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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파인양선조실기(坡仁兩先祖實紀)8세조 인촌공(仁村公) 조명(趙銘, ?~1478)행장⟫

by 晛溪亭 斗井軒 202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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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양선조실기(坡仁兩先祖實紀)8세조 인촌공(仁村公) 조명(趙銘, ?~1478)행장⟫

8세조 인촌공(仁村公) 조명(趙銘, ?~1478)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경부(警夫)호(號) 인촌(仁村)

인물/전통 인물

성별:남성, 출생 : 연도미상, 사망 : 연도1478년(성종 9), 본관:한양(漢陽)

주요 관직 : 병조정랑

조선 전기에, 병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부(警夫), 호는 인촌(仁村). 태조배향공신이며 개국공신인 조인옥(趙仁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조뇌(趙賚)이고, 아버지는 이조참의 조순생(趙順生)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사정 원유용(元有容)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병조정랑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아버지와 함께 금산에 유배되어 관노가 되었다. 1469년(예종 1) 4월 관노에서 방명되었고, 5월에는 고(故) 판서(判書) 윤사윤(尹士昀)에게 사급되었던 그의 처 소사(召史)와 충청도 목천에 안치되었던 아들 조예(趙禮)도 사면되었다. 그의 처가 중궁(안순왕후)의 족친이었기 때문이다.

1470년(성종 1) 고신(告身)을 돌려받았으나, 1477년 목천에 살고 있던 중 경조(冏照)가 현감과 더불어 반역을 도모한다고 밀고하여 하옥되었다. 1478년 학생 이자명(李自明)으로부터 무고당하기도 하였다. 죽은 뒤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장보사(章甫祠)·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淵泉先生文集卷之三十二 豐山洪奭周成伯著 / 行狀[下]

兵曹正郞贈都承旨趙公行狀

公諱銘。字警夫。端廟朝吏曹參議諱順生之子也。參議公。當癸酉之難。與忠定公皇甫仁,忠翼公金宗瑞等。同罹于大𥚁。至正廟辛亥。追錄死事諸臣。與忠定公子錫,忠翼公子承珪等。俱設壇。祀于莊陵之傍。後又贈吏曹參判。公以世宗時。登文科。歷官至兵曹正郞。斐然有文學稱。一日兵曹失軍簿。郞吏皆駴懼莫知所爲。公從容口呼。遂完其籍。旣而得 所失簿校之。無一字駭異者。人皆大服。旣遭癸酉之禍。坐孥。配錦山。久之量移木川。公自罹酷。日夜號慟。幾不能全其生。及在木川。卜宅于細城山下。登所居後高峰。東向而拜。南向而哭。課日以爲恒。盖端廟弓劍之藏。東在寧越。而參議公受後命之地。南在于固城也。峰之南數里。有崗巒崒然特起。而臺于其頂上者。相傳爲公所築。公每以月朔及望。衣朝衣。立臺上。拜跪如朝禮。或呑聲掩涕。竟日而後去。婦幼樵牧。指點以相語。遂名其峰曰正郞。臺曰望京。所居村曰多仁。繇是號公爲仁邨先生。公竟以哀毁沒其身。歿 後二百餘年。莊陵始備象設。又其後九十餘年。而參議公侑祀于陵傍。於是公之忠孝。亦益彰于世。今上四年甲子。湖西觀察使摭公議。以聞于朝。輔臣宗伯。皆言其可褒。十三年壬申。贈公承政院都承旨。木川之士。又相與俎豆公于忠烈祠。嗟乎。晻欝於一時之近。而炳朗乎百世之遠。天之於忠孝。其可謂不薄耶。公世以漢陽爲貫。以高麗僉議中書事諱之壽。爲鼻祖。有吏曹判書漢山君忠靖公諱仁沃。翼亮我太祖。配食廟庭。生知敦寧府事節孝公諱賚。卽公祖考也。參議公娶原州元氏。司正有容女。 生公。公娶懷德黃氏。知中樞府事尙文女。從公贈貞夫人。有一男伯亨。縣令。縣令生一男五女。男璲大。護軍。女婿亦有官軍邑者。公家旣遘禍。世祖念其爲國初元勳裔。至晩年。特加原貸。以故子孫皆不阻仕宦。其後以篤行孝友。被㫌奬者相望。公墓距正郞峰下不十里負震而封。黃夫人祔焉。余甞考 莊陵禪授之際。爲忠臣者固不可勝記。而其家有孝子者三人。金忠翼之子承珪。以身蔽其父而殉。河忠烈之子珀。聞有難。入訣其母曰。父旣被禍。子不可獨活。遂再拜而出。從容就死。其一人則公是也。公雖不 獲與參議公同死。而銜恤抱慟。畢生如一日。以其身自獻于君親而無變。視死者。亦可以無怍矣。公雖得伸於久遠。而年代旣邈。其事行多佚不傳。傳者亦不能詳。其裔孫允欽。掇其槩爲狀。以奭周甞叨太史氏。俾纂次。以諗來許。余屢辭不可得。遂因其家牒而謹書之如右云。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2

国学原典·史部·二十四史系列·元史·卷一百六十六

http://www.guoxue.com/shibu/24shi/yuanshi/yuas_166.htm

列传第五十三

M哟�○王綧斋

,美王綧,高丽王之犹子也,美容仪,慷慨有志略,善骑射,读书通大义,以质子入朝。岁癸丑,高丽权臣高令公叛,宪宗命耶虎大王东征,綧奉旨为使讲和,仍镇守其地,时高丽人户新附者,就命綧总之。中统元年,授金符总管,升佩虎符,兼领军民。三年,率兵征济南李璮。至元七年,高丽臣林衍叛,世祖遣头辇哥国王讨之,綧签领部民一千三百户,与国王同行。是年十一月,以疾辞还,家居。二十年九月,卒,寿六十一。子三人。知

管高阿剌帖木兒袭职,授虎符,总管高丽人户。至元八年,将兵讨叛贼金通精,贼败走耽罗。十一年,进昭勇大将军,从都元帅忽都征日本国,预有战功。十五年,加镇国上将军、安抚使、高丽军民总管,寻升辅国上将军、东征左副都元帅。十八年,复征日本,遇风涛,遂没于军。知

褪阔阔帖木兒,入侍武宗潜邸,积劳授太中大夫、管民总管。古

远大兀爱,袭兄阿刺帖木兒职,佩金虎符,授安远大将军、安抚使、高丽军民总管、东征左副都元帅。二十四年,乃颜叛,力战屡捷。复从月鲁兒那演讨塔不歹、朵欢大王于蒙可山、那江,统兵五千余众,与八剌哈赤脱欢相拒,绝流战黑龙江,箭中右臂,忍伤复战,敌大败。二十五年,征哈丹秃鲁干,隶平章阔里帖木兒麾下,论功居多。冬十二月,贼军古都秃鲁干次于斡秃鲁塞,平章率兀爱讨降之。明年,加授昭武大将军、辽阳等处行中书省事。又明年,哈丹等入寇高丽国境,遣兀爱镇守,仍修城壁,严卒伍,军威大振,贼遂潜遁。九月,哈丹秃鲁干复寇缠春,兀爱引兵击却之。二十八年,入觐世祖于内殿,嘉其战功,赐尚方玉带及银酒器。二十九年,改东征左副都元帅府,立总管高丽女直汉军万户府,乃授兀爱三珠虎符,升镇国上将军,总管高丽女直汉军万户府,兼沈阳安抚使、高丽军民总管。

◐안무고려군민총관부 (安撫高麗軍民總管府)◑

원나라가 심양(瀋陽)지방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특수행정기구.

여몽전쟁(麗蒙戰爭) 중 몽고에 투항하였거나 유망(流亡)한 고려인들을 심양과 요양(遼陽)에 거주시키고, 1234년(고종 21)홍복원(洪福源)을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던 것을 1261년(원종 2)에 개편한 것이다.

이해에 만가노(萬家奴)를 총관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삼았으며, 1263년에는 그 전에 토루카(禿魯花)로서 원에 보내졌던 고려 왕족 영녕공 준(永寧公綧)을 안무고려군민총관에 임명하여 심양의 고려인 2,000여 호(戶)를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洪茶丘)도 요양(遼陽)지역을 1261년에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에 임명되어 심양의 안무고려군민총관부와는 별도로 요양의 고려인들을 다스렸다.

이 후 영녕공과 홍다구의 아들들이 안무사(安撫使)·고려군민총관의 관직을 세습하면서 각각 심양과 요양의 고려인들을 통치하다가 1296년(충렬왕 22)에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摠管府)로 통합되어 제주의 탐라군민총관부(耽羅軍民摠管府)와 함께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소속되었다.

 

●심양지역의 철령에서 안무고려군민총관부를 합단적(哈丹賊)에게 막은 공으로 옥대와 은주기를 하사

합단(哈丹, 카단)은 몽골 제국 칭기즈칸주1의 동생이 이끈 카치운 왕가(王家)의 제왕(諸王)이었다. 1287(충렬왕 13)에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인 옷치긴의 후손이자 요동 일대를 근거로 하고 있던 내안(乃顔, 나얀)이 쿠빌라이주2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진압한 끝에 내안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합단은 1290(충렬왕 16)에 요동 일대(초기 쌍성총관부, 辽宁省Liaoning Province))에서 몽골 제국의 진압군과 대항하였다. 합단군은 현재의 지린성[吉林省] 일대를 떠돌다가 몽골 제국의 장수 내만대(乃蠻帶, 나이만다이)에게 패배한 후 두만강을 건너 고려 동북면을 침입하였다.

합단 세력이 침입해 오자 고려는 적이 침공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에 수비 병력을 배치하며, 동시에 몽골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합단은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반란군이었으므로 몽골 제국에서도 구원군을 파견하여, 1290년 연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몽골군 23,000여 명이 고려에 진입하였다. 한편 고려 정부는 129012월에 강화도로 피신하고, 전국의 주현(州縣)에 영을 내려 산성과 섬으로 피난하게 하였다. 이 무렵 합단 세력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영흥 금야읍)을 대부분 함락하였다.

 

고려 후기 이민족의 침입

합단적

북에서는 합단적ㆍ홍건적의 침입, 남에서는 왜구 창궐

[김쌤’s 한국사] = 고려후기는 중국에서는 몽골의 주변세력 정벌, 고려 내부적으로는 문신귀족사회의 모순,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혼란이 거듭된다.

고려 내외부적인 요소가 더해지면서, 고려는 북쪽에서는 합단적과 홍건적의 칩임을 받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받게된다. 이같은 혼란기는 이성계라는 신흥무인의 성장의 배경이 되고, 결국 조선건국으로 이어진다.

 

Ⅰ. 합단적(哈丹賊)의 침입(1290~1291)

1) 원나라의 사정

①원의 황제에 오른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가 반기.

②카이두가 위세를 떨치자,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 명장 바얀(伯顔)에게 카이두 정벌(1277).

③카이두, 나얀ㆍ식투르ㆍ카다안(哈丹) 등과 2차 동맹 구성(1287)해 쿠빌라이에 대항. → 쿠빌라이 칸, 카이두의 반란 격퇴.

④만주에 근거를 둔 반란군 합단은 근거를 잃자, 고려 침공.

⑤원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반군이 고려를 침범하자, 원은 반군의 뿌리를 뽑기 위해 고려에 군사원조.

 

2) 고려의 사정

 

원나라, ‘여몽연합군으로 1차 일본 원정(1274). 2차 일본 원정(1281/충렬왕7). 몽골침입으로 전란에 시달리고, 전란 직후 몽골의 막대한 공물요구에 전쟁준비까지 더해지면서 백성들 도탄 지경.

동부방면 합단적의 침입, 서부방면 원의 지원병, 고려의 방어군 등이 개경 등지에서 주둔하면서 고려의 내부 민심 흉흉.

동해안 침입 합단적은 식량부족으로 고려인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겹쳐.

 

원주 원충갑묘역(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8, 지정 2006728) 원충갑(1250~1321)은 고려의 무신으로 원주 출신이다. 합단적(哈丹賊)이 치악성을 포위(1291, 충렬왕17)하자, 열차례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렀다. 원충갑의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1308)했고, 원주는 3년동안 각종 부역과 잡공 면제혜택을 받았다.

 

3) 합단적 침입의 경과/결과

원의 세조에 대항, 반란(1287/충렬왕13) 일으켰던 무리의 잔당인 합단이 무리 이끌고 고려의 동북면(충남 천안)으로 침입(1290/충렬왕16).

합단적, 원의 쌍성총관부에 이어 고려의 등주(함경남도 안변)까지 함락시키자 충렬왕 강화로 피난.

합단적, 교주도(강원도) 거쳐 양근(경기 양평) 점령하고 원주 치악성 공격. 고려군 방어.

원주에서 패배한 합단적, 충주에서 고려군의 방어에 또 패배, 연기(충남 연기)에 집결.

목주(충남 천안)에 주둔중이던 원과 고려 연합군, 충남 연기의 합단적 기습 토벌(1291). 충렬왕 개경 복귀.

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五 / 墓碣銘

仁村趙公墓碣銘 幷序庚子 

莊陵癸酉。吏曹參議趙公順生。與皇甫忠定公仁,金忠翼公宗瑞。幷罹于禍。至健陵辛亥。追錄死事諸臣。與忠定公子錫,忠翼公子承珪。俱設壇享于莊 陵之側。趙公胤子兵曹正郞諱銘。坐孥謫錦山。久之量移木川。公自嬰酷禍。號絶幾不全。及居木。宅于細城山下。陟屋後高峯。東向拜南向哭。日以爲恒。盖 莊寢在越。而參議公受後命于固城也。距數里有岡巒壁立者。公每朔望登其頂。公服拜跪如朝禮。呑聲飮泣。竟夕而返。婦孺樵牧。皆指點其所。名其峯曰正郞。臺曰望京。所居村曰多仁。仍稱公爲仁村先生。公毁瘠歾。墓于正郞峯下負震之原。後二百餘年。而端廟復位。又九十餘年而參議公配侑焉。純宗壬申。贈公承政院都承旨。木川章甫。又俎豆公于忠烈祠。公之志節。於是焉益章。嗚呼。晻昧于當時。而炳烺于永世者。是可驗天道之有定也。公字警夫。漢陽人。出自高麗僉議中書諱之壽。至諱仁沃吏曹判書忠靖公。配食太祖廟庭。生知敦寧府事節孝公諱賚。卽參議公祖禰也。參議公配原州元氏。司正有容女。公配懷德黃氏。知中樞府事尙文女。從贈貞夫人。祔公墓。男伯亨縣令。縣令男璲大護軍。公夙著文譽。策名于英陵盛際。歷官至兵曹正郞。曹失軍籍。郞吏咸懼得罪。公從容口呼。遂完其簿。旣而得所失者。無一字駁異。人皆驚服。遇遭世禍。罔究厥用。俾其曠世高才。不少槩見。惜哉。莊光之際。賢士大夫。皆死於忠。忠臣之門。又有三孝子。金忠翼之子承珪。河忠烈之子珀。其一公也。金河收孥而死。公止於竄。故無死。然含寃茹痛。以致滅性。以靖獻于君親者。視被禍而死。又加難矣。屈於近而伸於遠。原始要終。靡有餘憾。何差殊於死生哉。古語云孝實天經。忠爲令德。百行攸先。一心靡忒。公其庶幾乎。公後孫允欽。謁銘于不佞。累辭而不得。遂據淵泉洪公所述狀而敍之。繼以銘曰。

父死於忠。子殉於孝。惟其孝盡。所以忠報。心注東越。目斷南嶠。臺擬採薇。峯是攀栢。其庶無愧。二理同極。城山可崩。公名不泐。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2

인촌 조공 묘갈명 병서경자년 仁村趙公墓碣銘 幷序庚子

장릉(莊陵 단종) 1년 계유년(1453)에 이조 참의 조순생(趙順生공이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등과 함께 화를 당하였는데건릉(健陵) 신해년에 이르러 이 일에 죽은 여러 신하들과 충정공의 아드님 황보석(皇甫錫), 충익공의 아드님 김승규(金承珪)를 추록(追錄)하고 장릉 옆에 단을 만들고 함께 제향하였다.

조공(趙公)의 아드님 병조 정랑(兵曹正郞) 휘 명()이 이 사건에 연좌되어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오랜 뒤에 목천(木川)으로 양이(量移)되었는데, 조공이 혹독한 화를 당한 뒤로부터는 울부짖다가 기절하는 등 거의 생명이 온전하지 못하였다.

목천에 거주할 적에 세성산(細城山)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공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집 뒤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절하고 남쪽을 향하여 통곡하였으니, 이는 단종의 능묘(陵墓)가 동쪽 영월(寧越)에 있고, 부친 참의공(參議公)이 남쪽 고성(固城)에서 후명(後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몇 리 떨어진 곳에 깎아지른 절벽으로 된 산이 있었는데, 공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산마루에 올라가서 관복을 입고 절하고 엎드리기를 조례(朝禮)처럼 하였고, 울음소리를 삼키고 흐느껴 울다가 밤을 새우고서야 돌아왔다. 부녀자와 어린아이와 초부와 목동들이 모두 그 곳을 가리키면서 봉우리를 정랑(正郎)이라고 이름하고 대를 망경(望京)이라 이름하고 공이 거처하는 마을을 다인(多仁)이라 이름하고는, 이어서 공을 인촌(仁村)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공은 슬픔으로 몸이 훼손되어 별세하니, 정랑봉 아래 부진(負震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2백여 년이 지난 뒤에 단종이 복위되고 또 90여 년이 지나 참의공이 배향되었으며, 순종(純宗 순조) 임신년에 공을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하였다. 목천의 선비들이 또 공을 충렬사(忠烈祠)에 제향하니, 공의 뜻과 충절이 이에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 당시에는 까맣게 알려지지 않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찬란하게 드러났으니, 이로써 천도(天道)가 정()해짐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은 자가 경부(警夫)이고 본관이 한양(漢陽)이니, 가계(家系)가 고려 때 첨의중서(僉議中書)를 지낸 휘 지수(之壽)에게서 나왔다. 이조 판서로 시호가 충정공(忠靖公)인 휘 인옥(仁沃)에 이르러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는데, 이분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절효공(節孝公) 휘 뢰()를 낳으니, 바로 참의 공(參議公)의 조고(祖考)와 선고(先考)이다. 참의공의 배위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사정(司正) 유용(有容)의 따님이다.

공의 배위 회덕 황씨(懷德黃氏)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상문(尙文)의 따님인데, 공을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고 공의 묘에 부장(祔葬)되었다. 아들 백형(伯亨)은 현령이고 현령의 아들 수()는 대호군(大護軍)이다.

공은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드러나서 영릉(英陵 세종)의 태평성대에 벼슬하여 직위가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이르렀다. 병조에서 군적(軍籍 군정(軍丁)을 등록한 장부)을 잃어버리자, 낭관과 아전들이 모두 죄를 얻을까 두려워했는데, 공이 조용히 구술하여 마침내 그 장부를 완성하였다. 얼마 뒤에 잃어버렸던 군적을 다시 찾아서 살펴보았는데 한 글자도 차이가 없으니,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화()에 걸려서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하여 세상에 보기 드문 뛰어난 재능이 조금도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장릉과 광릉(光陵 세조)의 사이에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충성에 목숨을 바쳤는데, 충신의 가문에 또 효자 세 분이 있었으니, 충익공(忠翼公)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와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아들 박()이고 또 한 분은 공이다. 김승규와 하박은 처자까지 죄에 연루되어 죽었고, 공은 유배형에 그쳤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그러나 원통함을 가슴속에 머금고 울분을 삼키면서 죽을 때까지 임금과 어버이에게 충절(忠節)을 바치는 것은, 화를 당하여 죽는 것에 비하면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때에 굽혔다가 먼 후세에 이르러 펴졌으니, 일의 처음을 근원해 따져보고 종말을 궁구해 보면 조금도 유감(遺憾)이 없다. 그렇다면 어찌 살아남은 것과 죽은 것에 차이가 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효도는 실로 하늘의 떳떳한 도()이고, 충성은 아름다운 덕이 되어 백 가지의 행실에 우선하니, 한 마음으로 어기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공이 바로 이에 가까울 것이다. 공의 후손인 윤흠(允欽)이 불초에게 명()을 청하였는데 내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마침내 연천(淵泉) 홍공(洪公)이 지은 행장을 근거해서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명은 아래와 같다.

아버지는 충성에 목숨을 바쳤고 / 父死於忠
아들은 효도에 목숨을 바쳤으니 / 子殉於孝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에 / 惟其孝盡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한 것이네 / 所以忠報
마음은 동쪽 영월로 달리고 / 心注東越
눈은 남쪽 영남을 바라보네 / 目斷南嶠
망경대(望京臺)는 채미와 견줄 수 있고 / 臺擬採薇
정랑봉(正郎峰)은 바로 측백나무 부여잡고 울부짖은 것이네 / 峯是攀栢
부끄러움이 없으니 / 其庶無愧
두 가지 이치가 똑같이 지극하네 / 二理同極
세성산(細城山)은 무너질 수 있어도 / 城山可崩
공의 이름은 마멸되지 않으리라 / 公名不泐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산 44-1

▲정랑봉과 망경대와의 거리: 약6.9km(14리)

[고삿재]

◈正郞峰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산 44-1

望京臺·山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봉대리 산 1

[獨立記念館]

 

벌欺覩듕·袈꼬·랗枷愷袈溝죗·禱袈·얩寧겟짇枷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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