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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도시향제례❀

◐남원 의병장 義忠祠 山西公 趙慶男 석채(釋菜)봉행◑◈조경남 (趙慶男)[1570~1641]◈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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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은 조선 중기의 무인으로 본관은 한양이요, 자는 선술이다. 또 호는 산서, 산서병옹, 산서처사, 주몽당주인 등 여러가지로 불리었다.
1570년(선조 3년) 오늘의 남원시 주천면 은송 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사직 벽이 며 어머니는 남원양씨이다. 사대부 가정 에서 태어나 사대부 의식이 매우 강했으며 문재가 남달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지만 성격이 매우 활달했다. 10세에 류인옥에게 입문해 제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3세 때는 난리가 있을 것이라 예견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18세에 중봉 조헌의 문하에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했다. 조중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순국한 분이다.
조경남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군문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29세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의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해 금산을 비롯, 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특히 조경남은 13세 때인 1582년(선조 15년) 12월부터 1639년(광해군 2년)까지 58년간의 사적을 일기로 남겼다.
이는 모두 4권 2책의 피라본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난중잡록’이라고 부른다. ‘난중잡록’이라고 한 것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두 차례의 국난 기록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직접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또한 나라 전체의 전항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후손이 보존한 이 ‘난중잡록’ 초본의 △제1권은 1582년 8월~1592년 7월 사이 △제2권은 1592년 8월~1593년 6월 사이 △제3권은 1593년 7월~1598년 12월 사이 △제4권은 1599년 1월~1610년 2월 사이로 나누어 편찬되어 4권 2책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1964년 9월 속 ‘잡록’ 4권 2책을 추가해 전 8권 4책으로 늘렸다. 책머리 에는 기정진, 최시옹과 저자의 서문을 실었으며, 끝에는 한익철의 발문과 11대 종손인 조태희의 간행사를 붙여서 그 후손 들이 석판으로 간행 반포했다.
이 간행사에 따르면 인조 때 ‘선조 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이 초본이 사료가 참고가 되었으며 그 부분을 자성해 정부에 보관하는 한편, 원본은 작성해 1657년(효종 8년) 본가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 뒤 고서간행회에서 ‘대동야승’을 간행할 때는 제26권부터 제34권까지 9편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은 정부에 보존되었던 부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난중잡록’ 이밖에도 ‘속잡록’을 합해 ‘산서야사’ 또는 ‘대방일기’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또 이 ‘난중잡록’은 ‘임진왜란사’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당쟁, 외교, 군사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된데다가 객관적 기술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조경남이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의 활동이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 때도 싸움터에 나가 몇 차례 적과 싸웠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는 늙은 외조모가 있어 피난이 불가피 했다. 그는 6세에 아버지를, 14세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조모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늙고 병이 든 외조모를 모시고 지리산으로 피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조경남은 정유년인 1597년 9월 말경에 들어서였다. 이에 앞서 왜적은 이해 추석을 전후 남원성을 무너뜨리고 5천여 명의 인명을 무참히 살육했었다. 이 무렵, 조경남은 지리산 황류동에 피난 중이었다. 그는 남원성의 함락에 대해 그의 난중잡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 15일 밤(1597년) 달은 휘영청 밝은데 멀리 남원성에서는 왜놈들의 조총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터져 나오는 총포의 불빛으로 하늘은 대낮과 같았다. 잔악한 적군의 포위 속에서 고전을 하고 있을 아군을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원통해 모르게 소리를 내어 통곡했다. 그리고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만약에 나에게 한 부대의 병력만 주어진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쳐들어가 고전하는 아군을 돕고 적의 기세를 분쇄할 자신이 있다. 허나 뜻만 있을 뿐, 아무 힘이 없으니 오직 분하고 분할 뿐이다.” 라고 했다. 또 9월 22일에는, 남원 동쪽 10리쯤 떨어진 불우에서 왜적 5명을 만나 동지 박언량과 이들을 살해했고 그 이튿날에는 마침 임실에서 남원을 거쳐 구례로 빠지려는 왜적을 그 길목 궁장현에서 김완, 박언량, 정사진 등과 함께 처음에는 활을 쏘아 다음에는 육탄전을 벌여 적 56명을 살해했다.
또 그 무렵 산동톤에는 왜적 400여 명이 머물며 익어가는 벼를 베어 군량미를 비축하고 한편으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김완, 양덕해 등 10여 명과 함께 야습해 적 55명을 살해했으며 이 밖에도 조경남은 적을 쫓아 경상도 하동·산음 또는 구례, 순천까지 전전하면 서 여러 차례 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편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의 생애를 보면 39세 때에는 향시 양장에, 45세에는 삼장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크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인조반정 후 54세에 진사시를 통과했지만 세상에는 인연을 끊고 방장산 용추동에 들어가 별업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나오지 않았다. 또한 병자호란 때의 홍익한·윤잡·오달제 등 삼학사가 중국심양에서 혹독한 곤혹을 치르고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충의를 읊기로 했다.
1641년(인조 1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1세였다. 남원시 이백면 초동마을 에 묘와 의충사가 있으며 주포서원에 배향되었다. 최근 이상과 같은 공적 내용을 감안, 지역향토예비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는 조경남 장군의 이름을 붙여 조경남 대대라는 현판식까지 했다. 이때 후손 조용석 과 군부대 장병 및 지역 문화계 인사까지 참여해 뜻있는 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신병 교육 시 필요에 따라 현장답사까지도 할 계획이라고 하니 뒤늦게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義忠祠 山西公 趙慶男 秋季享祀◑

◈조경남 (趙慶男)[1570~1641]◈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으로 불리우며 남원 주천면 은송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사직 벽()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사대부 의식이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으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되었으나 기상이 활달하였다. 10세에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하여 제술(製述)로 남을 놀라게 하였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세에는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29세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의 왜군을 무찔렀다.

 39세에는 향시(鄕試) 양장(兩場),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하고서도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업(別業)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瀋陽) 순절 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사후 주포서원(周浦書院)에 향사되었다.

1582년에서 1639년까지 58년간의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난중잡록이 있다. 속잡록(續雜錄)과 더불어 의병활동의 생생한 기술과 명청과의 외교활동의 객관적 기술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의 묘가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산 140-1에 있으며 사당 "의충사(義忠祠)"에 영정이 있다.

()55723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초촌길 110-9

(지번)전북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706-5

먼저 조경남 장군을 모신 의충사와 난중잡록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남원의 유구한 역사 속에 가장 빛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단언코 조경남 장군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경남 장군은 1570년(선조3년)에 출생하여 1641년(인조1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의병을 일으켜 남원 주천과 이백, 운봉을 비롯해 함양과 산청, 구례, 하동 등지에서 수많은 왜적을 무찌르며 양민 보호와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신 바 있습니다.
또한 1582년부터 1638년까지 57년간의 국내외 정세와 의병활동 상황, 시대상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난중잡록을 저술 하셨습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선조수정실록을 엮을 때 사료로 참고하고자 난중잡록을 빌려다 인용하였다고 하니 그 가치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난중잡록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경남 장군을 모신 의충사는 이백면 초촌리 산 140-1번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묘역은 8,174㎡로 사당 1동, 삼문 1동, 강당 2동, 관리사 1동, 홍살문 1동 등의 시설물이 있습니다.

의충사는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난극복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35사단과 결연하여 신병교육대를 조경남 부대로 명명하고 장병교육과 정기적인 현장답사 및 참배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난중잡록은 전란사 연구의 필수과목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어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와 학도들의 의충사 방문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춘향전과 관련된 국문학계와 언론계 인사들이 자주 방문하고 있으며 특히 경북 봉화와 영주 지역에서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이 찾아오고 계십니다.

하지만 현재 의충사의 관리상태를 보면 과연 우리 남원이 역사의 산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담장은 철조망으로   허술하게 되어 있으며 묘역과 사당은 노후화된 상태로  손길이 닿은지 오래입니다. 경계석이나 바닥은 근래에는 볼 수 없는 시멘트 제품으로 깨지고 파여있어 교체가 시급한 실정입니다.

번듯한 조경수 한그루, 잔디식재 한곳 없는 곳에 장군님과  난중잡록을 모셨다 말하기에는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다행히 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사회 각계각층의 245분이 모여 「의충사수호관리위원회」를 조직해 묘역관리를 하고 매년 10월 9일 향사를 봉행하고 있으나 재원부족으로 그 정성과 노력은 빛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소중한 역사현장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의충사 묘역정비와 환경개선에 정성을 다해주시길 당부합니다.
남원시의회에서「역사와 문화재 연구회」를 구성하여 최근 경남과 남원의 문화재 관리실태를 수차례 비교·점검한 바 있습니다.

남명 조식, 일두 정여창, 옥계 노진 선생 등 영남학파 거유들의 정신이 절절히 전해져오고 문화재가 뛰어나게 오래도록 보전․관리되고 있어 거듭 부끄럽고 부러웠습니다.

이환주 시장님과 남원시는 이제부터라도 남원 정신을 선양하고 도 지정 문화재, 더 나아가 국가 지정 문화재 선정에 모든 노력을 다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 임진왜란 역사답사지 -난중잡록의 저자 」

** 의병장 조경남 장군 **
- 남원시 이백면 소재 의충사(義忠祠) -

※ 난중잡록조경남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남원시 소재 의충사 답사.
   1. 일 시 : 2021. 3. 11.(목) 09:30 ~ 17:00
   2. 장 소 : 남원시 이백면 초촌길 706-7. // 조경남 장군 묘역(063-625-5965)

(사)정유재란역사연구회

▣ 의병장 조경남 장군 의충사(義忠祠)

 

** 남원시 이백면 의충사(義忠祠) 조경남(趙慶男, 1570~1641) 장군을 찾아서....

예부터 남원은 지리적으로 천혜(天惠)의 요새를 방불케 하는 조건을 지닌 고을이다. 동으로는 백두대간 지리산, 서쪽으로는 섬진강의 상류인 요천강이 흐른다. 전주, 구례, 운봉, 장수로 통하는 길목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교통 통신제도인 역참이 설치됐던 군사적 요충지다.
이곳이 유학자이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 장군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원에서 가다보면 오동초등학교를 가기전 굴다리 400m전 커브길 우측으로 보면 의충사 조경남 장군 묘역 1km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 장의문 >

** 우회전하여 조금 직진하면 의충사의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주차장이다. 주차장 앞에 가로막고 있는 외삼문은 장의문(仗義門)이다.

 

< 사적비 등 비군(碑群) >

 

< 경모재(景慕齋) >


< 강당(講堂) >

 

** 조경남 장군은 1570년(선조 3)~1641(인조 19). 남원군 주천면 내송리(당시 남원도호부)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무인이며,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

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이다. 아버지는 사직 벽(璧)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이다.

 

** 조경남은 6세 때 아버지 조벽, 13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외조모 손에 양육되었으나, 그

기상이 활달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장군은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사대부 의식이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10세에 진사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해 글을 써 남을 놀라게 했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세에는 자수성가한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했다.
39세에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45세에 삼장(三場)에 합격하고서도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 의충사(義忠祠) >


< 조경남 장군의 영정 >

 

** 인조반정 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 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업(別業)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심陽) 순절 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사후 주포서원(周浦書院)에 향사되었다.

 

**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정유재란 최초의 의병장인 조경남은 원래 남원에 살던 28세 평범한 서생이었다.

그러나 1592년,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뒤흔들었던 전쟁의 소용돌이에 그의 인생도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남원부 관아에서 서기일을 하면서 보고들은 모든 소문과 상소, 격문을 일기에 기록해가며 패전에 울고 승전에 웃으며 점차 자신도 그들처럼 싸우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조경남 선생의 신도비 >

** 그러나 막상 정유년 8월 왜군이 남원에 들이 닥쳤을 때, 그는 성에 남지 않고 가솔들과 산속으로 피난을

떠났다. 막상 닥치니 겁도 났을 것이고 가장으로서 차마 가솔들을 다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원이 함락되고 한 달간 왜적이 곳곳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걸 보면서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남원으로 돌아간다.


** 혼자 싸울 수는 없으니 여러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각설하고~ “형님들~ 영남에서 변이 닥쳤을 때 그 사람들은 싸울 줄을 몰라 저마다 자기 살 길만 찾았는데,

서생인 곽재우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많은 적을 베어 많은 고을들을 수복했소. 그런데 우리 고을은 왜적이 본도에 들어온 뒤로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 베어 마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록 무시무시한 왜적이 득실거려 방책이 없다 하지만 이 땅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맨손으로라도 싸우다 죽어야 할 판인데 우리가 이렇게 숨어있어야 되겠습니까~? 지금 적은 분산되어 있고 길은 험하니, 이곳 지리에 익숙한 우리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자~ 모두들 같이 싸웁시다~!!” 라고 외쳤다.
“즉 우리도 할 수 있다 한번 해보자~ 이거죠. 한번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다 겁쟁이들만은 아닙니다.”
조경남의 감동적인 연설은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충의를 가진 선비들인 형들은 모두들 일어나 조경남의 어깨를 붙잡으며 “왜적 토벌하고 사로잡고 목 벨 사람을 뭐하려 멀 리가 찾겠나?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데 ‘응~’ 경남이 잘 가게, 자넨 진짜 충의지사야 멋져. 그럼 안녕히! 우린 영원히 자넬 잊지 않을거야.” 이렇게 환송해 주었다.

 

< 조경남 장군의 묘 주위 마을 >

 

** 2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8월 가산을 풀어 모집한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운봉 팔랑치 첫 싸움에서 왜적 100여 명을 전멸시켰다. 이어 육십령 전투에서의 승전을 비롯해 정유재란 때 불우치 매복전, 궁장동 혈전, 하동 추격전, 탄음과 산음의 화공전 등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왜적 수천 명을 섬멸하며 호남을 지킨 명장이 되었다.
** 왜적을 속이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한 병법과 용병술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도 단 한차례 패한 적이

없었다. 부하들도 한 명의 희생이 없어 당시 ‘제갈공명의 환생’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병장

조헌의 주제자인 장군은 적과 맞서 싸우며 왜병을 직접 격퇴한 무패의 의병장이 된 것이다.

 

< 조경남 장군의 묘 >

 

** 이 같은 공적을 인정해 조정에서 호조참의(정 3품)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끝내 사양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또 위태롭게 되자 67세의 노령을 무릎쓰고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진격했다.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통분하여 되돌아 왔다.

 

< 난중잡록 책 >

** 우리가 알고 있는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장군이 57년 동안 국내 중요 사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서책이다. 직접 체험한 전쟁 종군기이기도 하다. 몸소 견문한 정치, 문화, 사회성을 가식이나 과장 없이 광범위하게

기술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폭넓게 다루고 있다.


**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 등 중요 사건과 풍속, 민간생활 등을 상세하게 적어놓아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 1649년(인조 27) 선조실록 수정청에서 난중잡록을 빌려다가 8년간이나 참고 사료로 활용했다. 이후 16권 한 벌로 필사해 규장각에 보관하고 나서야 1657(효종 8) 원본을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장군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다. 난중잡록 이외도 성리학 주석 3권, 윤리변 5권, 오상통론과 소견록 각 1권의

저서가 전했으나 화재로 모두 소실됐다. 때마침 첨지중추부사 최시웅이 빌려 간 난중잡록 8권만이 현재 남아 있을 뿐이다.

 

** 이후 장군은 말년에 지리산 동쪽 초입인 남원시 내송리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고 살았다. 인근 지리산

명승지를 두루 찾으며 뜻 맞는 문인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즐겼다. 장군은 1641년 5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그 후 사림의 건의로 사헌부 비평, 승정원 좌승지(정3품), 호조참판(종2품)에 추증됐다. 현재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에는 1986년부터 남원시와 그의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정비한 사당 의충사(義忠祠)와 묘가 있다.

장군이 집필한 ‘난중잡록’은 후손들이 보관하다 현재는 남원시 향토박물관에 위탁보관 중이다. 현재 생존 중인 그의 12대손 조영진(71. 남원시)씨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남원은 물론 인근 지역 곳곳에서 왜적을 섬멸했던 장군의 일화가 ‘조장군 이야기’로 불리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고 말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출생지였던 주천면 은송리에 있는 생가는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남원시는 하루빨리 이러한 애국충절의 고장이 남원임을 증명할 수 있도록 장군의 생가도 복원하여 명실상부한 의병장 조경남 장군이 거듭 날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바라면서 발길을 돌린다.

 

※ 유랑자의 2021. 02. 24 다음 카페 기록에서 발췌 함.

※ 의충사 : 전북 남원시 이백면 초촌길 110-9 (지번) 이백면 초촌길 706-7

 

< 남원성 전투 상황 >

< 난중잡록 책 >

< 전쟁의 참혹한 상항을 기록하다 >

< 산서 조선생 연보 >

< 조경남, 난을 기록하다 >

< 임란기 남원의 인물과 그 기록 특별전을 열며 >

< 정충록 >

< 의병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 >

< 변사정, 의병을 모아 왜군에 항전하다 >

< 안영,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

< 양대박, 운암전투 승리의 주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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