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가는 행복 이야기

♣소양로 비석군(昭陽路 碑石群): 춘천부사 조원기, 관찰사 조종필 선정비, 향토문화유산(유형) 제2017-1호, ♣소양정(昭陽亭) :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

by 晛溪亭 斗井軒 2025. 6. 10.

소양로 비석군(昭陽路 碑石群):  향토문화유산(유형2017-1

♣소양로 비석군(昭陽路 碑石群): 부사 조원기(임천인), 관찰사 조종필 선정비,  향토문화유산(유형) 제2017-1호, ♣소양정(昭陽亭) :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

선정비 관찰사(觀察使) 부사(府使 고을의 수령(首領) 고을을 다스리면서 이룩한 공적이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비로서 우리나라의 어느 고장에 가도 쉽게 찾아볼  있다칭송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송덕비(頌德碑), 공덕비(功德碑), 흥학비(興學碑), 청백비(淸白碑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다
 비석군은 소양1 주변과 춘천관내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 1940년과 1983년에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서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가운데 조선시대 종이품지(從二品職으로서 지금의 도지사 급인 관찰사비 3() 종삼품직(從三品職) 으로서 시장급인 부사비 15종사품직(從四品職) 군수비 2   26기가 있다

 

碑石群_府吏 趙遠期(林川人)淸德善政碑"근화동(2021)"

3. 이범익 영세불망비이승만 탄시기념비
2. 권응기 칭덕선장비, 000영세불망비조최수 흥학선정비조병철 칭덕선정비, 000영세불망비이시원 선정비오명신 선정비유현 선정비조원기 선정비조한영 청백애민비박장원 칭덕비유흥 선정비
1. 이괴 선정비, 주석면 선정비, 김영구 선정비, 조종필 선정비, 0회 영세불망비, 권직상 애민선정비, 경최 애민선정비, 유현 흥학애민비, 김덕함 청백선정비, 오정위 청백애민비, 엄황 선정비, 유경창 선정비

♣소양정 :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

춘천시 소양로1가 봉의산 기슭에 있는 소양정은 소양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에 세워져 1,500여년의 역사가 서린 소양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추정된다. 산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요산요수의 지형 덕에 ‘이요루(二樂樓)’라고도 불렸다. 소양정의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 중층 누각 주심포집 팔작지붕이다.

소양정은 본래 지금의 위치보다 강 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소양1교 부근에 있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인 1605년(선조 38)에 홍수로 유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부사(府使) 유희담이 다시 건축하였고 1647년(인조 25)에는 부사 엄황(嚴滉)이 중수하면서 정자 동쪽에 선몽당(仙夢堂)이라는 부속건물을 세웠으나 1777년(정조 1)에 홍수로 또다시 유실되었다. 1780년 부사 이동형(李東馨)이 재건하였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타 1966년 옛 터에서 위로 올려 현 위치인 봉의산 기슭에 중층 누각으로 재건하였다.


2층 누정에 오르니 우거진 숲 사이로 소양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정자에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소양정에서 보는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짐작이 간다. 수암 이근구의 소양정의 한글 현판 시조 <소양정에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요루 천년 세월/ 개축 몇 번 개명 한 번 
   겹처마 팔작지붕/ 봉황으로 앉아서
   발끝에 산하를 펼쳐/ 푸른 춘천 바라본다.

   망루에 올라보니/ 거울 같은 두물머리
   소양강 북한강이/ 반갑게 손을 잡고
   산들도 어깨를 겯고/ 우쭐 우쭐 춤춘다.

   세월은 강을 막아/ 호반 봄내 이루고
   철새는 떼를 지어/ 호수위에 시를 쓰니
   황혼의 저녁노을이/ 봉의산을 빗질한다.

 

주변에는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살았던 고려의 유신(儒臣)인 원천석(1330~ ?)을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 삼연 김창흡, 석천 임억령, 도암 이재, 구당 박장원, 손재 조재호, 죽창 구용, 하은 신집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시액이 가득하다.   다음으로 시선이 닿은 것은 고려 말의 학자이자 고려의 유신(儒臣)인 운곡 원천석(元天錫), 1330~ ?)<春州 昭陽亭>(춘주 소양정)이었다.

   소양강가 누각 다시 찾아오니     
   다락 가득한 봄빛 더욱 풍류스럽네.     
   구름과 안개 꽃과 달 한가롭게 읊는 곳     
   얽히고설킨 나그네 시름 풀어보네.

   重到佋陽江上樓(중도소양강상루)
   滿樓春色更風流(만루춘색갱풍류)
   雲烟花月閑吟處(수수한화격안개)
   消遣縈盈客裏愁(소견영영객리수)

 

원천석은 흥망이 유수하니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는 시조로 유명하다.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살았다. 태종이 간곡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던 인물이다. 다음으로 다산 정약용의 시 昭陽亭懷古’(소양정회고, 소양정에서 옛일을 회상하다)에 시선이 갔다

   어부가 수원을 찾아 동천으로 들어가니, 
   붉은 누각이 소양정을 가리네 
   궁씨와 유씨의 할거(요새)는 자취도 없어졌고, 
   진한과 맥국의 싸움은 끝내 가련하구나
   우수산 옛 들판엔 봄풀이 아스라하고, 
   인제에서 흘러내린 물엔 낙화는 곱구나
   속세의 먼지 털어 무슨 소용, 
   강버들 석양에 물드는데 홀로 닻줄 푸는구나.
   
    漁子尋源入洞天(어자심원입동천)  
    朱樓飛出幔亭前(주루비출만정전)
    弓劉割據渾無跡(궁유할거혼무적)  
    韓貊交爭竟可憐(한맥교쟁경가련)
    牛首古田春草遠(우수고전춘초원)
    麟蹄流水落花姸(인제류수락화연)
    紗籠袖拂嗟何補(사롱수불차하보)
    汀柳斜陽獨解船(정류사양독해선)

 

정약용은 춘천에 와서 소양정의 봉의산 앞에 우뚝 섰다. 만정봉(幔亭峰)은 중국 무이산에 있는 봉우리로 봉의산을 뜻한다. 정약용은 예전 춘천 땅에 낙랑과 대방이 있었다고 보았는데, 시에 나오는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은 그곳의 태수였다. 이들은 북으로는 맥(), 남으로는 진한(辰韓)과 경계를 두고 싸웠다고 생각했다. 지금 춘천에 오니 옛 터에 봄풀만이 우거지고 강물엔 꽃잎이 떠서 내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시간의 덧없음에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영조 때의 문신이었던 도암(陶菴) 이재(李縡)<昭陽亭>(소양정)이다.

   정월에 소양정에 올라서 
   석옹(石翁)의 뒤를 이어 적어본다 
   멀리 마을에 연기 오르는데 한사람 떠나가고 
   해지는 모래사장 차가운데 한 쌍의 새는 울어댄다 
   산에 눈 내리고 강은 얼어 말할 수 없이 깨끗해 
   하늘 높고 땅은 아득하니 모두가 분명하다 
   늦봄이 올봄보다 낫다고 하지 말게나 
   참맛은 담박함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正月昭陽亭上行(정월소양정상행) 
       石翁之後敢容評(석옹지후감용평) 
       遙村烟闊一人去(요촌연활일인거) 
       落日沙寒雙鶴鳴(낙일사한쌍학명) 
       山雪江氷更淸絶(산설강빙갱청절) 
       天高地逈覺分明(천고지형각분명) 
       休言春晩勝春早(휴언춘만승춘조) 
       眞味方從淡處生(진미방종담처생) 

 

이재는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용인의 한천(寒泉)에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으며,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하는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서, 당시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 시액 외에도 매월당 김시습, 삼연 김창흡, 석천 임억령, 구당 박장원, 하은 신집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와 묵객들의 작품과 또 지암 성운경, 해관 홍종대 등 근현대에 활동한 지역 학자들의 한시들이 저마다 소양강을 두고 재주를 겨루듯 걸려 있다. 모두 지금의 자리가 아닌, 소양강가에 있을 때가 더욱 운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시를 감상하고 수양정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피니 수양정 옆에 퇴색한 비석 하나가 눈길을 끈다

춘천의 절기(節妓) 전계심(全桂心)의 묘비

이 비석은 바로 춘천의 절기였던 전계심의 묘비다. 이 비석은 춘천에서 태어난 관기(관청에 딸려 가무, 기악 하던 기생) 전계심의 묘 앞에 있던 비석이다. 오랫동안 풍우한설로 훼손되어 초라하다.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세웠다.

전계심은 조선 정조 때 천가에서 태어나 어려서 기생이 되었다. 천성이 청결하고 유정한 그녀는 천박하지 않고 아름다운 용모와 단정한 행동으로 눈독을 들이는 관속들이 적지 않았다. 그녀는 17세가 되던 해 춘천부사 김처인의 소실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부사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데리고 갈 처지가 되지 못하여 기회를 보아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다. 그러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사또의 덕에 호강을 한번 누려보려던 그녀의 어머니는 실망한 나머지 딸을 서울의 기방으로 팔아넘겼다


계심은 어쩔 수 없이 기방으로 갔으나 이미 부사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기에 부사가 자기를 찾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사랑하는 낭군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지냈다. 하지만 기생으로서 남의 눈에 띠지 않으려고 조심하면 할수록 한양의 한량이나 불량배들이 그녀를 가만히 놓아두질 않았다. 권력으로 돈으로 계심을 소유해보려고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계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자 어느 날 불량배 몇 놈이 들이닥쳐 계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폭력으로 야욕을 채우고 달아났다. 그녀는 찢어진 옷 더럽혀진 몸을 보고 한없이 울었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애까지 유산 되자 그녀는 사랑했던 사람에게 애절한 사연을 남기고 은장도로 자결하고 말았다.  

한편 계심이 자결하던 날 계심이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가보니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어 부사는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 봉의산 기슭에 장사를 지내주었다. 계심의 순절담은 곧 강원순찰사에게까지 알려져 순찰사는 열녀정문旌門을 세워주었고, 이 내려지게 되었고, 1796년에 그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 춘천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春川桂心殉節之墳’(춘천계심순절지분)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기생의 묘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분묘는 본래 봉의 산록 소양강 변에 있었으나 도로가 개설되면서 소실되고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7년 이곳 소양정 근처로 옮겼다. 이 비석은 그녀의 애틋하고 절개 있던 마음을  가슴 속에 되새겨 볼 수 있는 향토의 유적이다.

계심의 아름다운 정절은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의 신소설 귀의 성소재가 되었고, 1회 춘천개나리 문화축제 때 계심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춘천시내 접객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렸던 일이 있었으니까 계심은 죽어서 영원을 살게 된 여인임이 분명하다.

전계심 묘비, 춘천 절기 전계심의 묘비와 안내판

항쟁의 역사유적, 봉의산성

7부 능선에 오르니 여기저기 돌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알고 보니 봉의산성으로, 봉의산도 과거 외적의 침입으로 항쟁한 자취가 남아 있었다. 봉의산 중턱 서남편 샘터 위쪽 10되는 지점에서부터 봉의산고성(鳳儀山古城)의 잔존형태가 이어진다. 산의 지형이 매우 가파르고 험준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에 좋은 자연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어서 성곽이 위치할 조건은 갖추었다고 하겠으나, 성안의 평지면적이 좁으며 식수(食水)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장기전에는 어려운 결점이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봉의산고성의 둘레가 2,463, 높이 10척이라고 했다. 460여 년 전의 봉의산성의 형태이다. 강원도가 발행한 강원향토문화기본자료에는 지금 11개소에 석축 길이 196, 높이 26가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 무렵에 보존된 봉의산성의 모습이다. 지금은 산성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성벽의 길이 약 1,240m. 강원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에 속하며 성벽의 길이는 약 1,240m이다. 많이 무너진 상태이지만 축성법을 살피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성벽은 높이가 6m가량이나 되며, 성석의 크기는 2025×50정도의 길쭉한 모양의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줄여나가는 물림 쌓기 기법으로 쌓았다. 이와 같은 축성수법은 전체적인 것은 아니며, 일부는 토성(土城) 흔적만 남은 곳도 있다.

이 산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문무왕 13(673), 수양주(首壤州)에 주양성(走壤城)을 축조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주양성이 지금의 봉의산성이 확실하다고 보면 이것이 이 성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될 것이지만 그러한 확증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거란 및 몽골과 전쟁을 겪는 동안 이 산성에서 수차례나 전쟁을 치른 격전지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에는 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봉의산성은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 이후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춘천지방으로 침입했던 외적에 대항, 항전했던 역사적 현장이다. 춘천 주민이 향토를 수호하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유적이다. 거란유족의 침입, 몽골족의 침입 이후 왜구(倭寇)의 출몰을 막던 기지였고, 조선왕조 말, 왜놈을 이 땅에서 쫓아내고자 의병봉기의 기치를 높이 올렸던 성채이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곽은 6·25동란 때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봉의산성은 외적(外敵)에 대한 항전장(抗戰場)으로서 역사적인 유적이다. 성안에는 여러 군데에 건물지가 있고 1954년에 창건된 봉의사가 있다.

시대에 따라 항전의 역사를 지닌 봉의산성

충원사(忠圓寺)로 개칭한 봉의사

봉의산 서쪽 중턱에는 현재 충원사라는 자그마한 사찰이 있고, 입구 오른쪽에는 충원사 연혁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현판에는 “현재의 봉의사(鳳儀寺)는 신라시대 충원사의 암자(庵子)였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가 있는 근화동으로부터 봉의산 서편일대가 옛날 충원사의 사지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사기(寺記)에 의하면 1954년 권매월(權梅月) 스님이 암자를 창건하고 봉의사라고 하였고, 그 후 선사당과 종각을 개축하였고, 1995년부터 대웅전(大雄殿), 충월당, 충월선원을 건축하면서 옛 충원사의 명맥을 유지하자는 뜻에서 봉의사(鳳儀寺)를 충원사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충원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 충원사의 암자로서 처음에는 '봉의사(鳳儀寺)'라 하였으나, 1954년 금강산 유정사의 승려 권매월이 암자를 중창하면서 '봉시사'로 바꾸었다. 1988년 승려 성월(惺月)이 부임한 뒤, 선사당(禪寺堂)과 종각을 개축하고 대웅전과 충월당(沖月堂), 충월선원(沖月禪圓)을 증축하였다. 대웅전 증축과 함께 진입로 108계단을 축조하면서 옛 충원사의 명맥을 복원한다는 의미로 사찰 명을 충원사로 바꾸었다.

옛 충원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1632년(인조) 이곳 현감을 지낸 유정립이 낙향하여 현 소양로 2가 ‘춘천7층석탑(보물 제77호)’이 있는 곳에서 집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고 쓰여진 그릇을 발견한 뒤부터, 탑 부근을 충원사지로 추정하게 되었다.  <고려사>에는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보물 제76호)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부터 봉의산 서쪽 편 일대가 옛 충원사 터라고 기록되어 있다.(두산백과 참조)

한때 봉의사였던 충원사

♣춘천부제영록(春川府題詠錄)​ - 문소각기(聞韶閣記)

https://blog.naver.com/10sunmusa/223881210789

 

관동지(關東誌) : 춘천(春川)을 노래함

춘천부 제영록 春川府 題詠錄 문소각기(聞韶閣記) 우리 동방(東方)에서 큰 고개와 바다를 끼고 군현(郡縣)...

blog.naver.com

우리 동방(東方)에서 큰 고개와 바다를 끼고 군현(郡縣)이 설치된 곳 중에 산수가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다. 영동(嶺東)과 영서(嶺西)에 위치한 여러 고을은 더욱 기이(奇異)하고 수려(秀麗)하다는 칭송이 있어 다른 도()에 비해 으뜸이다. 그 중에서도 수춘주(壽春州)가 단연 제일이다. 수춘은 춘천의 별호이다.

대개 춘천의 동쪽으로는 봉의산(鳳儀山)이 있어 하늘 속으로 우뚝 솟아 있고, 소양(昭陽), 장양(長楊) 두 강은 봉의산(鳳儀山)의 서쪽에서 만나 빛나도록 맑은 물결로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대개 우리 동방에서 산수가 빼어나기로는 영동과 영서를 최고로 치는데, 영동과 영서가 최고라면 수춘(壽春)은 그 중에서도 제일이다. 이곳에는 올라서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정자(亭子)와 누대(樓臺)가 있어 모든 경치를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가 있다.

관청과 공해(公廨)는 산등성이와 그윽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데, 관아(官衙)의 청사(廳事)를 말한다. 각기 땅의 형세를 참작하여 건립(建立)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공관(公館)에 기거하는 이는 봉의산(鳳儀山)이 있는 줄은 알지만 소양(昭陽), 장양(長楊)은 알지 못하고, 요선당(邀仙堂)에 거처하는 이는 소양(昭陽), 장양(長楊)은 알지만 봉의산(鳳儀山)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왼편에서 보이는 것이 있으면 오른편에서는 반드시 빠뜨리고, 앞에서 얻는 것이 있으면 뒤에서는 반드시 놓쳐 버리는 것과 같다. 피차(彼此)가 서로 가려 그 미관(美觀)을 완비(完備)할 수 없는 까닭에 완벽을 바라는 이들은 항상 탄식해마지 않는다.

지금의 부사(府使) 엄황(嚴愰)은 고을을 다스린 지 3년 만에 엄황(嚴愰, 15801653)의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명보(明甫)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주부, 남해현령, 안동판관, 곤양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경상우병사, 의주부윤,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645년부터 1648년까지 춘천부사로 재직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문소각을 창건하고, 󰡔춘주지(春州志)󰡕를 저술하는 치적을 이루었다.

위로는 고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화목(和睦)을 도모하는 가운데 공관(公館)과 요선당(邀仙堂) 사이의 땅을 살펴 작은 누각(樓閣)을 창건하고는 문소각(聞韶閣)으로 이름 했다. 누각(樓閣)이 자리한 곳의 지세가 다소 높아 남북으로 한 길[]이 넘지만 구릉(丘陵)이 험난하지 않고 사망(四望)이 넓게 트여 이요(二樂)을 모두 갖추었다.

곧 봉의산(鳳儀山)의 서쪽과 소양(昭陽), 장양(長楊)의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험한 산이 면목(面目)을 드러내고 넓은 강물은 금대(襟帶)를 잡아당기는 듯하다.

깃과 띠를 이르는 말, 옷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산천이 꼬불꼬불 둘러싸고 있어 요충지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구름과 연기가 사지면 배들이 모여드는 사시(四時)의 기상(氣象)의 변화를 누각 밖으로 죄다 바라볼 수 있다. 수고스럽게 걷거나 힘들게 찾아다니지 않아도 안석(案席)에 기대어 곁눈질하는 사이에 모든 극진(極盡)한 미관(美觀)이 눈으로 들어온다. 이는 마치 파사(波斯)페르시아.의 거호(巨胡)가 뭇 보물을 소유하여 진열한 채 한 번도 상점으로 보내 매매하는 법 없이 혼자서 이방(異邦)의 진귀한 보배들을 마음껏 감상하며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엄부사(嚴府使)의 규획(規畫)은 참으로 여유로우면서도 일신(日新)한 것이 아니던가?

! 춘주(春州)의 봉의산(鳳儀山)과 소양(昭陽), 장양(長楊)은 마땅히 우주(宇宙)가 생성된 이래로 있어 왔겠지만 이곳에 언제부터 치도(治道)가 구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땅에 고을살이 온 인사(人士)들 또한 얼마만큼이나 현달(賢達)했는지 알 수 없다. 하늘과 땅이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산천이 은밀하게 형용(形容)해 낸 것을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남김없이 다 드러낸 것이니, 어찌 엄부사(嚴府使)의 장심(匠心)고안(考案)만 신묘(神妙)하며, 하늘의 주재(主宰)만 심원(深遠)한 것이겠는가?

광상(曠相)한 경영(經營)은 사람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까닭에 귀신(鬼神)과 이물(異物)이 실로 묵묵히 그 일을 돕지 않았으리요?

그렇지 않으면 조물주(造物主) 또한 만물을 개폐(開閉)함에 있어 조금이나마 통어(統御)함이 없었겠는가? 산을 봉의(鳳儀)로 이름 한 지도 오래되었다. 봉황(鳳凰)은 반드시 소()를 기다려 거동하는 법인데, 소는 순() 임금의 음악이다. 이 이름은 能韶繼光大堯之道즉 능히 대요의 도를 잇고 빛낸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소가 아홉 번 연주되면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 없이도 봉의(鳳儀)로 일컬어진 것은 아마도 오늘을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숭정(崇禎) 을해년(1635) 가을에 안절(按節)왕명에 의해 지방 군현의 치적(治積) 및 비리(非理)를 감찰하는 일차 춘천에 이른 적이 있다. 공관(公館)에서 왕명(王命)을 선포(宣布)하고 저녁에는 요선당(邀仙堂)에서 유숙(留宿)하였다. 이때는 이른바 문소각(聞韶閣)이라는 것이 없었고 옮겨 다니는데 지쳐 형승(形勝)을 살펴보지 못했다.

평상시에 왕래한 지도 지금까지 14년이 지났지만 문소각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전히 누각의 위치를 익숙히 가리킬 수 있었다. 이에 그 대강(大綱)을 대략이나마 기록하여 엄부사(嚴府使)의 요청에 부응하고자 한다.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가 기문(記文)을 쓰다.

중수문소각기(重修聞韶閣記)

수채(遂采)는 어릴 때 선군자(先君子)의 문소각(聞韶閣) 제영(題詠)을 읽고 오수채(吳遂采, 16921759)를 말한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수(士受), 호는 체천(棣泉)이다. 병조판사를 지낸 오도일(吳道一)의 아들이며,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1735(영조 11)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교리, 이조좌랑, 부응교 등을 거쳐 1741년 승지에 오르고 대사성, 예조참판을 역임했다.

선군자 : 돌아가신 아버지, 즉 선친(先親)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는 오도일(吳道一)을 지칭한다.

오도일1695(숙종 21) 강원도 관찰사(觀察使) 재직 시에 소양정에 올라 박태보(朴泰輔)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이 고을의 명승(名勝)이 영서(嶺西)10여 고을 가운데 으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춘주(春州)와 서로 가까운 부양(斧壤)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부양(斧壤)평강(平康)의 고명인데, 오수채(吳受采)가 평강현감(平康縣監)으로 부임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강산(江山)의 미관(美觀)을 죄다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번 가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이는 한유(韓兪)가 등왕각(縢王閣)에 오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유(韓兪, 768824)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는 퇴지(退之)이며 당나라 남양(南陽) 사람이다. 송대(宋代)에 창려백(昌黎伯)에 추봉되었기 때문에 흔히 한창려(韓昌黎)로 불린다. 강서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에 있는 누각으로 당 고조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지은 것이다.

 

지금도 왕래하는 가운데 가슴속에는 이곳에서 여유롭게 머물면서 세사(世事)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미련이 있었다. 지금의 춘천부사(春川府使) 상산(商山) 김제미(金濟美)는 나의 벗이다.

상산(商山)은 지금의 경북 상주(尙州)의 고명이다. 김광세(金光世, 1700미상)를 말한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제미(濟美)이다. 1733(영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734년에서 1744년까지 춘천부사로 재직했는데, 소양정을 중수한 것은 1744년이다.

하루는 글을 보내 오기를, 문소각(聞韶閣)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퇴락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중수하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이는 나도 일찍이 한 번 주목하였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었기에 충분히 나를 흥기시킬 만한 일이었다.

 

! 문소각(聞韶閣)을 처음으로 건립한 사람과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봉의산(鳳儀山) 아래에 지어진 누각이 어찌 문소(聞韶)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가산의 형상이 마치 봉황(鳳凰)이 와서 춤을 추는듯하여 소()()임금이 지은 음악의 이름를 들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면, 나는 산이 소()를 현출(現出)해 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를 들을 수 없다면 누각(樓閣)을 문소각으로 이름 한 것은 무망(誣妄)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지만나는 자첨씨(子瞻氏)로부터 한 마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에 따르면, ()는 곧 사라졌다. 사라짐이 있는 것은 존재하는 법으로 이는 일찍이 일월(日月)한서(寒暑)회명(晦明)풍우(風雨)와 더불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함께 행해져 온 것이다. 무릇 형체(形體)가 있고 소리가 있는 것은 모두 나의 경관포현(磬管匏絃)악기의 총칭이다.이다.

아아! 이는 지자(知者)와 더불어 논할 것이리라. 대저 이 땅을 다스린 이들은 능히 성인(聖人)의 교화를 부양(敷揚)하고 인풍(仁風)을 선도(宣導)하여 한 구역(區域)을 태화(太和) 속으로 융합(融合)함으로써 사람들은 호수(湖水)와 산이 백리(百里)에 펼쳐진 땅에서 만족할 수 있었으니,

강하(江河)의 토탄(吐呑),

초목(草木)의 부앙(俯仰),

조수(鳥獸)의 명호(鳴號),

중규(衆竅)의 호흡(呼吸)과 아침과 낮으로 헌미(軒楣)추녀 혹은 처마의 아래와 준석(樽席)술자리의 사이에서 물태(物態)를 달리하는 것은 어디를 가도 소()가 아닌 것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은택(恩澤)이 극진하지 못하여 백성은 궁핍해져 기운은 어그러지고 요기(妖氣)를 초래하여 원망과 저주의 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워 우리 백성들이 즐겁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상실하게 되고, 산천초목(山川草木)마저 참담(慘憺)하고 쓸쓸하게 만든다면 격부(擊拊)악기 이름와 축어(祝敔)()과 어()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축은 음악을 시작할 때, 어는 그칠 때 울린다.를 매일같이 이 누각(樓閣) 위에서 울려도 이른바 ()’는 끝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다.

! ()가 어찌 구할 수 있는 기물(器物)이겠는가? 제미(濟美)가 부모의 봉양(奉養)을 위해 근신(近臣)의 직책에서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온 지 1년 만에 이미 왕의 덕의(德意)를 선포(宣布)하고 정령(政令)을 이루니 백성들의 화락(和樂)이 백방(百方)으로 드러났다. 누각(樓閣)의 수리를 시작하여 공사(工事)를 마치고 빈객(賓客), 관속(官屬)과 함께 낙성(落成)을 보게 되었다. 낙성하는 날 고연(高筵)을 열고 술을 준비하여 대부인(大夫人)께 헌수(獻壽)하였다. 또 고을에서 나이가 많은 이에게도 술을 올리면서 연모(燕毛)잔치에서 자리의 순서를 모발빛, 즉 연령순(年齡順)으로 결정하는 예를 말한다. 연장자를 우대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의 예를 행하였다. 이러한 일대(一大) 행사(行事)춘천의 사람들로 하여금 효도와 노인을 노인답게 여기는 도리를 알게 하였으니, 제미(濟美)춘천을 다스리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할만하다. 이에 일방(一邦)의 사람들 이 효도하고 공손하여 풍속이 순미(淳美)해 지고, 흡족히 서로 더불어 왕의 은택에 흠뻑 젖어들게 되었다. 공적(功績)이 이와 같으니 제미(濟美)가 이곳에서 노래하고 술 마시는 취지는 오로지 성주(聖主)께서 내린 은혜를 춘천의 부로(父老)들과 공유(共有)함에 있다 해도 과장은 아닐지니, 비록 ()를 듣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들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병들고 노쇠하여 단 한 번도 노를 저어 산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했다. 제미(濟美)더불어 난간(欄干)에 기대어 고상(高尙)하게 시를 읊조리며 술잔을 들어 서로에게 권하면서 손으로는 소양강(昭陽江)의 달을 어루만지며 함께 소소(蕭韶)의 음()을 품평하였다. 이 부분은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연상케 한다. 또 자첨씨(子瞻氏)의 뜻을 보다 확충하여 다시 선친(先親)의 제영(題詠) 아래에 나의 이름 자()를 더하기를 바라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기문(記文)을 지었다. 드디어 연이어 시()를 지어 이르기를,

貊之墟兮古有閣 맥국(貊國)의 옛 터에는 예전부터 누각(樓閣)이 있었더니

突兀百年新厥桷 우뚝하니 백년 만에 새롭게 중수되었더라.

閣上閣下瞍幽矚 누각의 위 아래로 그윽한 경치가 선명하니

鳳儀之雲昭陽月 봉의산(鳳儀山)의 구름과 소양강(昭陽江)의 달빛이라.

太守心淸政與若 태수(太守)는 마음이 맑아 정치도 깨끗하고

百里太古春有脚 수춘(壽春)이라 백리 땅에 태고(太古)부터 사람의 발길이 잦았으리.

韶亡天地歷千劫 천지(天地)에는 천겁(千劫)토록 소()가 사라졌건만

怳惚希音滿廖廓 황홀한 희음(希音)만은 허공 속에 가득하네.

我爲作歌聞韶曲 내 노래 한 곡 지으니 문소곡(聞韶曲)이라

遙賀江山飛一句 길이 강산(江山)을 경하(慶賀)하며 한 구절을 띄우네.

라고 하였다.

1744(갑자, 영조 20) 추맹(秋孟)202) 하순에 수양(首陽) 사수(士受) 오수채(吳遂采)가 기()하다.

 

♣문소각기(聞韶閣記)

경사(京師)한양의 동쪽은 협곡(峽谷)이다.

묘적령(妙積嶺)으로부터는 뱀처럼 구불구불해져 가면 갈수록 험준하다80리 산길을 걸어 춘천(春川)의 경계에 들어서면 혹은 협소(狹小)하여 담장 같고, 혹은 회합(會合)하여 옥()과 같다. 깊은 것은 강이 되고, 얕은 것은 여울이 된다. 평평한 곳에도 돌이 많고 험하며 길은 산등성이에 희미하게 나 있다. 7080리를 가면 갑자기 너른 들과 기다란 섬 그리고 언덕과 구릉이 보인다. 멀리 비치는 곳에서 서남쪽 가까이로 뻗어 나온 산이 있는데, 봉의산(鳳儀山)이다. 그 아래에 있는 이른바 문소각(聞韶閣)은 관부(官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음악 가운데 그 성()하기가 소()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나라가 쇠퇴하자 공자(孔子)께서도 이를 아셨으니,

만약 󰡔서경(書經)󰡕봉황(鳳凰)이 와서 춤을 추네.”라고 한 것이 󰡔서경(書經)󰡕/익직(益稷)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하였는데, ()로서 소()를 연주하여 아홉 번을 마치면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는 말로서 이는 매우 상서로운 징조이며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흥감(興感)의 이치(理致)는 오히려 황망(慌茫)함 속에 있음을 특별히 말씀하신 것이라면 문소각(聞韶閣)으로 명칭한 까닭은 무엇인가? 천하에서 지극히 정()하기로는 산()과 같은 것이 없고 지극히 동()하기로는 악()과 같은 것이 없다. 산은 인()에 가깝고 ()은 지()에 가까워 () 임금께서 평토(平土)할 때부터 반드시 악()()을 우선적으로 구별하였다. 대개 국도(國都)에서 군현(郡縣)에 이르기까지 진산(鎭山)이 없는 곳이 없으니, 봉의산(鳳儀山) 또한 춘천(春川)의 진산(鎭山)이 아니던가? 봉의는 곧 봉산(鳳山)의 이칭(異稱)이다.

󰡔시경(詩經)󰡕에서는 주()나라의 아름다움을 송축(頌祝)하여, 기산(岐山)에서 봉황(鳳凰)이 울었다.”라고 했으며, 󰡔사기(史記)󰡕에서는 영천(潁川)의 치도(治道)가 군현(郡縣)에까지 이르렀다.”고 했으니, 영천(潁川) 중국 하남성 등봉현(登封縣)에서 발원하여 안휘성에서 회수(淮水)로 흘러들어가는 강.

 

 

이 모두는 만물(萬物)의 감응(感應)은 덕()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에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물로서의 산은 정()한 것이다. 따라서 악()의 이치(理致)처럼 흔적도 없이 유산(流散)되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구차하게 다시 얻으려 한다면 마찰과 소란이 없을 수 없으니 어찌 반드시 울음소리에 가탁(假託)한 뒤에라야 소()라고 하겠는가?

어떤 이는, “()의 가운데는 높고 양쪽이 낮아 마치 봉황이 훨훨 날아오르는 듯 하여 봉의(鳳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기묘년에 능성(稜城) 구상(具庠)이 기()하다.

昭陽倚罷上聞韶 소양정(昭陽亭)을 거쳐서 문소각(聞韶閣)으로 올라가니

縹渺朱欄切紫霄 비단 같은 붉은 난간이 하늘을 막아서네.

節屬暮春花事遍 계절은 늦봄이라 사방에 꽃이 피고

江當落日練光搖 해지는 강가에는 하얀 빛이 피어오르네.

身浮宇宙愁還動 광활한 우주에 두둥실 몸을 띄워도 수심(愁心)은 그칠 줄 모르고

手指蓬瀛路未遙 손가락으로 너머 봉영(蓬瀛) 길도 요원하지 만은 않구나.

山頂風松時奏樂 산마루의 풍송(風松)이 때맞춰 가락을 연주하니

雲邊怳見鳳飄颻 구름 곁으로 황홀하게 봉황(鳳凰)의 날개 짓을 바라보네.

●봉 : 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州山)을 말하는데, 모두 신선이 산다는 선산(仙山)이다.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린다.

정미년(1667) 3월 하순에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문소각에서 구술(口述)하여 동석(同席)에 앉은 이에게 봉정(奉呈)하는 시.

 

亂山中闢野蒼蒼 어지러운 산속에 아득히 들판이 열리고

二水幷成一水長 두 강물 어우러져 한 물 되어 길게 흐르네.

飛閣不孤塵外勝 날아갈 듯한 누각은 세속을 벗어난 빼어남이요.

淸遊欣値雨餘凉 비온 뒤의 청량(淸凉)한 때를 만나 유람도 청아(淸雅)하네.

波啣落照搖丹襤 물결은 지는 해를 머금은 채 붉은 난간을 뒤흔들고

風曳流雲度畵梁 바람은 떠도는 구름을 몰아 그림 같은 징검다리를 건너네.

三日淹留幽興足 사흘을 머물러도 그윽한 정취가 흡족한데

百年登覽幾人忙 백년토록 여기에 오른 이 그 얼마나 많았으리요.

계해년(1683) 5[仲夏]에 반남(潘南) 박태보(朴泰輔)

문소각(聞韶閣)에 올라 즉석에서 지은 시.

 

落日門巖泊片舠 해지는 문암(門巖)에는 조각배가 머무르고

仙鄕官路鷺洲皐 선향(仙鄕)으로 부임하는 길에 백로주(白鷺洲)가 시원스럽네

倚雲秋睡荒郊遠 구름을 의지하여 황량한 교외에서 가을 잠을 이루고

帶月霄眠畵閣高 그림 같은 누각에 올라 달을 끼고 밤잠을 자네.

貊國墟浮三嶽翠 맥국(貊國)의 옛 터에는 푸르른 삼악(三嶽)이 떠오르고

鳳儀光撼二江濤 봉의산의 광채는 두 강의 물결 위로 아롱거리네.

朝來不說昭陽會 아침에 올 때는 소양에서의 술자리를 말하지 않더니

宿醉樽餘栢葉醪 숙취(宿醉)한 뒤의 술통에는 백엽주(栢葉酒)만 남았네.

송석(松石) 송성명(宋成明)

그 백로주는 아니겠지만 예를 들어 강소성 남경 장강가의 백로주 풍경

金陵古今圖考 금릉고금도고의 백로주 지도

남경 장강변의 백로주공원 풍경

문소각에서 박학사(朴學士)의 운()을 차하다.

박태보(朴泰輔, 16541689)는 조선 숙종 때의 간관(諫官)으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이다.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던 도중에 죽었다. 저서에 󰡔정재집󰡕/등이 있다.

秋氣江光一樣蒼

畵樓高處鴈嘶長

千年興廢波聲怒

八月登臨野色凉

侵檻宿雲飛鳳岫

透簾新旭射虹梁

名區到底看如夢

却笑吾行役役忙

 

정축년(1677) 7[初秋]에 관찰사 유득일(兪得一)208)

유득일(16501712)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숙(寧叔), 호는 귀와(歸窩)이다. 1697(숙종 23)에 강원도 관찰사에 재직했다.

眼界乎看一莽蒼

山河指點意何長

酒醒疏檻風留韻

睡起虛簷雨送凉

鳳岳朝嵐連古郭

貊江春水上魚梁

潘南寶唾成陳跡

爲掃紗籠讀遍忙

 

봉악 : 춘천의 진산을 이루는 봉의산(鳳儀山)을 말한다.

맥강 : 소양강(昭陽江)을 말한다.

어량 : 물고기를 잡는 장치로 물살을 가로막고 물길을 한 군데로만 터놓은 다음에 거기에 통발이나 살을 놓는다.

반남 : 박태보의 관향.

보타 : 좋은 글귀나 명언을 이르는 말.

사롱 : 사등롱 현판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덮어씌우는 천.

신묘년(1711) 4[孟夏]에 이조(李肇)

문소각(聞韶閣)에 머물던 중에 태태수(太太守)를 위하여 장난삼아 노래하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太守의 위에 또 태태수가 있음을.

지위도 없고 <다스리는> 백성도 없으며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다.

순임금의 음악을 누각에서 듣는 별도의 지위며,

태수 시절마다 와서 따뜻한지 서늘한가 묻네.

남승(藍丞)215)은 관아에서 날마다 시를 읊조리고,

남승 : 남전 현승(藍田縣丞)의 준 말. 현승은 부현령(副縣令) 격이어서 결재하는 권한은 없고 오직 서류를 검열할 뿐이라는, 한퇴지(韓退之)󰡔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에서 따온 말.

공당(公堂)은 저절로 청정(淸淨)하도다.

소양강 물새 친인(親人)을 가까이 한다지만,

어찌 춘주(春州)에 기러기 와서 명()을 받음이 있겠는가?

광릉(廣陵)의 연화(煙花)를 가려 얻으며,

연화 : 이백의 시 황학루에서 맹호연이 광릉으로 감에 보내며(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故人西辭黃鶴樓 친구는 나를 여기 황학루에 남겨 놓고 煙花三月下揚州 춘삼월 꽃안개 속 양주로 내려간다에서 온 말이다.

 

호북성 무한시 황학루

 

 

 

무성(武城)의 현가(絃歌)로 정치를 도와 다스리네.

무성의 현가 : 무성은 춘추 시대 노() 나라의 현읍(縣邑)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비현(費縣)에 있었으며 현가는 거문고비파 등을 연주하며 시가(詩歌)를 읊는 것. 자유(子游)가 무성의 읍재(邑宰)가 되어 백성들에게 예악(禮樂)을 가르쳤으므로, 곳곳마다 현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이는 골골마다 독서하는 소리가 들려 유교가 크게 진작되리라는 말이다. 󰡔論語󰡕「雍也.

평장(平章) : 공평무사한 정치으로 연월(煙月): 태평세대.에 글의 권한[詞權]을 쥐고,

전최(殿最)로 육사(肉絲) 고과(考課)의 권한을 전임하네.

전최 : 포폄(褒貶)이라고도 한다. 법적으로는 경관(京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으나 대개 지방관의 경우를 일컬었다. 지방관이란 백성을 직접 대하는 관원으로서 그 잘잘못이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임명과 감독에 신중을 기하는 한편 나쁜 지방관은 파면되기도 했던 것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는 전야(田野)의 개간, 호구(戶口)의 증가, 부역의 균등, 사송(詞訟)의 간결, 도적의 근절 등 5가지 면에서 지방관의 성적을 판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태조 1) 이미 지방관의 고과법(考課法)을 제정하여 실적을 선()()()(殿)4등급과 여기에 세밀한 등급을 붙여 조사보고하도록 하였다. 그 후 기준은 다소 달라졌으나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하여 관찰사가 지방관의 실적을 몰래 조사하여 매년 615일과 1215일에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육사 : 얇게 썰은 고기. 여기서는 好食한다는 의미이다.

사금(師琴)과 염창(髥唱)하며 또한 당()에 올랐고,

사금 : 미상. 악사가 연주하다는 의미로 보인다.

염창 : 미상. 태평성대의 노래 정도의 의미로 보인다.

곧바로 방영(防營)에 피리와 북소리 다투네.

방영 : 조선 시대에, 강원도평안도함경도에 설치한 방어사의 병영(兵營).

기린강[獜江] 물결에 물고기 <뛰어노는> 소리 듣고,

봉황산[鳳岫] 바람 따뜻하여 백성이 소생하네.

너에게 묻노라.

치화(治化)함에 처음에 몇 번이나 솔개 소리 울릴 수 있어야,

내가 오는 봄에 악정(樂正)의 웃음 없게 할 것인가?

악정 : 고려조선 시대에, 성균관에서 음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일을 맡아 하던 벼슬. 고려 충렬왕 34(1308)에 설치되어 공민왕 11(1362)에 사예(司藝)로 개칭되었으며 조선 태조 1(1392)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성종 때 또다시 사예로 개칭되었다.

내가 가면 백성이 누구를 그리워하랴,

오직 홍장(紅粧)의 제가가 목을 길게 빼고 나란히 바라보리라.

경신년 모춘에 78세 늙은이 계옹(溪翁)이 쓰다.

박학사(朴學士) : 박태보 의 운을 차하다.

故國荒墟樹木蒼

煙蕪縱目鳥飛長

簷迎山氣晴霏雨

窓納江光夏作凉

明月幾回留畵檻

暗塵無數落紅梁

流連今古繁華事

樓外云云逝水忙

 

고국 : 맥국

유련 : 강물을 따라 내려가서 돌이킬 줄 모르는 것은 ()’라고 하고, 강물을 따라 올라가서 돌이킬 줄 모르는 것을 ()’이라 한다.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을 말한다.

을해년(1695) 여름에 관찰사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

삼가 족조(族祖) 서파공(西坡公)의 운을 차하다.

樓壓平蕪十里蒼

夕陽徙倚送眸長

北來山勢圍坪遠

西走江聲落檻凉

夜靜月華生鳳岳

日斜人影倒魚梁

聞韶飮罷昭陽又

應接風光亦覺忙

 

평무 : 잡초가 무성한 평평한 들.

을묘년(1735) 중하(仲夏)에 전()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오언주(吳彦冑)

문소각에서 삼가 계부(季父) 귀와공(歸窩公)의 운을 차하다.

遠樹秋山八望蒼

淸江巨野逵林長

重陽令節吾行遍

一夜高樓客夢凉

此日登臨饒勝槪

何年創始揭脩梁

名區處處堪乘興

却恨王程等撥忙

 

중양 : 음력 99.

왕정 : 왕사(王事)를 위해 분주하게 행하는 여정(旅程) 또는 부임(赴任)의 기한(期限)을 의미한다.

유숭(16611734)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원지(元之)이다. 1719(숙종 45)에서 1720(숙종 46)까지 강원도 관찰사에 재직했다.

기해년(1719) 9[季秋] 상순에 관찰사 유숭(兪崇)233)

鳳儀山色入靑霄

飛閣凝雲怳聽韶

可識化翁勞劈畵

須敎勝客着逍遙

雙江合道明沙闊

千樹橫堤錦葉凋

住節登高還是日

欄邊秋彰鴈迢迢

 

정사년(1737) 2[重陽]에 이중협(李重協)

이중협(1681?)은 본관이 경주(慶州), 자는 화중(和仲)이다. 이 시는 1737(영조 13) 강원도 관찰사에 재임할때 지은 것이다.

淸分偏於嶺峽饒

宦遊前後到聞韶

自慙曾乏褰帷化

可道今騰詠袴謠

遠嶼回巒江面闊

雜花柔柳野情遙

山鳩下席庭陰轉

官角嗚嗚破寂寥

 

건유 : 수레에 걸쳐진 휘장을 걷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정사년 3[暮春]에 죽천(竹泉) 조최수(趙最壽)

판상(板上)의 운을 차하다.

三山聳峙二江橫

形勝關東最有聲

神鬼長時應秘護

樓臺何歲此經營

俄看瑞鳳翔千仞

翻聽雲韶奏九成

儻問使君閑趣味

煙洲一鷺檻前迎

 

구성국 : ()의 음악인 ()’를 아홉 번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구성은 구변(九變)과 같은 말이다.

사군 : 춘천부(春川府)의 장관인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지칭한다.

한사득(16891766)은 본관이 청주(淸州), 자는 계능(季能)이다. 1748년부터 1749년까지 춘천부사를 지냈다.

무진년(1748) 여름[維夏]에 한사득(韓師得)

峽坼沙明二水分

鳳儀山下一樓雲

荒城鴈度孤舟泊

古水蟬鳴落日曛

今夜笙簫仙是吏

昔時宮闕貊爲君

宋欄月上人皆醉

老桂淸香空外聞

 

김한철(17011759)은 본관이 경주(慶州), 자는 사적(士迪)이며,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병인년(1746) 6월에 김한철(金漢喆)

문소각에서 사질(舍侄)의 운을 차하다.

사질 : 조카인 조재호(趙載浩)를 말한다.

楊柳高欄夕照橫

風光却是金湯地

江城五月亂鸎聲

形勢俱宜水陸營

穢貊亡餘故都在

鳳凰來日此樓成

衰年車馬還奇會

喜有他鄕骨肉迎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으로 금성철벽(金城鐵壁) 또는 철옹성(鐵甕城)이라고도 한다.

병인년(1746) 5월에 귀록산인(歸鹿山人)

귀록산인 :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은 본관이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이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평정된 후에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고 1750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문집에 󰡔귀록집(歸鹿集)󰡕이 있다.

萬木流秋韻

官庭菊欲黃

峽中開野闊

雲裡放江長

勝地仍樓閣

佳辰且詠觴

錦茵移底處

名構又昭陽

 

신미년(1751) 8[仲秋]에 관찰사 조명리(趙明履)

조명리(趙明履, 16971756)는 본관이 임천(林川), 자는 중례(仲禮), 호는 노강(蘆江)도천(道川),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751년부터 1752년까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東土曾千國

中原此一吳

韶音生曠野

覇氣散荒都

日晩林鳴鳥

春深江有鳧

絃歌且爲樂

興歇不須吁

 

갑술년 3[暮春]에 이형만(李衡萬)

地勢盤巴蜀

天客坼楚吳

山河今大府

人物古名都

兵氣交龍虎

波聲雜鴈鳧

斜陽倚高閣

興廢一長吁

 

파촉 : 사천성(四川省)의 별칭이다. ()는 지금의 사천성 중경지방(中京地方)이고 촉()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지방이다.

김진상(金鎭商, 16841755)은 본관이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자(退漁子)이다.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문집에 󰡔퇴어당집(退漁堂集)󰡕이 있다.

정사년(1737) 10[孟冬]에 퇴어자(退漁子) 김진상(金鎭商)

邃深雲夢楚

敞豁岳陽吳

遠水迷獜峽

荒城認貊都

居民群鳥獸

開國杳魚鳧

興廢成千古

登臨費一吁

 

운몽 : 중국 화용현(華容縣) 동남쪽 파구호(巴丘湖)가 있는 곳으로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이다.

악양 :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陽縣).

홍봉조(洪鳳祚, 16801760)는 본관이 남양(南陽), 자는 우서(虞瑞), 호는 간산(㿻山)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1747년부터 1749년까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이 시도 이 때 지은 것이다.

무진년(1748) 홍봉조(洪鳳祚)248)

문소각을 중수한 후 율시 한 수를 지어 지주(地主)249) 김사군(金使君)250)에게 봉정하다.

지주 : 춘천부사를 이른다.

김사군 : 김광세(金光世)를 말한다. 17436월부터 174410월까지 춘천부사로 재직했다.

山如鳳舞截雲橫

韶斷千年或聞聲

絶峽中間大開野

名區形勝一防營

前人結構疑神造

卽地丹靑不日成

祗願長留賢太守

錦筵歌管每相迎

 

방영 : 조선시대 강원도평안도함경도에 설치한 방어사의 병영.

화려한 단청.... : 이 말은 󰡔시경(詩經)󰡕/대아(大雅)영대(靈臺)편에 나온다.

조재호(趙載浩, 17021762)는 본관이 풍양(豊壤), 자는 경대(景大), 호는 손재(損齋)이다. 1759년 돈녕부사로 있으면서 계비(繼妃)의 책립을 반대하다가 임천(林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서 춘천에 은거하였다. 문집으로 󰡔손재집(損齋集)󰡕이 있다.

갑자년(1744) 9[菊秋]에 조재호(趙載浩)

판상(板上)의 운을 차하다.

鳳儀山聳怳聞韶

結構翬飛入遠霄

畵欄迎輝光爍爍

危欄架壑影搖搖

霜淸蘆林漁歌冷

秋晩江城鴈陣遙

棨纛明朝何處向

蓬萊前路興先飄

 

임술년(1742) 9[菊秋] 상순에 관찰사 조명겸(趙明謙)254)

조명겸 : 1742(영조 18)에서 1743(영조 19)까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雲嵐爽籟自淸凄

炎夏如秋客意迷

最愛月明三五夜

遠江連白近江西

 

운람 : 구름과 아지랑이를 말한다.

십오야 : 음력 보름날 밤으로 특히 음력 8월의 보름을 이른다.

이현석(李玄錫, 16471703)은 본관이 전주(全州), 자는 하서(夏瑞), 호가 유재(遊齋)이다. 1693년 춘천부사 시절는 진휼에 힘써 춘천부진민막소(春川府陳民瘼疏)(󰡔유제집(遊齋集)󰡕)를 개진하였으며, 춘천부사직단기우제문(春川府社稷檀祈雨祭文)(󰡔유재집󰡕), 기린산기우제문(麒麟山祈雨祭文)(󰡔유제집󰡕), 대룡산기우제문(大龍山祈雨祭文)(󰡔유재집󰡕)을 짓기도 했다.

숭정(崇禎) 을해 후 57년 임신년(1692) 유재(遊齋) 이현석(李玄錫)

문소각에서 판상(板上)의 운을 차하다.

十里煙郊極望蒼

赤欄西帶碧流長

風吹草際帆檣出

月轉松梢枕簟凉

故國江山民似鹿

仙人樓閣杏爲梁

花深鶴睡悠然臥

幾處飛塵世事忙

 

을미년 3[暮春]에 정지환(鄭趾煥)

此地何年鳳鳥翶

九成遺韻一樓高

秋生古貊空王迹

天借名區屬我曺

檻外橫瞻三岳勢

枕邊長送二江濤

滁亭誰識從遊樂

只有林禽也自號

 

임술년 9월 상순에 완산(完山) 이정현(李廷顯)

鳳舞龍盤畵亦難

昔年王氣好江山

群峰拱揖靑千疊

遠水來襟白一灣

峽邑風淳民訟歇

鈴庭日永妓歌閑

平生若得春州倅

世上功名摠不關

 

임술년(1802) 9[菊秋]에 관찰사 신헌조(申獻朝)

신헌조 : 1802(순조 2)부터 1804(순조 4)까지 강원도 관찰사에 재직했다. 이 시도 이때 지은 것이다.

峽路盤回窄似舠

於焉忽得此亭皐

聞韶三日還忘去

儀鳳千年不勝高

客易霽雲開野色

許多秋水散烟濤

無由出空明悄

態倚胡狀進菊醦

 

을묘년 8[仲秋] 하순에 도순사(都巡使) 이병정(李秉鼎)

韶斷人間世幾千

忽登斯閣聽依然

平蕪遠色連秋水

古貊遺墟入暮烟

勝地風光誰是主

淸簫明月吏如仙

江山不奈新題品

滿壁驪珠獲已先

 

여주 : 여룡지주(驪龍之珠)의 준말로 검은 빛깔의 용인 여룡(驪龍)의 턱에서 떨어졌다는 구슬을 말한다.

정사년 6[季夏]에 서유전(徐有銓)

江閣飄然坐似舠

滿簾蒼翠落雲皐

依俙十五年前勝

縹渺三千界上高

春樹萋萋迷古國

晴沙滾滾走平濤

仙區日月淹爲客

潦倒何關醉濁醪

 

신미년(1751) 윤월(閏月)에 이우진(李羽晉)

이우진(李羽晉, 16401698)은 영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익(聖翼), 호는 평원당(平遠堂)이다.

彩構結阿閣

丹苞影子回

庭疑群鳥舞

山忽九成臺

㗳爾噓天籟

殷其動地雷

希音如復作

許見有虞來

 

희음 : ()의 음악인 소()를 말한다.

기헌(寄軒) 이정운(李貞運)

갑자년(1804)에 나는 노친(老親)을 봉양하기 위해 춘천부사를 자청했다. 한가한 날 문소각에

올라 벽 위에 붙어 있는 백주(白洲)262)의 지자(識字)희자(喜字) 운에 차하다.

백주 :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의 호이다.

 

鑾掖餘賜醖觴 銅章喜是彩衣郞 名區日月鴻恩重 仙窟烟霞鶴髮長 秋艇飛高銀鯽膾 春盤採動紫芝香 更憐朱墨多閑燕 聊點丹鉛擬晩唐

 

학발 : 두루미의 깃털처럼 희다는 뜻으로, 하얗게 센 머리 또는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

주묵 :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이동을 구별하거나 첨삭을 가할 때 쓰인다. 이외 장부에 지출을 적을 때도 쓰인다.

단연 : 연지와 분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문장에서 잘못된 글자를 고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만당 : 중국 사당(四唐)의 마지막 시기. , 836년에서 907년 사이의 시기를 이르는데, 이상은두욕사마예장교 등이 활약했다.

김근순(1772?)은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여인(汝仁), 호는 십청(十淸)귀연(歸淵)이다. 1804310일에 도임하여 1805228일까지 춘천부사를 지냈다.

김근순(金近淳)

翬閣斜連鳳岫蒼

九韶當日六鳴長

黃花滿岸秋容淡

白鳥橫江暮色凉

伯氣千年迷穢貊

客愁何處問河梁

人間一謫猶仙界

隨意登臨不用忙

 

육명六鳴 : 황제 이하 6대의 고악명(古樂名) 중 하나로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순()의 소()를 말한다.

위 시의 원운(原韻)은 족조(族祖) 정재공(定齋公) 박태보(朴泰輔) 이 계해년(1683)에 지은 시로 종정(宗正)이 을해년 가을에 귀양살이 할 적에 차운(次韻)한 것이다. 계해년 가을에 다시 아사(亞使)로서 이곳을 지나다가 비로소 나무에 새겨 걸었다.

박종정(朴宗正)

落木蕭蕭客未眠

蒼莽野色峽中圓

楊嘉路出三山外

獜狼舡分二水邊

此日縣監前府使

千年貊國卽村田

聞韶閣上悄然坐

鳳不飛來月在天

 

인수(獜水)와 낭수(狼水) : 인제와 화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 소양강과 북한강의 상류 장양강(長楊江)을 말한다.

전일의 부사가...현감이 되고 :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던 심정연(沈鼎衍) 등의 태생지라는 이유로 1756(영조 32) 부에서 현으로 강등된 것을 말한다. 1766(영조 41)에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병자년 가을밤에 촉천(矗川) 나그네 서직수(徐直修)

벽상(壁上)의 운을 차하여 부백(府伯)춘천부사에게 증정하다.

經營不必較前賢

閒曠唯應樂暮年

塵世機關難盡了

淸尊懷抱直須宣

洩雲無定歸何處

皓月長生照此筵

萬古驅驅輸俯仰

且將詩律撼晴川

 

세속의교사한 마음 : 기심(機心)과 같은 말이다. 곧 교묘하고 사기(詐欺)스런 마음을 말한다.

재미 삼아 윤이성(尹而聖)에게 봉정하고 아울러 부백(府伯)에게도 보이다.

病客從來怯羽觴

任將歌管屬檀郞

何妨閑幔深深掩

不用淸宵細細長

碧桂近窓傳晩吹

金蟾當案護殘香

獨枕未須成悵望

且敎仙夢到高唐

 

우상(羽觴)은 참새 모양으로 생긴 술잔으로 머리와 꼬리 그리고 좌우의 날개가 있다. 잔 위쪽에 날개를 단 것은 빨리 마시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으로 술잔의 총칭으로 쓰인다.

단랑(檀郞) : 부녀자들이 지아비 또는 연인을 부를 때 단랑(檀郞), 단노(檀奴)라고 한다.

계수(桂樹) 만취(晩吹) : 만간지풍(晩間之風)이라고도 한다. , 저녁 무렵에 불어오는 바람을 말한다.

이 시는 나의 선조 학곡(鶴谷) 문정공(文靖公)강원도 관찰사와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洪瑞鳳, 15721645)을 말한다.께서 안절(按節) 차 춘천부(春川府)를 지나면서 지은 시이다. 예전에는 사롱(紗籠)을 걸어 두었지만 지금은 잃어 버렸다. 부지(府誌)에 실려 있는 기록을 통해서 보니 마음속으로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들 수만(秀晩)으로 하여금 공경히 유집(遺集)을 열람하여 잘못된 글자로 바로 잡고 판에다 쓰게 하여 삼가 누각(樓閣)의 처마에 걸었다.

경신년 5[仲夏]에 부사 홍성연(洪聖淵)이 삼가 기록하다.

춘천부 객관(客館)에서 학곡 홍상공(洪相公) 홍서봉(洪瑞鳳)의 운에 차하다.

春讌江樓雨滿觴

繡衣當日我爲郞

仙區一去烟霞隔

使節重來歲月長

巖寺可忘津北路

官樓初動臘前香

籠紗暎壁無人知

爲有新詩逼盛唐

 

그시절에는 : 홍서봉이 안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자신[이명한]이 종사관으로 배행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납전(臘前) : 음력 12월의 납일에 백신(百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백주(白洲)이명한

문소각에서 삼가 귀록상공(歸鹿相公)조현명의 운에 차하다.

鳳儀山豁大江橫

至樂無聲勝有聲

別界開張何爽朗

化翁排置太經營

敢言肉味忘三月

自覺臺名合九成

夜半雲晴生桂魄

把盃如接故人迎

 

지락(至樂) : ()의 음악인 소()를 말한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소()를 열중해서 듣다보니 세달 동안 육미를 잊었다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계유년 9[季秋] 상순(上旬)에 관찰사 조홍진(趙弘鎭)

정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관보(冠甫), 호는 창암(窓巖)이다.

을해년에 나는 은대(銀臺)왕명을 출납하는 관서인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에 있으면서

춘천부사로 나가기를 자청했다.

부모를 모시는 여가에 즉사(卽事)를 읊어 희환(喜歡)에 가탁하다.

그 자리에 가서 직접 일에 관계하거나 그렇게 관계하는 일을 말한다. , 그 일을 제목으로 당장 시가를 짓거나 그렇게 지은 시를 말하기도 한다.

十載承恩侍玉堂

東飛鳬舃又玆鄕

中天積氣孤峯出

遠浦流雲二水長

比屋桑麻時雨潤

滿簾松桂晝陰凉

斑衣晨夕春爲壽

更以岡陵答寵光

 

옥당 : 홍문관(弘文館)을 말한다.

상마(桑麻) : 전원을 말한다. 대개 전원에는 상마(桑麻), 즉 뽕나무와 삼베를 심기 때문에 전원의 대칭(代稱)으로 쓰이게 되었다.

반의(班衣) : 여러 빛깔의 옷감으로 지어 만든 옷.

이광문(17781838)은 본관이 우봉(牛峰), 자는 경박(景博), 호는 소화(小華) 또는 삼주이다.

삼주(三州) 이광문(李光文)

벽상(壁上)의 태태수가(太太守歌)를 차하다.

그대는 이 땅의 수령을 두고 진태수(眞太守)라고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온 나라 안의 사민(士民)들이 공경하는 바를 깨닫네.

또 태수(太守)의 아비를 두고 태태수라고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내면서 온정(溫情)이 있네.

깊고 깊은 누각에 고침(高枕)을 베고 누우니

하나의 티끌도 깨끗한 금서(琴書)에 이르지 못하네.

소리개는 어지러이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약동하니 이 모두가 스스로 만족할만하고

()은 장수하고 오리는 단명하니 저마다 정해진 명()이 있네.

굳이 무성(武城)에서의 현가(弦歌)와 우열을 비교치 않더라도

흥이 올라 시()로써 명령(命令)을 삼고 술()로써 정사(政事)를 삼으니

이제야 태태수의 낙()이 진태수(眞太守)보다 더 즐겁다는 것을 알겠네.

치화(治化)를 부여받아 권병(權柄)을 잡았으니

()를 들을 만하건만 소는 들리지 않고

공가(公家)의 백사(百事)가 아무리 떠들썩하고 분주해도

오직 청산(靑山)만은 완연히 봉황의 의형(儀形)을 이루네.

영동(榮桐) 탁악(橐卾) 꽃에는 병이 없고

자잘한 전최(殿最)에 여전히 일이 많아도

어찌 내 몸을 고요하게 기르고 내 마음을 바로잡는 것만 같으리오.

침착하고도 여유 있네!

태태수는 여전히 참된 수재(守宰)의 지혜를 지니고서

강산(江山) 풍월(風月) 연운(煙雲) 어조(魚鳥)를 사시사철 주관하네.

사민 : 본서에는 사녀(士女)로 되어 있는데, 사민(士民)의 오기이다.

무성(武城) : ) 춘추시대 노나라의 치하(治下)에 있던 읍으로 산동성(山東省) 가상현(嘉祥縣) 남쪽에 있다.

현가(弦歌) : 거문고와 비파로 연주하는 노래를 말한다.

공가(公家) : 관가(官家), 관청(官廳)을 말한다.

전최(殿最) :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의 실적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일. 성적을 고사할 때 상()을 최, ()를 전이라고 하여 매년 615일과 12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음. 전최는 경관(京官)에게도 적용되지만, 지방이 대민관계상 중요하므로 전최하면 지방관의 경위를 말하는 것으로 되었음.

병자년(1816) 초여름에 72세 화천옹(華泉翁)이채(李菜, 17451820)이 아들 지부사(知府事) 광문(光文)

시켜 기록한다.

화천옹(華泉翁)의 태태수가(太太守歌)를 차하다.

그대는 수춘(壽春)에 또다시 태태수(太太守)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태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誠敬)을 기르네.

또 문소각에 태수의 소요처(逍遙處)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이곳에 안주(安住)한 늙은이는 온정(溫情)한 사람일세.

광활한 백로주(白鷺洲)에 모래는 더욱 빛이 나고

봉의산 우뚝 솟아 가을이 더욱 깨끗하네.

파리한 얼굴 백발로 그 사이에 앉은 이는 바로 태태수이니

천명을 즐기는 것 외에 다시금 무얼 하겠는가?

비단을 지어 무채아(舞綵兒)에게 부여하고

누각에서는 어떤 정사(政事)가 행해지는 지 알 수가 없네.

할 일 없어 먼 곳의 새들은 시령(詩令)을 전해오고

다정한 한 조각의 구름은 세속의 영욕 속으로 다가오네.

세속의 티끌과 소란을 잊고 담담히 앉으니

계곡의 물은 평온히 흘러 마음이 급할 것 없네.

늙어가는 몸 무엇으로 태평성대에 보답하리.

우리 임금님께 질병이 없기를 기원할 뿐이네.

술 단지 하나 바둑돌 하나도 청절하지 않음이 없어

불현듯 사람으로 하여금 형용하기 어려움을 깨닫게 하니

진정한 즐거움이 그치지 않는구나.

사시의 경관이 저마다 다르니

오직 이 한 곡조의 청가(淸歌)로서 태태수에게 맡기네.

기묘년 10[孟冬]에 오헌(悟軒) 72세 옹이 기록하다.

朝衣鳳惹御爐烟

恩誥來州暫借緣

古樂不圖聞此地

名樓何幸得殘年

山高神鳳其來否

野闊泟鴻遂杳然

謾卷文書隱䋛檻

夕陽搖蕩二州邊

 

기묘년(1819) 가을에 남주헌(南周獻)

남주헌(17691821)은 본관이 의령(宜寧), 자는 문보(文甫), 호는 의재(宜齋)로서 춘천부사(18191820)를 지냈다. 문장과 사부에 능하였는데 문집으로 󰡔의재집(宜齋集)󰡕이 전한다.

燕坐仙樓對羽觴

官娥細唱勸桑郞

山如振翼當簷近

水似彎弓抱野長

病冒日醒甘井味

酒情春動異蔬香

碧紗輝暎朱欄月

豈有新詩更擬唐

 

계미년(1823) 3[暮春]에 이인부(李寅溥)

이인부는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월포(月浦)이다. 1822(순조 22) 8월부터 18234월까지 춘천부사에 재임했다.

소양정중수기(昭陽亭重修記)

수춘(壽春)은 영서(嶺西)의 큰 고을이다.

그 땅이 서울과 가깝고 풍속이 순후(淳厚)하여 송사(訟事)

가 적으며 강산(江山)과 누각(樓閣)의 명승이 있어

사대부(士大夫) 중에서 거처를 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고을을 얻으면 다행으로 여겼다.

1741(영조 17, 신유)에 나의 벗 한산(韓山) 이자이(李子彛) 덕중(德重)

이덕중(1702?)은 본관이 한산(韓山), 자는 자이(子彛), 호는 결재(潔齋)이다. 1741년에서 1743년까지 춘천부사를 지냈다.

춘주부사(春州府使)로 나가게 되었다. 자이는 청명(淸名)과 준망(儁望)이 있어

일찍이 요직(要職)에 올라 세상에서 명망있는 대부(大夫)가 되었다.

논자(論者)들은 자이(子彛)를 두고 하루도 조정(朝廷)을 떠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들 했지만,

외직(外職)으로 체직(遞職)되어 나갔으니 이는 자이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자이(子彛)가 이미 주()에 부임했을 때는 연례(年例)의 큰 기근(饑饉)이 들었지만

구휼(救恤)에 노력하여 선정(善政)의 소리가 관내에 가득하였다.

자이가 내게 글을 보내기를,

()에는 강 근처에 소양(昭陽)이라 이름 하는 정자(亭子)가 있는데,

온 주에서 으뜸가는 경관입니다.

요사이 퇴락하여 무너져 유람(遊覽)하는 이들이 모두들 근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경영(經營)하고 수리(修理)하여 공사(工事)를 마쳤으니,

바로 1742(임술) 가을이었습니다.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글을 보내면서 탄식하여 이르기를,

벼슬에는 내직, 외직 할 것 없이 그 직책을 다하면 그만이다.

세상이 부박해진 이래 조정(朝廷)에서 과연 그 뜻을 실천하고 그 직책(職責)을 거행하는 자가 있었는가? 영욕(榮辱)을 일삼다 외부로부터의 이해에 유혹되어 본마음을 해치고 잃을 뿐만 아니라

간혹 스스로 몸과 마음을 망치는 이가 있으니, 이 어찌 오로지 그 사람만의 허물이겠는가?

시세(時勢)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만약 외직(外職)일 경우,

백리(百里)의 땅이라면 하나의 명령(命令)만으로도 행할 수 있고,

백리는 원래 작은 나라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한 지방을 말한다.

하나의 은혜(恩惠)만 있으면 세상을 보살필 수 있다

베풀거나 가늠하는 것은 모두 내 마음에서 근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세(時勢)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이다. 자이(子彛)가 이 고을을 맡은 지도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폐단(弊端)을 개선하고 퇴폐(頹廢)한 것을 죄다 수리하였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재력(財力)을 비축하여 한 정자(亭子)의 명승(名勝)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였다.

자이는 고을을 다스리는 여가에 술을 지니고 정자에 올라 주저(洲渚)섬과 물가가 휘돌아 나가고,

구름과 연기가 출몰(出沒)하며,

돛단배와 모래가의 새들이 위 아래로 왕래하는 것을 굽어보고는

흔쾌한 마음에 돌아갈 것조차 잊기도 했다.

또 조정에 있는 여러 군자(君子)들을 생각하건데 그들의 직책이 하나의 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백배는 중요하지만 능히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자이의 즐거움이 반드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근심을 계속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관직(館職)에 대죄(待罪)하여 한마디 말도 못하고

하나의 일도 논하지 못했지만 직책에 따른 약간의 실효(實效)가 있어

시종(侍從)하는 직책에 몸담을 수 있었다.

이에 결연(決然)히 떠날 수도 없어 산골짜기 한 고을의 수령직을 자처하여 자이(子彛)가 한 것보다 더

힘쓰고자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금 염치없이 소양정의 기문(記文)을 짓게 되었으니,

자이(子彛)가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의 감회(感懷)를 알게 될 것이다.”하였다.

숭정 기원후 두 번째 임술년(1742) 12[季冬] 상순에

연안(延安) 이천보(李天輔)305)가 기문(記文)을 짓다.

이천보(16981761)는 본관이 연안(延安),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이다.

문학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진암집(晉庵集)/84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