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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북극곰소련놈들-우크라이나 전쟁(우크라이나어: Радянсько-українська війн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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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한테도 쳐맞는 놈들이 솔직히 핵무기 빼고 싸우면 서우크동한국 양끝단에 있는 나라들하고 동시에 전쟁나면 소련놈들 못막는게 뻔하고 중간에 있는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땅 반으로 토막 내버리고 소련은 역사에서 삭제됨!!!

 

♣우리나라 같이 이른바 누구를 침략해 본적이 없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이 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이유는 유럽을 돌아다녀보면 알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일이나 휴가로 유럽을 들렀고 많은 유럽인들 또한 러시아에 갔었다. 특히나 유럽은 철도와 도로가 다 연결이 되어 있어서 사실상 이동의 자유가 있었던 샘이다.

 

그리고 기이한 점은 소련은 1991년 망했으며 현재는 공산당도 아니고 통합러시아당이 집권당이며 푸틴이 황제노릇을 하고 있지만 명백하게 국민투표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형식을 띄고 있다. 게다가 자본시장도 개방이 되어 있어서 주식투자도 가능하고 은행설립도 가능하고 많은 외국기업도 진출해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러시아는 예전의 공산당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더 이상 아니라는 말이며 또한 그런 모습이다. 지금은 러시아 경제제재로 외화결재나 화물의 입출입이나 방문 어렵지만 전화통화나 메일 등은 검열없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상한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른바 민주진영인 서방국가와 전체주의진영인 러시아와의 이념적 대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서방국가들이 이 빨갱이새끼야라고 러시아를 조지거나 러시아가 부루조아개돼지들이라고 서방국가를 욕하며 싸우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 결국에 이 전쟁은 정확하게 원인을 분석하자면 푸틴의 전쟁이다. 예전에 소련연방이었던 국가들이 독립을 하고나서 초기에 독재권력이 들어서는 고통을 겪다가 슬슬 서방물이 들어서 민주적정권으로 바뀌고 정치, 경제적 이유로 "유럽국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었다. 

 

누가봐도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서 낙후되었으며 서유럽과 거래 등을 통해서 빨리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동유럽국민들의 열망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소련의 영향력, 철의 장막이 걷혀지자 그동안 안보이던 젖과 꿀이 흐르는 유럽이 보이게 된것이다.  만일 러시아가 유럽보다 더 많은 경제적 혜텍을 주었다면 분위기가 달랐겠지만.. .그러면 동유럽 국가들이 EU 가입하면 러시아로써는 무슨 손해가 있느냐면 사실 별로 없다. 동유럽의 경제가 발전하면 자원부국인 러시아도 자원을 팔아 발전한다. 그리고 그 동유럽 국가들의 규모를 따지고 보면 사실 상 러시아에 위협이 될만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구소련연방에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크로아티아..거기다 마케도니아 등등 러시아와 손절하고 나토에 가입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유럽이 EU라는 경제공동체 이외에도 NATO라는 군사협의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돈 더많이 되는 쪽으로 들러붙는다. 이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토가입은 이 조직을 배신하고 적대적 조직에 가입한다라는 뜻이다. 꼬붕이 손씻고 나가겠다고 해서 놔뒀는데 상대 조직에 가입해버리네. 이러면 상황이 복잡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줄줄이 상대조직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러시아는 자신의 입지와 역할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와바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냥 깨끗히 포기하고 그러든가 말든가 하면 모든 것은 원만히 끝나지만 푸틴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푸틴이 권력을 장악하고 겉으로만 민주적인 선거를 거쳐서 거의 영구집권체제를 확립하고 나니까 슬슬 옛날 생각이 나는 것이다. 만일 러시아가 푸틴이 어떤식으로든 견제를 받고 정치적 위협을 겪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절대적 독재권력이 들어서면 더이상 국내문제는 신경쓸필요 없다. 김건희 말처럼 밑에놈들이 알아서 해주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과거 쏘련시절의 영광이 떠오르게 되고 결국에는 등을 돌리는 구 쏘련연방국에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졌고 그것이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쏘련연방에서 독립하면서 러시아가 놔주는 대신에 나토로부터 가입을 받아주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받는다. 즉 꼬붕을 놔줄테니 니 조직에 가도 받지말라는 것이고 상대조직도 오케이 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몰도바 등 주변국가들이 이미 나토에 가입된 것을 보고 나토에 가입요청을 하지만 나토는 약속을 했으니 거부를 했다.  그런데 영기서 중요한 것은 나토도 사실상 러시아를 적대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심지어는 러시아조차 나토의 가입시키는 것을 고려했었을 정도이다. 초기의 나토가 바르사뱌 조약기구에 대한 대응으로 창립이되었지만.....

세르게이 코롤료프(Sergei Kololev)는 러시아의 과학자로 구 소련의 ICBM 및 인공위성 개발에 기여하였고, 또한 러시아가 현재 유용하게 운용 중인 소유즈 로켓을 개발하였으며, 러시아 우주계획의 아버지로 불리는 천재 과학자이다.


코롤료프는 1906년 12월 30일 제정 러시아,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러시아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


1918 ~ 1920년 사이 러시아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유럽엔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에선 볼셰비키 주도의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공립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그 기간 동안 코롤료프는 집에서 혼자 독학을 해야 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배식 공급도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코롤료프와 그의 가족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고 티푸스와 독감 등은 흔히 걸리는 병이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코롤료프는 학문에 매진하여 1924년 키예프 공대 항공공학과에 입학한 후 곧이어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 대학으로 옮겨 항공기 설계 공학으로 학부를 졸업한다.


당시 그의 지도 교수는 소련의 유명한 항공기 설계자 투폴레프였는데, 투폴레프는 훗날 소련군의 폭격기와 수송기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러시아 방위산업체의 설립자가 된다.​​


졸업 후 항공기 설계국에서 일하며 그는 취미로 틈틈이 로켓을 독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알아본 공산당은 그를 소련의 로켓 연구소 제트 추진력 연구 그룹으로 전근시킨다.


이곳에서 코롤료프는 치올코프스키 로켓 방정식을 유도해 낸 러시아의 천재 로켓과학자 치올코프스키를 만난 뒤 그에게 큰 감명을 받고 제트추진 연구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치올코프스키는 분사 가스의 속도와 로켓 엔진의 점화, 연소, 종료 시의 질량비가 큰 만큼, 큰 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치올코프스키 공식으로 수식화하여 최초의 로켓 이론을 완성한다.

제트 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1933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엔진 개발에 성공한 코롤료프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곧 제트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으나...


그의 승승장구를 시기하던 동료 발렌틴 글루쉬코는 그가 주도한 몇 개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버린 것을 빌미로 1938년 그를 국고 낭비 혐의로 고발해 버린다.​​


이 시기의 소련에는 반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대숙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국 동료 과학자의 모함에 의해 체포된 코롤료프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의 수용소인 굴라그로 끌려간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코롤료프는 치아를 모두 잃고, 심장병에 걸렸으며 배우자가 이혼을 통지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굴라그 강제노동 수용소의 수감자들.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려간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노동만 하다 죽으란 것과 같았다.


소련 공산당이 자국의 유능한 과학자를 수용소에 가두어 둔 동안 나치는 천재 과학자 브라운의 주도하에 탄도미사일 V2 로켓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기에 이른다.

나치의 로켓 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이었던 브라운 박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국이 포섭하여 훗날 미국의 아폴로 계획을 이끈다.


그리고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하고 2차 대전이 드디어 종결된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권을 진입했던 나치의 V-2 로켓은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 입장에선 너무나도 매력적인 무기임에 분명했다.​​


코롤료프를 허위 고발한 동료 글루쉬코는 소련군이 노획한 나치의 V2 로켓을 분해한 후 V2 로켓의 복제를 위한 연구를 반복하지만 제대로 된 복제품 하나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윽고 글루쉬코는 탄도로켓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은 소련에 단 한 명뿐이란 것을 깨닫고 상부에 보고한다.

"V-2 로켓의 비밀을 완전히 풀 수 있는 사람은 코롤료프 뿐이오."​​


6년 만의 석방, 그리고 로켓과의 재회를 위해 코롤료프는 곧 사면되어 V2 로켓의 연구를 위해 독일로 보내진다.


소련의 과학자들과 그리고 납치된 나치의 과학자들은 석방된 코룔로프를 중심으로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중대한 임무를 하사받는다.

"양키들에게 뒤처질 순 없다. ​

우수한 소련제 로켓을 만들라."



코롤료프는 철저한 분석 끝에 V-2 로켓의 카피에 성공하고 곧이어 개량 버전인 R-2 로켓의 발사까지 성공한다.

R-2 로켓은 V-2 로켓보다 2배의 사정거리를 보일 정도였다.

이러한 실험에는 여러 번의 실패가 있었고 매 실패마다 코롤료프는 소련 공산당의 협박과 압박에 시달렸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1953년 코롤료프는 사거리가 1200km에 달하는 R-5 중거리 로켓의 개발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1957년 여러 개의 엔진을 하나로 묶는 클러스터링 기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초의 ICBM인 R-7 로켓의 개발에 성공한다.


카자흐스탄에서 실험 발사된 R-7은 약 6000여 km를 비행하여 캄차카반도에 있는 표적에 정확히 떨어진다.

이 R-7 로켓은 소유즈 로켓으로 개량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무려 1500회에 달하는 발사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로켓이란 뜻으로 '로켓계의 폭스바겐'이란 칭호도 붙었다.

마침 같은 시기 미국도 ICBM 계획인 아틀라스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흐루쇼프 공산당 제1서기장은 코롤료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지금 미국 놈들이 로켓 발사에 번번이 실패하고 있을 때 우리가 재빨리 저 우주 공간으로 먼저 인공위성을 날려봅시다."

몇 달 내로 인공위성의 발사 계획이 잡혀있던 만큼 많은 과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나, 코롤료프는 그가 일생을 받쳐왔던 연구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엄청난 노력 끝에 코롤료프는 인공위성의 개발에 성공했고, 공 모양의 인공위성에 '동반자'라는 뜻의 '스푸트니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러시아 로켓과학의 아버지 치올코프스키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실은 R-7 로켓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비록 승전국이긴 했지만 과학기술력은 아직 미국에 한참 뒤처진 농업국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우주 진입에 성공해버렸고 그에 대한 소식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예로 당시 1957년 워싱턴 DC의 소련 대사관에서 열렸던 '로켓과 인공위성' 이란 학술세미나에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모였을 때, 세미나가 끝난 후 열린 파티에서 미국의 로켓과학자들이 소련의 과학자들에게 질문을 한다.

미국 : "소련의 로켓 개발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나?"​

그러다 술에 취한 한 소련 과학자가 너스레를 떨며

소련 : "아주 조만간 우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거다."​

미국 : "아주 조만간이 대략 얼마인가?"​

소련 : "일주일? 길어야 한 달 안이다."​​



이 말을 들은 미국의 과학자들은 모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농업국 가수 준인 소련이 어떻게 미국을  앞지를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마침내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는 미국 전역에 공식화되었고,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무시하던 소련이 이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주에서 핵무기를 떨어뜨릴 수 있게 되었다며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국에서는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불렀다.


그 후 거듭된 연구로 많은 데이터를 축적한 코롤료프는 불과 6개월 뒤인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을 태워 세계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낸다.

소련에게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타이틀을 넘겨주고
세계 최초 유인 우주비행사 타이틀까지 놓친 미국은
허둥지둥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세운다.​

우주탐사의 선구자인 소련도 대단했지만 미국의 저력 또한 실로 어마어마했다.

1969년, 기어이 미국은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유인 달 탐사에 성공함으로써 소련을 앞지르는 발판을 만든다.

미국에 질수 없었던 소련도 달 탐사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때 탐사선으로 설계된 것이 코롤료프가 개발한 소유즈 우주선이었다.
(소유즈 우주선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개량되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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