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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훌륭한 분 조 온]국어(국민학교 제 5학년 1학기 국어책, 22 -29쪽).현재는 교과서 개편으로 게재 안됨,펴냄:서기 1986년 3월 1일.

by 晛溪亭 斗井軒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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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절공 조온(한양조씨 6세조)


조선이 건국되자. 나라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안팎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능력있고 명망 있는 인재가 많이 필요하였다.
조온은 이러한 때에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데 노력한 분이다.
평안도에 침공한 왜구를 무찔렀고. 또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분란을 막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렇게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인을 훈련시키고 호적을 정리하여 나라의 터전을 충실히 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벼슬이 높아졌지만, 그는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항상 아랫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아꼈으며, 이웃을 가족처럼 사랑하였다.
공신에게 내리는 곡식을 곳간에 비축하였다가,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도움을 입은 사람들이 은혜를 갚기위하여 그의 허름한 집을 고쳐 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조온은 끝내 허락하지 않고,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또한 그의 생활은 서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검소하였다.
조 온이 벼슬에서 물러나 정동(현재 서울 정동)에 있는 집에서 말년을 보낼 때였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왔다. 이제 막 벼슬길에 들어선 사람으로서 우쭐한 마음이 가득하였다. 재상을 지낸 조 온에게 부탁을 하면 벼슬이 오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찾아왔던 것이다.
처음에 젊은이는 집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왕의 친척이며 높은 벼슬을 지낸 대감의 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왕 왔으니 대감을 뵙고 가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리 오너라."
그가 큰 소리로 하인을 부르자, 안에서 한 노인이 나타났다.
"누구를 찾으시오?."
"여보, 대감께서는 안에 계시오?."
젊은이는 노인이 조 온 대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물었다.
"내가 조 온이오. 무슨 일로 오셨소?."
젊은이는 깜짝 놀라 허리를 굽히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 온은 젊은이를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소.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인데.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조 온은 젊은이를 사랑방으로 안내하였다. 방에는 돗자리가 한 장 깔려 있고. 조그만 책상에 책이 몇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대감의 방이 이럴수가...............?."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방을 둘러보았다.
"앉으시오, 젊은이."
젊은이는 절을 하고 대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 오셨소?."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젊은이는 부탁을 드리러 왔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조 온은 새로 벼슬길에 오른 젊은이를 보니, 자신이 나라일에 몰두한던 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젊은이와의 대화는 그칠줄을 모르고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저녁 상이 들어왔다.
"자 함께 듭시다. 우리 집에는 본래 준비가 없어서, 귀한 손님이 와도 대접할 만한 것이 없다오."
정말 상 위엔, 보리가 많이 섞인 밥과 반찬 두어 가지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평소 이런 밥을 먹어 보지 않았던 젊은이는 넘어가질 않았다.
입 안이 깔깔해지고, 얼굴은 붉게 상기 되었다.
"왜 그러오? 찬이 입에 맞지 않나 보군."
"아닙니다. 조금 전에 들어서 아직 시장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 슬며시 수저를 놓았다.
"그럴 줄 알았소. 먹을 만한 반찬이 없어서 미안하오."
상이 물려지자, 젊은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였다.
"대감께서는 너무 몸 을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모든 일이 습관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하오. 젊어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벼슬길에 있을 때에는 전쟁터에서 생활하다 보니, 호화롭고 편안한 것 과는 멀어지게 되었지요. 내게는 오히려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오."
"그렇지만. 지금은 벼슬길에 계시는 것도 아니시고, 춘추 또한 높지 않으십니까?"
"여보시오 , 젊은이. 지위가 높아졌다고 또 공이 좀 있다고 해서 호화롭게 지내서는 안됩니다. 나는 지금 나라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백성과 똑같이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나라일을 돕는 길이라고 믿소."
조 온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생활이 부끄러웠다. 부탁해서 벼슬을 올려 볼까 했던 마음도 뉘우쳐졌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하였다.
"대감의 가르치심을 깊이 명심하고, 바르게 살아가겠습니다."
그 뒤로 젊은이는 언제나 조 온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검소하고 바르게 살기 위하여 노력 하였다.
이렇듯 조 온은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언제나 나라일을 걱정하고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겼던 조 온의 일생은 우리에게서 훌륭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註: [훌륭한 분 조 온]에 관한 내용은
책 명: 국어(국민학교 제 5학년 1학기 국어책, 22 -29쪽).

현재는 교과서 개편으로 게재 안됨
지은이 : 문교부(현재 교육부)
펴낸이 : 국정교과서주식회사.
펴  냄 : 서기 1986년 3월 1일.


=장명산선산의 舊墓小=

國朝人物考三十六 / 蔭仕

趙溫 墓表[趙復陽]

[DCI]ITKC_KP_C004A_0360_010_0020_2023_008_XML DCI복사 URL복사

公諱溫, 姓趙氏, 其先漢陽人也。 雙城摠管暉, 其高祖也; 監門衛上護軍良琪, 其曾祖也; 三重大匡龍城君暾, 其祖考也;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龍源府院君、判少府寺事、襄烈公仁璧, 其考也。 襄烈公繼室以桓祖大王女, 實我太祖大王妹壻也。 麗末知國事有歸, 乃老襄陽, 守臣節以終, 襄陽人立廟祀之。 公襄烈公之長子也。 事太祖、太宗, 策開國、定社、佐命三勳, 封漢川府院君, 官至議政府左贊成, 諡曰良節公。壬辰之亂, 公之遺像及世藏文籍, 蕩失無餘, 以故言行、事蹟、歷官、生卒, 皆不可考。 今以雜出於譜牒、記傳者觀之, 公之曾孫文節公元紀族譜序, 有曰: “良節、良敬以孝廉忠愨, 共得懿諡。 而良節贊三大功, 皆以義適勳功所致, 散諸窮族, 草屋數間, 未容旋馬, 食無異味, 坐不重茵, 年幾八耋, 始終如一云。” 良敬卽公弟右議政涓也。 又傳良節旣卒, 其子搆堂, 宣請良敬公落之。 良敬至視庭除, 不坐堂而出曰: “伯氏居宅, 不設階級, 豈財力不足歟? 若曹不追趾先人儉德, 今乃爲石砌, 吾不復入汝室矣。” 諸姪懼, 卽壞之。 公之孫司藝衷孫, 常勅群子弟曰: “吾自釋褐日, 慕先祖攸行, 而未能焉。 吾家子弟如有立身於世, 而或負良節之意者, 則吾死不瞑目矣。” 洪相國彦弼撰文節公碑文, 敍其世系, 亦稱公淸德峻節爲世楷範, 卽此者, 可以見公之平生矣。

夫豪貴芬華, 衆所艶慕, 自古勳貴之家, 鮮有不流於驕溢者。 故曰“居貧賤易, 處富貴難”。 公以開國元功, 位躋極品, 家門隆盛, 光寵燀赫, 而一切以淸約自律, 蕭然如寒士, 非有卓絶之操, 能之乎? 至公四世孫靜菴先生文正公光祖, 倡明道學, 爲東方儒宗, 配食夫子廟庭, 其亦種德之所由來歟!

公之妣曁夫人, 皆不知何氏, 或曰夫人某氏也。 有五男三女: 曰儀, 僉知中樞; 曰琓, 知中樞; 曰河, 別將; 曰興, 繕工監正; 曰育, 義盈庫使。 府使李仲慶、護軍尹希錢、直長李紹仁, 其壻也。 子孫繁昌, 世有聞人, 至今冠冕不絶, 積厚流遠, 信哉!

公之葬在交河縣某方負某方之原, 舊有碣, 仆而缺。 八世孫司憲府掌令克善, 慨然與諸宗人謀, 鳩材治石, 將刻而復樹之, 未就。 其胤昌漢, 踵成之。 掌令以學行進將大用, 不幸病卒。 昌漢能繼先志, 卒豎玆石, 使後人知爲良節公之墓, 其亦可書也。

[주-D001] 輔 : 底本에는 “轉”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 및 《冶谷集・世系》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2] 事 :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는 “命”으로 되어 있다.
[주-D003] 散 : 底本에는 “敬”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4] 耋 :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는 “袠”로 되어 있다.
[주-D005] 勅 : 底本에는 “陳”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6] 豎 : 底本에는 “堅”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2022

▣조온 [ 趙溫 ]의 묘표(墓表) 저자 조복양(趙復陽) 시호 : 양절(良節)▣

공의 휘(諱)는 온(溫)이요 성(姓)은 조씨(趙氏)로 그 선계(先系)는 한양(漢陽) 사람이다. 쌍성 총관(雙城摠管)을 지낸 조휘(趙暉)가 그 고조(高祖)이고,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지낸 조양기(趙良琪)가 그 증조(曾祖)이다. 삼중 대광(三重大匡) 용성군(龍城君) 조돈(趙暾)이 그 조고(祖考)이고, 순성 익위 협찬 보리 공신(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용원 부원군(龍源府院君)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이 그 선고(先考)이다. 양렬공의 계실(繼室)은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딸이니, 양렬공은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매서(妹壻, 매제(妹弟)를 말함)인데, 고려 말에 국사(國事)가 다른 성씨(姓氏, 조선 태조를 가리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서 곧 양양(襄陽)에서 노년을 보냄으로써 신하의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마쳤으므로, 양양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공은 양렬공의 맏아들인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기어 개국 공신(開國功臣)ㆍ정사 공신(定社功臣)ㆍ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세 공신에 녹훈(錄勳)되고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양절공(良節公)이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왜란 때에 공의 유상(遺像)과 대대로 간직해온 문적(文籍)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에 공의 언행(言行)ㆍ사적(事蹟)과 관력(官歷)ㆍ생졸(生卒)을 모두 고찰할 수가 없다.

 

이에 보첩(譜牒)과 전기(傳記)에 뒤섞여 나오는 것을 살펴보면, 공의 증손자인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가 쓴 족보(族譜)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양절공과 양경공(良敬公)은 효성스럽고 염결(廉潔)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함으로써 함께 훌륭한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특히 양절공은 협찬한 세 가지 큰 공훈에 있어 모두 의(義)로써 적절하게 처신하였으며, 공훈의 상사(賞賜)로 받은 것들을 살림이 가난한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서너 칸의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으므로 말[馬]조차 몸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또 밥상에는 별미의 음식이 없었고 좌석에는 두터운 요조차 없었으니, 연세가 여든이 되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변함없이 살았다.”고 하였다. 양경공은 곧 공의 아우인 우의정(右議政) 조연(趙涓)이다.

 

또 전하기를, “양절공이 별세한 뒤에 그 아들이 집을 새로 짓고서 양경공을 초청하여 낙성(落成)을 하였는데, 양경공이 그 집에 이르러 정제(庭除, 뜰의 층계)를 보더니 당(堂)에 앉지도 않고 나가버리며 말하기를, ‘백씨(伯氏)께서 살던 집에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 어찌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그랬겠는가? 그런데 너희들이 선인(先人)의 검소한 덕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도리어 돌로 계단을 만들었으니, 나는 너희 집에 다시는 들어오지 않으련다.’고 하니, 여러 조카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공의 손자인 사예(司藝) 조충손(趙衷孫)은 항상 여러 자제(子弟)들에게 타이르기를, “내가 석갈(釋褐, 과거에 급제함을 말함)한 날부터 선조(先祖, 조온을 말함)께서 행하신 바를 흠모하였으나 나는 선조처럼 해내지 못하였다. 우리 집안의 자제로서 만일 세상에 입신(立身)을 하고서도 혹시라도 양절공의 뜻을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상국(相國) 홍언필(洪彦弼)이 지은 문절공(文節公)의 비문(碑文)에도 그 세계(世系)를 서술하면서 또한 ‘공의 청덕(淸德)과 준절(峻節)이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노라’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공의 평생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호귀(豪貴)하고 분화(芬華)한 생활은 여러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것이므로, 예로부터 훈귀(勳貴)의 가문(家門)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옛말에 ‘빈천하게 살아가기는 쉬워도 부귀하게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공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원훈(元勳)으로서 벼슬이 극품(極品)에 올라서 가문이 융성하고 총광(寵光)이 혁혁하였으되, 모든 것을 한결같이 청렴하고 검약함으로써 자신을 다스렸으며 마치 가난한 선비처럼 조촐하게 살았으니, 탁절(卓絶)한 조수(操守)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공의 4세손(世孫)인 정암 선생(靜菴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여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 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말함)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그 또한 공이 덕(德)을 쌓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공의 선비(先妣)와 부인(夫人)은 모두 어떤 성씨(姓氏)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부인은 모씨(某氏)라고 말하기도 한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조의(趙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차남인 조완(趙琓)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고, 그 다음 조하(趙河)는 별장(別將)이고, 그 다음 조흥(趙興)은 선공감 정(繕工監正)이고, 그 다음 조육(趙育)은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다. 부사(府使) 이중경(李仲慶)과 호군(護軍) 윤희전(尹希錢)과 직장(直長) 이소인(李紹仁)이 그 사위들이다. 공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대대로 이름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높은 벼슬에 오른 자들이 끊이지 않으니, 덕을 두텁게 쌓으면 복록이 오래 이어진다는 옛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공의 장지(葬地)는 교하현(交河縣)의 모좌 모향(某坐某向) 언덕에 있는데, 옛날에 비갈(碑碣)이 있었으나 쓰러져 부서졌다. 이에 공의 8세손(世孫)인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극선(趙克善)이 그 일을 슬프게 여기고서 여러 종인(宗人)들과 도모하여 재력(財力)을 모아 비석을 다듬고 장차 비문을 새기어 다시 세우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 아들인 조창한(趙昌漢)이 뒤를 이어 성사시켰다. 장령(掌令, 조극선을 말함)은 학행(學行)으로 벼슬에 나아가 장차 크게 쓰이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병이 들어 죽었으며, 조창한은 선친의 뜻을 잘 이어받아 마침내 이 비석을 세움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이 양절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이 또한 비문에 기록할 만한 일이다.

 

==六世 良節公諱溫 墓碑陰記==

漢陽趙氏顯於麗季 國初連世有大名公佐我 太祖策開國定社佐命三大勳 勳業當炳國史而 史秘不可攷家藏遺像及世蹟遺勳幷失壬辰之亂 以故歷官行治無能矢先君子嘗曰 洪陽族人世珍家有行狀一度寶襲而不許人窺逮 今訪其後嗣己失之 矣可勝歎惜公之衣履之藏在 於交河縣而墓碑且破傷以若 朝家賜牌禮葬之地其所痛歎尤當如何哉 遠孫有鐸宅俊相繼往省來言厥狀曰 斷碑陰刻有邦楨參議四字今右揆沈公之源昔牧洪陽日爲余言 嘗祇謁公墓是時石碣存其欸識乃 我外先祖判決事公邦楨與參議公邦彦所樹也 然則判決參議於公爲玄孫 豈有至玄孫始碑之理碑不得保完盖己再焉神道又闕豊鐫何歟公性簡儉家無石砌 傳誦至今或因遺命勿立歟 有鐸倡爲重建之謨而儉議屬余以其事逐 布告湖右宗僅能各出一端綿布合成三十有三匹 克善力綿計拙不克成功逾十年所而綿布演爲五十其數迺者克善姑子朴承休來莅洪邑以其資屬焉不數月工告訖前面大宇縣監鄭彦悅所書仍叙顯末以示來裔云爾 後孫 掌令 克善

漢陽趙氏 高麗末期 顯達하여 國初에 이르러 대대로 큰 名望이 있었다. 이 태조를 도와 開國 定社 佐命 세 가지의 큰  冊封 받았으니, 勳業이 마땅히 國史에 빛났을 것인데, 史記 秘藏되어 참고 할 수 없고, 집에 寶藏 遺像 世蹟(대대로 전하는 遺蹟) 遺勳이 모두 壬辰倭亂에 실전되어 벼슬의 이력과 行治의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先君子(자기 아버지를 일컬음)께서 말씀하시기를 洪陽族人 世珍의 집에 行狀(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 한통이 있는데, 寶襲하여 남에게 보이기를 허락지 않는다.” 했었다. 이제 와서 그의 후손을 찾아가니 이미 유실된 것이다. 어찌 한탄스럽고 애석함을 감내하겠는가.

 

의 묘소(衣履之藏) 交河縣에 있는데 墓碑가 또한 破損되었다. 朝家에서 賜牌하고 禮葬(오늘날의 國葬)한 위치로서 통탄스러운 일 더욱 어떻다 말하겠는가? 먼 자손인 有鐸 宅俊이가 잇달아 나가 살펴보고 와서 그곳의 상황을 말하기를 깨진 비석의 후면 각자에 邦楨, 參議, 네 글자가 있다.” 했는데, 현재 우의정인 沈公之源이 옛날 洪州牧使로 있을 때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공의 묘를 봉심(祇謁)하였는데, 이때에도 묘갈에 기록(欸識)이 보존되었으니, 곧 우리 외선조인 판결사공 邦楨과 참의공 邦彦이 세운 바이다.” 했다. 그렇다면 판결과 참의는 에게 玄孫이 되니, 어찌 현손에 이르러 비로소 비석을 세울 이치가 있겠는가? 비석을 보전 못하기가 이미 두 차례나 되었고 神道碑 역시 훌륭한 새김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의 성품이 간략하고 검소하여 집에 섬돌(石砌 ; 오르내리는 층계 돌)이 없었다. 지금까지 전송(傳誦)된 것으로 보아 遺命으로 세우지 못하게 된 것인가?

 

有鐸이가 다시 세울 계획을 주창하자, 여러 의논으로 나에게 그 일을 위촉했다. 드디어 호우(湖右) 제종(諸宗)에게 布告하여 근근히 각각 한필의 綿布(무명)를 내게 하여 도합 33필을 거두었다. 克善이가 힘이 모자라고 계획이 졸하여 성공을 이룩하지 못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면포는 50필로 불어났다. 얼마 전에 克善의 내종(姑子) 박승휴가 홍주읍에 임관되자 그 자재를 위촉하여 수개월도 안되어 준공했는데, 前面大字는 현감 鄭彦悅이 쓴 바이다.

 

인하여 그에 대한 顚末을 서술하여 후손(來裔)에게 보이노라.

 

후손 장령 극선

 

(한풍군파, 온양군수 文穆公 克善, 1595(선조28) - 1658(효종9), 신묘보[23] 족보 편수, 양절공墓碑陰記) : [장명산 유택에 세워져 있던 묘비문 내용]

▲▼파주장명산선산 舊幽宅: 경기 파주시 오도동 산 21

▲▼現幽宅 : 충남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559-2

▲▼現幽宅 : 충남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5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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