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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와 전주이씨 혼맥도(선원중심)◑
■조선 제 1대 태조대왕의 조부 - 도조(度祖)■
도조(度祖)[ ? ~ 1342]
태조의 조부. 이름은 춘(椿). 초명은 선래(善來). 몽고식 이름은 발안첩목아.
천호(千戶) 행리(行里)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등주최씨(登州崔氏)로 호장(戶長) 기열(基烈)의 딸이다.
1394년(태조 3)4대조를 추존할 때 도왕(度王)이라 하였다가 2년 뒤에 다시 도조로 격상하였다. 원나라로부터 아버지의 천호관직을 계승하고 아울러 발안첩목아라는 몽고식 이름을 받았다.
처음에 박씨와 결혼하여 자흥(子興){몽골식 이름은 탑사불화(塔思不花)}와 자춘(子春)을 낳았다. 박씨가 죽자 쌍성총관(雙城摠管)의 딸 조씨(趙氏)와 재혼하였으며, 곧 의주(宜州)에서 화주(和州)로 옮겼다.
그가 이때 화주(지금의 함흥평야)로 옮긴 것은 농업과 목축에 편리한 점도 있었지만, 후처 조씨가 조휘(趙暉)의 손녀이었으므로 처가의 정치적 세력을 이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후계자쟁탈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1334년(충숙왕 복위 3)부터 풍질(風疾)을 앓게 되어 전처 소생인 자흥을 계승시키려 하였으나 후처인 조씨는 그녀의 맏아들인 완자불화(完者不花)로 계승하기를 원하였다.
그해에 원나라에서는 중서성차관(中書省差官)으로 하여금 행리를 따라온 오동(斡東)의 백성을 뽑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원류이민(原流移民)을 분리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원나라의 책동 배후에는 후처인 조씨가 개입되어 있었다.
이춘이 죽자 자흥이 습직하였으나 2개월 뒤에 죽으니 이로 인하여 후계자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흥의 아들 교주(咬住)가 어렸으므로 자흥의 이복동생 나해(那海:그의 동복형 완자불화는 이때 사망한듯함.)가 야심을 품고 모계인 조총관의 세력을 배경으로 관직을 세습하려 함으로써 교주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결과 전처 소생과 후처 소생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춘의 전처 박씨는 오동백호(斡東百戶) 박광(朴光)의 딸이고 자흥의 처인 교주의 어머니도 박씨였으므로 결국 남방 유이민의 후예인 박씨세력과 조씨세력의 대결이 되었다. 이들의 대결은 상중에 원나라에서 직첩으로 내린 선명(宣命)과 인신(印信)을 나해가 훔쳐감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이에 이자춘은 형수 박씨에게 교주를 데리고 개원로(開元路)에 가서 호소하게 하였다. 결국 원나라에서 조씨는 적실이 아니므로 조씨 소생은 세습할 수 없고, 교주는 유약하므로 그가 장성할 때까지 그의 숙부 자춘이 습직할 것을 명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박씨세력을 옹호한 것은 쌍성총관인 조씨의 독점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꺼린 때문이다.
능은 의릉(義陵)으로 함흥 동쪽 운전사 주변에 마련되었다.
*부인
`경순왕후 박씨 敬順王后 朴氏 [ ? ~ ?]
본관은 문주(文州). 원나라에서 천호벼슬을 받고 조선조 때 문하시중에 증직된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흥 동쪽 동명사 근처에 마련되었다.
소생으로는 완창대군 자흥(子興), 환조(桓祖), 완원대군, 완천대군, 완성대군이 있다.
▣한양조씨(趙氏)▣
쌍성총관 조양기의 딸. 소생은 2남 3녀로 완자불화(完者不花)와 나해(那海), 문혜공주(文惠公主)와 문숙공주(文淑公主)와 문의공주(文懿公主)가 있다. 장녀 문혜공주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고, 차녀 문숙공주는 다루카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으며, 삼녀 문의공주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조선 제 1대 태조대왕의 아버지 - 환조(桓祖)■
환조(桓祖)[1315 ∼ 1360]
태조의 아버지. 이름은 자춘(子春). 몽고식 이름은 오로사불화이다.
도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알동백호(斡東百戶) 박광(朴光)의 딸이다.
1394년(태조 3) 태조의 4대조를 추존할 때 환왕(桓王), 태종 때 다시 환조로 추존하였다. 조카 교주(咬住)가 장성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형의 천호(千戶) 관직을 습직하였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독자적인 체제를 굳혔다.
그는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세력(附元勢力)인 조씨(趙氏:이복동생의 外家)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습직하였으나, 그뒤 원나라의 정책에 의하여 타격을 받게됨에 따라 점차 원나라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이른바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라 하여 중서성(中書省)·요양성(遼陽省)·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분간하여 호적을 작성하려 하였는데, 이것은 원주민을 우대하고 이주자를 쇄환(刷還)하려는 저의를 가진 것이었다. 이는 이주민을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대륙에서 원명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동북면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연결되어 있는 친원 기씨세력(奇氏勢力)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그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대로 구축하여온 세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1355년(공민왕 4) 그가 공민왕을 찾아 내부(來附)할 뜻을 비치자, 공민왕은 그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이듬해 유인우(柳仁雨)와 더불어 동북면을 협공하게 하여 쉽게 이 지역을 점령,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로써 그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가세하여 뿌리깊게 대립하였던 조씨세력을 제거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의 전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이 하사되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개경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그가 동북면에 돌아가면 그곳의 토착기반을 이용하여 배반할 것임을 들어 조신들이 반대하였으나,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하여 다시 영흥으로 돌아왔다. 그뒤 동북면에 돌아온 지 4년 만에 병사함으로써 당초 조신들의 염려는 기우로 끝났다.
죽은 뒤 그의 아들 이성계는 통의대부 금오위상장군 동북면상만호(通議大夫金吾衛上將軍東北面上萬戶)가 되어 약관으로 정3품의 중앙무관직과 선조의 기반인 상만호의 두가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이성계가 동북면의 토착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세력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다.
*부인
` 의혜왕후 최씨 懿惠王后 崔氏[ ? ~ ? ]
본관은 영흥(永興). 처음 성은 조씨(趙氏)로 선수천호(宣授千戶) 조(祚)의 딸이다.
본래 중국 등주(登州)사람으로 함경도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돈을 많이 모아 큰 부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남다른 데가 많았으며, 가년이 되자 부모가 김린(金麟)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녀가 말을 듣지 아니하자 가재(家財)를 반으로 나누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 슬피 울면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 인연이 있는데 어찌 뜻밖에 김린의 아들에게 시집갈 수 있겠는가. 배필이 곧 이를 것이다.”라고 거절하였다.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桓祖:子春)가 볼일이 있어 조조의 집에 갔는데, 그때 그녀가 용 두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한마리는 뱃속으로 들어가고 한마리는 뜰에 서 있는 좋은 꿈을 꾸자 자춘에게 청혼을 하여 그에게 시집갔다.
아버지 조조는 그 복을 완전하게 받고자 성을 바꾸어 외가의 성인 최씨로 하고 이름도 그가 자(字)로 쓰던 한기(漢奇)로 고쳤다고 한다. 그녀는 회임한 지 14개월 만에 이성계(李成桂)를 낳았다.
그녀의 생존시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여졌고, 조선이 개국되어 태조가 즉위하자 의비(懿妃)로 봉하여졌다. 뒤에 태종이 의혜왕후로 추봉하고 능을 화릉(和陵)이라 하였다.
1471년(성종 2) 영령전(永寧殿)에 이안하였고, 1795년(정조 19) 영흥본궁(永興本宮)에 추제(追#제53)하였다. 슬하에 2남(태조 이성계와 永城大君 天桂) 1녀(貞和公主)를 두었다.
` 이씨
한산 이씨. 이름은 내은장. 자춘의 여종.
소생으로는 자춘의 서장자 이원계가 있다.
` 김씨[ ? ~ 1404]
이름은 고음가. 자춘의 여종.
후에 정안옹주(定安翁主)에 봉해지고, 다시 정빈으로 추증되었다. 소생으로는 의안대군 화가 있다.
*자녀
<적장녀> 정화공주(貞和公主)[ ? ~ ? ] - 의혜왕후 소생
태조의 유일한 동복 남매로 의정부 찬성사를 지낸 조인벽에게 시집갔다.
<서장자> 이원계(李元桂)[ 1330 ~ 1388] - 이씨(내은장) 소생
공민왕 때에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여 공을 세우고 2등공신에 책록되었는데, 특히 2차침입 때는 조천주(趙天柱) 등과 함께 안우(安祐)의 휘하에 종군하여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76년(우왕 2) 원제(元帝)가 고려국왕으로 임명한 심왕탈탈불화(瀋王脫脫不花)가 입국한다는 보고에 따라 국경방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同知密直)이었던 그는 원수가 되어 서북방어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어 이듬해에는 나세(羅世)의 휘하로 종군, 강화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1380년에 왜구가 또다시 광주와 능성·화순 두 현(縣)을 침범하자 최공철(崔公哲)과 함께 전라도 방어의 임무를 맡았다. 그해 황산싸움에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88년 요동정벌 때에는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서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여 1390년(공양왕 2) 회군공신에 책록되었다. 전장을 함께 누볐기에 이성계와 우애가 돈독했고, 이성계는 그의 어머니 이씨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없앴다.
처음에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고 오랑캐 토벌과 왜구 토벌의 혁혁한 전공으로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에 올랐다. 태조 즉위 후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이란 시호를 내렸다. 1872년(고종 9)에는 완풍대군 겸 영종정경으로 추증되고, 자손들은 4세봉군(四世封君) 겸 종정경으로 증직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태조의 옹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대대로 은혜를 입어 온 고려왕조를 모반할 수도 없고, 한편 형제로서의 효우를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고려 충신이었던 원계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켜 1388년 10월 23일 음독 자결하였다.
첫번째 부인은 남평 문씨 익점의 딸로 아들 완원부원군 · 완산부원군과 딸 1명을 두었다. 두번째 부인은 경주 김씨 찬성사 김용의 딸로 아들 완남군 · 완녕군와 딸 2명을 두었다.
<서2남> 이화(李和)[1348 ∼1408]
조선왕조 개국 1등공신. 호는 이요정(二樂亭).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회군공신에 봉해지고,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해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의안군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서훈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왕자의 난에 다시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에 서훈되었다. 그는 전후 4차에 걸쳐 공신에 피봉되고, 도합 570결(結)의 공신전을 받아 조선 초기 공신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1401년(태종 1) 조선 개국 후 최초로 의안공은 의안대군(義安大君)으로 진봉되었다. 1407년(태종 7) 7월에 영의정부사로 임명되자,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형제를 청죄(請罪)하는 상소를 하여 무구 형제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기공친(朞功親)·대공친(大功親)이상의 종친은 사환(仕宦)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지친으로서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영의정부사라는 최고 관직에 임명된 것은, 태종 때 태조의 직계가 아닌 왕족은 왕위계승의 권외로 밀려나는 대신, 그들을 일반문무관처럼 사진(仕進)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 태조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시호는 양소(襄昭)이다.
소생으로는 지숭, 숙, 징, 담, 교, 회, 점 등 7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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