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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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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유서경(柳西坰)의 말에, “역사책에는 감개되고 분통이 터지는 대목이 많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저 그림자만 보고 한 말이다. 천년 전의 흥망(興亡)의 자취를 보고도 오히려 불평을 갖게 되는데, 하물며 자기 몸으로 친히 경력하고 자기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이야 그 감개와 분통의 절심함이 어찌 지나간 역사책에 비교가 되겠는가. 그렇다면 산서옹(山西翁)의 이 기록으로 그분의 심회를 가히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문()으로는 자료를 널리 모아서 기록하고 할 말을 빠짐없이 다 갖추었으니, 이것이 좌씨(左氏)춘추(春秋)경문(經文)에 대하여 전()을 쓰듯이 바로 역사가(歷史家)의 한 체제이며, 그 의()로는 천 년 전 불평의 나머지이니, ! 참으로 흐느낄 만한 일이다. 대개 우리나라 선조조(宣祖朝)와 인조조(仁祖朝)의 시대에 이 천하에 일이 많아서, 크기로는 하늘과 땅이 번복하여 사람의 떳떳이 지킬 인륜이 망하고 끊어졌으며, 적기로는 만백성이 다 죽게 되어 피와 살점이 땅바닥에 깔리게 되었으니, 하늘이여! 밑에 있는 이 백성들을 사랑할진대 어찌하여 화액을 내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대저 사람마다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이것은 다만 이미 그렇게 된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군자라면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서 느끼는 감격과 분통을 어찌 이미 그렇게 된 일이라고 이르겠는가. 산서옹이 이 시국을 당하여 느낀 것이 몇 가지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겠으나, 그의 잦은 탄식과 비개(悲慨)는 한때 사대부(士大夫)들이 붕당을 나누어서 자기 편만 감싸주려는 데 있었으니, 나는 우선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공의 의사를 밝혀 보려 한다. 그 당시에 천하의 대세가 점차로 암흑으로 치닫는데, 우리 동쪽 나라만이 인의(仁義)를 숭상하는 나라로서 이 위험한 천하 대세의 목구멍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었으니, 만약 우리 동방(東方) 사람들이 앞을 내다보고 일찍이 대비책을 도모하여 큰 지위에 있는 자나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마음을 협동하여 밤이나 낮이나 자력을 강화했다면, 맹자(孟子)의 이른바 천리의 국토를 가지고서 남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한 것이니, 오직 자신의 위태함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천하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을 풀어 흩뜨리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동국(東國)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사대부들은 동인ㆍ서인ㆍ남인ㆍ북인이니 한 것이 과연 무슨 명목(名目)인가. 창과 칼은 되놈을 무찌르기에 쓰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창을 갈아 가지고는 자기 당을 지키고 다른 편을 치려고만 하였고, 계획과 책략(策略)을 세우는 것은 적을 제어하려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획과 책략을 남의 공을 세우는 데 방해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해치려는 데만 쓰려고 하여, 아무리 좋은 말과 깊은 모책(謀策)이라도 좋은 것이 되지 못함은 자기 당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이 죄가 되지 않음은 자기 당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물의 실정을 보면, 합하면 힘이 강하고 나누어지면 힘이 약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의논이 이처럼 네 갈래로 나누어지고 다섯 갈래로 찢어져 있으니, 저 악독한 왜적이 쳐들어 오고 중국이 병난에 피폐되었음을 기다릴 것 없이 약할 대로 약해졌을 것이다. 하물며 원기(元氣)가 벌써 허약하여졌으니 외부의 사기(邪氣)가 침입하여 올 것은 역시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동서로 붕당이 나누어지자 바다 건너 왜적이 밀려들게 되고, 대북(大北)이니 소북(小北)이니 하는 싸움이 벌어지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리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미리 서두르면 자립할 수 있고 미리 서두르지 않으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니, 아무 준비 없이 창졸에 급한 사변에 부딪친다면 비록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재가 있다 해도 손을 묶고 아무런 방책을 쓸 수 없을 것이며, 다만 충성과 신의가 있는 의사(義士)들과 아무런 죄없는 백성들만이 간()과 뇌가 깨어져서 들에 널리고 신성한 국토가 허물어진 빈터로 되는 것이다. 옛날 예()로 본다면 진() 나라 왕이보(王夷甫) 따위의 여러 사람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 슬프다. 크게 간사하고 지극히 악한 자가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서로 자기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도 일찍이 문장(文章)을 사업으로 삼고 고금의 역사에 통달한 자이니 처음에야 어찌 나라를 그르치기로 스스로 기약하였겠는가. 그도 어찌 자기에게 동조하는 자라서 다 군자가 아닐 것이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라서 반드시 다 소인(小人)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겠는가. 또 어찌 그가 백성과 나라가 편하면 자기 몸과 집도 편할 것이고 나라가 편치 못하면 이와 반대된다는 진리를 몰랐겠는가마는, 철인(哲人)도 어리석지 않음이 없다는 듯이 서로 함께 와중(渦中)에 빠졌으니 그 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괴이한 일이라 하겠다. 공은 산야에 있는 한낱 선비라 나라의 정사를 논하는 데 참여할 수는 없었으나, 시국을 근심하고 세속을 민망히 여겨서 마음속에 쌓이고 쌓였었다. 정유년(선조 30, 1597) 왜란이 다시 일어나자 의병을 불러 모아 몸을 떨치고 나서서 기회를 만들고 편리한 방법을 타서 오히려 여러 번 왜적의 머리를 부수어 죽였으니, 보다 더 크게 뜻을 펴지 못한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뒤로 시국의 모든 일은 날로 그르쳐지기만 하여 격렬한 근심과 울분을 호소할 길이 없으므로, 이에 이 기록을 쓰기로 하여 선조대왕(宣祖大王) 임오년(1582)부터 인조(仁祖) 신사년(1641)까지 전후 60년 간의 천재지변과 요괴한 물상, 조정의 상황과 민간의 풍속, 난중의 공문과 의병의 격문서, 변방 이외의 모든 일들을 다 모았는데, 그 중에 혹 소루한 것도 있는 것은 듣고 본 것이 미처 못 미친 때문이지 고의로 빼버린 것은 아니다. 공의 가슴속의 핏덩이는 이 기록에 다 쏟은 것이다. 정진(正鎭)이 약관(弱冠) 시절에 오 충렬(吳忠烈) 공의 유고(遺藁)를 보다가 그 뒤에 기록된 말이 조산서(趙山西)대방기문(帶方記聞)에서 나온 것임을 보고서 처음으로 이 글이 있음을 알았으나 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그 뒤 30년을 지나서 산서옹의 후손 조병덕(趙炳悳) 군으로부터 이 기록의 반을 얻어서 보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또 전부를 다 얻어 읽게 되었다. 이로써 나의 숙원(夙願)이 쾌히 이루어진 것이나, 이 책 머리에 서문을 쓴다는 것은 내가 어찌 감히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조 군의 선친이 전에 잘못 알고 서찰을 보내서 부탁한 일이 있었고 지금 와서 조 군이 전의 부탁을 또 다시 청하니, ! 양세(兩世)를 두고 청하는 것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조 군은 힘쓸지어다. 천 년 뒤의 사람도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니, 이 글이 전하는 날에는 반드시 책을 덮고서 여러 번 탄식할 자가 있으리라.

숭정(崇禎) 4번째의 병진년(1856) 동짓날,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은 삼가 쓰노라.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亂中雜錄序

柳西坰言史書苦多感憤此影子語也千載興亡尙爲之不平況身親經歷耳目之所睹記其感憤之親切又豈史書比耶然則山西此錄翁之心可見已其文則廣記備言若左氏傳經之爲乃史家之一軆其義則千載不平之餘憤嗚呼欷矣蓋我  仁之際天下多事大者天地飜覆彝倫斁絶小者生靈糜爛血肉塗地天乎仁愛下民胡爲崇降不祥至此極也夫人痛哭流涕然此特其已然處若夫君子先事之感憤豈已然之謂乎山西之所感於時事者未知其有幾件節拍而歎息悲慨屢發於一時士夫分朋護黨請姑以此一節明公之意焉當時天下大勢駸駸然趣於陸沈而吾東適以仁義之邦據大勢之咽喉苟使吾東之人遠見而蚤爲之圖大小協心夙夜自强則千里未聞畏人不惟可以自救自拔使天下免於被髮左衽其在吾東歟其在吾東歟彼士大夫之東西南北果何名目也戈矛所以殲胡也吾東礪戈矛於黨同伐異籌策所以制敵也吾東運籌策於妨功害能忠言深謀未爲賢以其不出吾黨也戕民病國未爲罪以其出吾黨也恒物之情合則强分則弱今國論之四分五裂如此不待玁狁之匪茹而中國已疲於兵革矣況元氣旣虛則外邪之橫侵亦次第事是以東西歧而海寇至羣北關而朔警急豫則立不豫則廢倉卒事急管葛束手徒使忠信義士無罪之元元肝腦塗壄草神州邱墟王夷甫諸人安得辭其責乎嗚呼巨奸奰慝不常有發言盈庭者固嘗業文章通古今初心豈遽以誤國自期豈不知同我者未必皆君子異我者未必皆小人豈不知民國安則身家亦安不安則反是靡哲不愚載胥及溺其病根安在可謂咄咄怪事矣布衣山野旣不得參涉國論傷時愍俗蓄積有素丁酉之變唱徒奮挺設機乘便猶足以屢碎敵首其不克大有所伸非氣義不足而然也嗣是以往時事日非憂憤激烈控訴靡階乃述此錄起宣祖壬午

仁廟辛巳六十年間天灾物妖朝象民風亂中文移尺檄以及邊外機事具蒐並畜其有疏漏處聞見之未周非故欲畧之也公之腔血盡此矣正鎭弱冠歲閱吳忠烈遺藁有後錄一段語出趙山西帶方記聞始知有此書而未之見後三十年蒙山西後孫趙君炳惠示以半部今又獲全帙焉夙願始快愜矣弁卷吾豈敢趙君先大人誤以書見托君又申前請噫兩世矣何忍辭君勉乎哉千載在後與我同情是書之傳必有掩卷而累欷者矣

崇禎四丙辰陽復日幸州奇正鎭謹書

 

난중잡록 서

산서잡록(山西雜錄)은 고 진사 선술(善述) 조경남(趙慶男) 공이 지은 것인데 산서는 그의 호다. 그의 선세는 한양(漢陽) 사람으로 판중추를 지낸 조혜(趙惠)의 후손이고, 호조 판서를 지낸 조숭진(趙崇進)의 현손이다. 그의 선고(先考)인 사직(司直)을 지낸 조벽(趙璧)은 남원 양씨(梁氏)와 혼인하였고, 그래서 남원부 동녘에 있는 원천리(元川里)에서 살았는데, 융경(隆慶) 경오년(선조 3, 1570)에 공을 낳았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겨우 말을 배울 수 있게 되자, 이미,

꽃은 난간 앞에서 웃고 / 花笑檻前
달은 하늘 복판에 다다랐다 / 月到天心

등의 싯구를 외었다. 사직은 그가 유달리 재주 있는 것을 기뻐하여 매우 귀여워했다. 을해년(선조 8, 1575)에 사직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유모의 등에서 서러워하여 못 견디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했다. 일곱 살에 처음 공부를 시작했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고는 했다. 기묘년(선조 121579) 가을에 상사(上舍) 유인옥(柳仁沃)에게 가서 배우면서 비로소 글을 짓게 되었는데 써낸 말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상사가 대단히 칭찬해 주었다. 글을 읽는 여가에 나무를 휘어서 활을 만들고 싸리를 잘라서 화살을 만들어서 나갔다 물러났다 껑충껑충 뛰었다 하는 활쏘는 법이 퍽 좋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데 있어서도 운치가 극히 청초하여 어른들이 감탄하고 다들 선대의 유풍이 있다고 칭찬했다. 임오년(선조15, 1582)에 공의 나이 13세였는데, 세 해가 함께 솟고 쌍무지개가 세 해를 포개서 꿰뚫은 것을 보고는 세상이 대단히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당시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잡록의 저술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계미년(선조 161583)에 양 부인이 세상을 떠나 공이 부모를 다 잃으니, 외할머니 허씨(許氏)가 다른 자녀가 없어 이때부터 할머니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살게 되었다. 정해년(선조 20, 1587)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찿아가 뵙고 도덕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임진년(선조 25, 1592)에 왜적이 창궐해서 나랏일이 형편없이 되자, 공은 자기가 완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것을 믿는지라 의병의 격문이 오면 번번이 떨치고 일어나 먼저 나설 뜻을 가졌으나, 외할머니가 연로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데다 또 이질을 앓는 일을 생각하여 딱 끊고 가버리기가 어려워 의분을 참고서 그만두었다. 행조(行朝 행궁(行宮)과 같은 뜻으로 임금이 파천해 있는 곳)로부터 스스로 죄책하는 교서가 내리기에 이르러서는 공이 그 교서를 보고 대성 통곡하며 말하기를, “신민(臣民)된 자가 이 교서를 보고도 통곡하지 않는다면 인정이 없는 자다.” 하고, 시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정유년(선조 30, 1597) 봄에, 무용(武勇)으로 뽑혀서 군문찬획(軍文贊畫)이 되었으나 마침내는 외할머니의 사정 때문에 사퇴하고 돌아와 노인을 업고 지리산 속으로 피난했다. 매일같이 왜적을 만나서는 힘을 내어 쳐서 쫓으니 산을 뒤지던 왜적들은 감히 항거하지 못했고, 도적질하는 무리들도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굴지 못했다. 공을 따라다니는 자들이 3백여 명이었는데 하나도 다치거나 없어지지 않았고, 산골짜기에 피해 와 있는 자들도 다 공의 덕으로 온전히 살게 되었다. 그리고는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여러 차례 특출한 공훈을 세웠다. 불우(佛隅)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 궁장(弓藏)에서 모조리 무찌른 싸움, 산골에서 한밤에 공격한 것, 하동(河東)에서 추격하여 적을 벤 것, 죽전(竹田)에서의 기묘한 계략, 숯굴[炭窖]에서의 급박한 추격, 산음(山陰)에서의 화공(火攻), 해현(蟹峴)에서 포위를 뚫은 것 등은 다 그의 전공 중에 뚜렷이 나타난 것들이다. 복수장(復讐將) 정이길(鄭以吉)이 원수(元帥)에게 보고하기를, “조경남은 일개 서생으로 의사들을 모아서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서하고 여러 차례 왜적을 섬멸하였으니, 나라를 위한 그의 정성에 대하여 마땅히 빨리 포상을 내리도록 장계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신하된 의리로서 임금을 위해 왜적을 토벌하여 자기의 분을 풀 따름이지, 적을 목 베어 바쳐 포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산과 들을 전전하여 싸워 전후로 왜적을 목 벤 것이 몇 백이나 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종내 일자반급(一資半級)의 상도 없었으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한 것이 이러했다. 무술년(선조 31, 1598)에 외할머니 허씨의 상을 당하여 복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본도(本道)의 병사(兵使) 이광악(李光岳)이 글을 보내 그를 막하로 부르므로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종군하게 되었다. 왜교(倭橋)의 전투에서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선봉이 되어 힘을 다해 왜적을 쏘았는데 쏜 화살 치고 명중하지 않은 게 없어 명장(明將) 이유(李兪)가 그를 무척 가상히 여겼다. 부총(副總) 이방춘(李芳春)이 승전이 더디어짐을 근심해서 시를 써서 이 장군에게 보내자 이 장군은 공을 시켜 그 시에 화작하게 하여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 공은 이 싸움에서 나라의 수치를 씻어 자기의 소원을 이룩하기를 바랐으나 하늘은 순(()의 반대)을 돕지 않아 대군은 물러서고 왜적 역시 바다를 건너가버려 마침내 큰 뜻을 이룩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이광(李廣)의 기구한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경자년(선조 33, 1600)에 사나운 호랑이가 호령(湖嶺)의 접경을 횡행하며 수백 명의 사람을 물어 죽여서 대낮에 큰 길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자, 이 때문에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은 체포되어 심문받기에 이르렀고 신임 방어사 이사명(李思命)이 또 그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공이 계략을 내어 쇠뇌틀을 안 보이게 설치해 놓았더니, 호랑이가 과연 쇠뇌에 맞고 달아나서 집 남쪽 산숲으로 들어가 벼랑을 등에 지고 으르렁대는 것이었다. 공은 팔뚝을 걷어부치고 곧장 앞으로 나가 활을 쏘아 관통시켜서 호랑이가 비틀거리다가 죽어 넘어지자, 곧 끌어다가 방어사에게 보내주었다. 방어사가 대단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왜란 때는 나라를 위해 왜적을 섬멸했고, 올해의 호랑이 재앙에는 사람들을 위해 해를 제거했으니 진실로 충의롭고 유공(有功)한 인물이다.” 하고는 그에게 푸짐한 상을 주었으나, 공이 그것을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호랑이 한 마리를 사살한 데 상이 다 뭡니까. 만약 상을 베풀고 싶으시다면 한 면()의 전결(田結)에 대한 가수(加數 농지에 부과한 과세)를 감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방어사가 말하기를, “그것은 방어사가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못 되오.” 하고는 10()을 감해 주고 그 상까지 내려주었다. 임인년(선조 53, 1602)에 공의 나이가 서른셋이었는데, “인생 백 년의 3분의 1이 지나갔다.”라는 싯구가 있으니, 이것은 공명은 늦어지고 세월은 흘러감을 개탄한 것이다. 무신년(선조 41, 1608)에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이 본부 판관이 되어 호곡(虎谷)으로 공을 찾아가 천사대(天使臺)에 앉아 있었는데 유 상사(柳上舍) 등 여러 사람이 다 모여 있었다. 술이 들어오기 전에 큰 노루가 장법산(長法山)에서 논으로 내려오니 학성군이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조형은 늙었다. 만약에 이 노루를 잡는다면 소 동파(蘇東坡)가 적벽(赤壁) 놀이에서 노어(鱸魚)를 얻은 것에 대신은 갈 건데.” 하니, 공이 곧 나장곤(羅將棍 죄인을 문초할 때 때리는 데 쓰는 몽둥이)을 집어들고 대에서 내려가 찾아서 쫓아갔는데 5, 60보도 안 가서 노루가 손아귀에 들어와 산 채로 대 위에 올려보냈다. 학성군은 대단히 기뻐하고 공이 노쇠하지 않은 것을 치하했다. 부사(府使) 성안의(成安義) 공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가 문장의 거벽(巨擘)인 줄만 알았지 짐승을 쫓아가서 잡을 만한 이런 용맹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제의 노루는 문만호(文萬戶)의 호랑이 정도가 아니다.” 하였다. 기유년(광해군 11609)에 향시의 두장[鄕試兩場]에 합격됐으나 예부(禮部)에서 꺾었다. 정사년(광해군 91617)에 또 세 장에 통과했다. 그때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이 나랏일을 맡고 있었는데 공은 정치가 어지럽고 윤리가 없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과거 보는 일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 앉아서 자기 서재에 주몽당(晝夢堂)’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오직 책만을 낙으로 삼고 살았다. 계해년(인조 1, 1623)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사림(士林) 중에 깊이 숨고 나타나지 않던 자들이 다 갓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彈冠 벼슬하러 나오는 것] 나왔다. 공도 과거에 응시하여 갑자년(인조 2, 1624)에 진사시에 뽑혔다. 이때부터 그는 오막살이 속에 자취를 감추고 세상에 나설 생각을 끊었으며, 마침내는 방장산(方丈山) 서쪽 용추동(龍湫洞) 속에 별장을 짓고서 유유자적하게 지냈고, ‘산서병옹(山西病翁)’이라 자칭했다. 슬프다! 공은 영특한 자질로 충효 강개한 절개를 지니어 임진왜란 때에는 나라를 근심하고 왜적에 분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렸으나, 다만 외할머니의 세상 떠날 날이 멀지 않아서 나라에 몸을 바치지를 못했지마는 그러면서도 충의심을 발휘하여 왜적을 죽였으니 그가 평소에 간직했던 뜻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충민(李忠愍)이 통제사(統制使)로 큰 공을 세우고는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공은 시를 지어 애도했다. 병자년부터 정축년간의 호란(胡亂 1636~1637) 때는 노환이 이미 심해서 국난에 달려갈 희망이 끊어지매 한갓 충의와 의분이 간절했을 뿐이었다. 삼학사(三學士)가 심양(瀋陽)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개하여 시를 짓기를, “시시(柴市)에서 자신을 희생한 문 승상(文丞相)이요, 연경(燕京)에서 굶어 죽은 사 신천(謝信川)이다.” 하였으니, 그의 충의의 기개는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음을 또 알 수 있다. 13살에 태양의 변괴를 우러러 보고는 그 시대가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자기의 보고 들은 것에 따라 이러한 집성(集成)을 내놓았으니, 어린 나이에 앞일을 알았다는 것은 더욱 기발하다. 임오년(선조 15, 1582)부터 시작하여 무인년(인조 16, 1638)에 끝나는 57년간의 일을 가지고 큰 책 8()을 저서하여 산서잡록(山西雜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정의 변고, 민생의 희비, 시운의 성쇠, 세도의 오융(汚隆)에 관한 것은 빠짐없이 실었고, 선악과 역순을 가리는 데 엄격했으며, 충신과 절사(節士)의 사적에 관해서는 더욱 충실하게 다뤄서 선한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고, 악한 자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였으니 이 책은 실로 쇠세의 한 귀감으로 세도에 관계되는 바가 크다. 공은 명문의 후예로 남쪽 시골에 밀려 내려와서 불행하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는데도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 문장은 세상에 알려지고, 지혜와 용맹은 당시에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주와 운수가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지닌 채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말 애석하다. ! 공은 비록 생전에는 불우했으나 다만 이 한 책은 후세에 전해질 수 있으니 불후(不朽)의 작이라 해도 좋다.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지난 갑자년(인조 2, 1624)에 공이 진사시에 급제하고 집에 돌아오자, 내 선친 판서공(判書公)이 당시 장령(掌令)으로 축하연에 초청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공의 손자 선() 군이 그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책의 보람을 나타내는 글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금년에 81세로서 노환으로 들어 앉아있는 터라 글을 쓸 생각은 없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감회를 누를 길 없어 감히 늙고 졸렬하다는 이유로 그의 생각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의 자서(自敍)를 가지고 거기에다 약간의 산정(刪定)을 가하고 중간에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덧붙여 한 편의 글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치인들의 잘잘못과 사세의 완급에 대해서는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으레 알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시 늘어놓지 않는다.

숭정 기원 39년 병오년(현종 7, 1666) 음력 9월 국화 피는 가을에 삭녕인(朔寧人) 최시옹(崔是翁)이 삼가 서문을 쓴다.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亂中雜錄序

山西雜錄者故進士趙公慶男善述之所作山西其號也其先漢陽人判中樞惠之後戶曹判書崇進之玄孫也其考司直璧娶于南原梁氏因居于府東元川里以隆慶庚午生天賦穎悟纔能學語已誦花笑檻前月到天心等句司直喜其奇俊撫愛特甚乙亥司直歿公在姆背悲不自勝見者爲之感動七歲始入學一聞輒誦己卯秋就傅于柳上舍仁沃始有製述而語輒驚人上舍大加奬許讀書之暇揉木爲弓翦杻爲箭進退踊躍射法工妙詠歌舞蹈體韻淸絶父老噓唏咸稱有先世風壬午公年十三見三陽幷出雙虹疊貫知世大亂乃記時事雜錄之修自此始癸未梁夫人歿奄矢怙恃而外祖母許氏無他子女自是祖孫二人更相爲命丁亥往謁于重峯趙先生得聞道德之諷壬辰島夷猖蹶國事罔極公恃其有膂力善騎射義檄之來輒有奮裾先登之志旋念祖母年老無依而且病痢難於絶裾而行乃含忍而止及自行朝有罪己之敎見而大慟曰爲臣民者見此敎而不慟哭則無人心者也作詩以見志丁酉春以勇武被選爲軍門贊畫終以祖母情勢辭歸負老避兵于智異山中日日遇賊奮身擊逐搜山諸賊莫敢相抗偸攘之徒亦畏而不敢恣行從公者三百餘人無一傷缺山谷避竄之人皆賴而全活乃與同志聚衆討賊累立奇勳佛隅之全勝。▦▦之鏖戰山洞之夜斫河東之追斬竹田之奇計炭窖之迫逐山陰之火攻蟹峴之突圍皆是戰功之表著者也復讎將鄭以吉報於元帥曰趙慶男以一書生募聚義士誓以同死累次殲賊爲國之誠宜速褒啓云而公以爲臣子之義爲君父討賊以洩其憤而已不可以獻鹹要功雖轉鬪山野前後斬伐不知其累百數而終無一資半級之賞其恥於自衒如此戊戌遭許祖母喪服未闋本道兵使李光岳署致幕下義不敢辭遂負羽轅門倭橋之戰爲劉都督綎前鋒竭力射賊發無不中天將李兪甚嘉之副總李芳春憂捷遲題詩送李帥李帥使公和之大得其稱賞焉嗚呼公於是役庶幾雪國恥成己願而天不助順大軍左次賊亦渡海竟未遂大志其亦李廣之數奇歟庚子有惡虎橫行湖嶺界咬殺人數百餘白晝大道人不得任意行防禦使元愼至被拿鞠新防禦李思命又欲措捕而不敢發公出方略設潛機虎果中弩走入家南山藪負隅咆哮奮臂直前射而貫之虎躑躅而斃卽曳致防禦大喜曰昔日倭亂爲國殲賊今年虎患爲人除害誠忠義有功之人也乃重賞之辭曰射殺一虎何賞之有如欲施賞願減一面田結之加數以惠衆人防禦曰此非防禦所可擅便乃減十石幷其賞賜之壬寅公年三十三有百歲三分己一分之句蓋歎其功名晼晩而日月流邁也戊申鶴城君金完爲本府判官訪公于虎谷坐於天使臺柳上舍諸人皆會酒未進有大獐自長法山下于稻田鶴城曰可惜趙兄老矣若獲此獐可代蘇仙之赤壁得魚卽把羅將棍下臺搜逐不及五六十步獐入掌握生致臺上鶴城大喜賀其不衰府伯成令公安義歎曰吾以某只謂文章巨擘豈料其有此逐獸之勇昨日之獐不啻文萬戶之虎也己酉中鄕解兩場屈於禮部丁巳又貫三場時李許當國見其政亂倫喪遂廢擧杜門扁其堂曰晝夢惟以書籍自娛癸亥天佑大東仁祖改玉士林之深藏不市者皆彈冠而出公亦應擧登甲子進士自是屛跡衡門絶意世事遂築別業於方丈山西龍湫洞裡徜徉逍遙自稱山西病翁公以英拔嵬偉之資有忠孝慷慨之節龍蛇之變憂國憤賊扼腕流涕只以祖母日迫西山不得許身於國而猶能奮義殺賊其所素蓄積槩可想矣李忠愍以統制立大功而中丸卒公詩以悼之逮至丙丁則衰病已甚望斷赴難而徒切忠憤聞三學士殉節瀋中感慨作詩曰殺身柴市文承相餓死燕京謝信州其忠義之氣老而不衰者又可見矣在舞勺之年仰觀日變逆知時亂隨其見聞有此集成童年先見尤可奇也自壬午止于戊寅乃以五十七年間事爲巨編八帙之書名曰山西雜錄其於朝廷之事變民生之休戚時運之盛衰世道之汚隆無不備載而嚴於淑慝逆順之分尤惓惓於忠臣節士之跡能使善者有所勸惡者有所懼實是衰世之一龜鑑也有關於世道者亦大矣公以名家遺裔流落南鄕不幸早孤而乃能自奮力學文章足以鳴於世智勇足以顯於時而才命不謀齎志以歿良可惜也嗚呼公雖不遇於當時惟玆一書可以有傳於後世雖謂之不朽可也記昔甲子歲公之折蓮而到門也吾先子判書公時以掌令見邀於慶席今公所抱秀才愃甫袖其書來示余求所以發輝者余今年八十有一衰病杜門無意於翰墨而念及疇曩不勝感懷不敢以老拙孤其意乃取公自敍略加删定間附所傳聞於前輩者以爲一通而至其當日人謀之臧否事勢之緩急觀此集者自可以知之今不復覼縷焉

崇禎紀元三十九年丙午菊秋朔寧崔是翁謹序

 

난중잡록 자서(自序)

오랑캐의 난은 어느 시대에도 다 있었다. 주 선왕(周宣王) 때에는 험윤(玁狁 옛 종족으로 흉노의 옛 이름)이 심히 기승을 부렸고, 또 한 고조(漢高祖) 때에는 묵특[冒頓]이 횡행하였으니, 6월에 출병시킨 일이라든지 후한 뇌물을 보내준 계략 따위는 본래 부득이한 일들이었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아무런 대비도 없을 때에 일어나서 먼저 상주(相州)에 견줄 요충지의 군사가 궤멸했고 또 장강(長江)과도 같은 험새(險塞)를 잃어버려, 임금은 파천(播遷)하기에 이르렀고 종묘 사직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8도는 함락되고 만백성은 짓밟혀 우리 국가의 당당하게 빛나는 왕업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민심은 한실(漢室)에 기울 듯 조국을 생각했고, 하늘의 뜻은 주() 나라에 돌아가듯 명 나라에 쏠려 관군이 패전하였지만 의병이 일어났고, 우리 군대가 패퇴하였으나 명군(明軍)이 왔다. 그리하여 비로소 토벌을 벌인 끝에 왜적을 국경 밖으로 몰아 내어 국토를 다시 회복하였고 파천했던 임금도 환도했으니, ()의 출병이야말로 그 은혜가 막중하다. 그러나 천심(天心) 이 돌아서지 않으매 화근이 제거되지 않았으니, 적은 3면을 점거하고서 강화를 요구하여 온 것이었다. 황제의 도량이 관대하여 전쟁을 그만두고, 왕을 봉해 주기를 의논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휴식을 바랐다. 그리하여 멀리 사신을 보냈으니 이것은 후한 뇌물을 보내 준 옛 계략과 같은 것으로, 그 은덕 또한 높다 하겠다. 그런데 저 짐승과 같은 왜적들이 은덕을 저버리고 하늘을 깔보며 해[]를 욕하여 관군을 도륙하고 침략을 자행하자, 황제의 위엄은 다시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고래[]떼 같은 왜적의 무리가 사라지고서야 변경의 전진(戰塵)이 깨끗이 맑아지고 사방이 편안하여졌으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이보다 더 클 데가 어디 있겠는가. ! 국운이 막혀 재화와 난이 연달아 일어나 7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되었고, 황제의 군사가 세 차례나 출동하였다. 싸우고 수비하기에 편할 날이 없었고 이기고 패하고 할 적마다 기쁘고 비통하였던 일은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때를 잘못 타고나서 이러한 난리를 만나고도 임금을 위해 죽지 못했으니, 신하되고 백성된 도리에 죄책을 면할 길이 없어 한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한갓 혼자서 눈물을 닦을 따름이다. ! 비록 나랏일에 힘을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은 늘 왕실에 있어서,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춤을 추면서 그 일을 기록했고 아군이 패전한 것을 보면 분함에 떨면서 그 일을 쓰고는 했으며, 애통한 말로 효유(曉諭)하는 교서(敎書)라든가 이첩(移牒)ㆍ공문ㆍ격서(檄書)에 이르기까지 본 일과 들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얻는 족족 기록하고, 간간이 나 개인의 의견을 넣어 연결시켜 글을 만들었다. 이 글이 후일 지사(志士)들의 격절탄상(擊節歎賞)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충신 열사의 사적과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잊은 자의 죄상이 여기에 누락되지 않았다면 직책 밖의 외람된 일이라는 책망을 나는 달게 받겠다. ! 한 가닥 천성이 매우 강개하여,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책망을 당할 것인데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임오년(선조 15, 1582) 왜란이 싹튼 초기부터 비롯하여, 경술년(광해군 2, 1610)에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무렵까지 끝냈는데, 내가 정유년(선조 30, 1597)에 피난하고 왜적을 토벌한 일을 그 다음에 다 엮어 넣어 나눠서 네 편으로 만들고 난중잡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궁벽한 시골이라 견문이 고루하여 사실과 어긋난 기사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그 가운데는 또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뜻도 많이 들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잠을 안 자고 심심풀이로 읽는 데 그칠 뿐이랴.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 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오직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외람되나마 후세의 군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만력(萬曆) 무오년(광해군 10, 1618) 가을 716.

한양인(漢陽人) 조경남(趙慶男)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亂中雜錄自序]

外夷之患何代無之周宣之世玁狁孔熾漢高之世冒頓橫行六月之師厚遺之計固不得已也今者海賊之變出於恬嬉之時先潰相州之師又失長江之險君父至於播越宗社盡爲灰燼八道淪陷萬姓魚肉我國家堂堂赫業殆乎不忍言矣何幸人心思漢天意歸周官軍敗而義旅起我師退而天兵至始行薄伐驅賊出境彊場重恢蜀駕還都六月之師恩莫重焉天心不悔禍根未除賊據三邊控辭乞和天度包容罷戰議封冀我寧息遠遣行人厚遺之計德亦隆矣羯狗孤恩嫚天辱日屠戮官兵敢肆荐食天威再震鯨鯢崩退邊塵掃淸四境晏然不幸之幸孰大於是嗚呼國運迍蹇禍亂連仍七歲兵戈六師三出載戰載守靡寧靡安或勝或敗可喜可痛者誠不可以一言盡矣我生不辰逢此亂離未死王事爲臣爲民咎責何歸扼腕中霄徒自抆淚而已嗚呼雖不能效力於國事乃心罔不在王室聞戰勝則蹈舞而記之見軍敗則奮憤而書之以至哀痛曉諭之敎移檄傳通之文所見之事所聞之實莫不隨得隨錄間以余私意連接成文冀爲他日志士擊節之資而忠臣烈士之事負國忘君之狀有或不漏於此則出位之責余何辭焉一端天性慷慨弸充知其非而未能止受其辜而不自抑起自壬午亂萌之始終於庚戌甫定之初余之丁酉避兵討賊之事雜編於其次折爲四篇名之曰亂中雜錄僻村窮巷孤陋寡聞不無謬聽失實之記其間亦多勸懲感動之意此豈但一時罷眠而已也哉吾夫子有言曰知我者其惟春秋乎罪我者其惟春秋乎余以是竊有望於後來之君子

萬曆戊午秋七月旣望漢陽趙慶男敍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1임오년 만력(萬曆) 10, 선조(宣祖) 15(1582)
2계미년 만력 11, 선조 16(1583)
3갑신년 만력 12, 선조 17(1584)
4병술년 만력 14, 선조 19(1586)
5정해년 만력 15, 선조 20(1587)
6무자년 만력 16년 선조 21(1588)
7기축년 만력 17, 선조 22(1589)
8경인년 만력 18, 선조 23(1590)
9신묘년 만력 19, 선조 24(1591)
10임진년 상 만력 20, 선조 25(1592)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1임진년 하 만력 20, 선조 25(1592)
2계사년 상 만력 21, 선조 26(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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