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漢陽趙氏始祖諱之壽壇碑
○ 雙城摠管漢陽趙公諱暉壇碑
○ 雙城摠管兼東征左副都元帥 漢陽趙公諱良琪壇碑
○三重大匡龍城君贈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壁上
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君漢陽趙公諱暾壇碑
○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源府院君贈左政
丞領 經筵事漢山伯諡襄烈漢陽趙公諱仁璧壇碑
♣ 漢陽趙氏 始祖 中書公 以下 2~5世祖 祭享 ♣
1.日時 : 매년(陰3.1) 11시부터~
2.場所 :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559번지 (매죽헌길518번길74) 世寧齋
: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559-2 漢陽趙氏 始祖 中書公 以下 2~5世祖 壇所內
始祖 中書公 諱之壽 壇碑文
* 始祖 中書公
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
漢陽趙氏始祖諱之壽之壇
○ 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漢陽趙氏始祖諱之壽壇碑文
우리나라趙氏姓의貫鄕이三十五本이나된다特히漢陽은더욱盛하다公은卽그거룩하신始祖이시다公의諱는之壽요官은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요獨子暉는雙城摠管이요孫良琪는二代摠管兼東征軍副元帥요曾孫琳은三代摠管龍川府院君이요暾은三重大匡龍城府院君이요玄孫小生은四代摠管으로無傳이요仁璧은三重大匡龍源府院君諡襄烈이요仁瓊은檢贊成으로无后이고仁珪는檢漢城尹이요仁沃은開國一等功臣吏曹判書諡忠靖이다五代孫以下는多不盡錄하다公의墓는咸鏡道永興西面殷谷洞에모셨다고族譜에傳해지고있으나失傳하였으니嗚呼라痛嘆하도다往年에子孫들이爲先하는精誠으로屢次찾았으나찾지못하고住民에게물으면趙氏先山이이山中에있었다고하나어느곳인지를몰라뜻을이루지못하여後孫들이百世의恨을풀지못하였다이에裔孫俊植등이圖謀하기를祖上의墓所를잃으면設壇하고享祀해서그恩愛心을베풀수있다하고高宗光武五年에設壇立碑하여그精誠을表하여왔다그러나南北이分斷되어丘陵을瞻望하고壇下에焚香하는것마저할수없게되었다그리하여以南諸孫들이다시울읍한지於焉五十餘年이나되었다뿐만아니라大宗會에서分斷以後두번째族譜를發刊하려함에僉宗이協議하여이곳以南에도따로設壇하여香火하는것이道理라하여모두讚同하지않는이가없음으로이에公의胄孫知中樞公諱증의墓域인洪城郡洪北面大仁里魯隱洞梅山에設壇하오니公의尊靈降臨하시어百世子孫을矜恤하시옵소서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二世祖 摠管公 諱暉 壇碑文
* 二世祖 摠管公
雙城摠管漢陽趙公諱暉之壇
○ 雙城摠管漢陽趙公諱暉壇碑文
예로부터墓所를傳하지못하면設壇하여祭祀하는것이그孝誠을이루고저함이다그러나摠管公山所는咸鏡道德源郡北城面新安里龍城社漆田洞亥坐에있으니어찌設壇할必要가있겠는가그러나지금은南北分斷으로奉審하지못한지五十餘年이다때문에門中諸人이서로圖謀하여將次始祖中書公壇所와함께以北에계신四代先祖의壇을竝設하자는것이다이것은비록예전엔없었던것이나今人의情誼에可合하니이는禮緣於情이란뜻이아니겠는가公의諱는暉이니始祖中書公諱之壽의獨子이시다本來漢陽府人으로後에龍津으로移居하였다高麗高宗四十五年戊午에雙城摠管이되었고子良琪는二代雙城摠管이요孫琳은三代摠管이고曾孫小生은四代摠管으로相繼襲爵하여九十九年間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宣德鎭,元興鎭,靈仁鎭,耀德鎭,靜邊鎭等十五州를統治하였다曾孫小生은無傳하여龍川의弟龍城府院君暾이漢陽趙氏의宗孫이되었다龍城의長男龍源府院君仁璧과仲男檢贊城仁瓊과三男檢漢城尹仁珪와四男忠靖公仁沃이며玄孫良節公溫과良敬公涓은竝爲開國元勳이며그以後公의子孫들이繁盛함은모두公의蔭德이아니겠는가公의墓所앞에四季節마다開花하는나무가있으니四季花라稱한다다른곳에옮겨심으면살지못하고죽어貞節을象徵하며石人과더불어永久히墓所를모시고護衛하는뜻을表하고있어旌表하는禮로써族譜首編에登載하고있다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三世祖左副都元帥公 諱良琪 壇碑文
* 三世祖左副都元帥公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總管府)兼東征左副都元帥
漢陽趙公諱良琪 之壇
配郡夫人朴氏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總管府)兼東征左副都元帥漢陽趙公諱良琪壇碑文
公의諱는良琪니始祖中書公諱之壽의孫이요雙城摠管公諱暉의子이다年十三에摠管을襲爵하여雙城摠管이되었다公의墓所는咸鏡道永興府德興面龍川里艮坐에계시고配位朴氏도합폄하였다元世祖가高麗忠烈王七年에日本을征伐함에都元帥에흔도를命하고忠烈王은公이武烈이있다하여따르도록命하니朝廷議論이年少하여어렵다고하였다公이奮慨하여말하기를내비록年少하나이미아비富貴를襲爵하였으니어찌어렵다고辭讓하겠는가請컨대軍門에서藝를試驗하리라하니王과元帥가크게奇特히여겼다出征함에都元帥는敗하였으나公은副元帥로金方慶을따라싸움에軍士를온전히하고勝捷하니元帝가嘉尙히여겨錦袍와玉帶를下賜하며말하기를네나이二十一에아직未婚이니이옷을입고東國에가서어진配匹을娶하여아름다운子孫을낳아代代로皇室에致力하기를네가오늘나를섬기듯하라하였다距今七百餘年에錦袍는保存할수없었으나玉帶는아직까지傳하는데其間數次잃었다되찾았다일찍이失火하여집을全燒함에도玉帶는後園나무가지에걸려있었고但그때홀과一枚는半을遺失하였다가有年後에行商에게서偶然히購入하여補缺하였다高宗元年에는大院君이빌려가宮에들여가서王과神貞母后께서보시고愛玩하시며久傳된것을아름답게여기시고그헤어진것을愛惜하게여겨玉工을시켜補完케하시고御覽玉帶란四字를써서本孫에게돌려보냈다그後에大院君이다시判書鍾弼에게書信을보내어借覽을請하고뒤에大院君이墓의明器로삼도록命하여함께葬事에使用되니마침내어찌할수없게되었다가丁未年에王禮로改葬하게되자前書信을가지고返還할것을要求하여回收되었다이제는바야흐로保藏되었는데萬一公의陰德과神의도움이아니었던들이러하겠는가國家나世家에도或名器가있으나公의玉帶와같이稀貴한世寶를보지못하였다일찍이後孫都承旨性敎는玉帶記事를撰하고監察鍾灝는玉帶保存顚末을짓고進士一元은贊을進士鍾奭은圖識를지어모두永久保存할計劃을삼았다三子를두니琳은三代摠管龍川府院君이요暾은龍城府院君이고天柱는判司農事이다龍川君의子는小生이니四代摠管으로無傳하며龍城君이四子를두니仁璧은漢山伯諡襄烈이오仁瓊은檢贊成이오仁珪는檢漢城府尹이오仁沃은漢山君諡忠靖이다曾玄以下는代代로道學節義가끊기지아니하고繁延하니어찌公의懿德餘韻이아니겠는가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四世祖 龍城府阮君 諱暾 壇碑文
* 四世祖 龍城府阮君
三重大匡龍城君贈推忠翊戴輔理贊化
佐命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
君門下左侍中漢陽趙公諱暾 之壇
配杆城郡夫人李氏
○ 三重大匡龍城君贈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壁上
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君漢陽趙公諱暾壇碑文
公은雙城摠管諱暉의孫으로高麗에여러번大功을세워高麗史列傳에등재되어지금까지世人이모두그名聲을알고德을稱頌하니何必여기에무엇을더記錄하겠는가삼가그傳을參考하여略述한다公의諱는暾이오初諱는祐요本은漢陽이다龍津에世居하여弱冠이못되어忠肅王을섬겼다當時女眞으로逃亡간衙前과百姓을公이王命을받고海陽에가서六十餘戶를刷還하고돌아와서監門衛郎將을除授받고뒤에또다시가서百餘戶를刷還하니王이嘉尙히여겨廐馬와綾緞을下賜하고左右衛護軍을除授하였다恭愍五年에雙城의옛땅을收復하여禮賓卿을除授받고開京에舍宅을下賜받았다六年에太僕卿에옮기었고紅巾賊이西京을陷落함에公은知兵馬使安祐의摩下에서그들을물리쳤다九年에判司農寺事를拜하고十年에工部尙書로옮겨王의南幸을따르니王이公과睦仁吉을命하여福州兵을나누어거느려서行宮을宿衛토록하였다十一年에海州牧使로나가고喪을當한지一年만에起復으로禮儀判書가되었다가다시檢校密直副使가되고紅巾賊을擊走시킨功으로一等功臣이되었다二十一年에辭任을願하여牛峰縣에居하고辛禑元年에三重大匡龍城君에冊封되고五年에龍津에歸老하였다子仁沃이따라가고자하니公이拒絶해말하기를우리집은時局의危疑함을만나서先祀를받듬이毫髮과같은데도玄陵이一門을돌보시어地位를온전히하고君을封하기에이르고너희들兄弟가모두顯達하였으되百에하나도報答하지못하였으니너희들은老父를念慮하지말고王室에致力하기를마치내곁에있는것과같이하라하였다六年에卒하시니壽七十三이다麗朝에서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君門下左侍中判禮儀司事上護軍事를贈職하였다.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五世祖 襄烈公 諱仁璧 壇碑文
* 五世祖 襄烈公
純誠翊衛輔理功臣三重大匡
龍源府院君贈左政丞領 經筵事
漢山伯諡襄烈漢陽趙公諱仁璧之壇
配貞敬夫人河東鄭氏
配貞和公主全州李氏
○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源府院君贈左政
丞領 經筵事漢山伯諡襄烈漢陽趙公諱仁璧壇碑文
公의諱는仁璧이요號는愚溪또는海月亭이다始祖中書公諱之壽와摠管公諱暉와副元帥公諱良琪와龍城君諱暾의四世는곧公의高曾祖祖考考位이다公은龍城君의맏아들로龍津에서誕降하였다特異한才質이있어學問을兼通하여先世의遺風을能히이었다恭愍王五年雙城回復時에父公과함께東北面兵馬使柳仁雨를도와護軍이되었으며十二年金鏞의討伐에공을세워收復京城二等功臣으로冊封되었고二十一年家州에서亂動者들이地方官吏를죽이는일이있자判事로서이들을討伐하였으며이해에萬戶가되어咸州北靑에서倭寇를大破하여奉翊大夫에올랐다辛禑元年密直副使로서忠惠王의아들을自稱한僧釋器를잡는데功을세우고다시東北面元帥로出征하여倭寇를討伐하였다三年甕津文化地方에侵入한倭寇를攻擊하였으며다음해判密直으로火砲를使用하여水軍을訓練시켰으며六年江陵道上元帥가되어倭寇를擊退하는데큰功을세웠다九年門下贊成事로東北面都體察使가되고十一年四道都指揮使가곧이어交州道元帥가되었다昌王元年威化島回軍에加擔하고三司左使가되었다恭讓王元年判懿德府事가되고다음해回軍二等功臣으로冊錄되었다太祖二年朝鮮朝에서開國二等功臣으로追錄하고推誠亮節翊衛輔理佐命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司事領經筵事漢山伯龍源府院君에封해지고諡襄烈을下賜하였다配貞敬夫人은河東鄭氏니一男一女를두었는데溫은開國定社佐命功臣漢川府院君諡良節이오配貞和公主는六男二女를낳으니涓은佐命功臣右議政漢平府院君諡良敬이오侯는知敦寧諡安靖이오師는號嘉川齋니僉知中樞요傅同知敦寧과保와伯은无后하다孫儀는僉知로无后하고琓은漢豊君이오河는都制요興은參判이오育은庫使요慕는摠制요慈는敦寧이오惠는崇政으로諡恭安이오憐은兵參이오得壽는司正이오孟發은縣令이오仲發은縣監이요季發은錄事로无后이다曾玄以下는不錄한다墓는開城興敎面蛇串里丑坐原이고公主墓는長湍郡西面田齋里子坐原이다仁祖六年襄陽府使인後孫緯韓이地方儒林과協議하여東溟書院과忠賢祠를세워公을모시고三子嘉川齋公을함께配享하였다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愚溪趙仁璧先生神道碑
開國定社佐命功臣輔國崇祿大夫議政府
左贊成漢川府院君諡良節趙公溫神道碑
○ 開國 定社 佐命功臣 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漢川府院君 諡良節 趙公 溫 神道碑銘
(번역문)
高麗 恭讓王이 太祖를 都統使로 삼아서 將次 遼東을 공격할때 軍師가 威化島에 이르러 回軍할 것을 定策하니 當時에 마음을 함께하고 協力한 사람은 곧 待中 沈德符와 評理 裵克廉과 鄭地와 右代言 趙仁沃과 吏曹判書 趙溫 等 四十五人이니 溫은 卽公의 이름이다. 高麗 忠穆王 三年(一三四七) 丁亥生이요 仁沃은 公의 叔父이다. 얼마후에 淸州에 水災가 일어나 公이 王에게 가서 命令을 받들기를 하늘이 災變을 내린 것은 賢臣을 가둔 때문입니다. 라고 아뢰니 王께서 깨달으시고 賢臣 李牧隱과 權陽村을 淸州獄에서 釋放시켜서 돌아오매 密直副使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壬申 七月 十六日에 公이 裵克廉 趙浚 鄭道傳 모든 분과 같이 國璽를 받들고 太祖 邸宅에 가니 太祖가 門을 닫고 들이지 않아 公 等이 門을 열고 直接 들어가서 廳舍위에 두니 그 이튿날 太祖가 卽位하고 開國功臣 벼슬의 차례를 定할 때 裵克廉 趙浚 等 十七人으로 차례를 定하고 왕으로 推戴하여 함께 大業을 이루었으니 그 功이 甚히 큰지라 功勞함을 잊기 어려운지라 平壤尹인 公도 諸公 十一人과 함께 擧事를 議論하여 임금을 推戴하였으니 그 功이 또한 크다. 그 外 十九人도 그 功을 可히 賞주라 하더라. 太祖二年 癸酉年에 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서 倭寇를 樹州에서 擊破하고 寧海州人 李唐信을 捕虜로 바쳐 遼東으로 護送하고 義州道의 壯丁들을 軍籍에 入籍시켜 軍事力을 强化하였다. 王이 壽昌宮 後苑 靑心亭에서 돌을 던져 싸우는 擲石놀이를 구경하니 公이 節制使로서 擲石軍을 거느렸으며 親軍衛都鎭撫가 되었다. 戊寅年에 鄭道傳을 죽일 時에 公은 關連하지 않았다. 그 後로 中樞院事 義興三軍府 左軍 同知節制使와 商議門下府事가 되시다. 上王이 太宗으로 더불어 定社功臣의 차례를 議論할때 公을 推誠協贊定難反正載安宗社의 功勞가 重大하여 永世토록 잊지 않을 功臣으로 삼으니 都監이 王께 말씀하여 趙溫은 功勞가 적지아니하니 二等功臣을 삼아서 閣을 세워 形像을 그리고 碑을 세워 功을 기록하고 父母와 妻는 二等을 넘어 贈職을 封하고 直子는 二等을 넘어 蔭職하고 直子가 없으면 즉 甥姪과 女婿를 等級을 높이고 功勳田 一百五十結과 奴婢 十五名과 書記 五名과 守禦軍 八名을 下賜받고 初仕에 들어가기를 허락받고 馬舍와 馬一匹과 金銀帶 一腰와 겉옷과 속옷 各 한벌을 하사 하고 嫡長孫은 世世로 벼슬을 하여 그 祿을 잃지 않게 하라 하고 政案을 기록하여 말하기를 定社二等功臣 溫의 子孫은 永世토록 도우라 하고 드디어 智門下府事가 되시다. 日本左京大夫 六州牧 義弘이 九州를 쳐서 이기고 使臣을 보내어 바야흐로 物件을 들여오라 하고 스스로 그 功을 말하고 百濟의 후손이라 하여 土田을 요구하거늘 왕이 관련되는 官廳으로 하여금 議論할때 公이 參知門下府事로서 成石璘 趙英茂 河崙과 함께 議論하니 옳지 않다 하였다. 定宗 元年 八月 四日 公이 鄭南晋 趙珍과 더불어 王을 모시고 말을 타고 막대기로 공을 치는 擊毬놀이를 하였기에 각각 馬 一匹씩을 下賜 받았다. 宗親 靖安公 芳雨와 益安公 芳毅와 懷安公 芳幹과 上黨諸侯 李佇와 勳臣 李居易과 趙英茂와 李天祐를 命해서 典 모든 道兵을 해체할때 公 또한 參與하고 그 남은 典兵者도 다 罷하였다. 太宗이 卽位하매 知中軍節制使가 되고 곧 參贊門下府事와 商議門下府事로 옮기다. 司憲府와 司諫院에서 서로 글을 올려 가로되 趙英茂 等이 兵器를 거두어 모을 때 卽時 輸納하지 아니하고 여러날 遲延하여 軍用物을 任意로 줄이고 參謀 道理를 하지 아니하니 罪를 可히 다스리지 못하니 그 벼슬을 거두고 그 罪를 鞠問하여 法에 依한 措置를 施行하라 請하다. 王이 듣지 아니하니 臺諫이 連日 두번 上疏하고 세번 上疏 하니 왕이 마지 못하여 가벼운 法을 適用하여 다만 그 職만 罷職하고 功臣은 保存하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벼슬에 還職하여 凉竹笠과 斜皮靴 各 하나씩 下賜받다. 樂正鄭以吾 宮中甲士의 養成軍을 罷하라 疏請하다 그 때에 甲士는 芳幹의 摩下사람이 많은지라 世子가 出入할 때 항상 두려움을 生覺하는 故로 또 이를 記錄하노라. 왕이 公에게 일러 가로되 나의 말이 어떠하오 하자 公이 가로되 어찌 가히 一儒의 말로써 가벼히 宮中의 甲士를 罷하라 합니까 왕이 가로되 너의 말이 더욱 나의 뜻과 같다 하면서 곧 鎭撫所 甲士 三百名을 罷하고 軍器를 다 三軍府로 보냈다. 庚辰七月에 公이 完山府로 流配되니 그때에 太上王이 公을 不忠이라 하여 罪를 定宗에게 請하는 故로 不得已 이런 命이 있었느니라 左政丞 成石璘과 右政丞 閔齊가 文武百官을 거느리고 太上殿에 가서 公이 無罪함을 分別하여 밝히니 드디어 大闕밖에 나가 편히 있으라 命하다. 얼마 있다가 三司左使 佐命功臣 四等에 책록되시다. 辛巳八月에 參贊議政府事로서 명나라에 聖節을 하례할 때 왕이 冕服으로 君臣을 거느리고 太平館에서 拜表하고 宣義門까지 전송하였다. 明年 正月에 돌아와서 議政府 贊成事에 오르다. 十一月에 東北面察理使가 되시니 吾都里 사람이 왔다. 趙思義의 兵亂後에 오도리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산골짜기에 숨고 敢히 나오지 못하였었는데 公이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傳하여 국가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조회하라 하여 내조하였다. 癸未十一月에 司平左使 李彬과 驪興君 閔無恤을 明나라에 보내니 謝恩禮와 兼하여 宗系를 분별하여 밝히더라 대개 前年에 公이 聖節使로 명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祖訓條章에 이르기를 太祖께서 李仁任의 아들이라 하여 朝鮮에 돌아와 告하여 분별하여 밝힌것이다. 乙酉年에 義安大君 和와 寧安君 良祐와 完山君 天祐로부터 王을 모시고 內樓의 잔치에 參席하였다. 丙戌年에 兵曹判書가 되고 다시 議政府 贊成事가 되시다. 戊子年에 太上王이 돌아가심에 齋都監判事가 되시다. 乙丑年에 功臣掌務가 되시어 西川君 韓尙敬으로부터 閔無咎와 閔無疾 等의 罪를 다스리는것을 논의할 때 刑曹正郞 李仲蔓은 公의 사위이므로 罪는 마땅히 罷職이로되 公의 緣故로 罪를 免하다. 太祖行狀 碑文은 河崙과 權近의 作으로 행동한 말이 合當치 못함이 있는지라 公臣臺諫이 二公의 不敬한 罪를 번갈아 請할 때 公이 南在復으로부터 請하되 왕이 말씀하시기를 河崙과 權近은 처음에는 비록 두 마음을 太祖께 있었으나 이제는 나에게 忠臣이니 너의 무리는 또한 나의 臣子라 마땅히 내 말을 따를지어다. 趙英茂와 安景恭 鄭擢 劉敞 韓尙敬 趙狷으로부터 왕이 말하여 가로되 太祖께서 만약 鄭道傳이 없었으면 누가 같이 開國을 했으리요 그 베푸는 마음이 公께서 나왔으니 可히 容恕하리라 하고 왕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리라 하니 公이 欣然히 물러가시다. 이로써 彈劾을 받지않게 臺諫에게 입었으되 왕이 就職을 命하다. 辛卯에 왕이 上王殿에 나가 獻壽와 極舞 춤을 추니 宗親과 公께서 參席하셨다. 壬辰年에 三軍別待衛 鷹揚衛節度使 別司 禁提調中軍節制使를 두니 公이 左一番節制使가 되셨다가 輔國崇祿大夫 府院君이 되시다. 太宗十七年(一四一七)丁酉 閏五月十九日에 漢川府院君으로 卒하시니 史臣이 말씀하시기를 公이 太祖를 왕이 되기전부터 섬김으로 開國 定社 佐命 功臣되시고 太祖 定宗 太宗 三朝를 섬겨서 議政府 贊成事에 이르시다. 사람됨이 淸廉하며 靜肅하고 溫柔하며 善良하고 몸가짐이 恭遜하고 말이 적으셔서 家産을 챙기지 않고 貴하게 節制하고 儉素하시니라. 享壽는 七十一에 訃音을 듣고 朝會를 거두고 賻儀를 前例와 같이 하다. 攸司를 命하야 禮葬하게 하고 諡號를 良節이라 贈하니 溫良하며 好樂하고 淸廉하며 自克한 것은 그 諡號法이다. 墓所는 坡州 交河面 吾道里 長鳴山 北龍之原에 있으며 壬坐이다. 賜牌山坂이 五町七段步가 되느니라 옛 碑碣이 傳하지 않음으로 玄孫 判決事 邦楨과 參判 邦彦이 다시 세웠는데 또 保傳하지 못하였다. 後孫 逸掌令 文穆公 克善이 다시 세우고 陰記를 撰하고 文簡公 松谷 豊陽 趙復陽이 碑文을 지었으되 오히려 大碑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난번에 宗議를 열어서 將次 圖謀할 때 後孫 炳吉이 나에게 碑文을 請하니 내가 감히 辭讓하지 못해서 마침내 碑文을 지어 쓰기를 公의 先祖는 漢陽人이다 高麗 僉議中書事 之壽는 卽 公의 五代祖이며 高祖 暉는 雙城摠管이니 摠管府를 和州에 두었으니 지금의 永興郡 迤北十二城이라 曾祖 良琪는 襲爵으로 摠管이 되고 元나라 世祖가 日本을 征伐할 때 副元帥로서 金方慶을 쫒아서 日本을 치고 全軍이 무사히 돌아왔다. 할아버지 暾은 高麗에서 벼슬하여 雙城以北 九州 十鎭을 收復하고 紅巾賊을 擊破하고 禮儀判書 三重大匡 龍城府院君이 되시니 事績은 高麗史에 記錄되어 있느니라. 大提學 尹紹宗이 本傳을 지었다. 아버지 仁璧의 號는 愚溪요 又號는 海月亭이다. 登州十二城을 깨끗이 收復하고 安祐와 李邦實과 더불어 平壤을 收復하여 三重大匡 龍源府院君이 되시고 朝鮮朝에서 左政丞 漢山伯을 贈하니 諡號는 襄烈이다. 東溟書院에서 祭享을 받들고 있다. 妣는 河東鄭氏니 生一男一女를 두고 妣 貞和公主는 卽 桓祖大王 第一女니 生六男二女를 두었다. 公의 配 張氏는 忌 三月三日이요 墓는 合兆하다. 配 朴氏 忌는 七月十六日이요 墓는 長端에 있으나 失傳하다. 五男三女를 두었으니 儀는 僉中樞요 琓은 知中樞 漢豊君으로 宗統을 이어받아 追封하고 河는 都制別將이요 興은 繕工監正 贈吏曹參判이요 育은 義盈庫使니 贈吏曹參判이다. 一女 婿 府使 李仲蔓은 西原人이요 二女 婿 護軍 尹希吏는 坡平人이요 三女 婿 直長 李紹仁는 仁川人이다. 僉中樞는 無后요 漢豊君의 아들 璔은 功臣의 嫡長孫으로 知中樞요 瑠는 嘉山郡事 贈工曹參議요 都制別將의 子는 玗이요 璋은 司直이요 瑭이며 璡은 察訪이며 琚요 珙은 通德郞이며 球다. 參判의 子 秀文은 平安兵使요 璜은 郡守요 秀武는 府使요 庫使의 子 哀孫은 文科에 급제하고 藝文舘檢閱과 成均舘司藝요 信孫은 牧使요 義孫은 進士에 判官이다 曾孫 允瑄은 蔭府使로 贈承旨요 允瓚은 縣監이요 允瑛은 禦侮將軍이요 允瑺은 郡守요 允琇는 司直이다. 壽昌은 御侮將軍이요 繼宗은 全羅兵使요 元紀는 進士로 文科 及第하여 刑曹 工曹判書를 歷任하고 左參贊에 이르고 諡號는 文節公이요 玄孫 邦楨은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判決事요 邦彦은 進士로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副提學과 江原 全羅 監司로 禮曹參判에 이르렀고 光祖는 號가 靜菴이니 大司憲이 되고 贈領議政이며 諡號는 文正公이고 孔子 文廟에 配享되었다. 五代孫 達孫은 大護軍이다 輔는 號가 遯菴이고 別提요 弼은 號가 遯溪이니 別座요 佑는 號가 竹溪로 進士에 佐郞이요 傅은 都事니 四兄弟 모두 己卯士禍때 禍를 같이 입었다. 六代孫 興仁은 大護軍이요 光庭은 壬辰倭亂때 倡義하여 延安城을 지킨 功으로 贈戶佐요. 七代孫 緯韓은 號가 玄谷으로 進士와 增廣甲科에 及第하여 禮曹叅判이며 耆老社에 들었고 纘韓은 號가 玄洲이며 進士로서 文科에 及第하여 左承旨요 配 高興柳氏는 殉節하여 旌閭를 받았다. 八代孫 從善은 漢溪君이요 克善의 號는 冶谷으로 逸掌令이며 贈吏曹判書와 祭酒를 겸직하고 諡號는 文穆公이다. 九代孫 明漢은 漢原君이요 得男은 丙子胡亂時 王을 扈從하고 殉節하여 忠臣旌閭를 세웠다. 渭叟는 府使로 孝旌를 세웠다. 代數가 먼 後孫 中에서 亨復은 進士로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吏曹參判이요 性敎는 進士로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泮長 知申 大司憲 禮曹判書 文衡으로 諡號는 文憲公이다. 恒敎는 進士로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同副承旨요 鐘灝는 監察이요 鍾弼은 進士로 壯元하고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工曹判書를 歷任하고 耆社에 들었으며 外官職에 六道의 監司를 歷任하고 鍾純은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承旨요 嘉善大夫에 올랐다. 子孫모두가 最高顯達한지라 以外 文官 蔭職武官을 殿堂에 올리지 못한 者는 많음으로 다 記錄하지 못하노라 鳴呼라 公이 將帥와 宰相과 功勳이 있는 家門에 태어나셔서 벼슬이 正一品인 政丞에 올랐는데도 조금도 驕慢하고 자랑하는 態度가 없고 몸가짐에 淸廉하고 儉素하여 襃賞과 賜牌田畓이 있는데 모든 어려운 一家에게 나누어 주고 草屋 수칸에 말을 둘곳이 없었으며 食卓에는 맛있는 飮食이 없고 坐席에는 깔방석이 없어 八十이 가까운데 처음과 끝이 한결같이 하셨는니라. 公이 돌아가시매 그의 아들이 집을 짓고 작은아버지 議政公 涓을 請하여 落성 하려하니 後에 議政公이 到着하여 섬돌을 보고 앉지도 않고 나가면서 말하기를 兄님께서 살아계실 때 섬돌의 階段을 만들지 아니한 것은 어찌 財力이 不足하여 그러셨겠느냐 너희들은 先人의 儉素한 德을 따르지 아니하고 石築으로 層臺를 만들었으니 나는 다시 너의 집에 들지 않으리라 하니 모든 조카들이 두려워하여 卽時 헐었으니 史臣이 칭하는 것은 곧 이러하기 때문이다. 洪相國彦弼이 公을 일러 말하기를 淸廉하고 德望이 높으신 節義를 稱讚하였으니 當日에도 알지 못하는데 後孫 百世에 公같으신 분이 몇사람이나 있을까 後孫이 昌大한것은 반드시 公께서 後孫에게 끼친 蕯德이로다. 이어 記錄하여 말하되 雙城摠管의 家世에 公께서 우뚝 태어나셨다. 威化島에서 回軍함에 모든분들이 誠意를 다 하여 協贊했도다. 水災變이 발생하자 널리 救援하였으니 二賢 李牧隱과 權陽村을 淸州獄에서 放免하도다. 마침내 太祖를 王位에 推戴하였으니 함께 大業을 이루었도다. 開國의 공을 의논하니 封爵이 赫赫하도다. 兵器를 輸納함에 遲延하여 彈劾을 입었도다. 父子벼슬을 지킴에 事務에 어려운 말이 있도다. 太上王에게 미움을 보였으니 完山府에 流配했도다. 文武百官이 더욱 힘써 分別하여 告하니 太上王께서 疑惑을 풀으셨으니 돌려서 聖節을 賀禮하는 使臣을 命하였도다. 돌아와 兵曹判書 職을 맡았으니 곧 두 政丞에 오른것이다. 三峰 鄭道傳의 용서를 청하여 王이 再顧하였도다. 三軍을 잡았으니 벼슬이 輔國崇祿大夫에 이르셨도다. 儉素한 德望과 淸潔한 風度는 可히 千百世에 傳하리로다. 무릇 나의 後孫을 누가 恭敬하지 아니 하리요 밝은 모습으로 代代로 臣으로 奉職하였으니 處處에 偉大한 事蹟이로다. 비석의 이수가 산처럼 우뚝솟았으니 꽃다운 名譽가 흩어지지 아니하리라.
封塋 後 五百八十五年 壬午 (二千二年) 十月 日 黃州 邊時淵 撰
緬封于 戊子(二千八年) 八月十三日 洪城郡 洪北面 大仁里 梅山祭閣谷 始祖中書公 壇下 甲坐 合窆
西紀二千十二年 壬辰 七月 日 知中樞府事公派 會長 時衡 謹竪
한풍군(漢豊君) 신도비문(神道碑文)
公의 諱는 琓이요 號는 望湖亭이요 姓은 趙氏이며 本은 漢陽이니 七世 大宗孫이다 漢陽趙門은 名門巨族으로 代代로 드러나 歷史에 記錄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는데 高麗中葉에 朝順大夫僉議中書事 諱之壽를 始祖로하여 生諱暉는 獨子이니 初代 雙城摠管으로 和州以北 十二城을 四代 九十九年間 世襲統治하였으니 公의 五代祖이다 高祖諱良琪는 二代摠管으로 哈丹을 討伐하고 東征軍副元帥로서 日本을 征伐하여 元世祖로부터 錦袍와 玉帶를 받았는데 玉帶는 大宗家에 世寶로 傳해내려온다 曾祖諱暾은 西京 至今의 平壤에 侵入한 紅巾賊을 擊退시켜 一等功臣에 策錄되고 工部尙書와 禮儀判書를 歷任하고 三重大匡 龍城君에 封하고 龍城府院君 門下左侍中에 追贈되었다 祖諱는 仁璧이니 元帥로 紅巾賊을 擊退시켜 西京 至今의 平壤을 回復하고 金鏞을 討伐하며 數次例 倭寇를 擊退시켜 三重大匡 龍源府院君 三司左使에 이르렀으나 高麗가 亡하자 妻男인 太祖를 따르지 않고 不事二君의 義를 지켜 東溟書院 忠賢祠에 配享되고 諡는 襄烈로 左政丞 漢山伯에 追贈되었다 考諱는 溫이니 太祖 定宗 太宗을 내리섬겨 開國 定社 佐命 功臣에 策錄되고 隨州에 侵入한 倭寇를 擊破하며 義州道의 壯丁들을 軍籍에 登錄시켜 軍事力을 强化하였으며 吏曹와 兵曹의 判書를 거쳐 輔國崇祿大夫 議政府 贊成事에 이르고 漢川府院君에 封하고 諡는 良節이다 妣는 貞敬夫人張氏와 繼妣는 貞敬夫人朴氏이다 公은 高麗 恭愍王 二十一年 壬子에 태어나 襄烈 良節 二公을 祖와 父로 모시면서 그 忠孝節義와 淸廉潔白으로 太宗과 世宗을 섬겼다 그러나 壬辰倭亂때 文獻을 모두 燒失하여 이제 다만 譜牒과 王朝實錄의 收錄을 살피고 記述하는데 지나지 아니한다 卽 世宗二年 五月에 公이 四十九歲로 嘉善大夫 判洪州牧事에 赴任하고 李成의 誣告罪를 主上께 告하여 다스렸으며 長男 璔을 全羅道監牧官 金和의 女와 婚姻시켜 以後 大宗派가 湖西에 世居하게 되었다 同年 四月에 右軍摠制로 轉任하여 軍의 紀綱確立과 戰列을 가다듬어 國家의 安保를 强化하고 礎石을 다졌으며 同十二年 八月 慶州府尹에 在任時 公平淸廉하고 正直한 官吏를 現地에 派遣하고 實한 分數를 就하여 百姓의 便益을 圖謨하고 國家의 財政을 充足하게 할것을 主上께 建議하여 是正하니 稱頌하는 사람이 많았다 直提學 錦谷 魚燮甲의 咸從魚氏 世稿中 鷄林府尹 趙某 望湖亭에 題한다 詩에서 相公休沐處 亭榭壒埃風 城闕歸來近 江山望矚通 閒情怑詩酒 妙道竅玄空 皇極求賢切 其徐佐建中인데 解說하면 相公께서 쉬고 씻던 곳에 亭子엔 티끌바람 불어온다 都城에서 오신지는 멀지 않아도 江山을 바라봄에 通해 보인다 한가한 心情은 詩와 술을 함께 하시니 묘한 도는 그대로 두시었던가 宮闕에서는 간절히 어진이를 구하고 싶은데 建徐中으로 輔弼을 하고 계시네 라고 하여 公의 性稟을 斟酌하게 한다 이듬해에 暫時 右軍摠制로 復歸하였다가 그해에 다시 宣慰使摠制로 咸吉道에 派遣되어서 民心을 가라앉히고 住民을 安定시켰다 同二十二年에는 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가 翌年에 正二品 資憲大夫 知中樞院事에 昇進되고 그해 八月 十五日에 卒하니 壽가 七十이었다 伯氏 僉知中樞院事 諱儀가 二女만 두고 无後로 早卒하여 公이 太宗十七年 宗統을 이어받고 世祖三年 功臣의 嫡長中 二品以上에 이른者는 君에 封하고 爵號를 물려받도록하라는 王命에 따라 漢豊君에 追封하게 되었으니 實로 漢陽趙氏의 胄孫이 되었다 墓는 坡州市 吾道洞 長鳴山麓의 考位兆下 壬坐이며 配位 貞夫人江陵金氏는 司僕少尹 雨의 女로 墓는 公과 雙墳으로 封하였는데 近代에 이르러 墓所의 主山인 長鳴山이 礦山開發로 破壞되고 周邊에 工場들이 들어서서 幽宅을 繼續 有持하기에 隘路가 있어서 二千八年 八月에 公이 처음 赴任했던 場所이자 後日 大宗派가 世居하며 始祖 中書公以下 五世祖의 壇所와 大宗派 世葬地인 洪州 至今의 洪城郡 洪北面 大仁里 魯隱洞 梅山 齋閣谷으로 考 良節公의 墓와 함께 移葬하였는데 公과 貞夫人은 考의 墓下에 合葬으로 모셨다 二男을 두니 長男 璔은 大護軍을 歷任하고 資憲大夫 知中樞府事요 다음 瑠는 嘉山郡事로 贈通政大夫 工曹參議요 孫男 允瑄은 府使로 贈左承旨요 允瓚은 禦侮將軍 禮安縣監이요 允瑛은 禦侮將軍 龍驤衛副司直이요 允瑺은 成梅竹軒 文人으로 中訓大夫 沔川郡守요 允琇는 五衛의 司直이니 모두 長房所生이고 壽昌은 禦侮將軍으로 贈戶曹參判이요 壽延은 縣監이니 次房所生이다 曾玄以下는 繁多하여 모두 記錄할 수 없으나 邦楨은 文科에 及第하고 判決事로 贈吏曹參判이요 邦彦은 文科에 及第하고 全羅 江原 觀察使와 禮曹參判에 이르고 達孫은 嘉善大夫 大護軍을 지냈고 興仁은 禦侮將軍 大護軍이며 光庭은 壬辰倭亂때 倡義하여 延安城을 지킨 功으로 戶曹佐郞에 追贈하고 顯忠祠에 配享되었고 維韓은 文科에 及第하고 仁川都護府使에 除授되고 壬辰倭亂때 原從一等勳으로 贈兵曹參判이며 緯韓 號玄谷은 文科 甲科에 及第하고 禮曹判書로 文章과 學德이 出衆하였고 纘韓 號玄州는 文科에 壯元及第하고 左承旨로 文章과 言辯이 卓越하였으며 從善은 戶曹參判에 追贈되고 漢溪君에 封하였고 克善 號冶谷은 道德學行으로 世人의 追尊을 받을뿐아니라 大孝로 旌閭와 御札을 下賜받고 吏曹判書에 追贈되고 諡는 文穆이며 晦巖書院과 道山書院에 配享되었으며 備 號桂窩는 文科에 壯元及第하고 濟用監正兼 西學敎授에 除授되고 大宗家의 大業을 지키기 위해 良節公 不祧廟 祠宇를 建立하였고 明漢은 戶曹參判으로 漢原君에 封하였다 晟漢 號東山은 漣川縣監때 政事를 簡明하고 嚴格하게 行하고 弊習을 一掃하다가 誣告로 罷職된 後 朝廷에서 臺官職에 薦擧하였으나 拒絶하고 魯隱洞에 隱居하여 後進을 養成하니 伊山祠에 配享되었으며 得男은 定略將軍으로 丙子胡亂때 王을 扈從하고 敵과 싸우다 壯烈히 殉節하여 忠臣旌閭를 내렸고 淵卿은 親患에 斷指하고 武科及第하여 여러鎭을 淸廉으로 다스렸고 仁顯王后가 西宮에 幽閉됨에 쌀과 소금을 화살로써 食糧을 供給하니 王后復位後 淸州營將에 除授되었다 公의 後裔가 이와같이 繁盛하는 것은 또한 公이 平素에 積德하신 餘韻이 아니겠는가 鳴呼라 國家의 興亡에 忠臣烈士와 經綸俊材가 出現하게 마련인데 特히 高麗가 亡함에 襄烈公은 妻男인 太祖의 革命에 不參하여 大義가 더욱 드러나고 良節公은 朝鮮 建國初에 諸般 國亂을 슬기롭게 도와서 三功臣에 모두 策錄되었으니 當時 公의 家門은 國家에 莫重한 世家이니 公의 氣勢를 누가 敢當하리오마는 資憲大夫의 崇秩로 七十上壽를 누리며 到處에서 善政의 治積을 남기어 그 遺德으로 子孫이 顯達하였다 公은 이와같이 生前과 歿後에 鴻福을 享受하였으니 可謂 壽福을 兼한 碩德이라할 수 있다 公의 墓碑文은 있으나 神道碑가 없기에 宗中이 相議하여 後人의 龜鑑으로 삼고저 刻字하니 後孫들은 精進하기 바라노라!
二千十四五年 乙未 月 日
忠淸南道知事 000 謹撰
漢豊君 00代孫 00 謹立
漢陽趙氏 漢豊君派宗會 統督
'❀漢陽人문화유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산리 산골(山谷)마을 방산정사(芳山精舍) 명덕사(明德祠) 공동재(崆峒齋) 삼산당,정(三山堂,亭)고택 (0) | 2017.04.20 |
---|---|
와란 소나무숲의 ‘퇴계선생수신십훈(退溪先生修身十訓)’비석 (0) | 2017.03.26 |
용주유고 (조경)趙絅 (0) | 2017.03.10 |
◐조위한[趙緯韓]신도비명(神道碑銘) -송시열(宋時烈)◑ (0) | 2017.01.31 |
『敬題文節公族譜卷末』(경제문절공족보권말) 한시 (0) | 2017.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