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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刊漢陽趙氏族譜序
惟我漢陽之趙。遠有代序。自高麗入國朝。公卿大夫莊士繼跡。其宗支柯葉蕃衍布濩。不知其幾百千也。知中樞府事文節公。以鉅人長德。仰惟本源之深遠。慨東方姓苑之莫傳。且慮遠兄弟之爲塗人也。遂遵其先尙書公衷孫志作世譜。上自雙城摠管。下至漢川,漢平。六世中閥閱功勞懿行淑德。靡不俱載。十餘傳內外子孫靡不畢錄。其誠勤可謂摯矣。然尙恨有闕者。左政丞襄烈公漢山伯夫人。卽我太祖康獻大王之姊也。先太祖開國。乃老襄陽。堅不事二姓之志。襄之人士爲立忠賢祠。尸祝而俎豆之。此非難敓之節可以表出者乎。良節,良敬之傳德襲訓。受祿于天。丹書鐵券。位躋台鼎者。有以也夫。絅嘗聞宗老梳翁公說。良節公旣卒制終。家子姪輩請良敬公共落室成。良敬公周視庭除。不坐堂而出。諸姪顚倒驚悐。請其故。公曰。伯氏在館時豈財力不足歟。不設階級。昭其儉也。而輩不思追趾先人令德。飾此石砌。余自今不入汝室矣。諸姪惶汗霑背。卽壞之。蓋二公之持廉尙儉如此云。其后良節公四代孫靜菴先生。唱明道學於吾東。際遇中廟。期鑄三代之治。不幸爲讒小所惎。身竟不保。然旋復天定。配享孔廟。爲百代儒宗。其爲胚胎前光而擴大焉者何如也。良敬公子姪之顯。孫曾之盛。亦不歉於良節。諸房支派亦勿替引之。詩所謂樂只君子。萬福攸同者非耶。良敬公於絅八代祖也。良敬卽摠管五代孫也。計其歷年則於今四百餘載。其間大運之盈虛消息。國家之興亡否泰。人事之儵往忽來不知其幾也。則今吾宗族之盛於前而替於後。勢也理也。無足怪者。昔春秋之時。晉之欒,范。齊之國,高。魯之孟,仲。宋之華,向。楚之景,屈。非不巨室世家。而傳不過四五世。不微則絶矣。又以漢之功臣年表觀之。至子至孫者亦尠矣。況望其累百年勳業之蓋覆其仍雲若我漢陽之世者乎。於是益見吾祖先之能守富貴。不危溢而退讓之德。素朴之風。皆可爲後世子孫法。后世子孫之承繼綿綿不絶如淮水者。其非食報歟。總之吾趙氏本出楊之漢陽縣。至龍城君樹功名於東界。子孫仍居龍津者數世。墳墓土田多在安永間。及國初。復爲漢陽人。文節公之綜理宗譜。在嘉,隆之際。則今去嘉,隆殆百有餘年矣。絅之曾祖贈承旨府君從兄弟若而人堇與錄焉。它可類知也。今吾宗族之在世者。與我顏行。則溯其世代。必與我同。下於我者。則其高曾之不及與於前譜。亦可知也。末梢後生昧昧無聞者。縱稱曰本姓漢陽。而庸詎知某爲吾祖而傳於幾世。某爲吾派而分於某世耶。況兵燹以來。譜牒之存者無幾。散處遐裔之宗生不識有舊譜者。亦不可謂必無。雖其生世能及譜牒之盛行。幸一見之。日遠易忘。人之常情。又豈眞知先祖之可尊可敬。同姓之可惇。世譜之所由作也。不寧惟是。黃渥之失譜而強引庭堅爲兄弟。羅威之賂遺羅隱而號爲叔父者介於其間。則疇能別白黑而異陰陽哉。余爲此懼。欲與同志重修世譜者雅矣。往丁亥歲。絅以不肖蒙恩。忝位列卿。今寧海府使贇氏父子方出入邇列。故知事緯韓氏方居耆老所。故掌令重呂,經歷松年,成均又新,引儀休,直長志孟,衛率備幸一時咸萃于都下。遂上下議論重修譜牒事。人皆樂而同辭。於是揀在京宗人中有辦局者十人爲有司。凡爲文遍告四方宗人。及某人爲一道之望。堪爲一道有司。某人爲一邑之望。堪爲一邑有司。各書族系單子。各出助工布木。貧富有差等事。皆松年與又新氏剴度而規畫者也。歲未終。四方宗人持族系工布者繮至輻湊。亡何。松年氏拜金山郡守。其族兄昌門又出爲奉化縣監。有若天所助焉。金山方鳩材與匠。經始其事。未幾卽世。奉化又罷官而歸。刊譜之役。遂無奈何也。俄而余以事謫在西塞。西土宗人來唁者亦多言及譜事。相與咨嗟而已。今年夏。寧海公以書告曰。吾幸涖于此。此地又多宗姓人。江左諸宗不謀而有意相譜役。進士以周又自奉化來。夫夫與修譜始議者也。閱二箇月。又以書報刊事幾完。徵序引於絅。又令絅紹介今領議政金公請弁首之文。金公我趙之自出也。我乃起而歎曰。多乎哉。寧海公之敏於事也。將墮之役。起於立談。董事之勤。倍於運甓。雲霄之閥。蟬聯之胄。班班臚列於剞劂氏之目中。則潘安仁之述家風。陸士衡之陳090_182c世德。敖而無足數者。吾宗可謂有人矣。左氏有言曰。先王胙之土而命之氏。又曰。召穆公糾合宗族于西周。後之論者亦曰。宗法與治法相左右。然則修譜卽合宗之遺法也。斯豈亶爲一姓氏之私。其實輔國家之治道也。太史公之作世家曰。三十輻共一轂。運行無窮。輔拂股肱之臣配焉。故作三十世家。吾祖先輔拂列聖之勣。奚讓於漢之世家哉。雖其耳孫之寢遠寢微者。苟爲某公某賢之世。則烏可泯泯無傳於譜中也。嗚乎。吾所與相視如道人者。其初兄弟也。兄弟其初一人之身。一人分而至於塗人。蘇明允之090_182d所悲。吾亦悲之。苟有尊祖敬宗之心。譜惡可已。願吾譜中之人。仍是而益勉孝悌之心哉。上之三年辛卯秋七月。良敬公八代孫正憲大夫前參贊絅。謹序。
한양조씨족보중간서문〔重刊漢陽趙氏族譜序〕
1651년(효종2)에 한양 조씨의 족보를 중간하며 쓴 것이다. 족보가 처음 조원기(趙元紀)에 의해 작성된 후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이 김육(金堉)에게 서문을 청하고 다시 간행하였다.
우리 한양 조씨는 세계(世系)가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다. 고려 때부터 국조에 들어올 때까지 공경대부(公卿大夫)와 품행이 훌륭한 선비들이 계속 이어졌는데 그 종족과 지파가 번성하고 퍼져나간 것이 그 몇 천 몇 백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지중추부사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께서는 큰 덕을 지닌 위인으로, 성씨의 본원이 심원한 것을 우러르고 동방에 《성원(姓苑)》처럼 성씨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는 한편 먼 형제들이 길에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선친 상서공 충손(衷孫)의 뜻에 따라 세보(世譜)를 만드셨다.
위로는 쌍성 총관(雙城摠管 조휘(趙暉))으로부터 아래로는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과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친 공적과 공로, 선행과 미덕을 모두 기재하지 않음이 없고, 10여 세대를 전하여 내외의 자손을 전부 다 기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성의와 근면함이 가히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빠진 분이 있는 것이 항상 아쉬웠는데, 바로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의 누이이신 좌정승 양렬공(襄烈公) 한산백(漢山伯 조인벽(趙仁璧))의 부인이다. 태조께서 개국하자 마침내 양양(襄陽)에서 늙으면서 두 성씨를 섬기지 않는 뜻을 굳게 하셨다. 양양의 인사들이 그를 위하여 충현사(忠賢祠)를 세우고 제사를 주관하여 올렸으니, 이는 세상에 드러낼 만한 빼앗기 어려운 충절이 아니겠는가.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과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이 덕을 전해 받고 훈계를 물려받아 하늘로부터 복을 받아 공신의 녹권(錄券)에 이름을 올려 지위가 삼정승에 오른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종로(宗老) 소옹(梳翁 조공근(趙公瑾))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양절공이 이미 돌아가시고 상제를 마쳤을 때 집안 자질(子姪)들이 양경공에게 새 집의 낙성식(落成式)에 함께 하자고 했는데, 양경공이 뜰을 두루 둘러보고는 대청에 앉지도 않고 나갔다. 여러 자질들이 놀라고 두려워 허겁지겁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형님께서 관직에 계실 때에 어찌 재력이 부족했겠는가. 계단을 놓지 않은 것은 그 검소함을 드러내신 것이라네. 그런데 너희들이 선인의 아름다운 덕을 따를 생각은 하지 않고 이처럼 섬돌을 꾸몄으니, 나는 지금부터 너희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하였다. 여러 자질들이 두려워 등에 식은땀이 흘렀고 즉시 섬돌을 허물었다. 두 분 공께서 청렴을 지키고 검약을 숭상하신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고 한다.
그 후에 양절공의 4대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은 우리 동방에서 도학(道學)을 창명하였으니, 중종조(中宗朝)를 만나 삼대의 정사를 실현하고자 기약했지만 불행히 참언하는 소인배의 미움을 받아 끝내 몸을 보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시 천명을 회복하여 공묘(孔廟)에 배향되어 백대의 유종(儒宗)이 되셨으니, 선조의 공덕을 품고서 확대시킨 것이 어떠한가. 양경공 자질(子姪)의 현달함과 손자와 증손의 성대함도 양절공의 자손에게 뒤지지 않는다. 여러 방손(傍孫)과 지파들도 침체되지 않고 이어 오고 있으니, 《시경》에 이른바 ‘즐거울사 군자여, 만복이 모이는 바로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양경공은 나에게는 8대조가 된다. 양경공은 바로 총관(摠管 조휘(趙暉))의 5대손이니, 지난 햇수를 세어보면 지금까지 4백여 년이다. 그 사이 대운(大運)의 영허(盈虛)와 소식(消息), 국가의 흥망과 성쇠, 인사가 빨리 흘러간 것이 부지기수였으니, 그렇다면 지금 우리 종족이 전에는 성했다가 후에는 쇠퇴한 것은 운세이고 이치이니 괴이할 것이 못 된다.
옛날 춘추 시대 때 진(晉)나라의 난씨(欒氏)와 범씨(范氏), 제(齊)나라의 국씨(國氏)와 고씨(高氏), 노(魯)나라의 맹씨(孟氏)와 중씨(仲氏), 송(宋)나라의 화씨(華氏)와 상씨(向氏), 초(楚)나라의 경씨(景氏)와 굴씨(屈氏)는 모두 거족 세가였지만 불과 4, 5 세대를 전하고는 쇠미해지거나 아니면 대가 끊겼다. 또 한(漢)나라의 공신 연표를 살펴보더라도 자식이나 손자 대까지 이른 경우가 또한 적다. 그러니 우리 한양 조씨의 세계(世系)처럼 수백 년 간의 공훈과 업적이 많은 후손을 덮어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 선조가 능히 위태롭고 방일하게 하지 않아 부귀를 지키고 겸손하고 사양하는 덕과 소박한 기풍이 모두 후세 자손의 본보기가 될 만 하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후세의 자손이 회수(淮水)처럼 면면이 계승되고 끊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 보답을 받아서가 아니겠는가.
총괄하자면 우리 조씨는 본래 양주(楊州)의 한양현(漢陽縣)에서 나왔다. 용성군(龍城君 조돈(趙暾))이 동쪽 국경에서 공명을 세우자 자손들이 그대로 용진(龍津)에 거주한 것이 여러 세대라 분묘(墳墓)와 토지가 대부분 안변(安邊)과 연흥(延興) 사이에 많이 있었는데, 국초에 다시 한양 사람이 되었다. 문절공이 족보를 정리한 것이 가정(嘉靖) 융경(隆慶) 연간에 있었으니, 지금은 가정과 융경 때로부터 거의 백여 년 뒤이다. 나의 증조부 증 승지부군(承旨府君 조수곤(趙壽崐))과 종형제 몇몇 사람이 겨우 족보에 기록되었으니,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 종족들 중에 나와 항렬이 같은 사람은 그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와 같겠지마는, 나보다 아래 항렬은 그 고조, 증조가 이전 족보에 미처 기록되지 못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깜깜하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제일 끝의 후손이 비록 본성이 한양이라고 말은 하겠지만 누가 나의 조상이고 몇 대를 전해 왔는지, 누가 우리 파(派)이고 누구의 대에서 나뉜 것인 줄을 어찌 알겠는가. 더군다나 병란이 있은 후로 남아 있는 족보가 거의 없어, 흩어져 사는 먼 자손의 종족 중에 옛 족보가 있는 줄도 모르는 자가 또한 반드시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살아있을 때 족보가 성행한 것을 다행히 한 번 볼 수 있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되면 쉽게 잊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선조를 높이고 존경할 만하다는 것을, 동성지간에 돈독할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참으로 알 수 있겠는가. 세보는 이러한 이유로 제작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황악(黃渥)이 족보를 잘못 만들어 억지로 황정견(黃庭堅)을 끌어들여 형제로 삼은 일이나, 나위(羅威)가 나은(羅隱)에게 뇌물을 보내어 숙부라고 호칭하게 했던 그런 일이 사이에 끼어들면 누가 흑백과 음양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것이 두려워 동지들과 함께 족보를 중수하려 한 지 오래되었다. 지난 정해년(1647, 인조25)에 내가 외람되이 성은을 입어 판서의 자리에 올랐고, 현 영해 부사(寧海府使)인 빈(贇)씨 부자는 근신의 반열에 출입하고 있었고, 고 지사 위한(緯韓)씨는 기로소에 있었고, 고 장령 중려(重呂)ㆍ경력 송년(松年)ㆍ성균 우신(又新)ㆍ인의 휴(休)ㆍ직장 지맹(志孟)ㆍ위솔 비(備)가 다행히도 일시에 모두 도성에 모여 있었기에 마침내 위아래로 족보를 중수하는 일을 의논하니,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이에 서울에 있는 종인 중에 일을 할 수 있는 열 사람을 뽑아 유사로 삼았다. 글을 지어 사방 종인들에게 두루 알린 것과 아무개는 한 도의 명망이 있으니 한 도의 유사를 감당하고 아무개는 한 읍의 명망이 있으니 한 읍의 유사를 감당하게 하여 각각 족계(族系) 단자를 쓰고 각각 공인에게 줄 포목(布木)을 내되 빈부에 따라 차등을 두도록 한 것은 모두 송년씨와 우신씨가 알맞게 헤아려 규모를 계획한 것이었다.
그해를 마치기 전에 사방의 종인들이 족계(族系)와 공인에게 줄 포목을 가지고 모두 모여들었다. 얼마 뒤에 송년씨가 금산 군수(金山郡守)에 제수되고 그 족형 창문(昌門)이 또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나가게 되니 하늘의 도움이 있는 듯하였다. 금산 군수가 한창 재목과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봉화 현감도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족보를 간행하는 일이 마침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내가 어떤 일로 유배를 가 서쪽 변방에 있게 되었는데, 위문하러 온 서쪽 종인들도 대부분 족보 간행 일을 언급하면서 서로 탄식만 할 뿐이었다. 올해 여름 영해공(寧海公 조빈(趙贇))이 편지로 다음과 같이 알려왔다.
“내가 다행히 이곳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또 종인들이 많은 곳입니다. 좌도의 여러 종인들은 모의하지 않아도 족보 간행을 도울 뜻이 있습니다. 또 진사 이주(以周)가 봉화에서 왔는데, 그는 족보를 중수하자는 처음 의논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2개월이 지나 또 편지를 보내어 간행하는 일이 거의 완성되었음을 알리면서 나에게 서문을 써주기를 부탁하고, 또 서문을 청하고자 내게 현 영의정 김공(金公 김육(金堉))을 소개해 달라고 하였으니, 김공이 우리 조씨 소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침내 일어나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영해공이 일을 민첩하게 완수하였다. 거의 폐해진 일을 잠깐 사이에 일으켰으니, 일을 독려하는 수고가 벽돌 옮기는 것의 갑절이었을 것이다. 지위 높은 가문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손이 기궐씨(剞劂氏)의 눈앞에 가지런히 나열되었으니, 반안인(潘安仁 반악(潘岳))이 가풍을 서술한 것이나 육사형(陸士衡 육기(陸機))이 세덕을 진술한 것은 별것 아니어서 꼽기에 부족하니, 우리 종중에 인물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좌씨(左氏)는 ‘선왕(先王)이 땅을 봉해 주고서 그 땅의 이름으로 씨(氏)를 명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소목공(召穆公)이 서주(西周)에서 종족을 규합하였다.’라고 하였고, 뒤에 논하는 자도 ‘종법(宗法)은 치법(治法)과 서로 좌우가 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족보를 중수하는 것은 바로 종족을 규합하는 전통적인 법이다. 이것이 어찌 오로지 일개 성씨의 사사로움이 되겠는가. 그것은 국가의 치도(治道)를 보좌하는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이 《세가(世家)》를 지으면서,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야 수레의 운행이 무궁하다. 군주를 돕는 고굉지신(股肱之臣)이 군주와 짝하였기 때문에 서른 개의 세가를 지은 것이다.’ 하였다.
우리 선조가 여러 성인을 보좌한 공적이 어찌 한나라 세가들보다 못하겠는가. 비록 점점 멀어지고 점점 미미해지는 자손이라도 진실로 아무개 공과 아무개 현신의 후세라면 어찌 족보에 전해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아, 우리가 길에서 만난 사람처럼 서로 바라보는 사람이 애초에는 형제였다. 형제도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몸이었는데, 한 사람이 나뉘어 길에서 만난 사람에 이른 것이다. 소명윤(蘇明允)이 슬퍼한 바를 나 또한 슬퍼한다. 만일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족보를 만드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족보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일을 계기로 더욱 효제(孝悌)의 마음에 힘쓰기를 바란다.”
금상 3년 신묘년(1651) 가을 7월에 양경공 8대손 정헌대부 전 참찬 조경은 삼가 서문을 쓴다.
용주유고 제11권 > 서(序)
《현곡집》서문〔玄谷集序〕
昌黎氏論文章曰。水氣也。言浮物也。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蘇長公亦曰。昌詩不如昌其氣。不佞於是。迺知文章以氣爲主之說古今不可易也。吾宗人玄谷翁生當隆,萬盛際。稟氣固厚。才結髮。喜文章。文非先秦兩漢不讀也。詩非開天大家數不眼之也。其所嚌胾。最深於太史氏及戰國弘辯之說。以助其氣。以資其筆勢。由是名噪一國。人不敢顏行抗其氣。掉鞅藝苑。破的澤宮。名標一頭。殆無虛歲。主司以得失翁爲憂樂。同進之士以莫先翁爲戒。顧坐時命。屢屈公車。至髮種種。乃始得之。然翁則猶然笑之。不少挫其氣。八角磨盤之勇。愈往愈壯。天啓年間。不佞忝入玉署。與翁同儤直。是時翁年過耳順矣。聽其譚論則河決而峽潰也。視其符彩則巋然靈光也。叩其竹素之業則惠施五車。不足當其意也。不佞作而面歎者良久。翁歿十年于茲。嗣子億氏宰南縣。付翁集于剞劂氏。爲不朽計。卷凡九。致禮千里外。徵不佞以序引甚勤。不佞披其編讀之曰。多乎哉。詞賦上規相如。下襲仲宣。飛章走檄。箋誄銘頌。俱有奇氣。其它庭對大策。步驟鼂,董之域。朝天記行。方丈,蓬萊幽討有韻之作。譬如騏驥脫馽。怒氣橫空。率是以往。累百餘篇。未見其氣之餒而竭而躓。翁之於斯術。可謂盡矣。噫。豐城劍氣出古獄而貫牛斗者。始籍昆吾之鑄。而終借雷煥之眼。觀翁之師友之間。亦猶是也。汀皐,溪院諸老先生折輩行許以少友。石洲,東岳,五山車氏以能詩聲最鳴於世。而與翁結爲詩社。磨礱浸灌。婆娑娛嬉。戲咲怒罵。無非養翁之氣而揚翁名也。翁之甚老而疾病也。不佞往造焉。翁已倦於言語。而資治一卷。尙在枕邊。隱隱眉睫間。有好氣象不肯泯者。奇哉奇哉。不佞今僭玄晏之序三都。則舍翁文氣。無他適也。翁弟玄洲公亦以文雄竝峙。翁實昌其氣而及於友于哉。
창려씨론문장왈。수기야。언부물야。수대이물지부자대소필부。소장공역왈。창시불여창기기。불녕어시。내지문장이기위주지설고금불가역야。오종인현곡옹생당륭,만성제。품기고후。재결발。희문장。문비선진량한불독야。시비개천대가수불안지야。기소제자。최심어태사씨급전국홍변지설。이조기기。이자기필세。유시명조일국。인불감안행항기기。도앙예원。파적택궁。명표일두。태무허세。주사이득실옹위우악。동진지사이막선옹위계。고좌시명。루굴공차。지발종종。내시득지。연옹칙유연소지。불소좌기기。팔각마반지용。유왕유장。천계년간。불녕첨입옥서。여옹동포직。시시옹년과이순의。청기담론칙하결이협궤야。시기부채칙규연령광야。고기죽소지업칙혜시오차。불족당기의야。불녕작이면탄자량구。옹몰십년우자。사자억씨재남현。부옹집우기궐씨。위불후계。권범구。치례천리외。징불녕이서인심근。불녕피기편독지왈。다호재。사부상규상여。하습중선。비장주격。전뢰명송。구유기기。기타정대대책。보취조,동지역。조천기행。방장,봉래유토유운지작。비여기기탈칩。노기횡공。솔시이왕。루백여편。미견기기지뇌이갈이지。옹지어사술。가위진의。희。풍성검기출고옥이관우두자。시적곤오지주。이종차뢰환지안。관옹지사우지간。역유시야。정고,계원제로선생절배행허이소우。석주,동악,오산차씨이능시성최명어세。이여옹결위시사。마롱침관。파사오희。희소노매。무비양옹지기이양옹명야。옹지심로이질병야。불녕왕조언。옹이권어언어。이자치일권。상재침변。은은미첩간。유호기상불긍민자。기재기재。불녕금참현안지서삼도。칙사옹문기。무타적야。옹제현주공역이문웅병치。옹실창기기이급어우우재。
창려씨(昌黎氏 한유(韓愈))가 문장에 대해 논하기를,
“물은 기(氣)이고, 말〔言〕은 뜨는 물건이다. 물이 크면 뜨는 물건은 크건 작건 모두 뜬다.”
하였고,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은 또 말하기를,
“시를 창성하게 하는 것이 그 기를 창성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나는 이에 마침내 문장이 기를 위주로 한다는 설은 고금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종인(宗人) 현곡옹은 융경(隆慶)과 만력(萬曆)의 성대한 시대에 태어나 천부적인 기질이 원래 두터웠다. 겨우 머리를 묶을 나이부터 문장을 좋아하여 문(文)은 선진(先秦)ㆍ양한(兩漢)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 시는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연간의 대가(大家)가 아니면 눈에 두지 않았다. 《사기(史記)》와 전국 시대 웅변가의 설을 가장 깊이 있게 읽었는데, 이로써 자신의 기를 북돋우고 필력의 재료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온 나라에 자자하여 사람들이 감히 그의 앞에 서서 그 기에 맞설 수 없었다. 문단에서 재주를 드날리고 시험장에서 솜씨를 발휘하여 이름이 제일 위에 걸린 것이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담당관은 옹을 얻으면 즐거워하고 옹을 얻지 못하면 근심했으며, 같이 진출한 선비들은 옹을 앞선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시운에 걸려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다가 머리가 희끗해져서야 비로소 급제하였다. 그러나 옹은 태연히 웃으며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팔각 맷돌과 같은 용기는 갈수록 더욱 씩씩해졌다.
천계(天啓) 연간에 나는 홍문관에 들어갔다가 옹과 함께 숙직을 서게 되었다. 이때 옹의 나이는 예순이 넘었다. 그의 담론을 들으니 마치 강물이 터지고 협곡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우뚝한 영광전(靈光殿)과 같았다. 공부한 서책에 대해 물어보니 혜시(惠施)의 오거서(五車書)도 그 뜻을 당해내기 부족하였다. 나는 일어나 그 앞에서 한참동안 탄복하였다.
옹이 돌아가신 지 지금 십 년이 지났는데, 장자 억(億)이 남쪽 고을의 현감이 되어 옹의 문집을 간행하여 세상에 길이 전하려고 하니, 모두 9권이다. 천 리 밖에서 예를 갖추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는 것이 매우 부지런하였다. 나는 문집을 펼쳐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훌륭하구나. 사부(詞賦)는 위로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본받고 아래로 중선(仲宣 왕찬(王粲))을 따랐다. 상주문과 격문(檄文), 전(箋), 뇌(誄), 명(銘), 송(訟)은 모두 빼어난 기가 있으며, 그밖에 조정에 아뢴 대책(大策)은 조조(鼂錯)와 동중서(董仲舒)의 수준에 다다랐고, 중국으로 사신 가며 여정을 기록하고 방장산(方丈山)과 봉래산(蓬萊山) 깊은 곳을 유람하며 지은 시는 비유하자면 천리마가 고삐를 벗고 노기가 충천하는 듯하다. 대체로 이후의 수백여 편의 글에서 기가 부족하거나 고갈되거나 꺾이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옹은 이 기술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아, 풍성(豐城)의 검기가 옛 감옥에서 나와 두우(斗牛)를 꿰뚫었으니, 처음에는 곤오산(昆吾山)에서 주조되었지만 결국 뇌환(雷煥)의 눈을 빌렸다. 옹의 사우(師友)들을 보면 이와 마찬가지이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동고(東皐 최립(崔岦)), 계원(溪院) 등 여러 노선생께서 나이를 접어두고 어린 벗으로 인정해주셨고, 석주(石洲 권필(權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오산(五山) 차씨(車氏 차천로(車天輅))는 시에 능하기로 세상에 명성이 매우 높았는데 옹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절차탁마하여 젖어들고 한가로이 노닐며 희롱하고 성내는 것이 모두 옹의 기를 북돋고 옹의 명성을 드날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옹이 몹시 늙어 병이 위독해졌을 때 내가 찾아가 뵈었다. 옹은 이미 말씀하시기 힘들었는데도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권을 항상 베갯머리에 두셨다. 미간에 은은하게 좋은 기상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내가 지금 분수 넘치게 현안(玄晏)이 〈삼도부(三都賦)〉의 서문을 쓴 일을 하려 한다면 옹의 문기(文氣)가 아니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옹의 아우 현주공(玄洲公 조찬한(趙纘韓))도 문호로 나란히 우뚝하니, 옹이 실로 자신의 기를 창성하게 하여 아우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이리라.
[주C-001]현곡집 서문 : 현곡(玄谷)은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의 호이다. 서문의 내용에 따르면 조위한 사후 10년 후에 조위한의 장자 조억(趙億)이 서문을 부탁하였다고 하니 대략 1658년(효종9) 무렵에 쓰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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