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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양근성지, 양평 도곡리 능말 한양조씨 양경공-총제공파 집성촌 순교자 현양비 축복!!!♠♥♣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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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yang문화유적2❀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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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성지, 양평 도곡리 능말 한양조씨 양경공-총제공파 집성촌 순교자 현양비 축복!!!♠♥♣

< 도곡리 능말 순교 현양비/탑 >

주소(지번):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도곡리 107-4

2021.05.31.

♠양근성지/수원교구,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천주교 신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간 한국천주교회의 요람!!!

양평 도곡리 능말 순교자 현양비 축복
♥순교영성 본받는 내·외적 신앙 요람으로 ‘우뚝’
♠대대로 천주교 신앙 이어온 지역 순교자 후손 한양조씨 양경공-총제공파 집성촌!!!

○5월 29일 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도곡리 능말 순교자 현양비 축복식 중 성수 예절을 거행하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조동섬(유스티노)과 그의 아들 하느님의 종 조상덕(토마스), 복자 조용삼(베드로)과 조숙(베드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중구(타대오)와 조인달 등 선조 순교자들의 고향이자 한양 조씨 양경공-총제공파 한흥군 후손들이 400여 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경기도 양평읍 도곡리 능말에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졌다.

○5월 29일 오전 11시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도곡리 107-4번지 현지에서는 교구장 이용훈 주교 주례로 순교자 현양비 축복식이 거행됐다. 이 자리에는 교구 사제단과 양근성지 후원회원 및 양평본당 신자들이 함께했다.

○양근성지(전담 권일수 신부)가 조성한 순교자 현양비는 이숙자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작품으로 10미터 높이에 노출 철근 콘크리트 공법으로 제작됐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베드로 사도와 휘광이 칼날에 스러져 양근 지역 강변 백사장과 강물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머리와 시신 모습이 형상화됐다. 전체적인 모티브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하늘과 땅 사이를 받치는 존재 아틀라스에서 따왔다.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 길을 걸으시고, 땅에 묻혔다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시고 돌보시는 예수 그리스도 모습이 창궁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와 닮은 면에서다. 또 도곡리 능말이 1901년부터 1912년까지 이상화(바르톨로메오) 신부, 페랭 백문필(필립보) 신부가 사목하던 옛 성당 터이기에,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를 연결하는 우리의 구세주도 상징화됐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미사 봉헌에 이어진 축복식에서 이용훈 주교는 권고를 통해 “어머니인 교회는 순교자 현양비를 신자들이 공경하도록 모시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른 순교자들의 모상을 기억하며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그리스도와 만나 완전히 일치하게 되는지 배우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순교자 현양비는 지난해 5월 완공됐으나 코로나19로 이날 축복식이 봉헌됐다. 현양비가 세워진 터는 674㎡ 규모로 양근성지가 공식 선포된 2003년 이후 매입해 도곡리 능말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양근성지에서 8.4㎞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십자가의 길도 마련돼 있다.

양근성지는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 최초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충청도와 전라도로 신앙을 전파한 한국 천주교회 요람지다. 성지는 양평군청과 함께 지난해부터 성지 앞 떠드렁 섬에 ‘떠드렁 섬 예수상’ 설치를 추진 중이다. 양근 지역 순교자들과 현재 양근성지가 위치한 오빈리 뒷산에서 일제에 저항한 의병 및 한국전쟁 때 학살된 양민 600여 명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권일수 신부는 “이 예수상은 자유, 진리, 평등, 박애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순교한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을 드러낸다”며 기도를 당부했다. 또 대성당 건립 및 순교자 전시관 개관 계획 등을 밝히고 “순교자 현양비 축성으로 앞으로 성지를 외적 내적 신앙의 요람지로 거듭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천주교 신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간 한국천주교회의 요람

●양근성지수원교구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

 

▣ 한흥군(漢興君) 조공근(趙公瑾) ▣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보(懷甫), 호는 소옹(梳翁). 아버지는 전한 조덕원(趙德源)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이(柳頤)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으로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피난하여, 그 신주를 개성목청전(穆淸殿)에 임시로 봉안해 두었다가 영변에 봉안하게 하였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대소조(大小朝)로 나누자, 이에 대한 여러가지 미비점을 상주하여 마침내 분조(分朝)의 체면을 갖추게 하였다. 1601년 옥천군수, 1605년 형조정랑에 이어 다음해 평창군수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앞서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녹훈되고, 한흥군(漢興君)에 봉하여졌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하여 양근(楊根)에 돌아가 치사를 청하였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 때의 훈작(勳爵)을 모두 삭적(削籍)함에 따라 삭훈(削勳)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묘사의 신주를 모신 공로가 참작되어 1627년(인조 5)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묘는 부인 풍천임씨와 같이 안장된 단분합장 묘이다.

 

묘 입구에는 한양조씨 8세 판관공파 묘역으로 안내되어 있다. 묘 앞 신도비 옆에는 한흥군파 표지도 있다.

 

​묘는 내맥과 사신사가 모두 편안하다. 묘는 유혈상 혈판에 쓰였다. 전순도 단단해 보이고 그 아래 중명당은 탐이 날만큼 편안하고 넓다.

 

다만 묘가 오래되어 혈판에 문제가 생긴 탓인지 호석과 비석 등이 검다. 습기 때문이다.

 

묘역 앞 가까이 전철로가 다소 신경 쓰인다.

 

​단호도사는 묘의 기맥은 15가닥이고 정혈에 안장되었다고 판단했다.

 

단호는 묘 보다 묘 전순 앞 너른 중명당을 주목했다. 대혈지가 여러 곳이며 그 중에는 기맥가닥 55개에 청룡은 2만7천m, 백호는 3만m에서 시작되었으며 혈판은 지상 110cm 아래 두께 200cm인 곳도 있다고 했다. 단호가 지목한 대혈지에 효천이 탐침기를 대보니 수치가 무려 500이 넘어 나왔다.

 

단호는 신도비 우측에서도 대혈지를 찾아냈다. 또한 중명당 우측 아래에 있는 거북바위 모양의 돌도 대혈지의 기맥이 있다고 보았다. 거북바위에는 玄至遊庭이라고 쓰여 있다.

 이십공신(二十功臣)

⊙개국공신(開國功臣, 1392), ⊙정사공신(定社功臣, 1398)

⊙좌명공신(佐命功臣, 1401), ⊙정난공신(靖難功臣, 1453)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 ⊙적개공신(敵愾功臣, 1467)

⊙익재공신(翊戴功臣, 1468), ⊙좌리공신(佐理功臣, 1471)

⊙정국공신(靖國功臣, 1506), ⊙광국공신(光國功臣, 1590)

⊙평난공신(平難功臣, 1590), ⊙호성공신(扈聖功臣, 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1604), ⊙청난공신(淸難功臣, 1604)

⊙정사공신(靖社功臣, 1623), ⊙진무공신(振武功臣, 1624)

⊙소무공신(昭武功臣, 1627), ⊙영사공신(寧社功臣, 1628)

⊙영국공신(寧國功臣, 1644), ⊙보사공신(保社功臣, 1680)

 

*녹훈도감: 나라에 공적을 세운 인물들에게 공신의 칭호와 관련 문서 등을 내리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이십공신회맹축 - 영국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 - 寧國功臣錄勳後)

(Isip gongsin hoemaengchuk (Scroll of Oath-taking Rites by 20 Meritorious Subjects))

 

이십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는 1646년(인조 24) 9월에 영국공신(寧國功臣)을 녹훈(錄勳)한 것을 계기로 국왕이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부터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이르는 20공신과 그 자손들을 거느리고 회맹제(會盟祭)를 행하고 이 때의 회맹문(會盟文)과 참여자의 명단(會盟錄) 등을 적어 권축장(卷軸裝)으로 꾸민 것이다.

 

회맹문(會盟文)은 국왕, 왕세자, 공신 및 공신자손 등이 모여서 동맹을 서약하고 공신과 그 자손에게 내려준 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협력하여 국은을 갚기에 힘쓸 것과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공신자손 간에도 단결하여 협력을 다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이어서 회맹록(會盟錄)에는 김유(金瑬) 등 영국공신과 개국공신 이하 19공신의 공신 및 그 장자, 적장손들의 군호(君號), 공신호(功臣號), 직함(職銜), 성명(姓名)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 녹훈도감(錄勳都監)에서 회맹한 계(啓)를 올리고 불참의 경우에는 신병질(身病秩)·인공재외질(因公在外秩)·재상질(在喪秩)로 구분하여 그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말미(末尾)에 '順治三年九月初 三日'라는 년기가 있다.

 

이 “이십공신회맹축”은 왕실이나 충훈부(忠勳府)에서 보관할 목적으로 최고의 재질로 거대하게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에 걸쳐 한자 한자에 정성들여 쓴 글씨와 선명한 주사란, 고급 재질, 장대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후기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현존하는 완전한 상태의 회맹축이 희소하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국보 제335: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

 

‘이십공신회맹축 –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숙종 6) 8월 30일에 개국공신(開國功臣) 이래 보사공신(保社功臣) 까지의 공신과 그 자손들을 모아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한 후 작성한 회맹축이다. 이 회맹축이 작성된 시기는 1694년이다. ‘보사공신’이란 1680년(숙종 6)년 4월에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된 ‘경신환국(庚申換局)’ 때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勳號)였으나, 1689년에 삭훈되었고 이후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삭훈된 공신들을 복훈(復勳)한 공신들을 말한다. 국보 제335호 회맹축은 이러한 숙종 연간 보사공신의 녹훈-삭훈-복훈이라는 역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 자료로서 오래 전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에게 반사하기 위해 활자로 간행한 ‘회맹록(會盟錄)’은 많은 복본(複本)을 제작한 결과 전래본이 다수이지만, 국보 제335호는 반사본(頒賜本)이 아닌 어람용이므로 유일본에 해당된다. 공신회맹이 있을 때마다 어람건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10년까지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3건에 불과하다. 1646년(인조 24)년과 1694년(숙종 20) 제작한 2건과 1728년(영조 4) 분무공신(奮武功臣) 녹훈 때의 이십공신회맹축이다. 이 중 영조 연간 분무공신 녹훈 때의 이십공신회맹축의 실물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역대 공신과 후손을 모아 충성맹세를 받았던 회맹제를 거행했을 때의 회맹문과 보사공신을 비롯한 20종의 공신과 그의 적장자손 총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 및 종묘축제문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제작연대, 제작사유가 명확히 적혀있고 그 위에 국새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어 기록문화적 의미 역시 매우 크다. 숙종 대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이 회맹축은 1694년에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혼란하였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삭훈되었던 보사공신들을 복훈(復勳)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숙종의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어 역사적 사료로서 정치사적 가치가 높다. 아울러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롭고, 장대하게 제작되어 공예, 직물사적으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로 88.8cm, 가로 2,414cm의 긴 두루마리에 당시 글씨를 잘 썼다고 알려진 서사관 이익신(李翊臣)이 글씨를 쓰고, 국왕을 위해 옥이나 상아, 생초(生綃)나 비단과 같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고, 숙련된 기량을 지닌 관청 소속 경공장들이 솜씨를 발휘하여 형식적인 완성도가 높아 조형 예술적으로도 주목된다. 이 어람회맹축은 이것을 만드는 전말을 기록한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를 통해 평남 성천에서 옥축(玉軸)을 진상하거나, 베틀로 생초(生綃)를 직조하고 다회틀로 다회(多繪)를 짜고 상아로 비녀(簪)를 만들었으며, 비단 위에 배접을 3번 바르고 매끈하게 광낸 후, 화원 한후방(韓後邦)이 인찰을 긋는 등 어람용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고급 재료와 도구 및 장인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 왕실공예품의 기술적 수준도 알 수 있게 한다.

 

2007년 4월 20일 보물 제151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2월 17일 국보 제33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두루마리 1축이며 규모는 세로 88.5cm, 가로 2,414cm이다.

 

開國功臣趙折涓嫡長孫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조진(趙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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