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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冶谷先生集序[尹東洙] 冶谷先生集事實記略/書先祖良節公遺書後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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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谷先生集序

冶谷先生集序[尹東洙] b026_119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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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黃勉齋論爲學之道曰。眞實心地。刻苦工夫。盖工夫能刻苦而後。可以進德修業。日造乎高明。心地能眞實而後。可以篤志務實。不騖乎虗僞。此易之所以自強不息爲乾之德。而君子之所以必誠之爲貴也。余以勉齋之訓。求之近世。先輩之學。惟冶谷趙先生庶幾乎。先生自少時。慨然有志於學。每日未明而起。盥櫛衣冠。端拱正坐。終日無惓怠之意。非六經四書。不讀。見朱子書。心誠好之。手抄而口誦。其他性理之書。靡不誦究。且記平日所得於耳目心思者。名曰三官記。又抄古人言行之善者。名曰常目編。晨誦庸學一遍。臨卧誦西山夜氣箴。日以爲常。篤學力行之功。老而匪懈。先生之於工夫。可謂刻苦矣。先生資禀篤厚。性行誠愨。宅心則以浮僞爲戒。飭躬則以忠信爲本。盖其所受於天賦。所存於身心者。已可謂純誠無僞之君子。而先生又以浦渚趙先生。潛冶朴先生爲師。則其敎曰。學者須當以毋自欺爲先。又曰。仰不愧。俯不怍。是功效。曰近思錄。四子堦梯也。先生一依其訓。尊信服習。表裡如一。幽顯不貳。卒以是成德。先生於心地。可謂眞實矣。迹其一生用功本末。深有合於黃氏八字旨訣。則宜其德之厚。業之大。存而爲上下之所尊敬。歿而爲士林之所景慕也。先生之於文辭。不甚屑意。而蘊乎內者發之言。辭達而義該。語圓而理暢。不可與徒尙華藻者比。信乎有德者必有言也。東洙生也晩。不及供灑掃之役於先生之門。而我曾王考魯西先生。與先生契義至厚。我祖考農窩公。累甞獲拜於先生。所以誦服先生之行義者甚深。余之所聞於家庭者如此。而余之妹婿李君思齊。亦篤行之士也。居在先生之遺里。盖慕先生之德而興起者也。又能道先生之細行甚備。故甞有高山景行之慕。而恨不摳衣於凾丈之間也。又先生是浦渚趙先生之門人。則浦渚。卽我之外高祖也。我從祖明齋先生常曰。牛,栗兩先生後。力於學問之功。唯浦翁爲最。而先生小少師承。則其淵源所漸。尤可知矣。浦翁甞以先生學行薦聞於朝。實用司馬君實劉器之故事也。於此。尤可見先生之學之德之眞可尊而可敬也。先生之曾孫敬煕。裒收遺文。並三官記。繕寫成編。藏于家。又相與謀付剞劂。而持以示余辱徵弁卷之文。敬受而讀之。則一言一字。皆出悃愊。無一毫矯餙之意。至於三官記。見聞不遺。思索皆精。反身自修之實。有異於口耳之學。以實心做實功者。盖可驗矣。明齋先生甞亟稱三官記曰。此皆公實用功處。觀乎此。可知其踐履之篤矣。噫。先生之文。余何敢言。雖托名卷末。爲後學之幸。而昧識陋文。誠有不敢當者。累辭而終不獲。遂以平日之所耳聞。中心之所誠慕者。書以歸之。

崇禎後再丙午。後學坡平尹東洙再拜謹序。

 

冶谷先生集事實記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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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諱克善。字有諸。姓趙氏。本漢陽。號冶谷。居德山 開 國元勳。漢川府院君。謚良節公諱溫八世孫也。師事潛窩李先生命俊。潛冶朴先生知誡。浦渚趙先生翼。仁祖朝以遺逸。直拜童蒙敎官。內職則宗簿寺主簿,翊衛司司禦翊衛,戶刑曹郞,軍器寺僉正。或就或不就。外邑則沔川,溫陽,淳昌, 再除 益山四邑及江華府經歷。或赴或不赴。孝廟己丑。在溫邑時。浦渚先生以爲經學精明。啓薦爲成均司業。丁酉夏。拜工曹正郞。七月。拜司憲府持平。九月。拜司憲府掌令。一年三聘。 屢侍經筵。每陳遇灾修省。正心爲治之術。上虗心聽納。奬諭甚渥。及其病也。上賜毛衣覆之。遣內醫救之。以御筆親批曰。凡救急之藥。勿待啓下。直爲取用。後以啓其喪也。衣衾,棺槨。極其備禮。護櫬營墓。悉令官庇。顯宗朝命㫌門閭。贈吏曹參議。肅宗朝。收用嗣孫。景宗朝。配享于新昌道山書院。英宗朝。配享于德山晦庵書院。哲宗朝。贈吏曹判書。兼成均舘祭酒。謚文穆公。明齋尹公拯。撰碑銘。玄石朴公世采。述墓誌。藥泉南公九萬。狀其行。敬庵尹公東洙。序文集。判書洪公祐吉。撰謚狀。盖先生天禀卓異。德性純粹。其學以格致,誠正,修身,齊家爲主。以事親孝。事君忠。事師敬。三事爲勸戒。用功最切於庸,學,心經,近思錄,朱書。其讀書應物之際。箚記所得而得於思者。屬之心官。得於聞見者。屬之耳目官。名曰三官記。自十五歲。記其日用行事。以效野史之軆。名曰日錄。有三十卷。啓運宮 仁獻王妃 喪。議其所宜服制。著說曰禮說僭擬。經史中文義之難曉。吐釋之可疑者。考校思索而聚之。曰雜記。擇經傳中可爲修身持心之法者及東方人言行之善者。名曰砭己要訣。常目編各一卷。又聚東方人言行之可資談笑者一卷。名曰永日錄。以爲親堂消遣之資。又有師友間疑禮問答一卷及朱子大全疑義。日錄以下作別集。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6

 

冶谷先生集卷之五 / 識

書先祖良節公遺書後識 b026_181b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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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惟我良節公適嗣。不幸屢絶而繼。加之以壬辰兵燹。仍之門戶寢衰。家傳靑氊舊物無存者。惟有一紙遺書在。余爲兒戱嬉時。亦甞見之。而莫知寶之。及長。求先世行狀,誌,碣等紀蹟之文而不可得。若遺像三本。皆亡於亂。于時宗孫大護軍公興仁。丁本生親我曾王母喪。居廬在鄕。婦女守京宅。蒼黃奔竄南歸。後有老婢子。抱負一神主至。卽公之主也。方倭奴充滿京都。以婢之無知。而能知收拾奉歸。祠宇中列序諸位。而能獨取公之神主。是則可異焉。然而公前後兩夫人。欲重造主。而姓氏鄕貫。皆未可曉。爲之嘆惜痛惋者。凡爲苗裔者之所同情也。今年。余辭官。歸伏圭竇。暇日取家譜。隨見聞增補餘。遂就宗家發篋。而遺書是受。盥手奉玩。筆畫妙絶佳健。跪讀以還。遺敎飭厲丁寧。仰而遐慕。俯而深感。何幸數百載下。目覿猶存之手澤也。噫。今日公之子孫。其麗非不衆也。克承前烈者盖寡。以致享祀不一。正犯公之所大戒。夫惟余之不肖無似。尙且惕然懼。赧然愧。不自知其所以爲心。况令不欲忝厥者見之。宜謂如何哉。於是。有模寫廣布諸宗族。而手拙未能。僅能謄取文字。以爲常目之地。庶幾有以警發豺獺之志云爾。丁卯季冬。後孫克善。感泣而書。

<선조 양절공(趙溫) 유서 뒤에 적은 기록(書先祖良節公遺書後識)>

●야곡 조극선(趙克善, 1595-1658)

☞삼가 생각건대 우리 양절공 적손은 불행하게도 누차 끊어졌다가 이어 나갔다. 게다가 임진년 전쟁(임진왜란)을 만나 이어서 가문이 점차 쇠퇴하여 집안에 전해오던 귀중한 옛 유물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으며, 유서 한 장만 남아 있었다. 내가 어릴적 장난치며 노닐 때 일찍이 유서를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을 보배로 여길 줄 몰랐다. 내가 성장하여 조상의 행장(行狀), 지(誌), 갈(碣) 등 행적을 기록한 글을 구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유상(遺像) 세개 같은 경우는 모두 전란 속에서 망실되었다. 이때 종손 대호군공(大護軍公) 조흥인(趙興仁)은 본생친(本生親: 양자가로 간 사람의 생가 부모)인 나의 종증조모의 상을 당하여 시골의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부인은 서울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허겁지겁 피난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중에 늙은 하녀가 신주(神主) 하나를 품에 안고 이르렀는데 바로 양절공의 신주이다. 이때 바야흐로 왜놈들이 서울에 가득 찼었다. 무지한 하녀가 어찌 수습하여 받들어 돌아갈 줄이나 알았겠는가? 사우(祠宇)에 나열된 여러 위패 가운데에서 유독 양절공의 신주만을 가져왔으니 실로 기이한 일이로다. 그런데 양절공의 첫번째, 두번째 두 부인의 신주를 다시 만들고자 하였으나 성씨와 관향을 모두 알 수가 없어 이에 통탄하여 애석하게 여길 따름인데 무릇 후대의 자손이라면 이에 동정할 것이다.

올해(1627) 내가 관직에서 물러나 허름한 집으로 돌아가 거처하게 되었다. 한가한 날에 집안의 족보를 꺼내놓고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나머지를 증보하던 차에 마침내 종가에 가서 궤짝을 열어 이 유서(遺書)를 얻게 되었다. 손을 씻고 받들고 읽어보니 필획이 절묘하고 아름답고 웅건 하였다. 꿇어앉아 읽어 보고는 돌아오니 남기신 가르침이 타이르고 격려하며 간곡 하였기에 우러러 아득히 사모하고 굽어서는 깊이 감동하였다. 수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와 아직 남아있는 손때를 직접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아아! 오늘날 양절공의 자손은 그 숫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대의 업적과 공적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드물며, 향사(享祀)를 지냄도 한결같지 않으니 이것은 바로 양절공의 큰 훈계를 어기는 것이다. 무릇 나는 불초무사(不肖無似: 어진 사람을 닮지 못한 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이르는 겸칭)하고 또한 근심스럽고 두려우면서도 얼굴 붉어져 부끄러울 따름이니, 스스로 마음써야 할 바를 모르겠다. 하물며 이를 보고 조상을 욕되게 할 수는 없으니 의당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에 양절공의 유지를 그대로 베껴 써서 여러 종족에게 널리 배포한다. 하지만 손이 서툴고 능숙하지 못하여 문자만을 베껴 취하였으나 늘 눈여겨 볼 교훈으로 여겨야 할 것이니, 승냥이와 수달피 같은 미물도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뜻을 경계하여 깨우치기 바란다.

정묘년(1627) 음력 섣달에 후손 극선(克善)이 감격하여 목메어 울며 쓰다.

(≪야곡집(冶谷集)≫권5) 번역: 김제공파 문학박사 조성환님

혹시나 대종손가나 4자파, 홍성예산쪽 종친중에 良節公遺書을 소지하고 있는 종친이 계시면 대종회사무실(문학박사 조성환:010-7135-3268)에 연락 바랍니다良節公遺書”도 번역해야 할 것 같습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6

야곡일록 제2(冶谷日錄 苐二) / 인조 5년(1627, 정묘) 10월 17일

ㆍ연계 및 출전

十七日

行 曽
王考忌祭 【暁與二兄·冕姪·爲善 奉 主徃下宅 陪 大人·季父 以行祭訖 奉 主而還 朝又徃下宅 季父兼邀崔基甫·鄭叔敬男氏·子翼·一兄以同餕】 崔基
甫歸 【自下宅返而即帰】 徃子羙家返 【子衡火後 今始造家 子翼請以分付 爲徃子美家 共議爲之 淂之與子薫 徒步將訪余 先到子羙
家 子薫扵子羙外黨族也 相遇留話 有顷 飲數觴而帰 則申仲過話去 乃扵 良節公遺書傳冩後 作文以紀感惜之懐】 朝隂霏 仍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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