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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조단비근방●39°18'57.9"N 126°53'35.5"E
▣2세조묘역근방●39°19'24.8"N 127°23'43.8"E
▣3세조묘역근방●39°33'04.2"N 127°16'33.1"E
▣4세조묘역근방●38°59'52.0"N 127°27'02.9"E
▣5세조묘역근방●37°83'98.5"N 126°57'61.2"E
▣5세조配貞和公主墓域近方●37°58'42.9"N ●126°37'16.4"E
●조소생(趙小生)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용진현(龍津縣)에 살았다. 항몽전쟁 말기 안무고려군민총관( 安撫高麗軍民總管府 )이 되었던 조휘(趙暉)의 증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휘의 원나라에 볼모로 간 이후 심양에서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總管府)가 존속된 1세기 동안 조휘와 그 자손이 총관직을 세습하였던 바, 1356년(공민왕 5) 왕이 원나라의 쇠미를 틈타 쌍성의 수복을 꾀할 당시 쌍성총관으로 있었다.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 등이 쌍성을 공략하자, 고려군과의 내응을 우려하여 인망이 있던 숙부 조돈(趙暾)을 연금시키는 한편,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과 함께 저항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돈이 탈출하여 고려군에 협력하고 쌍성인들이 고려에 귀순하자 일이 기울어진 것을 알고 여진지역으로 도주하였다.
고려가 돈(暾)을 보내어 회유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고 1362년 원나라의 반적(叛賊) 나하추(納哈出)를 끌어들여 고려의 동북변지역을 침구하였다가 홍원(洪原)에서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격파당하고, 같은 해 여진의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 : 몽골(원나라)이 군사, 행정등 점령지역의 지방통치를 위해 파견한 중앙관리으로 고려인을 임명한 적이 없고, 전부 몽골인으로 임명했다.
◐쌍성 사람으로 증조부 고려인 조휘가 원나라에 볼모로 가면서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總管府)가 설치되고, 이후 총관 자리를 조소생까지 4대째 세습했다. 이 글에 조소생이 조휘의 종증손이라 나와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지금 한양조씨 족보에는 조소생이 조림의 아들로 나와있지만, 과거 족보 제작 때는高麗軍民總管職을 세습한 조상의 행적을 부끄러워하여 용성부원군(조돈) 이상은 간략히 기재한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조돈의 직계 자손이 아니었던 조소생은 조림의 아들로高麗軍民總管職을 세습했음에도 족보에서 빠졌었다. 그래서 해당 글에서는 조휘의 종증손으로 추정한 것이다.
1356년에 공민왕이 추밀원부사 유인우를 동북병마사로 임명하고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總管府)을 탈환을 명령하자, 유인우는 이인임 등과 함께 쌍성을 공격하였다. 조소생은 숙부 조돈이 고려와 내응할 것을 우려하여 연금시켰지만, 조돈은 탈출에 성공해 쌍성 사람들을 고려와 내응하게 하였다.
결국 쌍성이 함락되어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總管府)은 90여년 만에 다시 고려 땅이 되었다. 조소생은 여진 지역으로 도망쳤고, 1358년 5월에 탁도경과 함께 해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359년 가을인 음력 7월에는 탁도경과 함께 고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362년 2월에 나하추를 끌어들여 고려의 삼살, 홀면 지역을 공격했으며, 고려에서는 동북면도지휘사를 보내서 대응하게 했지만 여러 차례 고려군을 격파했다. 7월에 나하추, 탁도경과 함께 홍원의 달단동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군사를 보냈다가 이성계에게 처절하게 대패한 뒤 여진 쪽으로 다시 달아났으나, 여진의 다루가치(達魯花赤)인 부카(不花)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쌍성각유적지: 함경남도 금야군/읍 성역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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