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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조 양렬공(諱仁璧)과 6세조 가천재공(諱師)의 동명서원 춘향제[안내]◑
●5세조 추성양절익위보리찬화좌명공신(推誠亮節翊衛輔理贊化佐命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 영경연사(領經筵事) 한산백(漢山伯) 행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行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겸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양렬공(襄烈公)이며 휘인벽(諱仁璧)과 6세조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가천재공(諱師)의 동명서원 춘향제를 2023년 5월 9일(화요일) 오전 11시부터 (우) 25014 강원 양양군 양양읍 서원길 44-9 (지번) 양양읍 조산리 543 소재 동명서원에서 모시게 됨을 종친님들께 알려드립니다.
♠가천재공 현령공파는 용인지역에서 버스1대, 현감공파는 제천/단양지역에서 버스1대로 대절해서 가기로 정기총회에서 결정 하였습니다! 6세조 양절공파종회와 양경공파종회 별로 버스대절하여 가는 방향으로 결정하면 좋은 안건이라 생각합니다!!!
(우) 25014 강원 양양군 양양읍 서원길 44-9 (지번) 양양읍 조산리 543
◐동명서원(東溟書院) 충현사(忠賢祠)현판◑
■충현사(忠賢祠)현판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67-1649)■
==병참공파 서각자 25세 趙守衡부인 古暈(옛무리) 李殷珠 여사==
▣동명서원유허비명[東溟書院遺墟碑銘]▣
◐公有偉節 矢蹈于東 공유위절 시도우동
♠공은 거룩한 절개가 있으니,
노중련 같이 동해에 빠지기로 맹세했도다!
◑公有宏德 迺享儒宮 공유굉덕 내향유궁
♣공은 큰 덕이 있으니, 서원에서 향사하였다.
◐睠彼凔溟 百川之宗 권피창명 백천지종
♠저 푸른 바다는 백 갈래의 냇물이 모인 곳이다.
◑仰公遺躅 萬世高風 앙공유촉 만세고풍
♣공이 남긴 자욱은 만세에 높은 풍도로다.
◐戒爾樵牧 是欽是崇 계이초목 시흠시숭
♠초부와 목동에게 부탁하노니, 이를 흠모하고 공경하라!
===後孫 觀察使 鍾弼[1898]===
▣▣▣ [ 동명서원 창건기 ] ▣▣▣
내가 중승으로 있을 때에 사건을 논하는데 너무 지나치다고 배척을 받아 이 땅으로 보직되었다. 수레를 내리면서부터 먼저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를 것을 급무로 삼아 향교를 중창하여, 크게 짓고 재사를 개조하여 새롭게 하였다. 또 학전을 마련하여 제생을 조석 식사의 이바지 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생각건대 교생들중에 군을 면하려는 자가 많이 있어 떠들고 소란을 피우므로 비록 준수하고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오히려 재사에서 착실히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렬읍에서도 모두 서원을 한적한 곳에 지어 많은 선비의 학업을 닦는 장소로 삼고 있는데 돌아보건대 이 읍에만 홀로 없으므로 나는 분개한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재물과 목공을 모아 백록동의 옛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더니 마침 조장에서 본부 대포진을 철거할 계제를 당하였다. 군기와 군향을 본부로 옮겨 왔으나 만호가 살던 관사만 홀로 우뚝하게 솟아 있어 장차 헐어다가 관용에 보태 쓰게 되었다. 내가 선뜻 기쁜 생각이 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하느님이 내게 집 한채를 빌려 주서 제생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으려는 것이니 꼭 헐어야할 이유가 없다. 」
하고 이에 구관을 그대로 쓰기로 하고 현판을 걸어 동명서원이라 일렀으니, 대개 제실과 강당이 의젓하고 다시금 새로웠다. 이에 부로와 제생이 모두 모여 감사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무릇 서원을 세우는 데는 반드시 그 지방의 명현이나 높은 덕이 있는 자를 모셔서 사당을 지어야 하는 것이니 예전부터 이르는 바, 『향 선생이 죽으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은 이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 고장에도 또한 사당에 모실만한 선현이 있는가?」
하였더니 전 정언 노경복은 나이 지금 八十으로 명경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조정에서도 드러났으며, 전일의 착한 분의 행적도 많이 알고 있으므로, 이 고장의 거인이며 덕이 두터운 자로 일컫는데 수염과 눈썹은 희고 말라서 백학과 같았다.
앞 자리에 나와 말하기를
「이 부는 멀리 떨어져 큰 고개와 바다로 쌓여 있어 예전의 어진이로 손 꼽을 만한 분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으나, 고장 부로들의 전하는 말에 용원부원군 조아무개라는 분이 국초에 이 땅에 와 숨어 살았는데 그의 남긴 풍습과 혜택이 매우 크니 조공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두렵고 놀라와서 이르기를,
「용원 부원군은 나의 八세 조이다. 그 분의 사업, 공훈과 벼슬하고 물러간 일은 세대가 멀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가승을 상고해 보면 공은 여조에 있어 예전에 세운 공훈으로 명망이 세상을 뒤덮었는데 마침 고려의 운은 다하였고, 진인은 한 집안에서 일어났으므로 벼슬하지 않고 물러가 동해 가에 숨어 있었으니 그 높은 풍도와 큰 도의심은 지금까지 세상에 빛나니 마침 사당을 지을만 하나 나는 그 분의 먼 자선으로 감히 이 예절을 거행하는데 앞장 서서 할 수는 없다.」
하여 세 번이나 머뭇거리면서 사양하였더니 부로와 제생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용원군의 절의는 전해 온지가 오래되었는데 우리 양양 사람은 그 남아 있는 말만 듣고도 감동하였으니,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덕택이니 일 향의 의논이 다 그러한데 부사는 어찌 자기의 선조라고 혐의할 것인가.」
하고 드디어 최정립, 이현일을 시켜 서원 북쪽에 사당 짓는 일을 감독하게 하여 제사지내게 하므로 나도 마지못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소금 가마 한 자리와 어선 한 척과 둔전 七석 지기를 마련하여 춘추향사의 미천과 제생이 공부하는데 쓸 양식으로 삼았다. 아! 흥하고 패하는 것도 운수가 있고 이루어지고 헐어짐은 일정한 법이 없으니 옛날 군인의 적을 막던 곳이 오늘날 선현을 향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후일에 인재와 선비들이 쏟아져 나와 계속하여 조정에 벼슬하여 사대부가 대를 잇게 되면 태령밖에 있는 거칠고 궁벽한 시골로 하여금 공자, 맹자의 도덕을 지키는 지방이 될 것이니 내가 이것을 경영하여 설립한 공도 또한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원컨대 제생은 힘쓸지어다.
후손 양양부사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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