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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 재제공 “만덕전“
■다산시문집 제14권 / 제(題)
▣題耽羅妓萬德所得搢紳大夫贈別詩卷
乙卯耽羅饑。萬德捐振之。詢其願。金剛山也。有聖旨令如願。
丙辰秋。耽羅妓萬德。驛至京。越明年春。萬德回自金剛。將還其鄕。左丞相蔡公爲立小傳。敍述頗詳。余不贅。余論萬德。有三奇四稀。妓籍守寡一奇也。高貲樂施二奇也。海居樂山。三奇也。女而重瞳子。婢而被驛召。妓而令僧肩輿。絶島而受內殿寵錫。四稀也。嗟以一眇小女子。負此三奇四稀。又一大奇也。
탐라(耽羅)의 기생 만덕(萬德)이 얻은 진신대부(搢紳大夫)의 증별시권(贈別詩卷)에 제함
을묘년(1795)에 탐라(耽羅)에 흉년이 들었는데, 만덕(萬德)이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구원하여 줬었다. 그의 소원이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고자 함이었는데, 임금의 분부로 소원을 들어 주게 하였다.
병진년(1796, 정조 20) 가을에 탐라(耽羅)의 기생 만덕(萬德)이 역마(驛馬)로 서을에 불려왔고, 이듬해 봄에 만덕이 금강산(金剛山)에서 돌아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적에 좌승상(左丞相) 채공(蔡公 채제공(蔡濟恭))이 그를 위해 소전(小傳)을 지어 매우 자세하게 서술하였으므로 나는 덧붙이지 않는다. 나는 만덕에게는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적(妓籍)에 실린 몸으로서 과부로 수절한 것이 한 가지 기특함이고, 많은 돈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 두 가지 기특함이고, 바다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함이 세 가지 기특함이다.
그리고 여자로서 중동(重瞳 겹으로 된 눈동자)이고 종의 신분으로서 역마(驛馬)의 부름을 받았고, 기생으로서 중[僧]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內殿)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이 네 가지 희귀함이다. 아, 보잘것없는 일개 여자로서 이러한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을 지녔으니, 이 또한 하나의 대단히 기특한 일이다.
▣《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 권55에 있는 〈만덕전(萬德傳)〉을 말함.
■번암집 제55권 / 전(傳)
▣萬德傳
萬德者。姓金。耽羅良家女也。幼失母無所歸依。托妓女爲生。稍長。官府籍萬德名妓案。萬德雖屈首妓於役。其自待不以妓也。年二十餘。以其情泣訴於官。官矜之除妓案。復歸之良。萬德雖家居乎庸奴。耽羅丈夫不迎夫。其才長於殖貨。能時物之貴賤。以廢以居。至數十年。頗以積著名。聖上十九年乙卯。耽羅大饑。民相枕死。上命船粟往哺。鯨海八百里。風檣來往如梭。猶有未及時者。於是萬德捐千金貿米。陸地諸郡縣棹夫以時至。萬德取十之一。以活親族。其餘盡輸之官。浮黃者聞之。集官庭如雲。官劑其緩急。分與之有差。男若女出而頌萬德之恩。咸以爲活我者萬德。賑訖。牧臣上其事于朝。上大奇之。回諭曰。萬德如有願。無問難與易。特施之。牧臣招萬德以上諭諭之曰。若有何願。萬德對曰。無所願。願一入京都。瞻望聖人在處。仍入金剛山。觀萬二千峯。死無恨矣。盖耽羅女人之禁不得越海而陸。國法也。牧臣又以其願上。上命如其願。官給舖馬遞供饋。萬德一帆踔雲海萬頃。以丙辰秋入京師。一再見蔡相國。相國以其狀白。上命宣惠廳月給粮。居數日。命爲內醫院醫女。俾居諸醫女班首。萬德依例詣內閤門。問安殿宮。各以女侍。傳敎曰。爾以一女子。出義氣救饑餓千百名。奇哉。賞賜甚厚。居半載。用丁巳暮春。入金剛山。歷探萬瀑,衆香奇勝。遇金佛輒頂禮。供養盡其誠。盖佛法不入耽羅國。萬德時年五十八。始見有梵宇佛像也。卒乃踰鴈門嶺。由楡岾下高城。泛舟三日浦。登通川之叢石亭。以盡天下瑰觀。然後還入京。留若干日。將歸故國。詣內院告以歸。殿宮皆賞賜如前。當是時。萬德名滿王城。公卿大夫士無不願一見萬德面。萬德臨行。辭蔡相國哽咽曰。此生不可復瞻相公顔貌。仍潸然泣下。相國曰。秦皇漢武皆稱海外有三神山。世言我國之漢挐。卽所謂瀛洲。金剛卽所謂蓬萊。若生長耽羅登漢挐。㪺白鹿潭水。今又踏遍金剛。三神之中。其二皆爲若所包攬。天下之億兆男子。有能是者否。今臨別。乃反有兒女子刺刺態何也。於是敍其事。爲萬德傳。笑而與之。聖上二十一年丁巳夏至日。樊巖蔡相國七十八。書于忠肝義膽軒。
만덕(萬德)은, 성은 김씨(金氏)이고 탐라의 양인 집 딸인데,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기녀에게 의탁하여 생활하였다. 조금 나이가 들자 관부(官府)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안(妓案)에 올렸는데, 만덕은 비록 뜻을 굽히고 기역(妓役)에 종사하였으나 자신을 기생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이 20여 세에 자신의 정상(情狀)을 울면서 관아에 호소하니 관아에서 불쌍하게 여기고 기안에서 삭제하여 다시 양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덕은 비록 집에서 용노(傭奴)로 생활하였지만 탐라의 장부를 남편으로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재화를 증식하는 데 재주가 뛰어나 물건의 귀천을 때에 맞게 판단할 수 있었으니, 값이 귀할 때는 내다 팔고 값이 천할 때는 사서 저장해 두어서 수십 년이 지나자 자못 부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성상 19년 을묘년(1795, 정조19)에 탐라에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죽었는데, 상께서 곡식을 선적하여 가서 구휼하라고 명하여 넓은 바다 800리에 돛단배가 베틀의 북처럼 자주 왕래하였으나 오히려 때에 맞추어 구휼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만덕이 천금(千金)을 덜어 내어 육지에서 쌀을 샀는데, 여러 군현(郡縣)의 사공들이 때에 맞추어 도착하니 만덕은 그 가운데 10분의 1을 가져다 친족들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관아로 실어 보냈다. 굶주린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구름처럼 관아의 뜰로 모이자 관아에서 그들의 완급을 구분하여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모두들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다.”라고 하였다.
진휼을 마쳤을 때 목사가 그 일을 조정에 상주(上奏)하니, 상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회유(回諭)하기를 “만덕에게 만일 소원이 있거든 어려운 일인지 쉬운 일인지 따지지 말고 특별히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 상께서 회유하신 내용으로 유시하기를,
“너는 소원이 무엇이냐?”
하니, 만덕이 대답하기를,
“소원하는 바는 없습니다만, 원컨대 한번 서울로 들어가 성상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1만 2000봉(峯)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탐라의 여인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오르지 못하게 금하는 것은 국법이기 때문이었다. 목사가 다시 그녀의 소원을 상주하니 상께서 그 소원대로 해 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관아에서 역마를 지급하고 이르는 곳마다 음식을 제공하게 하였다.
만덕은 한번 범선을 타고 만경의 구름 낀 바다를 건너 병진년(1796) 가을에 서울로 들어와 한두 번 채 상국(蔡相國)을 만나 보았는데, 상국이 그 정상(情狀)을 상께 아뢰니 상께서 선혜청에 명하여 다달이 식량을 지급하게 하였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을 때 내의원 의녀로 임명하여 의녀들의 반수(班首)가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만덕이 규례에 따라 내합문(內閤門)에 이르러 전궁(殿宮)에 문안하니, 각 전궁에서 여시(女侍)를 시켜 전교하기를 “너는 일개 아녀자로서 의기(義氣)를 내어 굶주린 백성 천백 명을 구제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다.” 하고, 상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반년 동안 머물다가 정사년(1797) 늦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만폭동(萬瀑洞)과 중향봉(衆香峯) 등 기승(奇勝)을 두루 찾아다녔는데 금불(金佛)을 만나면 번번이 정례(頂禮)를 행하고 정성을 다해 공양하였으니, 대개 불법(佛法)이 탐라국(耽羅國)에 들어가지 않아서 만덕은 당시 58세에야 처음으로 범우(梵宇)와 불상(佛像)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안문령(雁門嶺)을 넘고 유점사(楡岾寺)를 거쳐 고성(高城)으로 내려간 다음 삼일포(三日浦)에서 뱃놀이를 하고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에 오르는 등 천하의 아름다운 절경을 다 구경한 뒤에 다시 서울로 들어와 며칠을 머물렀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내의원에 이르러 돌아가겠다고 고하니 전궁에서 모두 전처럼 상을 내려 주었는데, 이때 만덕의 이름이 왕성(王城)에 가득하여 공경(公卿)과 대부(大夫)와 선비 들이 너나없이 한번 만덕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였다.
만덕이 떠날 때 채 상국에게 사례하고 목이 메어 말하기를,
“이생에서는 다시 상공(相公)의 존안과 모습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국이 말하기를,
“진 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는 모두 바다 밖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일컬었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한라산이 바로 영주(瀛洲)이고 금강산이 바로 봉래(蓬萊)이다.’라고 하였다. 너는 탐라에서 나고 자랐으니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白鹿潭)의 물을 떠 마셨을 것이고 지금 또 금강산을 두루 답사하였으니, 삼신산 가운데 두 곳은 모두 유람한 셈이다. 천하의 수많은 남자 중에 이렇게 유람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데 지금 이별하는 자리에서 도리어 아녀자의 수다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고, 이에 그 일을 서술하여 〈만덕전〉을 지은 다음 웃으며 주었다.
성상(聖上) 21년 정사년(1797) 하지일(夏至日)에 78세의 번암(樊巖) 채 상국은 충간의담헌(忠肝義膽軒)에서 쓰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전백찬 정문채 김정기 (공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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