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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四郡子(매화·난초·국화·대나무) 竹 : 一志 李炳五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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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郡子(매화(梅)·난초(蘭)·국화()·대나무(竹))

대나무() : 一志 李炳五

[개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를 이겨내며 핀다.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는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군자(君子), 즉 덕(德)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사군자라고 부른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묵화(文人墨畫)의 소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서서 시문(詩文)의 소재로서 등장하였다.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명대(明代) 이르러서이다. 그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대나무가 ≪시경 詩經≫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 매·난·국은 화조화(花鳥畫)의 일부로 발달하기 시작하다가 북송(北宋) 때 문인화의 이론과 수묵화의 발달과 더불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매·난·국·죽의 순서는 이들을 춘하추동의 순서에 맞추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군자화의 발달

[1. 고려시대의 사군자화]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나라 회화의 소재도 다양해지고 송·원의 영향으로 사대부화의 전통이 생기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작품은 없다.

그러나 ≪고려사≫ 또는 당시의 문집에 수록된 기록을 통하여 묵죽·묵란·묵매가 고려 왕공 사대부(王公士大夫) 사이에 널리 그려졌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빈번했던 사신들의 내왕를 통하여 중국 회화가 실제로 고려에 많이 전해졌다. 그중에는 사군자화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에 두 나라간의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충선왕이다. 그는 원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원의 조맹부(趙孟頫)·주덕윤(朱德潤)과 같은 당시의 사대부 화가들과 교유하게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맹부는 원대 초기의 산수·묵죽·묵란의 대가였으므로 원대의 사대부화의 이론과 회화 양식이 고려에 전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고려시대에 묵매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중기의 문신 정지상(鄭知常)과 후기의 차원부(車元頫)이다. ≪동국문헌≫<화가편>에 단순히 ‘선화매(善畫梅)’라고만 했으므로 그들의 그림의 성격을 알 수는 없다. 묵란화는 말기의 사대부 윤삼산(尹三山)·옥서침(玉瑞琛) 등이 잘 그렸다고 전하며 선승(禪僧) 중에도 매·죽·난을 모두 잘 그린 석축분(釋竺芬)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에 비하여 묵죽을 잘 그린 사람들의 수는 더 많고 그에 관한 기록도 찬(讚)이나 화제(畫題)의 형식으로 많이 남아 있다. 김부식(金富軾)의 집안은 아들 돈중(敦中), 손자 군수(君綏) 등 삼대(三代)가 묵죽으로 이름이 났고, 이인로(李仁老)·정서(鄭敍)·정홍진(丁鴻進)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이 당시 대부분의 찬이나 화제는 묵죽을 그린 사람들을 소식이나 문동에 비교하며 찬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인품을 대나무의 여러 가지 특성에 비유한 것도 있다. 이는 전형적인 북송 문인 묵죽화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조선시대의 사군자화]

조선 초기에도 고려시대에 이어 사군자화가 계속 문인들 사이에 그려졌음은 물론이고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들 사이에도 필수화목이 되었던 것 같다.

화원을 뽑는 시험에 관한 ≪경국대전≫의 기록에 보면, 시험 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화목으로 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더 중요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묵매·묵란도 화원 시험 과목에는 들지 않았지만 중기부터 많이 그려졌던 듯하며 현존하는 작품수도 많다. 15, 16세기부터는 백자(청화·진사·철사백자 등)에도 매·죽, 그리고 좀 늦게 난·국 등의 그림이 표면 장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사군자화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기의 사대부 화가인 이정(李霆)·오달제(吳達濟)·어몽룡(魚夢龍) 등은 조선시대 묵매·묵죽화의 양식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후기에 들어오면 조선시대 사군자화는 질적·양적인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 시기는 바로 회화사 전반에 걸쳐 진경산수(眞景山水)·풍속화 등 한국적인 회화의 발전을 보게 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김정희(金正喜)와 조희룡(趙熙龍)을 정점으로 하여 말기의 사군자화는 약간 수그러진 듯하다. 그러나 김규진(金圭鎭)·민영익(閔泳翊)의 묵죽, 강진희(姜進熙)·조석진(趙錫晉)의 묵매, 허유(許維)·민영익·이하응(李昰應) 등의 그림에서 새로운 구도와 필치에 의한 시대적 감각의 표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묵국화는 매·죽·난에 비하여 훨씬 덜 그려졌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사대부 화가들의 작품 또는 말기의 화원들의 작품이 다수 전한다.

[2.1. 조선 초기(1393∼1544년)의 사군자화]

고려시대 사군자화의 유품이 없으므로 조선 초기 사군자의 양식적 기원을 찾기는 다소 어렵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대부들의 묵죽화·묵란화에 관한 기록은 많이 있으나 실제로 남아 있는 작품 수는 얼마 안 된다.

가장 연대가 이른 묵죽화는 수문(秀文)의 ≪묵죽화책 墨竹畫冊≫이다. 이는 10장으로 된 화첩(畫帖)으로 1424년(永樂 甲辰)에 해당하는 연기(年記)가 있다.

그 다음으로는 박팽년(朴彭年)의 것으로 전하는 몇 점의 묵죽 그리고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묵죽이 남아 있다. 수문과 신사임당의 그림은 모두 대나무 잎의 크기에 비하여 줄기가 가늘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원말의 예찬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예찬의 그림이 당시 조선 화단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들 상호간의 연관을 짓기가 어렵다. 또한 수문의 그림은 10장 모두가 배경이 비교적 많이 포함되어 산수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점에서도 서예적 성격이 강조된 북송과 원대의 묵죽과 크게 다르다.

묵매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하는 8장으로 된 화첩(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굵은 수간(樹幹)이 약간 경사지게 화폭의 아랫부분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가느다란 가지가 뻗어 나와 몇 개의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수장품 목록에는 원대의 왕면(王冕)의 묵매도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면 그림들은 꽃이 가득히 달린 화려한 매화 그림들로 알려져 있다. 제한된 수의 유작(遺作)으로 초기 묵죽·묵매의 양식을 규명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이미 이 시대 그림들은 중국의 사군자화와는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2.2. 조선 중기(약 1550∼1700년)의 사군자화]

중기에는 비교적 많은 작품이 남아 있어 사군자화의 양식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선 묵죽화에서는 이정을 들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초기의 묵죽화 양식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묵죽화 양식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서예성을 좀더 강조한 것이다. 짙은 단색조(單色調) 농도의 먹과 엷은 먹으로 각각 대나무 한 그루씩을 그렸다. 이 때 뒤의 대나무는 앞의 대나무의 메아리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실성(寫實性)을 좀더 강조한 것이다. 줄기가 굵은 통죽의 음영 효과를 잘 살려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거기에 강한 필치로 몇 개의 잎을 가해 놓은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양식은 후기의 유덕장(柳德章)에 의해서 계승된다.

묵매도 마찬가지로 조선 묵매화의 양식이 수립된다.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는 어몽룡·허목(許穆)·오달제 등을 들 수 있다. 어몽룡의 그림, 특히 그의 <월매도 月梅圖>는 대체로 신사임당의 구도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굵은 둥치와 마들가리의 단순한 대조에서 차츰 벗어나 화면을 좀더 화려하게 대각선으로 자르는 구도가 등장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허목·오달제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지며 매화꽃도 입체감이 좀더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이 때에는 또한 비백법(飛白法)으로 된 노간에 윤묵(潤墨)으로 찍은 점들이 대조를 이루며 화려한 느낌을 더해 준다. 조속(趙涑)·조지운(趙之耘) 등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의 묵란에 관한 기록은 많으나 묵죽이나 묵매에 비하여 유작의 수가 적다. 이정·이우(李瑀) 그리고 이징(李澄)의 바람에 나부끼는 난을 그린 작품들만이 전한다. 묵국의 경우는 초기의 작품은 볼 수 없다.

중기의 사대부이며 명필로 이름난 이산해(李山海)의 그림이 한 점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필력(筆力)에 관한 평판에는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허목이 ≪미수기언 眉叟記言≫에서 이산해의 묵국을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2.3. 조선 후기(약 1700∼1850년)의 사군자화]

조선 후기에는 남종화(南宗畫)의 본격적인 수용과 더불어 ‘서화 일치’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군자화가 더욱 성행하게 된다.

또한 남종화법의 지침서인 ≪개자원화전≫이 우리 나라에 전래됨에 따라 사군자화도 구도나 기법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비교적 전대의 양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김정희의 화론과 묵란·묵죽처럼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최고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유덕장은 중기의 이정의 두 가지 양식의 묵죽을 모두 답습한 대표적 인물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그의 묵죽은 이정의 것보다 먹의 농담 대조가 좀 더 단순화된 감이 있어 은은한 맛이 덜하나 힘차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강세황(姜世晃)은 사군자뿐만 아니라 인물·산수 등 여러 분야에 세련된 기법을 보인 드물게 보는 사대부 화가이다.

위의 두 사람이 18세기를 대표한다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신위(申緯)·김정희·조희룡을 들 수 있다. 신위의 묵죽은 먹의 농담 변화가 여러 층이며, 대나무 잎을 그린 필치가 좀더 부드럽다. 그리고 바위나 토파(土坡) 역시 오파(吳波) 양식에 기초를 둔 부드러운 필치로 되어 있어 남종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이 때의 문인 화단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한 김정희는 묵란·묵죽에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킬 것을 한 번 더 강조하여 예서(隷書)의 획(劃)과 묵란의 획을 동일시하였다.

또한 문인 정신의 표현인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였다. 그가 남긴 많은 묵란·묵죽, 특히 힘차게 뻗어나간 난엽은 추사체(秋史體) 글씨와 더불어 기괴한 일면을 보여 준다.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희룡은 난초나 대나무에 있어서는 스승에 미치지 못하나 묵매에는 단연 후기의 제일인자로 꼽을 만하다. 그의 묵매는 중기의 묵매화 구도에서 탈피하였다.

즉, 좁고 긴 화폭에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며 힘차게 올라가는 굵은 둥치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잔가지에 꽃이 달린 화려한 구도를 이루었다. 매화꽃은 윤곽선을 그린 것, 몰골법의 묵매 및 홍매 등 다양하며 수간도 비백법과 윤묵획이 조화를 이룬다.

묵국도 ≪개자원화전≫의 본을 따라 많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죽·매·난에 비하여 유작의 수가 훨씬 적다. 그 가운데 문인 화가 이인상(李麟祥)의 <병국도 病菊圖>는 강한 표현력을 가진 섬세한 필치로 작가 자신의 생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문인 묵죽의 대표로 꼽을 수 있다.

[2.4. 조선 말기(약 1850∼1910년)의 사군자화]

김정희의 영향으로 19세기 중기에 이미 토대를 굳힌 남종화풍은 말기에도 강세를 보이며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는 사군자 가운데 난초가 가장 유행하였다는 인상을 주나 실제로는 매·난·국·죽 모두 상당히 보편화되어 왕공 사대부·화원 등의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따라서 그림 양식도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대부 화가들은 묵매·묵란을 많이 그린 허유, 난초로 유명한 이하응, 그의 양식을 답습한 김응원(金應元), 이들과는 좀 색다른 묵란을 그린 민영익, 묵죽으로 뛰어났던 김규진 등이 특기할 만하다. 화원으로는 유숙(劉淑)·장승업(張承業) 등을 들 수 있다.

허유와 이하응의 난초 가운데 많은 작품이 대련식(對聯式)으로 된 길고 좁은 종폭(從幅)으로 이에 따라 특수한 구도가 성립되었다.

즉, 난초 두세 포기를 화폭의 아래위로 대각선의 위치에 배치하고 이들이 절벽이나 바위로부터 옆으로 늘어진 모습을 많이 그렸다. 이와 같은 구도는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훨씬 동적이며 활달하게 뻗어 내려간 난엽과 더불어 전체 화면에 활기를 부여한다.

민영익의 난초는 전서(篆書)의 획을 상기시키는 장봉획(藏鋒劃 : 붓끝이 획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필획의 모양이 둥근 감이 나고 두께가 거의 일정한 것)이며 난엽이 거의 직각으로 한 번 꺾이는 특수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명나라 말·청나라 초의 화가 도제의 난초와 비슷하다.

말기 묵죽의 대표자라고 할 만한 김규진은 여러 종류의 대나무를 골고루 그렸다. 가장 특징 있는 것은 무성한 잎이 많이 달린 굵은 왕죽(王竹)이다.

죽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윤묵으로 곧게 뻗어 올리고 마디 사이의 간격을 최소로 남겨 대나무의 곧은 인상을 강조한 듯하다. 그 밖에도 달밤의 죽림(竹林)을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게 변화 많은 먹의 농담으로 표현한 그림도 있다.

묵매는 화원들 사이에 많이 그려진 듯하며 양기훈(楊基薰)·장승업·조석진 등의 유작이 많이 있다. 양기훈의 그림은 전대의 그림에 비하여 좀더 기교를 부려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복잡한 가지의 배치를 보인다. 사대부 묵매 화가로는 허유·강진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소품(小品)으로 꽃의 크기가 강조된 특징 있는 그림을 남겼다.

그러나 말기의 묵매는 대체로 중국 화본의 영향에 많이 의존한 탓인지, 복잡한 꽃술과 점(點)의 지나친 사용 등으로 간결한 맛을 잃고 있다. 묵국도 화본의 영향을 많이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화원 유숙(劉淑)의 그림 또는 안중식(安中植)의 작품들에서는 화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신선한 국화를 보게 된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의 사군자화는 중기로부터 많은 화가들이 배출되어 양식적 전통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후기·말기가 되면 한편으로는 중국 사군자화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극복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보였다.

중국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 좋은 작품도 많이 남겼다. 현대까지도 동양화의 정신과 기법을 제일 단적으로 표현하는 화목(畫目)으로 간주되어 계속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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