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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수덕사 정혜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조각, 22세 조종보 선생!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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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정혜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조각, 22세 조종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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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정혜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조각, 22세 조종보 선생!

 수덕사 정혜사 석조관음보살입상22세 조종보 묘소조종보 선생 손자 전 한양조씨 대호군파종회장 겸 대종회 상임부회장 조병구수덕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제작은 조종보, 전병근, 김병휘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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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정혜사 석조관음보살입상

 

▲22세 조종보 묘소

 

▲조종보 선생 손자 전 한양조씨 대호군파종회장 겸 대종회 상임부회장 조병구

수덕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제작은 조종보, 전병근, 김병휘에 의해 이루어졌다. 3명의 석장이 밤낮을 가리 않고 약 3개월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어렵게 불상을 완성하였다.
이들은 예산과 홍성 등 충남 인근에서 오랫동안 주로 묘제 조각을 전담했던 장인들이었다.
평생 유교식 묘제 조각을 해오던 이들은 상석과 향로석을 제작하듯이 관습적으로 불단 위에 향로석을 설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근대라는 새로운 조류가 시작되는 시대였기 때문에불교와 유교가 결합된 불교식 제단위에 유교식 향로석이라는 생소한 조합이 용인, 수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56권의 1호(2023년) 참조]

●논문 이주민 일제강점기 만공의 예산 정혜사 중창과 석조관음보살입상 조성의 의미●

2020년 9월 24일 충남 홍성군 구항면에서 석장 조종보의 손자 조병구 선생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정혜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외에 제작한 다른 작품들을 찾아봤으나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유물은 없음을 확인하였다. 유족으로부터 증언과 자료협조를 받았기에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약사여래불상(藥師如來佛像)

약사여래불상(藥師如來佛像)은 손가락의 표현이 정교한 양손으로는 정병을 감싸안듯이 쥐고 있다.

서쪽으로 나있는 산길 1020계단(정확하지는 않지만 혹자는 1200계단이라고 함)을 오르다보면 정혜사 가는 길 우측으로 1924년 만공스님에 의해 조성 봉안된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이 석불을 놓고 미륵불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화불이 보관에 새겨진 관음보살상이다.

화불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어머니의 상호를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석불은 7m가 넘는 거대한 입상으로 자연암벽을 깍아 조상하였다. 사각의 좌대 배면은 후암벽과 붙어있과 석불은 환조로 조형되었다. 전체구성은 탑파 형식을 차용해 조상한 듯 축대를 쌓아 지대석처럼 다진 뒤에 기단과 석불입상을 조상했다. 석불이 세워진 하부에는 2층의 기단식 좌대이고 사각의 보관 위에도 탑의 상륜부처럼 낙수면이 있는 지붕돌처럼 이중의 보개를 얹었으며 보주가 올려져 있다. 보살의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굴곡이 없는 신체위에 선각된 천의를 입고 있다. 손가락의 표현이 정교한 양손으로는 정병을 감싸안듯이 쥐고 있다. 정병 안에는 생노병사에서 오는 중생의 8가지 고통을 덜어주는 감로수가 들어있다. 1층기단의 하대갑석에는 '세존응화이천구백오십일년갑자동십만공계수봉안(世尊應化二千九百五十一年甲子冬十滿空稽首奉安)'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석불입상 앞에는 장방형의 배례석이 있으며 육각석등 한기가 조성되어 있다.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새겨진 바위는 자연적 으로 형성된 처마 바위 때문에 줄을 매기 어려운 구조로 당연히 비계를 설치하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45 처마 바 위 부분에는 끝이 둥글게 말려 들어간 3개의 쇠고리가 박 혀 있다(그림 11). 중심 축선에 하나, 광배 너비만큼 벌어 진 위치에 2개, 총 3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박혀 있다. 이 쇠고리는 초를 그릴 때 다림추를 달아 기준점으로 사용 했던 중요 장치이다. 제작이 끝난 후에는 철거하지 않고 서울 승가사 마애불좌상, 예산 수덕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처럼 풍탁을 달아 불상을 장엄하는 용도로 재활용하였다.

일제강점기 강화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 연구_이주민_2020.pdf
19.77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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