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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행사자료❀

<二憂堂 遺稿>는 한양 조씨 조유상(趙柳祥) 어르신의 문집이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9.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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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상(趙柳祥) 님의<二憂堂 遺稿> 미유당(微幽堂) 조영휘 (趙英輝) 국역 (tistory.com)

 

조유상(趙柳祥) 님의<二憂堂 遺稿> 미유당(微幽堂) 조영휘 (趙英輝) 국역

주소: http://blog.daum.net/nostalgiatoroots/15965771 <二憂堂 遺稿>는 한양 조씨 조유상(趙柳祥) 어르신의 문집이다. 조선시대 서자로서 살아오신 가슴 아픈 삶의 역정이 담겨 있는 문집 이다. 이 어르신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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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憂堂 遺稿>는 한양조씨 선조 조유상(趙柳祥) 할아버지의 문집이다.

 

조선시대 서자로서 살아오신 가슴 아픈 삶의 역정이 담겨 있는 문집 이다.

 

이 어르신의 10 대 손이신 미유당(微幽堂)이라는 아호를 지니신 조영휘 (趙英輝) 선생님의 번역된 글이다. 10년 이상을 선조를 생각하신 오롯한 피와 땀이 곳곳에 응어리진 역작이다. 한문학자도 아니시다. 그러나 정통한문학자 이상으로 날카로운 어법에도 깊은 지식이 담겨져 있다. 오랜 세월 선조님의 글을 번역하시면서 터득한 진정 살아 있는 기운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역사를 판단하시는 안목도 깊으시다.

 

필자가 제일 감동을 받는 것은 이 분이 번역해서 옮기는 글에 맞춤법 하나, 오자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二憂堂 遺稿>를 번역하시기 위해서 중국까지 가시어 <한어대자전>을 구입해 오셨다는 말씀에는 여러 번 감탄을 했을 뿐이다. 요즘에는 향가 문학에도 국어학자 못지않게 숨은 실력을 뽐내고 계시다.

 

필자가 이 분을 알게 된 것은 12 년 전인가 보다. 번역을 많이 하시는 분이기에 필자 가문의 글 하나를 번역해 주셨으면 하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그 번역에 놀라움을 가졌고, 풍부한 어휘 해설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도 자주 질문을 드리곤 한다. 성의가 대단하시다. 꼭 두 번을 만나 뵈었다. 늘 존경스럽다. 인터넷을 통해서 만나게 된 배움의 벗이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보고 같은 분이시다. 번역이 된 책이 천여 페이지를 넘는다. 그 속에는 선조님의 깊은 철학, 그리고 미유당 님의 불타고 있는 정성이 환히 빛나고 있다. 그냥 생각이 떠올라 아래처럼 작은 낙서 하나 담았다.

 

기둥 하나 일 년 깎고 서까래 일 년 다듬어

壽 暉 良琪 맥 흐름에 교하 맹곡 정신 담고

서자로 지샌 아픔을 후손 혼 불 담으셨네.

 

현주 선조 청음 선조 역사에서 심지 나눴고,

한양 조씨 안동 김가 문화에서 지혜 오가니

이 세상 숨 쉬는 터전 오롯한 정 꽃 피우리.

  

 조유상(趙柳祥) 님의<二憂堂 遺稿> 미유당(微幽堂) 조영휘 (趙英輝) 국역

 

http://blog.daum.net/nostalgiatoroots/15965773

 

▣역자 (趙英輝) 서문▣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

     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역자는 이우당유고(二憂堂遺稿)를 번역해 오면서 이따금씩 위 글을 떠올리곤 했었다. 이 글은 조선(朝鮮)이, 세월의 풍파가 아무리 거셀지라도 뿌리 깊은 나무처럼 의연히 버티고 서서 아름답게 꽃 피우고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그리고 근원이 깊은 물줄기처럼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내를 이루어 큰 바다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세종대왕의 염원이 담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한 대목이다.

 

비록 실핏줄보다도 가녀린 뿌리 한 줄기일지라도, 빗물 한 방울이면 차고 넘칠 작디작은 웅덩이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배제되지 않고 모두 동참함으로써만이 갓 태어난 나라를 큰 바다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세종대왕이었기에 이와 같이 자신의 뜻을 후세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세종대왕이 그토록 염원했던 방향과는 결코 같은 길로 가지 않았다. 조선 사회는 오히려 세종의 간절한 염원과는 정 반대의 길로 들어섰고 그 길을 공고히 하는 데에 몇 백 년의 세월을 허비하였다. 조선은 이에 따른 가혹한 국가적 사회적 비용 지출을 강요당하는 국면을 견디다 못해 샘이 깊은 물처럼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동원 가능한 인적 자원을 국가 경영에 가장 효율적으로 투입한다 해도 부족할 판에 차별이라는 황당무계한 명분에 매몰되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결과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자의 차별’ 정책이었다. 로마가 로마로서 1000년을 이어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많은 사학자들은 말한다. 로마를 로마로서 존립 가능하게 했던 것은 정복지역의 야만인들을 로마인으로 포용한 덕분이었다고...

 

조선의 서자차별정책은 사학자 이성무가 쓴「한국의과거제도」에 의하면 그 시원이 조선 창건 초기에 닿아 있다. 실로‘샘이 깊은 물’보다 깊다고 할 만하다.「경국대전(經國大典)」은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죄를 범하여 영원히 서용하지 않기로 한 자, 장물죄를 범한 관리의 아들, 개가했거나 행실이 나쁜 부녀자의 자손, 서얼(庶孼)과 그 자손에게는 문과, 생원, 진사 시험을 허용하지 않는다.

 

「경국대전」은 서자와 그 후손에 대하여 문과, 생원, 진사 시험의 응시를 금지하였다. 이를 보통‘서자 금고(禁錮)’라고 부른다. 이는 누구든 한 번 서자에 연루되면 그 자손들은 모두 오늘날의 국가고시 응시가 금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자신이 태어날 나라를 선택해 태어나는 자는 없다. 역시 그 부모를 선택해 제 태어나고 싶은 데서 태어나는 자도 없다. 이우당유고(二憂堂遺稿)의 저자 조유상(趙柳祥)은 조선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자신의 죄과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후손들 역시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 아무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죄를 지은자의 자손이나 행실이 나쁜 부녀자의 자손 등은 국가가 과거응시를 금지할 만한 일말의 근거가 있다고 치더라도, 서자와 그 자손들까지 금고한 것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음양(陰陽)을 뒤섞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의지를 가지고 적자 집안에는 티 없이 아름답고 바른 굳센 기개를 하사하고 미천한 백성과 서자 집안에는 순수하지 못한 요사한 기질을 내려준다. 그래서 이러한 기질을 타고나 성장한 사람들은 모두 타고난 기질의 선과 악을 따른다. 이 때문에 문벌과 한미, 적서의 선과 악, 빈곤과 현달의 차이가 현저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천한 백성과 서자들은 마땅히 금고하여 기용하지 말아야 하고 문벌집안의 적자를 찾아 기용해야 한다. 이것이 당연한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이른바 음양을 뒤섞는 자들의 논리는 궁색하고 허황하다. 그러나 필자가 살던 시대 주류사회의 인식은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 주장의 근거는 선과 후 그리고 원인과 결과가 명백해야 한다. 사건의 선과 후, 원인과 결과는 음()과 양()의 조합이다.

 

그러나 조선의 주류사회는 음양의 조합 즉 논리 전개의 일반원칙을 어떻게든 못 본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야비하지만 선후와 인과관계를 전도함으로써 논점을 흐려 막다른 길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논쟁의 한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결국 차별의 논거가 터무니없다는 자기 부정의 현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자차별정책의 폐해는 그 법적 효력이 과거응시자격 박탈이라는 단순한 금지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아래는 조선의 천재 허균(許筠)이 쓴 한글소설「홍길동전」의 일부이다. 허균(許筠,1569~1618)은 앞으로 보게 될 이우당유고(二憂堂遺稿)의 저자 조유상(趙柳祥,1634-1704)보다 약 65세 정도 연상이다.

 

공이 더욱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겼지만 근본이 천한지라, 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면 곧 꾸짖어 못하게 하였다. ………… 마침 공이 달빛을 구경하다가 길동이 배회하는 것을 보고 즉시 불러 물었다. 길동이 공경하며 대답했다.

 

“소인이 평생 서러워하는 하는 바는, 소인도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남자가 되었으니, 아버님이 낳으시고 어머님이 기르신 은혜가 깊은데, 그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길동이 눈물을 흘려 적삼을 적셨다.

 

 

어떤 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차별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비하를 동반한다. 비하는 그 대상이 동일한 인격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이를 상대에게 표출하는 행위이다. 차별받는 자들이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앞에서 본「홍길동전」의 한 장면은 이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죽은 자라면 아비가 아버지가 아닌‘대감’이 되고 형의 아들이 조카가 아닌‘도련님’이 되는 상황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과거 응시를 거부당한 것만으로도 피를 끓게 할 일인데 사회적 비하라니, 당사자의 분노가 어떠했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서자들은 이런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필자 조유상(趙柳祥)이 여기에 동참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가능한 모든 논리를 동원하여 금고(禁錮)의 부당성을 설파하고 비하의 부도덕성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하였다.

 

특히, 순조(純祖) 재위 중 1824년에는 조선 전국 유생 9996명이 연명한 상소를 통하여 조정에 그들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이 이를 확인하고 있다. 조선의 명망가들도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서자차별정책의 완화에 대하여 진언을 거듭하였다. 그 대열에는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등 조선의 현자들이 총망라되었다.

 

유고의 저가 조유상(趙柳祥)이 서자차별정책에 어떻게 저항했었는가는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흙먼지 날리는 황야를 향하여 그는 비탈을 내닫는 바위처럼 돌진하고 또 돌진하였다. 누가 동조하든 비방하든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심산을 드러내는 데 주저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음양을 뒤섞는 자들 또한 마냥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그의 자서전 격인‘바보 전’에“나이가 쉰인데 어려서부터 늙은이가 되기까지 그칠 줄 모르고 힘썼던 것은 지체 낮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고백에서 우리는 험난했던 투사의 여정과 주류사회의 조직적 반동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1704년(숙종30),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 자신의 말마따나 역대 조선 조정의 계속된 배척에도 불구하고 서자구제를 위한 현자들의 정책 건의는 이어졌다. 그렇지만 조정의 대처는 너무나 옹졸하여 실망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조정은 조건부로 서자들에게 과거응시를 허용했지만 조유상(趙柳祥)은 이를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국가가 인재를 부르는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 쪽에서는 이를 수용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서자들이 생겨났지만 저자는 이들을 군자(君子)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자가 되지 못한 자들이 관직에 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을 뿐이었다. 역시 그들은 저자의 신념을 지지라도 하듯이 속절없이 초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1894년, 풍전등화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확인하고서야 조선 조정은 비로소 갑오경장(甲午更張)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문벌과 반상제도(班常制度)를 혁파하고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차별을 폐지하는 등 신분차별과 관련한 제도를 개선하기에 이른다. 이때 서자금고가 폐지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유상(趙柳祥)이 죽고 난 190년 뒤의 일이었다.

 

조유상(趙柳祥)은 힘써 공부했지만 당시 대장부의 보편적 꿈이었던‘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濟家治國平天下)’의 당당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말처럼‘역사가 망각한 하찮은 존재’로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지체 낮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끝내 타협하지 않고 신념을 견지함으로써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와 마주앉아 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이우당유고(二憂堂遺稿)를 남길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서자 조유상(趙柳祥)도, 서자를 차별했던 조선(朝鮮) 조정도 가고 없다. 그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샘이 깊은 물’처럼 바다에 이르러 마침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다. 국민은 균등한 기회를 누려야 하며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는 원칙이 법에 보장된 나라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사회를 차별이 없는 공정한 사회라고 말해도 좋을 것인가? 아마 누구든 선뜻‘그렇다’라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금수저’‘흙수저’가 이력을 대표하고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가 현장에서 죽어나가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차별 없는 공정한 사회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인류 역사가 열린 이래 차별이 없었던 적은 없었으니 차별은 사회발전의 구조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별은 결코 정당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금지해야 하고 새로운 차별이 배태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조선 500년 장구한 세월 동안 차별받았던 서자는 저자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를 고발한 당사자는 많지 않았다.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한다면 이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로서 깊이 뿌리내릴 수 없다. 그리고 샘이 깊은 물처럼 내가 되어 대양에 이를 수도 없다. 역자는 여기에서 이우당유고(二憂堂遺稿)의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9. 02. 25.

역자 趙英輝 쓰다.

趙英輝

http://blog.daum.net/baikchon001/1264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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