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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조득남(趙得男)ㆍ1594(선조27)~1636(인조14)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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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득남(趙得男)ㆍ1594(선조27)~1636(인조14)

본관은 한양이고 조선조 초의 명신 한천부원군 온(漢川府院君 溫)의 9대손이다. 정제의 자로 화현면 화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勇力)이 뛰어나 주위의 촉망을 받으며 자랐다. 1621년(광해군13) 무과에 급제하고 출사하여 병마만호(兵馬萬戶)에 이르렀다.

 

1627년(인조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 왕을 강화까지 호종하였고 1630년(인조8) 3월에 유흥치(劉興治)가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서(李曙), 정충신(鄭忠信) 장군과 함께 출전하여 평정하고 같은 해 4월에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자 출동하여 진압하였다.

 

1636년(인조14)에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로울 때 왕을 호종, 남한산성에 들어가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장군 휘하에서 북문을 지키며 결사항쟁으로 청군을 무찌르고 승리하니 왕이 술을 하사하고 공조정랑을 제수하였다. 다음날 다시 나가 무수한 화살이 떨어지는 전투에서 장검을 빼어 들고 적진에 뛰어 들어 좌충우돌, 적을 무수히 죽이고 분투하다가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공의 전사소식을 접한 왕은 매우 슬퍼하며 수포를 내려 수의를 짓게 하고 북문아래 매장하였다. 난이 끝난 후 포천 운악산 아래 이장하였다.

 

1725년(영조1) 경연(經筵) 신하들의 건백(建白)으로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내려 애국충절을 기리도록 하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려(旌閭)가 없어졌다. 포천군비와 유림, 후손들의 성의를 모아 2001년 5월에 가산면 마산리 둔지고개 마루에 복원 건립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포천사람으로서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받은 사람이 세분이 있다. 이를 포천의 3충신이라 한다.

 

●첫번째로 세조조(世祖朝) 때 상왕(上王)인 단종의 복위운동울 꾀하다가 같이 계획하던 동료 김질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걸개를 지키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한 분인 유응부(兪應孚)선생이다.

 

두 번째로 선조조(宣祖朝)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겁이나서 허둥대며 도망친 수령방백(守令方伯)이 많았는데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의병을 모집하여 항전하다가 순절한 충신 권종 선생이다.

 

마지막으로 인조조(仁祖朝)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 호병과 싸워 큰 전과를 올리고 순국(殉國)한 조득남 장군이다.

★조득남(趙得男)장군은 공조정랑으로 인조 병자년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외적과 싸우다가 남한산성 북문에서 약1.5km 떨어진 법화골(고골계곡) 전투에서 배복한 청군에 의해 정예병 300명이 장렬히 전사하여고, 정려 충신각과 정략장군(定略將軍) 경기만호병마사(京畿萬兵戶馬使)를 追贈★

* 법화골 (法華谷_법화곡)....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고리가 조선의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남한산성 밖에 앙고리의 고향인 법화둔의 지명을 따서 세운 법화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골짜기(고골계곡: 경기 하남시 상사창동 )라 하여 법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옛 절터에는 부도(浮屠) 3기가 남아있다.  

 

이 세사람을 포천의 삼충신이라 한다.

  ♥조병철 형님 공적비 건립♥ 

===2023년 2월 18일(토)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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