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이방원 일당이 포은선생이 이성계의 문병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 선죽교에서 조영무를 축으로 조영규고여와 함께 철퇴로 처죽이는 모습!
◈1389년,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태생이라 주장하며 폐위시킨뒤 공양왕을 옹립할때 동참했다. 흥국사 9공신(이성계, 심덕부[14],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의 하나로서 이성계파로 여겨지게 되고, 반(反) 이성계파의 테러 대상으로 오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이성계의 저의가 다른데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성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진양과 함께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멀쩡히 돌아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이성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에 방문했다. 기록으로는 이때 이방원과 술자리를 했고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자, 단심가로 화답했다고. 이 부분을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이성계가 낙마한 것처럼 꾸며서 정몽주가 일을 도모하게 한 후, 개경으로 귀환한 이성계가 정몽주를 용서함으로써 한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으나 실패한 것으로 각색했고, 이방원과 서로 시조를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구구한 말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딱 시조만 주고받도록 깔끔하게 처리하여 명장면을 연출했다.
●선지교의 피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 《태조실록》 권1 <총서>,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1392년 을묘일(음력 4월 4일).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2 ##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알리자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낌새를 살피려 했으나 태조는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태종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정몽주가 돌아갈 때 조영규(趙英珪) 등 너덧 명을 보내어 길에서 그를 격살하게 하니 나이 쉰여섯이었다.
《고려사》 권117, <열전>30, 정몽주##
어쨌든 이것으로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신왕조 수립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하고, 판전객시사(정3품)이던 조영규를 비롯한 일부 부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죽였다. 《태조강헌대왕실록》에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이어 판개성부사 유원의 문상을 갔다 오느라 원래 다다르기로 예정되었던 곳에 정몽주가 제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자 이방원이 초조해 하는 모습도 실려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습격하는 조영무 등에게 고함을 지르다 타고 있던 말이 먼저 칼에 맞고 바닥에 쓰러진 것을 다시 일어나서 집 쪽으로 뛰어가려다 뒤따라온 고여가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선지교에서의 죽음은 이후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먼 후대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 본인의 제자였던 권우나 권근의 저술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당대 사람들의 증언도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으로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이 설은 권근이나 권우가 머슴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권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날 권근이 끝까지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거리를 분주히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정몽주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한다. 정몽주는 이 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일 사람 얼굴을 봐서 뭐하겠나라는 설도 있고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되는데 그 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것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것과, 수행하던 종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종이 그것을 거부하고 함께 죽은 것 등.
사실 이성계 낙마~정몽주 사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내용으로 남아있어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하다. 다만, 대부분의 기록은 정몽주가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계획에 대해서 알았다는 점에서 공통되며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죽을 줄 알면서 병문안을 갔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거리이다.
728x90
반응형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양등처행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요양행성(遼陽行省) (1) | 2023.03.05 |
---|---|
▣古 高句麗, 高麗 領土▣ (0) | 2023.03.05 |
▣쌍성총관부는 어디에 있었을까 권근이 주원장에게 항변한 고려의 영토!!!▣해외에서 난리난 옛 고려영토! 한국영토 확장될 최근상황 - "영국 유력지가 주목한 이유" (0) | 2023.03.04 |
■고구려/고려 천리장성[千里長城] (0) | 2023.03.04 |
■일본도자기시조 이삼평가 종손이 운영하는 도자기그릇가게 홈페이지 : 일본궁정에 납품하는 가게, 陶祖 李参平窯, ■일본도자기여조 : 갤러리 백파선 Gallery Baekpasun (0) | 2023.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