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일년만에 러시아 신화는 박쌀되였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6. 17.
728x90

https://blog.naver.com/zhengcj55/223030957599

 

일년만에 러시아 신화는 박산되였다

https://ml.mbd.baidu.com/r/VooCtf9Onu?f=cp&u=64606f5f11f83b38 2022년 2월 24일 부...

blog.naver.com

https://youtu.be/zefqT9Lheqk?t=4 

 

2022년 2월 24일 부터 2023년 2월 24일. 러시아 우크라 전쟁은 정확히 일년이다. "1시간 22분만에 우크라이나가 망한다'는 보도로 부터 오동지구 대치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놀라게 하였으며 특히나 일부분 사람들의 놀라운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우크라 전쟁 1주년을 맞아 한 해 동안의 전세를 한 차례 파노라마식으로 머리 빗듯이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어떻게 이 전쟁이 이렇게까지 번졌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년간의 러시아- 우크라 전쟁은, 가히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러시아군의 전면 공격 단계인 2월 말부터 3월 말까지 35일 동안 러시아군은 북에서 남으로 우크라이나 전체에 C형 대공세를 펼치며 9개 노선으로 나뉘었지만 주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중점을 두었다.

2. 러시아군 중점 진공계단. 4월 초~7월 초, 100일

3. 전쟁의 침묵계단.(대치) 7월 초-8월 말 50일

4. 우크라이나 반격 단계. 9월 초11월 상순, 70일.

5. 전략경색 단계 11월 중순부터 현재 까지 110일이다.

[개전 전책]

러시아군은 개전 당시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15만내지20만 명의 군대에 배속됐으나 개전 이틀동안에 참전한 병력은 겨우 일,이만명에 불과했고 일주일 뒤에도 겨우 5,6 만 명에 불과했다.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병력이 절대적 열세인데 푸틴은 어떻게 개전(開戰) 결정을 내릴지 궁금해 해왔다.

크렘물린이 FSB(연방보안국) 5국(대우크라이나 근무)에서 우크라이나의 핵심 장성들을 30억 달러에 매수됐다고 믿었던 사실이 4월에야 밝혀졌다.

2003년 이라크전쟁은 미 중앙정보국이 이라크군을 10년 앞당겨 30억 달러를 들여 연대장에서 국방장관까지 모두 사들였던 것이다.

50만 명의 이라크군은 싸우지도 않고 무너졌고, 1만 명의 미군이 쿠웨이트에서 바그다드로 흔들거리며 "말타고 꽃구경 하듯"이 바그다드에 도착하였다. 장소충선생마저도 이해 할수 없는 비밀 공작의 기적이였다.

 

 

미군의 이같은 성과를 배운 러시아도 30억 달러를 들여 우크라이나군의 핵심 장교들을 위로부터 아래까지 매수 할 생각이였다.

그러나 억울하고 한심한 진술은 FSB 5국의 정부국장, 그리고 150명의 부하들이 30억 달러를 떼먹어 탕진했다는 점이다. 매수란 푸틴을 구슬리는 말일 뿐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거야 말로" 솜뭉치로 가슴 칠 일"이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 계획대로 '특별한 군사행동'전개 하였다. 러시아군은 24시간 안에 400㎞를 돌진하고 키예프 등 요지를 강점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연 며칠에 걸친 인수작전의 접수만 가다렸다.

그 결과 20만 러시아군과 크렘린궁은 접수 대기조차 하지 않은 FSB 5국에 속았고 러시아군의 접수를 기다리는 우크라이나 장성은 하나도 없었고, 신속하게 움직여 저항 준비하는 우크라이나군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한 시간에서 한 해로 변한 '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다.

[초봄 키예프 전투]

키예프전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통제권을 놓고 러시아-우라오전쟁의 첫 번째 대전이자 영향력이 제일 컸던 최대 관심사였다. 목적은 바로 수도 키예브의 공제권이다.

 

 

 

키예프 전투의 관건은 24일 오후 늦게부터 저녘까지 치러진 안토노프 공항전이다.

러시아는 벨라루스(백러시아) 방향에서 미-17 수송헬기 약 30대를 동원해 약 400명의 공수병을 수송하고 공중돌격 키예프 북쪽 20㎞ 지점 호스토멜 진에 있는 안토노프 수송기 설계국 공항으로 이동시켰다.

러시아군의 정예 공수병 400명이 빠르게 공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국민경호대 제4기동여단이 신속하게 달려왔다.

초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치열한 전투를 거듭한 끝에 러시아군은 공항통제 작전과 수송기의 대량 공중 수송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러시아군은 이미 공중에서 13대의 Il-76 수송기를 회항시켰다.

러시아군은 계획대로 비행장을 탈환하지 못하면서 부터 대부대 비행기의 급강하를 유도해 키예프를 점령하고 제렌스키를 생포한다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 갔고 '번개전'을 기나긴 '소모전'으로 만들었고, 우크라군은 초보적으로 대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지상군은 28일부터 3월 초까지 키예프 북서교 각 도시를 공격했다. 이후 러시아군의 공세는 다시 침체에 빠졌다. 키예프 그린벨트 밖에서 멈춰선 것은 후방보수가 비효율적이어서 공급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이 이 방향에서 3만5400명에 불과한데 우크라이나군이 2만 명 가까이 동원되고 있어 키예프 도시면적이 모스크바와 같이 넓기 때문에 몇 만 러시아군이 키예프를 강공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3월 초순 몇 차례 공격에 실패한 뒤 3월 중순 러시아군이 방어 태세로 전환하면서 공격이 거의 멈췄다. 이와 함께 우크라이나는 서부에서 이동해 온 부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르핑, 부차 등에 대한 반격이 시작됐다.

이 단계는 우크라이나의 가장 어려운 단계로 수도가 포위되고 넓은 국토가 전쟁의 불길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서방 군사원조도 단지 대전차 휴대용 무기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민은 러시아군의 기습전, 선전전, 인지전 '세자루 도끼'를(세가지전술) 용기와 의지로 버텨내며 외부전에서 상상했던 것처럼 투항하지 않고 신속하게 예정된 전쟁동원에 나섰다.

우군 보병은 도시와 삼림지형을 결합해 끈질긴 방어를 펼쳤고, 결국 강력한 공세를 막아냈다. 러시아군의 공격력 부족, 후방 부실, 조직력 부재의 실체가 드러났다.

우군은 수백 개의 특수 분대를 조직하여 러시아군의 교통 보급로에 대해 광범위한 공격을 개시하여 교량, 도로를 파괴하고 매복 공격하여 대량의 러시아군 후방 보급 차량을 파괴하였다.

러시아군은 3월 하순까지 전군의 절반 가용병력으로 키예프를 포위 공격하는 데 진전이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서부에서 조직한 국토방위여단도 속속 키예프에 도착해 반공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군은 29일 우크라이나 북부에서 철수를 선언하고 전면 공격에서 중점 공격으로 힘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키예프 전투는 4월 3일 벨라루스와의 국경에 도달하면서 끝났다.

[만춘초여름 북도네츠크 공세]

우크라이나 동부로 눈을 돌린 하르키프를 비롯해 러시아가 2014년 독립의 두 주 루간스크와 도네츠크를 책동했다. 두 주를 합해 돈바스라 부르지만 러시아족은 무장전에 앞서 두 주의 지반을 절반밖에 장악하지 못했다.

2월에는 러시아군의 하르키우 공세에 진전이 없는 중에 기습적으로 들어온 선두부대가 소량 소멸됐다.

그러나 하르키우 동쪽에서는 우군 방어가 거의 없는 루간스크 쪽으로 러시아군과 러시아족 무장이 큰 진전을 이루며 루간스크 주의 대부분을 순조롭게 점령했다.

하르키우 남동쪽에서는 러시아군이 3월 초 쟁탈전을 거듭한 끝에 4월 초 도네츠 강의 나루터 마을 이주엠을 점령하고 노스도네츠강을 건너는 교두보를 점령했다.

이때 정면으로 방어하는 우군은 국민경호대 여단 몇 개가 위급했다. 그러나 이들 국경여단은 4월 하순 다시 러시아군의 정예 연합 돌격을 기어이 막아내면서 한 치의 전진도 하지 못하게 9월 초순까지 버텼다.

'이구무'측은 별다른 진전이 없어 러시아군은 루간스크주의 나머지 부분, 각 극지방에서 새로 차출된 마지막 일부 참전부대, 체첸 무장, 바그너 용병 등과 함께 루저우 제2의 도시, 우콘루간스크 행정기구가 있는 노스도네츠크를 공격했다.

5월 초 러시아군이 북돈성에 진격했고 5월 하순에 공세에 들어갔다.

압도적인 반복적 화포공격과 쟁탈 끝에 27일에야 러시아군이 북도네츠크를 점령했다. 7월 9일 강 건너편을 점령 강 대안에 있는 "리서창스크" 를 점령하고서야 러시아군의 중점 진공계단이 겨우 완성되였다.

또 러시아군은 5월 중순 북돈성 서쪽의 북도네츠 강에서 오군 후방을 포위해 건너려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군의 포병군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러시아군의 기계적인 수행 명령이 반복되는 등 집요하고 무모한 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대대급 4개 전투군은 2개나 섬멸되고 1개 중타격을 받았고, 나루터에 장갑차량 100여 대가 밀집해 손실되였다.

러시아 1개 집단군(사실상 5개 대대급 전투군 BTG5000 전투병)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오군 포병은 천연장벽과 결합해 공방전에서 승리하였고, 50㎞의 삼림하천의 뒷걱정은 풀렸다.

노던타운 이남의 보파스나 쪽에서도 러시아군은 5월 우회전을 시도해 노던타운을 포위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서야 교통의 노드인 바흐무트(Bakhmut)에 가까워져 10km도 채 가지 못했다.

9개월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군의 막바지 공세가 집중되고 있어 바흐무트를 압박하는 꼴이 되고 있다.

8년 동안 러시아군이 뚫으려 했던 도네츠크시티 쪽으로 시선을 돌려 1년을 보냈지만 러시아군과 러시아군은 여전히 가까운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도네츠크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마리우폴은 우크라이나 최동남 해안에서 러시아-우 국경과 인접해 있다.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겹겹이 포위되었다.

마리우폴의 3개월 방어는 러시아군 남부 군구의 주력을 견제하고, 우크라이나 후방에 부대를 만들고, 서방 장비를 입수하고 배우는 데 시간을 벌었다.

어쨌든 러시아군은 과량의 포탄을 쏟아부어 7월 노스톤 네츠크와 리시찬스크를 모두 점령한 뒤 더 이상 진척이 없다.

우동 국경의 하르키우에서 흑해의 해변의 헤르손까지 1200km에 이르는 전선에서 하르키우, 이구무, 바흐무트, 도네츠크 정면, 자폴로제, 헤르손까지 6개 전역이 모두 난항을 겪고 있다.

[여름의 정적과 가을의 반격]

여름 전장은 잠잠했지만 나토가 지원한 400여 문, 120만 발이 넘는 포탄이 도착하는 등 그동안 기술적으로 앞서 있었지만 화포의 질과 수량이 러시아군보다 떨어졌던 오군 포병도 수적으로 러시아군과의 격차를 벌려 질적으로 역전했다.

특히 미군 장비서열에서 별 볼일 없었던 하마스 20대가 도착하자마자 100km에 육박하는 GPS 유도 사거리를 확보하고 소형 정밀유도탄 역할을 한다.

러시아군 후방의 여러 탄약고를 폭파하고 러시아군 탄약고를 압박 당하니 전선에서 120km 떨어진 곳으로 철수시켜 후방 효율성을 많이 떨어뜨렸다.

그 후 우크라이나가 반격할 날이 왔다. 9월 초의 '이구름', 10월 초의 '볼리만', 11월 초의 '헤르손'이다. 우군이 역공을 거듭하여 성공하자, 러시아군은 후퇴하고 후퇴하여 돈바스의 쟁탈로 돌아갔다.

9월6일 오후, 역시 넉 달째 잠잠한 '이구무' 쪽에서 우군 구전 주력이 뒤늦게나마 역공에 나섰다. 7일 오후 3만 명의 인구를 되찾은 우군은 8일 오후 셰브첸코보를 탈환 했다.

하루 동안 직선거리로 최대 50km, 실제 도로 거리로 80km를 돌진했다. 불가사의한 고속 진군이였다. 9일 오후 우크라이나 선두부대는 5개월 전 만탄의 쿠피얀스크에 입성했다.

러시아군의 측면 방어선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무너진 근본 원인은 러시아군의 자원이 부족하고, 병력 수비가 취약해 노출된 측면의 전력 부족이다. 러시아군의 허약한 '연복대'(연약한 복부)를 돌파구를 마련했고, 러시아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구무' 전역에 걸친 러시아군은 갈팡질팡 당했다. 원래 이 지역은 러시아군이 약 2만5000명으로 우군보다 1만5000명보다 만명이나 많았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우군이 측익성읍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망하였다.

나흘 만에 오스킬 강 전체가 동쪽으로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당초 러시아군은 4개월 만에 퇴각했고, 지금은 4일 만에 돌려주고 있다. 또 러시아군이 황급히 도시를 버리고 도망가서 많은 전리품을 주웠다.

전쟁터를 수습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9월 20일부터는 오스킬강을 건너 동쪽으로 5월 하순에 잃어버린 리만을 겨냥한 2차 공세를 계속했다.

리만 쪽의 러시아군 작전은 상대적으로 완강했지만 열흘 만에 무너졌다. 이에 비해 우군은 4~5월 이 지역을 오랫동안 지켜왔다.

푸틴이 지난달 30일 오후(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4주 러시아 병합' 행사를 하고 있을 때 러시아군은 진지를 포기하고 크리미나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오군 포병은 무인기의 유도 아래 도로를 따라 철수한 러시아군을 정밀 폭격했다. 죽 음의 도로에서 탈출한 러시아군의 피해는 막대하다. 도로 양편에는 오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폭파된 러시아 군용차와 러시아 전몰자 시신, 러시아군 포로가 가득했다.

우군은 1일(현지시간) 정오 리만시티 서부 입구 랜드마크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꽂았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밤 "러시아군이 포위되지 않도록 철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방어선이 대폭 후퇴하면서 병력 밀도가 높아졌다. 오군의 공격은 힘이 들기 시작했고 탱크는 부족했고, 공격력도 부족했고, 움직일 수 없었다. 전선은 기본적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남쪽의 헤르손에서 남선우군이 8월 하순에 가장 먼저 반격을 가한 것도 공수 능력이 부족해 일부 진전을 이룬 뒤 침체에 빠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정예 공수병 전원을 소집해 우군과 맞섰다.

그러나 헤르손 쪽으로서는 러시아군이 배수진을 쳤다. 이들의 점령지역은 허송시티를 비롯해 드네프르 강의 최하류 지역을 뛰어넘었다. 이 지역은 안토니우카, 신카호프카 등 2개만 강을 건널 수 있고 도로 철도는 2개씩이다.

우군은 9월 전선 돌파 후 '하이마스'로 원거리 정밀타격, 교량 일체를 차단했다. 러시아군은 카페리 보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우크라아군은 하마스로 러시아군의 나루터를 계속 봉쇄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병참이 어려워 이 지역의 작전을 제대로 유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11월 초 중간선거가 끝난 뒤(현지시각) 9일 저녁, 러시아는 헤르손시 포기를 선언했다.

11월 12일, 우군은 헤르손에 들어가, 대전 후 유일하게 잃어버린 성도시를 회복했다.

러시아는 2월 중반 이후 자폴로 덥지 않은 자포리자 주와 헤르손이 없는 헤르손 주만 얻었다.(말하자면 인천이 없는 경기도를 얻었다.)

【마무리】

그 후 겨울은 1년 이상 전쟁을 치르며 본격적인 공방이 벌어지지 않았다.

유일한 공세는 러시아 바그너 용병집단이 감옥에서 모집한 5만 명에 가까운 중범죄자를 이용해 바흐무트를 필사적으로 공격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바흐무트는 반쯤 포위한 채 겨우 도시에 접근했다. 또 주변의 소금광성 솔레달이라는 작은 마을도 점령했다.

단기간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제대로 된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등 소모전 참호전으로 전락한 형국이다.

하지만 변화는 불변으로 잉태된다. 미국과 유럽이 지원하는 서방식 탱크가 우크라이나에 도착, 두 달가량 학습사용전술 편성을 거쳐 4월부터 단계적으로 전장에 투입돼 오군 공격의 화력 지원 부족을 해소할 계획이다.

서방의 대러시아 석유 가격제한제재는 이미 발효돼 러시아의 소득 측정과 재정 능력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이 점이 숨은 변화요, 전쟁터 뒤의 가장 큰 변수다.

근본적으로 러시아는 어린동생 같은 우크라이나와 이런 초라한 전쟁을 1년이나 거치면서 군사력 부족의 실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세계 제2의 군사강국' 신화를 깨버린 특별 군사행동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듯' 이 러시아군에 큰 망신을 안겨 주었다.

전쟁을 앞두고 일반인들은 러시아를 소련을 계승한 세계 제2의 군사강국으로 여겼다. 가장 깊이 있는 군사전문가도 러시아의 재래식 무력은 한국에 비해도 형편없고 터키와 맞먹는다고 보는 데 불과하다.

결국 대전이 개전되자 러시아의 군사력은 터키보다 못한 채 이집트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년 동안 전격 키예프, 철강 홍수, 1시간 22분, 놀라운 전투,제렌스키 도망,부터 에너지 에이스, 핵 억지력, 루블 신화, 싸울수록 부자, 제철소에 큰 고기, 러시아 군대는 큰 만두를 빚는다... 등등

우크라이나의 역습 허풍이요, 유럽인 겨울 동사한다, "랑아봉"대"천령개"라는니(중국의 옛무기) , 미국 중간선거 끝나면 우크라 지원 중단한다느니 동장군이 러시아 편을 든다는니…. 이 모든 뉴스는 강행과 자아 위안이였으며 러시아 군사 강국의 신화는 하나 둘 수포로 돌아갔다.

진실은 바로 러시아군 조직과 병참능력이 떨어지고 전술 전투능력도 안 된다는 점. 이로 인해 러시아군의 군사강국이란 소문은 "유명무실" 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마지막 패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허약한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고, 미국은 연합을 강화하면서 거의 뇌사(뇌사)한 나토를 만혈(수혈)로 부활 시킨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