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공파 절효공파종회 임원들에게 1년전 부조묘 제향후에 계속 카톡로 보내 "파인실기"에 사진 및 추모비명이 없어 올렸으면 하였고 그 생각으로 보냈더니 1년동안 아무말도 없다가 1주전에 갔다왔나 봅니다. 12.10.토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기획인물재조명6]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 조명묘소 천안하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조 충신 조명(趙銘)이라는 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조명에 대해 재 조명해 보자. 조선조 세조(世祖)가 된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유 字는 粹之)는 권력에 눈이 멀어 나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을 권좌에서 내치고 그도 모자라 사약(死藥)을 먹여 죽였다. 이 때 이 일을 주도한 간신배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많은 충신(忠臣)들이 분연이 일어나 단종 복위에 목숨을 내놓았다. 조명의 부친인 순생(順生)이 이에 연루 됐다 하여 전라도 고성으로, 그의 아들인 명은 금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조명(?~1478) 관향은 한양(貫鄕 漢陽)이며, 자는 경부(字 警夫), 호는 인촌(號 仁村)이다. 부인은 회덕황씨(懷德黃氏)이다. 태조 이성계 묘정(太祖 李成桂 廟廷)에 배향된 개국공신 인옥(開國功臣 仁沃)의 증손이다. 지 돈녕부사(知敦寧府事) 뇌(?)의 손자이고 이조참판(吏曹參判)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원주 원씨(原州元氏)로 사정을 지낸 유용(有容)의 따님이다. 명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16세의 어린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문과에 급제해서 병조정랑이 있었던 1453년(단종 원년)에 한명회 일당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아버지 순생과 함께 죄를 물어 금산에 관로로 유배 됐다. 순생은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단종을 지키려다 전라도 고성으로 유배됐고 그도 모자라 사약을 먹고 죽었다. 안평대군 용(瑢)에게 아부해 매일 왕래하면서 한명회 일당이 세운 새로운 왕조 세조에게 역도의 죄를 지었다 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손들은 죄를 물어 귀향, 아녀자들은 재상가의 노비로 삼았다. 세조의 실록엔 조순생의 부인 원주 원씨는 처음에 전 부사직 이몽가(府使直 李蒙哥)의 노비로 보냈다가 임자번(林自蕃)의 노비로 주었다 기록하고 있다. 아들 조명은 아버지 순생(順生)이 귀향 갈 때 연좌제(緣坐制)의 죄를 물어 금산에 유배(流配)됐다. 그러고도 세조 일당들은 불안했던지 당시 계유정란에 가담된 자들에게 모두 사약 먹여 죽였다. 그러던 어느 날에 세조(世祖)가 속리산과 온양에 산양과 온천을 왔을 때 어느 신하가 역도들은 다 죽고 왕좌가 안정됐으니, 역도 조순생의 아들 조명이 적소에 있으니 부자의 죽음으로 한 집안의 대를 끊을 수 없다고 간해 명을 풀어 줬다. 명은 정치에 환멸을 느껴 아버지가 죽은 고성 땅과 단종이 죽은 영월을 돌아보고, 목천 신기(新基)에 정착하게 됐다. 순생의 묘소와 명의 묘소는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있고, 인군(引郡)에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 보아 인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천 신기에 살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뒷산에 올라 단종이 승하 하신 강원도 영원을 향해,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성을 향해 망배통곡(望拜痛哭)하기를 폭우뇌성과 북풍한설(暴雨雷聲 北風寒雪)에도 멈춘 날이 없었다. 조명은 16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20살 전후로 정랑에 오른 인재로 그 알량한 왕좌의 싸움에 회생된 조선시대가 낳은 충신중의 충신이다. ▶또 다른 천안의 청량포 ‘정랑봉’= 천안시 성남에 전해오기를 조명이 단종을 추모하며 매일 올라 통곡망배 하던 망향산이 있다는 구전을 듣고, 천안향토회 김종식연구사는 수차례 이곳을 방문해 찾았지만 없었다. 그의 노력끝에 수신면 망경산을 수차례 오르다 석곡리에 정랑봉에 추모비가 있다는 지인의 안내로, 사진작가 이종덕과 함께 올라보니 이곳은 김종식 연구사가 조명의 비를 찾기 위해 수차례 다니며 지나쳤던 곳이다. 향토사학자 김종식과 이종덕 작가는 몇 시간의 노력으로 비석부근에 우거진 나무와 풀을 베어 보니, 정랑봉 추모비(正郞峰 追慕碑)라는 4자 짜리의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지난 2006년 여름의 일이다. 당시작가 이종덕작가 김종식연구사와 금석문 발굴에 늘 함께한 인물이다. 며칠 뒤, 천안 전통문화 연구회 회원들이 답사, 탁본을 떠 번역을 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정랑봉 추모비명 (正郞峰 追慕碑)’ 우리나라 땅 수천리에 여러 산들이 줄지어 서있고, 만천봉우리가 있으니 명칭이 얼마나 많을까 마는, 역시 그 처음 심상으로 이름 지어진 것에 불과하되 오직 대륙의 정랑봉(正郞峰)은 그렇지 않다. 봉우리는 현의 남쪽 대양동(縣 南 大陽洞)에 있는데 후에 단종조의 명신(端宗朝 名臣) 정랑 조공(正郞 趙公)의 충효(忠孝)서 이름이 지어지게(作名) 됐다. 조공의 휘는 명(趙公 諱 銘)이요. 호는 인촌(號 仁村)이며 한양이 세가(漢陽世家)이다. 단종 조 이조참의(端宗 朝 吏曹參議)를 지낸 파서선생 휘 순생(坡西 先生 諱 順生之 子)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해 청현(淸顯)을 두루 거치고 계유정란(癸酉靖亂)에 일문이 구찬지화(九竄之禍)를 당했다. 공이 이때 정랑(正郞)으로 금산(錦山)에 유배됐다가 상왕(上王 단종을 말함)께서 해(害)를 당함과 부공(父公)의 소식을 듣고 애통하고 원통해 생에 의욕이 없었다. 후에 생의 환멸(還滅)을 느껴 본 현 세성산 서쪽(本 縣 細城山 西)에 살았는데 지금의 대양동(大陽洞)이 이곳이다. 임금과 부친이 비명(匪命)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겨 하루 세 번씩 집 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상 동으로 절하고 남으로 울부짖음을 일상으로 했다(東拜南號). 장릉은 영월(寧越有 莊陵)에 있고, 고성(固城)은 후명(後命)으로 부친이 귀향을 가서 사사(賜死)된 곳이다. 얼마나 그러했는지 사립문이 달아 없어질 지경이 됐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정랑(正郞)이라 하니 정랑이라는 명칭(名稱)이 여기서 시작된다. 인에 마음을 둔 선비와 유람하는 나그네로 자연에 임하여 마음을 시로 읊지 않음이 없다. 본 현의 수장(本縣 首將)이신 안정복(安鼎福)이 ‘정랑봉(正郞峰’세자를 써서 걸었고, 암행어사 김이성(暗行御史 金履成)은 “단묘건곤이 다만 이 한 봉우리라는 구절은 진실로 광세의 감흉을 일으킨다.” 그 “첨피고봉 영세청풍(瞻彼高峰 永世淸風”이라는 것은 강제 송 선생(剛齊 宋先生 祝辭)이 축사(지은 글) 한 것이다. 봉우리 동남쪽 십 여리쯤 또 누대(樓臺)가 있는데 망경대(望京臺)라고 한다. 대개 공이 매일 의복을 갖추어 입고 홀기를 들고 서울을 바라보며 절하며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조(仁祖) 때에 이르러 공에게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사림(士林)들은 충열사(忠烈祠)를 세워 제사하고 또 후에 숙묘전(肅廟殿)에 제사했다. 공이 살았던 마을은 공이 산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이 인촌(仁村)이라 칭(稱)하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의 호(公之號)가 되었다. 후에 대양(大陽)으로 이름을 고치니 현재는 천안군의 치하에 속한다. 봉우리는 지금 유씨(柳氏)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아! 세월이 바뀌어 강산이 여러 번 변했는데 오직 이 우뚝한 봉우리는 마모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만천봉의 기상을 띠어 우뚝 솟아 있어 부녀자들과 선비들이 전하여 쇠하지 않아 후손이 추모함이 깊도다. 장자께서 물은 차마 땅을 폐하지 못하고 차마 황폐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뜻으로 곧은 옥돌(비석)을 세워 이를 표하노니 그 논의를 주도한 것은 후손 형원(後孫 炯元)이다. 아! 공의 남기신 발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이 봉우리에 있을 것이며 그 명칭의 자세함을 알고자 한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천 백세가 지나더라도 이 비석으로 인하여 공의 큰 절개를 알게 될 것이다. 오호라! 자규(서쪽새)가 우는 그믐날이면, 공의 꽃다운 영혼이 반드시, 봉우리 위를 배회할 것이며, 한스러움이 또한 무궁 할 것이다. 지금 그 먼 후손 철형(喆衡)이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하거늘 나는 이 봉우리 아래 사람이라 매양 이곳에 올라 탄식 한 것이 오래 되었다. 나의 조부 제학공(祖父 提學公)께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정랑봉이 북쪽에 있으니 조 선생을 추모하노라”하셨다. 가만히 느낌이 있어 드디어 이렇게 쓰노라 이때는 단묘 이후 아홉 번째 갑술년 중추절이다. 가선대부 전행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안동 김경규는 삼가 짓고 전 장릉참봉을 지낸 완산 이석영은 삼가 쓰노라.(嘉善大夫 前行 奎章閣 副提學 安東 金敬圭 謹撰 前行 莊陵參奉 完山 李錫永 謹書)라고 기록돼 있다. 김헌규 기자 always2011@naver.com <저작권자 © 충남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고삿재] ◈正郞峰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산 44-1 ◈望京臺·山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봉대리 산 1 [獨立記念館] ○ 망경산(望京山 385m)은서쪽으로는 운주산과 동쪽으로는 동림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상에 있는 산이다. 나즈막한 산이지만 북쪽으로 천안 흑성산과 은석산 너머 멀리 한양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산이라 하여 망경산이라 한다. 전국 여러 곳에 망경산이나 망경대(望京臺) 등의 지명이 분포하는데, 고도는 높지 않지만,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어 얻은 이름으로 보인다. ‘경(京)’은 한양 혹은 임금을 상징하며, 나라에 상(喪)을 당하면 한양을 향해 한양인 이조정랑 조명(趙銘)이 망배(望拜)나 망곡(望哭)을 했던 곳이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망경대/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의 수신면 백자리와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경계에 위치한 산이며 동쪽에는 동림산과 이어지고 북쪽에 수신면의 기름진 들판이 전개된다. 단종이 등극한 후 곧 세조의 찬탈이 이어지자 많은 신하들이 이에 반대하여 죽거나 유배되었고, 당시 이조정랑 조명(趙銘[?~1478])은 부친 조순생(趙順生[?~1454])이 안평대군과 함께 단종복위에 가담하였다 하여 경남 고성의 죽도로 유배를 보내고, 조명은 금산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후 세조가 조명을 유배에서 풀어주었는데, 부친 조순생(趙順生)은 고성 죽도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날마다 이 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고 단종을 그리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이에 선비들이 그의 충절(趙銘)을 기리기 위하여 이 산봉우리를 그의 벼슬을 따서 정랑봉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그가 임금이 계신 영월을 항상 바라보았다는 뜻에서 망경대 또는 망경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랑봉조명추모비명(正郞峰趙銘追慕碑銘)● [원 문]==正郎峰 追慕碑==
環東土數千里 群山列立萬千其峰 名稱亦何限而直不過厥初尋常之爲也 惟大麓之 正郞峰則不然 峰在縣南大陽洞 後因故端廟名臣正郎趙公忠孝而著焉趙公諱銘 號仁村 漢陽世家 莊陵伏節 吏曹參議 坡西先生諱順生之子也 妙年擢第歷踐淸顯 當癸甲之稽一門九竄 公時以正郎 編配錦山及上王遇害 父公受命催痛茹冤 如欲无生後蒙原宥 量移本縣 僦居細城山西 卽所謂大陽洞者是也痛君父匪命 日三登家後高峰 東拜南號 以爲常 蓋莊寢在寧越 父公後 命 受因固城也 因柴毁而歿 縣人號是峰曰正郎 正郎之稱自此始焉仁志之士 遊散之客 莫不登臨 想像歌詠其事 縣倅安公鼎福 以正郎峰三字揭試題 繡衣金公履成 有端廟乾坤 只一峰之句 誠曠世之與感也 其曰瞻彼高峰 永世淸風 剛齋宋先生所製祝辭也峰之東南十餘里許 又有臺曰望京 蓋以公每於吉望具朝衣 朝芴 望拜京華 以展舊君朝儀也 迨仁陵感際 贈公直提學 士林立忠烈祠 以祝之 又後陵祀肅廟展 公所居之村 自其僦居 鄕人稱多 仁村而因稱公號 後改今名大陽地 區現屬天安郡治下 峰巒今爲柳氏家私有 嗚呼 物換星移 滄桑屢變 惟此一芴 靑峰不磨不頹 帶得万千峰 氣象而崒然特立 婦儒之傳誦不? 雲仍之追慕深增依程子所謂 水不忍廢地 不忍荒之義 建貞珉以表之 其贊劃者后孫炯元也 噫欲觀公之遺躅 斯有峰焉 欲詳名之徵情蓋觀乎此碑也 後千百世 尙有以識公之大節也夫 嗚呼子規?月 白夜公之英靈 其必徜徉乎 其上而恨亦無窮矣 今其遠孫喆衡屬余記之 究論余是峰下居人 每登臨歎賞久矣吾王考 提學公亦嘗有詩曰 正郎峰在北 追憶趙先生 竊愈感焉 遂書之如右 時端廟後九甲戌中秋也嘉善大夫 前行奎章閣副提學 安東 金敬圭 撰前行章陵參奉 完山 李錫永 謹書景仰 高山慕孝忠 今人詳說 正郎蹤試看當日罔非土 端廟乾坤之一峰 繡衣使 市隱 金履成梅竹樓前啼蜀禽 望景臺上暮雲深 可憐一片峰頭月長照 孤臣戀闕心 經筵官 峿堂 李常秀 乙亥 春立 우리 동토 수 천리 여러 산들이 줄지어 서 있고 만천봉우리가 있으니, 명칭이 얼마나 많을까 마는 역시 그 처음 심상으로 이름 지어진 것에 불과하되, 오직 대록(大麓)의 정랑봉(正郞峰)은 그렇지 않다. 봉우리는 헌의 남쪽 대양동(大陽洞)에 있는데, 후에 단종조(端宗朝)의 명신(名臣)이신 정랑 조공(正郞 趙公)의 충효로써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공(趙公)의 휘(諱)는 명(銘)이요 호는 인촌(仁村)이며 한양(漢陽)이 세가이다. 단종조(端宗 朝)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파서(坡西)선생 휘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을 두루 지내다가 계유정란(癸酉靖難)에 일문이 많은 화(禍)를 당했다. 공이 이때 정랑으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상왕께서 해를 당함에 부공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고 원통해 하며 생에 욕심이 없었다. 후에 정치적 환멸에 본 현으로 이사를 와 정착하여 세성산(細城山) 서쪽에 살았는데 즉 대양동(大陽洞)이 이 곳이다. 임금과 부친(君父)이다 비명(匪命)으로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겨 하루 세 번 집 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상 동쪽으로 절하고 남으로 울부짓음을 일상으로 삼았다. 장릉(莊陵)은 영월(寧越)에 있는데 부공이 후명으로 고성(父公 後命 固城)에 귀향 가서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사립문이 달아 없어질 지경이 되었으므로 마을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정랑봉(正郞峰)이라 하니, 정랑은 조공의 관직에서 온 것이며, 산의 명칭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仁)을 마음에 둔 선비와 유람하는 나그네로 자연에 임하여 마음을 시로 읊지 않음이 없다. 현의 원님인(縣監) 안정복(安鼎福)이 정랑봉(正郞峰) 세 자를 써서 걸었고 어사 김이성(御使 金履成)의 단묘 건곤이 다만 이 한봉우리라는 구절은 진실로 광세의 감흥을 일으킨다. "첨피고봉 영세청풍(瞻彼高峰 永世淸風)"이라는 것은 강재 송선생(剛齋 宋先生)이 축사한 것이다. 봉우리 동남쪽 14여리(6.9km) 쯤 또 누대가 있는데 망경대(望京臺.山)라고 한다. 대개 공이 매일 의복을 갖추어 입고 홀기를 잡고 한양(京)을 바라보며 절하며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조 때에 이르러 공에게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사람들은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제사하고 또 후에 숙묘전(肅廟展)에 제사하였다. 공이 살았던 마을은 공이 산 다음부터 마을사람들이 인촌(仁村)이라 칭하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의 호가 되었다. 후에 대양(大陽)으로 이름을 고치니 현재는 천안군(天安郡)의 치하에 속한다. 봉우리는 지금 유씨(柳氏)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오라 세월과 강산이 여러 번 바뀌고 변했는데 오직 이 우뚝한 봉우리는 마모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만천봉의 기상을 띠어 우뚝 솟아 있어 부녀자들과 선비들이 전하며 쇠퇴하지 않아 후손들이 추모함이 깊도다. 정자(程子)께서 이르길 물은 땅을 폐하지 못하고 황폐하게 하지 못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뜻으로 곧은 비석을 세워 이를 표하노니 그 논의를 주도한 것은 후손 형원(炯元)이다. 아! 공이 남기신 발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이 봉우리에 있을 것이며 그 명칭의 자세함을 알고자한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천백세가 지나더라도 이 비석으로 인하여 공의 큰 절개를 알게 될 것이다. 오오라 자규(子規)가 우는 그믐날이면 공의 꽃다운 영혼이 그 반드시 봉우리 위를 배회할 것이며, 한스러움이 또한 무궁할 것이다. 지금 그 먼 후손 철형(喆衡)이 나에게 와서 기문을 부탁하거늘, 나는 이 봉우리 아래 사람이라 매양 이곳에 올라 단식한 것이 오래되었다. 나의 할아버지 제학(吾王考 提學)공께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씀하시길, 『정랑봉이 북쪽에 있으니 조선생을 추억하노라』하셨다. 가만히 느낌이 있어 드디어 이렇게 쓰노라, 때는 단묘 이후 아홉 번째 갑술년 중추절이었다. 가선대부전행규장각부제학을 지낸 안동 김경규(嘉善大夫前行奎章閣副提學 安東 金敬圭)가 삼가 짓고, 전 장릉참봉 완산 이석영(前 章陵參奉 完山 李錫永)은 삼가 쓰다.
조영수 2022-12-15 07:44:15
충정공파종회(회장 조성계)에서는 현재 우리 문중의 고서 파인실기를 번역중에 있으며 번역이 완료되면 책자 간행을 검토중에 있다고 합니다. 위의 글은 충정공파 조성봉님의 글로 제 메일로 보내주셔서 홈페이지와 종보에 실어달라고 요청하셔서 게재한 글인데 가천재공파 조병용님께서 본인의 입맛대로 편집하고 또한 번역한 책자를 간행한 것으로 조작하여 답글로 게재하였습니다. 충정공파종회에서는 번역중인 책자를 버젓이 간행한것으로 만들어 게재하여 종인들이 본 홈페이지를 보고 벌써 간행한것이냐? 고 오해를 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기에 대종회로 조병용님의 답글을 삭제 요청하여 부득이 삭제하게 되었습니다. 조병용님은 한양조씨대종회에서 추진한 한양조씨유래비를 제멋대로 편집하여 건립위원회에서 고역을 치렀고 매년 간행하는 한양조씨종보도 제 입맛대로 편집 게재하여 경고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위반을 하고 있어서 대종회에서는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생산적인 일을 하여 돈을 벌던가, 아니면 책을 읽는 등 공부를 하던가 하지 가천재공파이면서 왜 타종파의 일에 불필요한 참견을 하는지 의문입니다. 부디 자중자애하기 바라며 종통왜곡에 앞장서는 귀하의 소속 가천재공파종회장이 귀하의 증손항열인데 잘 가르치기 바랍니다.
●정랑봉(正郞峰)/망경대(望京臺) ※인촌공 조명선조님 추모비 탁본사진/추모비명(번역서) 내용은 충정공파 임원들에게 1년전부터 부조묘제향후에 카톡으로 몇 번씩 보내들이면서 파인실기에 인촌공 추모비 내용이 실기에 없길래 임원들에게 알려드리면 실기에 함께 올리지않을까 하였는데, 이미 다음카페엔 1년전에 천안시 향토사학자 분께 번역서를 부탁하여 카페에 올렸습니다. 그런 내용을 이런식으로 인격살인하면서 욕먹이네요! ●전남 정절사 유허비 내용도 조중현 어르신에게 번역 내용을 보내길 부탁하였는데, 종보에는 그어르신 함자는 없고, 다른사람 이름으로 올렸더군요! 양심갔고 삽시다. ●암행어사 계음공 조팽년선조님 신도비 번역한 내용도 부탁한 어르신의 함자(한풍군파종친 조성환박사님)를 없세고 나중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올리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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