鳳城)ㆍ진원현(珍原縣)ㆍ갑향현(甲向縣)ㆍ옥과현(玉果縣)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箚刺䚟)가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였다. 그 뒤에 또 3년에 걸쳐 잇따라 고려를 정벌해 광주(光州), 안성(安城), 충주(忠州), 현봉(玄鳳), 진원(珍原), 갑향(甲向), 옥과(玉果) 등의 성을 함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광주와 옥과현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진원은 지금 장성부(長城府)에 병합되었다. 갑향은 바로 갑향(甲鄕)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말기에 지금의 창평현(昌平縣)에 병합되었다. 현봉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 진도현(珍島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도성은 제주(濟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진도(珍島) 위에 있으며, 진도군(珍島郡)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함순(咸淳) 6년(1270)에 고려에서 반란을 일으킨 배중손(裵仲孫)이 고려 왕 왕식(王植)의 서족(庶族)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세워 왕으로 삼고는 진도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몽고에서 토벌해 평정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도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탐라현(耽羅縣)
《원사》 탐라열전(耽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탐라는 고려의 여국(與國)이다. 세조(世祖)가 이미 고려를 신하로 복속시키고는 탐라가 남송(南宋), 일본(日本)과 통하는 요충지라고 여겨 주의를 기울였다.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탐라로 도망쳐 들어갔다. 10년(1273)에 경략사(經略使) 흔도(忻都) 등에게 명하여 탐라의 적당(賊黨)을 정토하게 하였는데, 적당들을 평정하고서 그 지역에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세우고, 진변군(鎭邊軍)을 주둔시켰으며, 공부(貢賦)로 해마다 모시포(毛施布) 100필을 바치게 하였다. 초토사는 뒤에 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로 바꾸고, 또다시 군민안무사(軍民按撫司)로 바꾸었다. 31년(1294)에 고려 왕이 상언(上言)하여 탐라 지역은 조종조 이래로 본국에 신속(臣屬)하였으니 그 나라를 예전대로 돌려 달라고 청하자, 황제가 그러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다시 고려에 예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탐라국은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탐라국기(耽羅國紀)에 상세하게 나온다.- 태조 때 탐라국의 태자가 와서 조회하였다. 숙종(肅宗) 때 탁라(乇羅)를 개칭하여 탐라군으로 삼았다. 의종(毅宗) 때 현령을 두었다. 희종(煕宗) 7년(1211)에 탐라현의 석천촌(石淺村)을 귀덕현(歸德縣)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2년(1271)에 김통정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난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원나라에서 장군 흔도를 파견하여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군사 500명을 남겨 두어 진압하였다. 충렬왕 3년(1277)에 원나라에서 목장을 설치하였다. 20년(1294)에 충렬왕이 원나라에 조회하면서 주청하여 마침내 탐라를 돌려받아 다시 본국에 예속되었다. 이에 제주(濟州)로 삼고는 비로소 최서(崔瑞)를 목사로 삼았다. 26년(1300)에 원나라의 태후(太后)가 또 내구마(內廏馬)를 방목하였다. 31년(1305)에 우리나라에 다시 속하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1318)에 초적(草賊)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어지럽히자, 사인(士人)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출동시켜 주살하고서 원나라에 아뢰니, 원나라에서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원나라에 예속시켜 주기를 청하자, 원나라에서 다시 만호(萬戶)를 두었다. 16년(1367)에 원나라에서 주(州)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때 목호(牧胡)가 강성하여 국가에서 파견한 목사와 만호를 자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金庾)가 목호를 토벌하였다. 그러고는 왕이 원나라에 상주하여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서관(署官)하고 기른 말을 뽑아서 바치기를 예전처럼 해 주기를 요청하니, 원나라에서 따랐다. 이때 원나라 순제(順帝)가 제주에서 피난하고자 하여 궁실을 짓고서는 어부(御府)의 금백(金帛)을 실어 왔으나, 다음 해에 원나라가 망하였다. 23년(1374)에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2000필을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한방언(韓邦彦)을 제주에 파견하여 말을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러자 합적(哈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감히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방목한 말을 명나라에 바칠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300필만 보냈다. 이에 왕이 최영(崔瑩)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평하였다. 지금은 제주목이 되었다.
이상은 전라도에 예속되었다.
○ 교주(交州)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동성은 동계교주도권과사(東界交州道勸課使)를 거느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교주는 지금의 회양부(淮陽府)이다.
○ 춘주(春州)ㆍ동주(東州)ㆍ화산(禾山)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헌종(憲宗) 3년(1253) 12월에 종왕(宗王) 야호(耶虎)에게 명하여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화산(禾山), 동주(東州), 춘주(春州)를 함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춘주는 지금의 춘천부이고, 동주는 지금의 철원부(鐵原府)이다. 화산(禾山)은 바로 화산(花山)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의 홍천(洪川)과 김화(金化)의 고려 때 별호가 화산(花山)이다.
○ 이주(伊州)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 3년에 그의 동생인 야굴왕(也窟王)으로 하여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의 동계(東界)로 들어가게 하고, 아모간(阿母侃)과 홍복원으로 하여금 북계(北界)로 나아가게 하였다. 몽고의 군사가 대이주(大伊州)에 주둔하고서 옛 화주(和州)를 향해 나아가자, 고려 사람들이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들어가서 버티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주(伊州)는 바로 이천(伊川)의 잘못된 표기이며, 이천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이상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 해주(海州)ㆍ백주(白州)ㆍ옹진현(瓮津縣)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강도(芝岡島)로부터 순풍을 만나 바다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옹진(甕津) 어귀에 닿아 상륙한 뒤, 다시 육로로 160리를 가서 고려의 경내인 해주(海州)에 닿고, 또다시 100리를 가서 염주(閻州)에 닿고, 또다시 40리를 가서 백주(白州)에 이르고, 또다시 40리를 가서 그 나라의 국도(國都)에 이르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해주와 옹진현은 모두 지금 그대로 따랐다. 백주는 지금의 배천군(白川郡)이다.
○ 염주(鹽州) -어떤 데에는 연안부(延安府)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염주(閻州)로 되어 있다.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2년(1252)에 아모간(阿母侃)이 고려의 염주(鹽州)에 주둔하였다.
《엄주별집(弇州別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도(金濤)는 고려국의 연안(延安) 사람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의 해주에서 100리를 가면 염주(閻州)에 이르고, 또다시 40리를 가면 백주에 이른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추론해 보면, 염주는 바로 염주(鹽州)의 음이 와전된 것으로, 지금의 연안부이다. 고려 충선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 평주(平州)
《요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배압(蕭排押)이 통화(統和) 연간에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할 적에 종정(從征)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진격하였는데, 개경(開京)의 서령(西嶺)에 이르러서 고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그러자 고려 왕 왕순(王詢)이 두려워서 평주(平州)로 도망하였다. 이에 소배압이 개경으로 들어가서 크게 약탈한 다음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주는 지금의 평산부(平山府)이다. 이 당시에 고려 왕이 전란을 피해 남행(南幸)하였는바, 평주로 도망쳤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봉주(鳳州)ㆍ동주(洞州)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太宗) 을미년(1235)에 당고발도아(唐古拔都兒)에게 명하여 홍복원과 함께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봉주(鳳州), 해주(海州), 동주(洞州) 세 주의 산성을 함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주는 지금의 봉산군(鳳山郡)이고, 동주는 지금의 서흥부(瑞興府)이다.
○ 신주(信州)ㆍ영녕현(永寧縣)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신주(信州) 영녕(永寧) 사람인 강전(康戩)은 자가 휴우(休祐)인데, 아버지인 강윤(康允)은 3대 동안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냈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주는 지금의 신천군(信川郡)이고, 영녕은 지금의 송화현(松禾縣)이다.
○ 황주(黃州)ㆍ안악군(安岳郡)ㆍ토산현(土山縣)ㆍ장명진(長命鎭)ㆍ철화진(鐵化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성(海州城)은 국성(國城)에서 서남쪽으로 2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닷가에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동북쪽은 바로 안악현이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경내에 안악(安岳), 삼화(三和), 용강(龍岡), 함종(咸從), 강서(江西)의 다섯 현과 장명진(長命鎭) 한 진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황주(黃州)에 속하였다. 모두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 또 이도기(理道記)를 보면, 조선 황해도의 황주, 봉주(鳳州)에서 중화(中和)에 이르는데,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불과 360리이며, 중화현에서 동쪽은 바로 토산현(土山縣)이다. 두 현은 모두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으며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지금은 예전 그대로 따랐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주와 안악은 모두 지금 그대로 따랐다.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장명은 지금의 장련현(長連縣)이다. 철화는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철화(鐵和)로 되어 있으며, 뒤에는 황주에 병합되었다. 삼화, 용강, 함종, 강서 네 현 및 중화현은 본디 북계(北界)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또 아래에 나온다.- 이상의 여러 성들은 모두 고려 때 처음 설치된 것으로, 《대청일통지》에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정주조(靜州條)에서 상세하게 밝혔다.
이상은 모두 황해도(黃海道)에 예속되었다.
○ 함주(咸州)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을사년(1245)에 정종(定宗)이 아모한(阿母罕)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홍복원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함주(咸州), 평로성(平鹵城)을 함락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예종(睿宗) 2년(1107)에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취하여 함주를 두었는데, 지금의 함흥부(咸興府)이다. 그 뒤 4년(1109)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동북계연혁조(東北界沿革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함주는 생각건대 바로 성을 철수해 돌려준 뒤에 내지(內地)에 교치(僑治)를 두고서 단지 그 이름만 존속시킨 것일 뿐이다. 평로성은 지금의 평안도 영원현(寧遠縣)이다. 함주와 평로성을 아울러 거론하였으니, 이는 영원현과 서로 가까이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 등주(登州)ㆍ화주(和州)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1년(1264)에 등주(登州)와 화주(和州) 등지의 모든 여진 사람들에게 고려의 경계에 들어가서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등주는 지금의 안변부(安邊府)이고, 화주는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 고주(高州)ㆍ문주(文州)ㆍ정주(定州)
《명사(明史)》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동북계 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 타길성(駝吉城)ㆍ아로성(亞魯城)
《금사(金史)》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동북계 연혁 구성조(九城條)에 나온다.
이상은 동계(東界)에 예속되었다.
○ 서경(西京) -어떤 데에는 평양(平壤)으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검성(王儉城)은 바로 평양성이다. 수(隋)나라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조선도(朝鮮道)로 나아갔는데, 바로 이곳이다. 오대(五代) 시대에 왕건(王建)이 고려에 웅거하면서 비로소 서경(西京)이라고 일렀다. 동관보(潼關堡)가 평양 서경에 있는데, 역시 조선에서 수졸(戍卒)을 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양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강동현(江東縣)ㆍ중화현(中和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동성(江東城)은 평양의 동쪽에 있다. 고려에서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강동군(江東郡)이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군은 대동강(大同江) 동쪽 언덕에 바짝 다가가 있는데,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가면 바로 중화현(中和縣)이다.” 하였다. 송나라 가정(嘉定) 9년(1216)에 거란(契丹)의 부장(部長)인 육가(六哥)가 고려에 쳐들어가서 강동성에 웅거하였는데, 금나라의 임금 아골타(阿骨打)가 군사를 파견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육가를 공격해 격파한 것은 바로 몽고의 임금인 철목진(鐵木眞)이 한 일로, 금나라 임금이 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강동현과 중화현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여섯 성을 국경 가에 수축하고는 곽주(郭州)라 하였다.” 하였고, 《요사》를 보면,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였는데, 동주(銅州), 곽주(霍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하였고, 《문헌비고》에는 이르기를, “곽주(霍州)는 바로 곽주(郭州)이다.” 하였는데, 모두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 영주(靈州) -어떤 데에는 흥화군(興化軍)으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흥주(興州)로 되어 있다- ㆍ철주(鐵州)ㆍ정융진(定戎鎭)ㆍ희주(煕州)ㆍ무주(撫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철주성(鐵州城) 역시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에서 주를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도 철주성을 설치하였다. 정융진을 관할한다. 지금 그대로 따라 철주라고 한다. 또 그 서북쪽에 있는 것을 영주(靈州)라고 하는데,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예전 명칭을 그대로 쓴다. 또 희주성(煕州城)이 철주의 동북쪽에 있는데, 당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희천군(煕川郡)이라 한다. 또 그 동쪽에 있는 것을 무주(撫州)라고 하는데,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예전의 명칭을 그대로 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설치하고서는 흥주(興州), 철주(鐵州)라고 하였다.” 하였고, 《요사》를 보면, “개태(開泰) 6년(1017)에 고려의 흥화군(興化軍)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고려사》에 의거하면, 흥주에 흥화진(興化鎭)을 만들었다. 그런즉 흥화군은 흥주이다. 고려 현종 때 승격시켜 영주(靈州)라 하였다. 지금은 의주(義州)에 병합되었는데, 의주에서 남쪽으로 55리 되는 곳에 있다. 정융진 역시 의주에 병합되었는데, 의주에서 동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철주는 지금의 철산부(鐵山府)이다. 희주는 지금의 희천군이다. 무주는 지금 덕천군(德川郡)에 병합되었는데, 덕천군에서 서쪽으로 180리 되는 곳에 있다.
○ 가주(嘉州) -혹은 가주(葭州)라고도 한다- ㆍ용주(龍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주성(嘉州城) 역시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 지금은 가산군(嘉山郡)이라고 한다. 서쪽으로 의주의 경계에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안주(安州)의 경계에 접하였다.
○ 강서현(江西縣)ㆍ함종현(咸從縣)ㆍ용강현(龍岡縣)ㆍ삼화현(三和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황주조(黃州條)에 나온다.
○ 구주(龜州) -어떤 데에는 정원부(定遠府)로 되어 있다- ㆍ자주(慈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원성(定遠城)은 평양의 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는 존폐가 일정치 않았다.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라 정원부라고 하였다. 지금은 그대로 따랐다. 그 남쪽에 있는 것을 자주성(慈州城)이라고 하는데,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자산군(慈山郡)이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설치하고는 구주(龜州)라 하였다.” 하였고, 《고려사》 지리지를 근거로 하여 보면, 구주를 고종 때 승격시켜 정원부(定遠府)로 삼았으며, 또 정주(定州)로 고쳤다. 그 뒤에는 치소를 마산(馬山)의 남쪽으로 옮겼는데, 바로 지금의 정주이다. 옛 구주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자주는 지금의 자산부(慈山府)이다.
○ 곽주(郭州) -어떤 데에는 곽주(霍州)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주성(郭州城)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발해 때에 그대로 따랐고, 그 뒤에는 요나라에 속하였다. 재기(載記)를 보면, 당초에 거란이 압록강 북쪽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은 마땅히 동쪽이어야 한다.- 을 고려에 주자, 고려에서는 흥주(興州),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등 모두 여섯 성을 축조하였다. 송(宋)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1012)에 거란이, 고려 왕이 멋대로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데다가 또 들어와서 조회하지 않은 데 대해 노하여 다시 6주의 지역을 빼앗기로 의논하였는데, 어떤 자가 이르기를, “개경에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그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압록강에서 대하(大河)를 따라서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7년(1014)에 거란이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列)을 파견하여 고려와 곽주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원나라 때에도 이곳에 곽주를 두었다. 지금은 곽산부라고 한다.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 3년(1231)에 오야이(吾也而)가 고려를 정벌하여 용주(龍州), 선주(宣州), 태주(泰州), 가주(葭州)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주(葭州)는 가주(嘉州)의 음이 와전된 듯하며, 지금의 가산군(嘉山郡)이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부(龍川府)이다.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축조하고는 용주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 성주(成州)ㆍ수덕진(樹德鎭)ㆍ순주(順州)ㆍ개주(价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주성은 평양의 동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 수덕진을 관할한다. 지금은 성천부(成川府)라고 한다. 또 그 북쪽에 있는 것을 순천군(順川郡)이라고 하며, 순천군의 서쪽에 있는 것을 개천(价川)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개천군(价川郡)이라고 한다. 모두 당나라 때의 옛 이름이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성천은 지금의 성천부이다. 수덕진은 지금은 양덕현(陽德縣)에 병합되었는데, 양덕현에서 서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순주와 개주는 고려 때 주라고 칭하였으며, 우리 조선에 이르러서 순천(順川)과 개천(价川)으로 고쳤는바, 《원사》 동녕로조(東寧路條)에 순주와 개주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 개주와 순주를 개천과 순천으로 고치고서 그것이 원나라 때의 옛 이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숙주(宿州)ㆍ은주(殷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주는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또 그 동북쪽에 있는 것을 은주성(殷州城)이라고 한다. 모두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옛 이름을 그대로 쓴다. -삼가 살펴보건대, 숙주(宿州)는 바로 숙주(肅州)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의 숙천부(肅川府)이고,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다.
○ 덕주(德州)ㆍ영청현(永淸縣)ㆍ통해현(通海縣)ㆍ순화현(順化縣)ㆍ영원진(寧遠鎭)ㆍ유원진(柔遠鎭) -어떤 데에는 평로성(平鹵城)으로 되어 있다- ㆍ안융진(安戎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덕주성(德州城)은 함흥부의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그 뒤에 그대로 따랐고, 원나라 때에는 그대로 이어 덕주를 설치하였다. 강동현, 영청현, 통해현, 순화현 네 현과 영원진, 유원진, 안융진 세 진을 관할한다. 뒤에 고려에 함락되었으며, 고려에서는 그대로 덕주라고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덕주는 지금의 덕천군(德川郡)이다. 영청현, 통해현은 지금은 영유현(永柔縣)에 병합되었다. 순화(順化)는 바로 순화(順和)의 오기(誤記)로, 지금의 순안현(順安縣)이다. 안융진은 지금 안주(安州)에 병합되었으며, 안주에서 서쪽으로 65리 되는 곳에 있다. 유원진은, 《고려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본디는 평로진(平虜鎭)으로,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하였다. 유원진과 영원진은, 《고려사》를 근거로 하여 보면, “유소(柳韶)가 수축한 장성이 서해 바닷가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운주(雲州) -지금의 운산군(雲山郡)이다-, 안수(安水), 청새(淸塞) -지금의 희천군(煕川郡)이다-, 평로(平虜), 영원(寧遠), 맹주(孟州) -지금의 맹산현(孟山縣)이다.- 등의 성을 지나서 화주(和州)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에 이르렀다.” 하였다. 그런즉 평로진과 영원진은 마땅히 희천과 맹산의 사이에 있어야만 한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영원진은 지금의 영원현(寧遠縣)이다. 유원진 역시 마땅히 영원현의 경내에 있어야 한다.”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여지승람》에서 영원진과 유원진이 지금은 영유현에 합하여졌다고 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원사》 열전을 보면, “을사년(1245)에 홍복원이 고려를 정벌하여 함주(咸州)와 평로성(平鹵城)을 함락시켰다.” 하였다. 또 《묵사(墨史)》에는 이르기를, “고려에서 먹[墨]을 진공(進貢)하였는데, 그 명문(銘文)에 평로성진공(平鹵城進貢)이니 순주공묵(順州貢墨)이니, 맹주공묵(猛州貢墨)이니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였다. 평로성은 바로 평로진(平虜鎭)이다. 평로(平鹵)의 로(鹵)가 《고려사》 지리지에는 로(虜)로 되어 있는데, 마땅히 먹에 새겨진 글자를 바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창주(昌州)ㆍ삭주(朔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삭주성(朔州城)은 평양의 북쪽 경계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도 역시 삭주라고 한다. 또 그 동북쪽에 창주성(昌州城)이 있는데, 이 역시 당나라 때의 옛 이름이다.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창성부(昌城府)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창주는 지금의 창성부이고, 삭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태주(泰州) -어떤 데에는 광화(光化)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주성(泰州城)은 정원부(定遠府)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의 서쪽에 있다.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태천현(泰川縣)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추격하여 고려의 서북쪽에 있는 광화(光和)의 경계에 이르렀다.”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이르기를, “태주는 본디 광화현(光和縣)인데, 광종(光宗) 때 태주로 칭하였다.” 하였다. 지금의 태천군(泰川郡)이다.
○ 선주(宣州) -어떤 데에는 통주(通州)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동주(銅州)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강주(鋼州)로 되어 있다- ㆍ영삭진(寧朔鎭)ㆍ석도진(蓆島鎭) -어떤 데에는 군도진(羣島鎭)으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선주성(宣州城)은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2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여 안동도호부에 속하였다. 요나라 때에 그대로 따라 선주(宣州)라고 하였으며, 역시 정원군(定遠軍)이라고도 하였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개태(開泰) 3년(1014)에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보주(保州)이다.” 하였다. 대개 발해 때 폐지한 것을 요나라 때 다시 설치한 것이다. 원나라 때에도 선주라 하였으며,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영삭과 군도 두 주를 거느린다. 바로 지금의 선천군(宣川郡)이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였다.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동주(銅州)에서 막아 싸웠는데, 이를 패퇴시켰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주성(鋼州城)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송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연간에 거란이 고려를 쳤는데, 고려의 장수 강조가 패하여 강주(鋼州)에 들어가 있다가 거란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쌓고는 통주(通州)라고 하였다.” 하였고,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통주는 현종 때 선주(宣州)라고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다. 《요사》에서 이른 바 동주(銅州)는 바로 통주(通州)의 음이 와전된 것이며,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바 강주(鋼州)는 바로 동주(銅州)의 오자(誤字)로, 모두 같은 곳이다. 영삭진(寧朔鎭)은 지금 의주에 편입되었는데, 의주에서 동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다. 군도(羣島)는 《원사》에 석도진(蓆島鎭)으로 되어 있는데, 대개 섬 안에 진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아도 상고할 수가 없다.
○ 맹주(孟州) -어떤 데에는 맹주(猛州)로 되어 있다- ㆍ삼등현(三登縣)ㆍ초도진(椒島鎭)ㆍ가도진(椵島鎭)ㆍ영덕진(寧德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맹주성(孟州城)은 조선의 국성(國城) 서쪽에 있다. 당나라 때 맹주를 설치하였다. 삼등현과 초도진, 가도진, 영덕을 거느린다. 지금은 주(州)는 폐지되고 현(縣)만 남아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묵사》를 보면 “고려에서 먹[墨]을 진공(進貢)하였는데, 그 명문(銘文)에 어떤 것에는 맹주진공(猛州進貢)이라 하였다.” 하였다. 또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의 송연묵(松煙墨)은 맹주(猛州)의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맹주(孟州)가 어떤 데에는 맹주(猛州)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지금의 맹산현(孟山縣)이다. 삼등현(三登縣)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초도는 지금의 풍천(豐川) 앞바다에 있고, 가도는 지금의 철산(鐵山) 앞바다에 있다. 대개 고려 때 이 두 섬에 진을 설치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역사 기록이 탈략(脫略)된 것이다. 영덕진은 《원사》에는 영득진(寧得鎭)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의주에 편입되었는데, 의주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있다.
○ 연주(延州)ㆍ양암진(陽巖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주성(延州城)은 함흥부(咸興府)의 서북쪽에 있다.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지금은 예전의 명칭을 그대로 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 운산군(雲山郡)에 편입되었으며, 운산군에서 동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있다. 양암진은 지금의 양덕현(陽德縣)이다. 《원사》 동녕로조(東寧路條)를 근거로 해서 보면, 양암진은 연주에서 관할하였므로 이곳에다가 부기(附記)하였다.
○ 운주(雲州) -어떤 데에는 위화(威化)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운주는 평양의 동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 역시 운흥군(雲興郡)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칠 적에 고려의 서북쪽 지역인 위화(威化)까지 추격하여 이르렀다.”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운주는 광종 때 위화진(威化鎭)이라고 칭하였다가 성종 때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운산군(雲山郡)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운흥군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의주(義州)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大定) 15년(1175)에 고려에서 상주하기를,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하고자 하나, 의주로(義州路)가 막혀 통할 수가 없으니, 정주(定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정평부(定平府)이다.- 를 경유해서 갈라로(曷懶路)로 들어가 아뢰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허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의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정주(靜州)ㆍ인주(麟州)ㆍ위원진(威遠鎭)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정주(靜州)와 위원진은 지금 의주에 편입되었는데, 의주에서 남쪽으로 25리 되는 곳에 있다. 인주는 지금 의주의 인산진(麟山鎭)이다. 대개 서경 이하의 여러 주(州), 현(縣), 진(鎭) 및 서해도(西海道)의 황주(黃州) 등 다섯 성은 모두 《원사》 지리지에 나오는바, 동녕로에 예속된 것들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서북계연혁조(西北界沿革條)에 나왔다.- 《원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말기부터 그 지역이 고려에 편입되었다. 주(州)와 진(鎭)을 설치하였다. 지원(至元) 6년(1269)에 그 지역이 와서 귀부하자 동녕로에 속하게 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잘못 이 설에 의거하여 이상에서 말한 여러 성들을 모두 당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원나라에서는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혀 말이 안 된다. 동녕로의 주와 진은 모두 고려에서 설치한 것이니, 어떻게 당나라 때의 옛 이름이 될 수 있겠는가.
○ 영주(寧州)ㆍ위주(渭州) -어떤 데에는 귀주(貴州)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덕성(德成)으로 되어 있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였는데,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주(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동주(銅州)의 잘못된 표기이다.- 와 가까운 곳으로는 또 비주(費州)와 귀주(貴州) 등이 있다. 혹자는, 비주는 지금의 매주(買州)의 와전이라고 하고, 귀주는 지금의 위주(渭州)의 와전이라고 말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고려 때 영주안북부(寧州安北府)라고 칭하였는바,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귀주는 《대청일통지》에서 이른바 위주(渭州)의 와전이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로,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다. 그리고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추격하여 고려의 서북쪽 지역인 덕성(德成)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를 근거로 해서 보면, 위주는 일명 옛 덕성이라고 한다. 그런즉 덕성은 역시 위주인 것이다. 고려 문종 때 위주가 이미 폐지되고 무주(撫州)가 치소(治所)가 되었으므로 《원사》 지리지에서는 싣지 않은 것이다.
○ 박주(博州) -어떤 데에는 덕창(德昌)으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운주(雲州)의 동북쪽에 박천성(博川城)이 있는데, 고려에서 설치한 것이다. 지금은 그대로 박천군(博川郡)이라고 한다. 서남쪽으로는 자산군(慈山郡)과 경계를 접하였고, 동쪽은 개천군(价川郡)과 경계를 접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추격하여 고려의 서북쪽 지역인 덕창에까지 이르렀다.” 하였으며,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박주는 일명 덕창이라고 한다. 원종(元宗) 때 주가 이미 폐지되고 가주(嘉州)에 속하였으므로 《원사》 지리지에서는 누락된 것이다.
이상은 북계(北界)에 예속되었다.
부(附) 미상(未詳)의 성읍(城邑)
○ 오리산성(五里山城)ㆍ옹자성(瓮子城)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영조(王榮祖)가 기축년(1229)에 북경등로정행만호(北京等路征行萬戶)에 제수되어 고려를 정벌하였다. 또 제왕(諸王) 야홀(也忽)을 따라 삼한(三韓) 지역을 정벌하여 천룡성(天龍城) 등 여러 진보(鎭堡)를 함락하였는데, 군사들에게 난폭하게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키니 백성들이 모두들 기뻐하였다. 오리산성을 격파하고는 주장(主將)에게 청하여 그 백성들을 보존시켜 주었다. 마침내 옹자성(瓮子城), 죽림채(竹林寨) 및 고섬(苦苫) 등 몇 개의 섬을 함락하고는 진을 고려의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천룡성은 충주(忠州) 근처에 있다. 고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에 있는 해도(海島)이다. 오리산성 및 옹자성은 지금 천룡성이나 고섬과 함께 거론하였으니 이들 두 성은 마땅히 한강 남쪽에 있어야 한다.
○ 개주(開州)ㆍ수주(受州)ㆍ화량성(花涼城)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매노(買奴)가 정행만호(征行萬戶)로써 태종 경인년(1230)에 고려의 화량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진군하여 개주(開州)를 공격해 개주의 장수 김사밀(金沙密)을 포로로 잡았으며, 마침내 용주(龍州), 선주(宣州), 운주(雲州), 태주(泰州) 등 14성을 함락하였다. ○ 태종 3년(1231)에 오야이(吾也而)가 살리탑(撒里搭)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여 수주, 개주, 용주, 선주, 태주, 가주(葭州)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 금산(金山)ㆍ귀주(歸州)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 을미년(1235)에 당고발도아(唐古拔都兒)에게 명하여 홍복원(洪福源)과 더불어 나아가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용강(龍岡), 함종(咸從) 두 현과 봉주(鳳州), 해주(海州), 동주(洞州) 세 주의 산성 및 자주(慈州)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또 금산(金山), 귀주(歸州), 신주(信州), 창주(昌州), 삭주(朔州)를 함락하였다.
○ 비주(費州) -어떤 데에는 매주(買州)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위주조(渭州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주(開州) 이하의 여러 성은 비록 이를 증명할 다른 서책은 없지만, 이들은 모두 서북쪽 지방에 있는 성 이름이다.
[주-D001] 오음(五音) : 음률의 기본이 되는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를 말한다.
[주-D002] 객산(客山)은 …… 있다 : 원문에는 ‘實主丙壬’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賓主丙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 주량(朱梁) : 오대 시대 때의 양(梁)나라를 말한다. 주씨(朱氏)가 창건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하며, 대개 남조(南朝)의 소량(蕭梁)과 구별하기 위해 주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D004] 왕식(王植)의 서족(庶族)인 승화후(承化侯) : 왕식은 원종(元宗)의 이름이고, 승화후는 왕온(王溫)이다. 원종 11년(1270)에 원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개성으로 환도할 때 삼별초(三別抄)의 영수로 있던 배중손(裵仲孫)이 이에 따르지 않고는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주-D005] 충민왕(忠愍王) : 공민왕(恭愍王)의 잘못된 표기이다. 정추는 공민왕 15년(1366)에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인하여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주-D006] 일본행성(日本行省) :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하였던 관청으로, 3차에 걸쳐서 세워졌는데, 일본 정벌을 포기한 뒤로는 고려에 대한 간섭 기관으로 변모되어 공민왕 5년(1356)까지 존속하였다.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征東行省), 정동성(征東省) 등으로도 칭하였다.
[주-D007] 명주(明州) :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영파부(寧波府)이다.[주-D008] 목호(牧胡) : 원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말을 기르는 몽고인을 말한다.
[주-D009] 홍천(洪川) : 원문에는 ‘洪州’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 헌종(憲宗) : 원문에는 ‘定宗’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 대동강(大同江) : 원문에는 ‘大東江’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 육가(六哥) : 야율육가(耶律六哥)이다. 금나라의 북변 천호(北邊千戶)로 있다가 몽고군이 침입하자 10여 만 명의 무리를 끌어 모아 몽고에 붙었다. 스스로 요왕(遼王)이 되어서는 연호를 원통(元統)으로 고치고 요동 지방을 차지한 다음, 지금의 개원(開原)인 함평(咸平)에 도읍하였다가 다시 몽고에 항복하여 원수(元帥)가 되었다. 야율유가(耶律留哥)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13] 통주(通州) : 원문에는 ‘通山’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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