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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cunzhen, Yixian, 황산 시 안후이 성 중국 245531
▲왕신부인호씨초상화, 남송 초기인 1131년에 시조인 왕언제가 정착했다. 9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왕씨(汪氏) 집성촌이다. 왕씨 시조와 더불어 휘주와 굉촌에서 각각 자리를 잡은 조상 3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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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X3M+GCH Hongcun Repair And Parts Center, 218省道 Yixian, Huangshan City, Anhui, 중국 245531
9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왕씨(汪氏) 집성촌이다. 리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을 촬영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汪氏宗祠
:黄山市黟县宏村镇宏村风景区乐叙堂, 汪氏家族祭祀祖先和先贤的场所
UNESCO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遗产World Heritage Site. “남부 안후이성 고대 마을–시디춘과 홍춘皖南古村落 西递村, 宏村Ancient Villages in Southern Anhui–Xidi and Hongcun.” 이현(이셴)黟县Yixian. 황산시黄山市Huangshan, 안후이성安徽省Anhui
전날인 5월 8일 23시 15분께 상하이 푸공공항 이미그레션을 통과했다. 불행스럽게 중국 남방항공 기내에는 중국 입국카드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친구 일행 7명은 이미그레션 앞에서 입국신고서를 작성하여야 했다. 23시 05분 상하이남역으로 가는 막차 공항버스를 탈수 없었다. 그래서 2대의 택시로 나누어 타고 이동했다. 한국 돈 5만원 정도 메타로 찍힌다. 4시 30분 항저우행 기차를 기다리며 한국 면세점에서 사온 발렌타인으로 한 잔식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기차 탑승 후 2시간 항저우역에서 항조우 동역으로 이동 후 8시에 황산 북역 가는 기차 탐승하고, 버스로 먼저 굉촌 마을로 이동했다. 마을 버스 터미널에 배낭을 맡기고 점심을 먹고 두 마을 여행을 시작했다.
명 · 청대에 찬란한 휘주(徽州후이저우) 문화가 꽃피웠던 이현(이센)黟县 지방에 ‘명당에 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吉地不可无水)’는 풍수를 따라 마을은 시냇물이 흐르고, 야트막한 산과 들판은 중국 전통가옥과 어우러져 담백한 수묵화를 그려낸 두 고대 마을 시디(서체)춘西递村과 홍춘(굉촌)宏村이 있다. ‘후이저우Huizhou 없이는 장사가 없다’(무휘불성상无徽不成商), ‘상인의 고향’(상고지향商贾之乡)으로 찬사를 받는 후이저우 상인 문화徽商文化를 만들어 낸 장사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 지역 상인들이 귀향하여 이룬 마을은 그들의 집 문과 처마, 대들보에 예술적인 조각을 새기고, 용마루에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높은 담벼락을 둔 고택의 좁은 골목길에 촘촘한 오래된 집들과 독특한 수리 시설을 보존하고 있는 두 마을, 홍춘宏村(굉촌)과 시디西递(서체) 마을은 지난 2000년 UNESCO 세계 문화유산에 “남부 안후이성 고대 마을 – 시디춘과 홍춘”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두 고대 마을은 안후이 성 황산 풍경구의 이현에 있다. 95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시디마을과 1131년에 시작된 홍춘은 명청 시대의 고대 마을들로 중국 후기 봉건 씨족마을 문화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휘주문화의 특성을 구현하고 있다. 휘주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휘주삼조徽州三雕’는 후이저우 스타일의 목조木雕, 석조石雕, 전조砖雕(벽돌) 조각의 세 가지 지역 전통 조각 예술을 말한다. 나무 조각木雕는 인물, 풍경, 꽃, 동물, 물고기와 곤충, 구름문양, 팔보, 고대 문자 대련, 다양한 길조 문양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목각은 가량架梁(대들보), 양탁梁托(들보), 첨조檐条(처마), 루층란판楼层拦板(바닥판), 화판华板, 창문, 난간 등에 사용되어 풍부하고 화려한 조각을 만든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홍춘마을 승지당承志堂의 "어초경독渔樵耕读(어업과 목공, 농경과 독서)", "백자요원소百子闹元宵(백자 등불 만들기)", "곽자의배수郭子仪拜寿(궈쯔이 생일)", 치산雉山 목각등이 있다. 후이저우 석각의 주제는 주로 동식물, 고대 문양, 서예 등을 포함한 부조와 원형 조각이다. 벽돌조각은 일반적으로 녹색 벽돌을 특수한 기술로 구워서 소리가 크고 색상이 순수한 것을 사용하는데, 먼저 잘게 갈아서 여백에 그림의 윤곽을 그려내고 사물의 깊이를 더하는 방식이다. 두 고대 마을은 지난 세기에 상당부분 사라져버린 옛모습들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골목길과 건축 양식과 장식, 그리고 마을 수로 시설 등의 독특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UNESCO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遗产World Heritage Site. “남부 안후이성 고대 마을 – 시디춘과 홍춘 皖南古村落 西递村, 宏村Ancient Villages in Southern Anhui – Xidi and Hongcun.” 이셴黟县Yixian 황산시黄山市 Huangshan, 안후이성安徽省Anhui.
굉촌宏村. 홍촌洪村 Ancient Villages Hongcun.
이셴에서 북쪽으로 11km 떨어진 황산 남서쪽 기슭에 위치한 중국 전통 마을 굉촌. 처음에 ‘홍춘洪村’이라 불렸다. 청나라 건륭제 때 황제의 이름은 홍력洪利이어서, 금기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굉촌으로 바꾸었다. 홍촌洪村으로 더 알려진 마을로 들어 가면 하얀 담장과 푸른 기와 지붕의 고택들이 고요한 호수에 반영을 드리운 영화 속 무대가 시작된다. 2000년 개봉한 리안 감독, 주윤발, 양자경 주연의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 명검으로 이름난 청명검靑冥劍을 다룬 무협 영화 ‘와호장룡 臥虎藏龍’의 촬영지다. 인공 호수를 만들어 배산임수를 만든 마을 안에는 명 · 청대의 140여 가옥이 잘 보존돼 있다. 마을은 소牛의 형상이다. 소의 위胃에 해당하는 월소月沼가 마을의 상징이자 중심이다. 월소는 1402년 명대에 만든 인공호수로, 마을 곳곳으로 흐르는 개울 물을 한곳에 모은 ‘반달 모양의 연못’이다. 연못을 둘러싼 고택이 수면에 드리워진 풍경은 수묵화처럼 단아하다. 남송 소흥시대南宋绍兴(1131~1162 에 시작된 홍춘은 관리와 상인으로 부를 쌓은 왕씨 일가가 고향으로 돌아와 1405년경 풍수지리에 따라, 서쪽 강줄기에서 물을 마을로 끌어와 월소月沼를 만들었다. 홍춘의 고대 건물은 휘식건축徽式建筑으로, 파란색 벽돌과 검은색 타일로 마감한 담장이 가장 큰 특징이다. 마을 주요 볼거리는 1855년 지은 소금상인 왕정귀汪定贵의 화려한 조각들로 유명한 목조주택 승지당承志堂이 대표 볼거리다. 승지당은 웅장하며 절묘한 주거용 집 중 하나로 "민간고궁民间故宫”으로 알려져 있다. 홍춘은 건축 조각, 실내 및 실외 장식 및 기타 측면에서 독특한 지역 문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홍춘의 건물에는 세심하게 조각된 입구 문지방, 우뚝 솟은 말 머리 벽, 지그재그 벽, 다양한 모양의 돌로 조각된 창문(석조루 창石雕漏窗)이다. 휘식徽式 건축 집은 나무 조각, 벽돌 조각, 돌 조각으로 덮여 있음을 강조한다. 말머리 벽은 방화용이고 안뜰 우물 천정天井은 비가 올 때 물을 저장하는 데 사용한다.
명나라 영락 시대에 만든 월소月沼는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랜드마크다. 마을 주변 서천의 물을 9번 휘돌아 흐르게 하여 마을 중앙에 연못을 만들어 물을 저장해 화재 예방과 식수 등으로 사용하였다. 마을 남단의 남호南湖는 명나라 때인 1607년에 만든 아치모양의 인공호수다. 굉촌수천宏村村水圳광촌 슈이젠은 명나라 영락 시대에 지은 총 길이 1,200m가 넘는 돌로 지은 수 미터 너비의 인공 수로로 지형 차이를 이용하여 9 번 휘돌아 마을을 통과하고 월소를 거처 남호로 흘러 드는 물길이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500년 넘은 두 고목古树이 있다. 이 두 나무는 소 모양 마을의 '뿔'이자 행운의 상징으로 여긴다. 후이저우 스타일의 대표주택 승지당承志堂의 목조木雕 "곽자의배수郭子仪拜寿(궈쯔이 생일)"은 꼭 만나야 하는 걸작이다. “凸”字형 집안 구조에 대들보梁架(양가)가 전형적인 명나라 스타일의 왕씨 가문의 사당汪氏宗祠인 낙서당乐叙堂, 전형적인 회족식 안뜰 주택 휘파정원徽派庭院을 가진 Huizhou 개인 정원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알려진 덕의당德义堂, 중앙 난간에 5개의 장수와 행운을 가져 온다는 박쥐蝙蝠(편복)가 새겨져 있고, 부와 행복을 의미하는 주인 침실 윗층 창문에 구리 동전 문양과 창 아래 난간에 새겨진 만자万字 문양이 볼거리인 경덕당景德堂. 전형적인 청나라 주거용 주택으로 월소 북서쪽 끝에 위치한 경수당敬修堂, 민속 예술 소장관으로 후이저우의 역사와 문화를 홍보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집 전체가 육각형으로 육합대순六合大顺을 의미하는 수인당树人堂, 집주인이 안뜰에 희귀한 복숭아나무를 심은 적이 있어 붙여진 도원거桃园居는 문루의 벽돌에는 사자, 흰 코끼리 및 기타 동물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방문한 여러 고택들과 좁은 골목길과 그 옆으로 빠르게 흐르는 수로들 그리고 월소와 남호의 두 인공 호수 오래 기억될 마을이다.
▣남호(南湖)와 월소(月沼) 중간의 홍예교(紅霓橋,무지개다리)▣
◈홍예교(紅霓橋)◈
중국에서 현존하는 것으로는 7세기 초 이춘(李春)에 의해 완성된 지간 37.4m에 이르는 안제교(安濟橋)가 가장 대표적인데, 이 밖에도 중국인들은 변화 있는 여러가지의 홍예교(紅霓橋)를 남겼다.
현존하는 국내의 홍예교(紅霓橋)는 일반형교에 비하여 짧은 기간(15∼18세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시대별 구조적 특성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건설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궁전교량 · 사찰교량 · 일반교량 및 성곽교량으로 구분할 수 있다.
궁전교량 중 현존하는 고대 홍예교(紅霓橋)들은 2경간의 단순교이며, 잘 다듬어진 비교적 큰 크기의 화강석이 사용되어 홍예교(紅霓橋)의 부재수가 적고 반원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교면은 3등분되어 중앙부는 왕의 통로이고 좌우로는 신하들이 통행하였기 때문에, 교폭이 넓고 교면은 비교적 평탄하다.
또한, 궁궐 안에 존재하는 인위적인 수로인 금천 위에 건설되었으므로 하폭이 좁고 경간장도 비교적 짧다. 대표적인 궁전교량인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는 1395년(태조 4)에 준공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된 뒤 대원군에 의하여 실시된 경복궁의 중건과 함께 복원되었다.
조선 초기의 영제교와 대원군에 의하여 복원된 영제교는 2경간 아치교였으나 현재는 길이 13.3m, 너비 10.2m, 경간 2.9m의 단경간 홍예교(紅霓橋)로 남아 있다. 이 밖에도 1411년(태종 11)에 준공된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는 길이 12.5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1.4m, 너비 12.6m, 경간 2.5m의 2경간 홍예교(紅霓橋)이며, 1484년(성종 15)에 준공된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는 길이 9.9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1.4m, 너비 6.6m, 경간 1.9m의 2경간 홍예교(紅霓橋)로서 둘 다 현존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민정신을 통일하고자 많은 사찰이 왕실이나 귀족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따라서, 부처를 모신 성스런 세계를 세속과 구별하기 위하여 중앙에 배치하고 높은 석축을 쌓은 다음 교량을 건설하여 연결하였으므로 사찰교량의 건설은 활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찰교량은 불국사의 교량들로 751년(경덕왕 10) 김대성에 의하여 24년이 걸려 완공된 것이다. 불국사의 교량은 홍예교(紅霓橋)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8개 계단의 청운교, 16개 계단의 백운교, 10개 계단의 연화교는 홍예교(紅霓橋)를 포함하고 있으며, 8개 계단만으로 이루어진 칠보교가 있다.
조선 전기의 불교는 숭유배불정책으로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어느 정도 불교의 중흥이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임진왜란 중 불타 없어진 사찰들이 중건되었다. 흥국사의 홍교(보물, 1972년 지정)는 길이 40m, 너비 4.2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5.7m, 경간 11.3m의 단경간이다.
선암사의 승선교(보물, 1963년 지정)는 상류와 하류에 2개의 홍예교(紅霓橋)가 존재하며, 상류의 홍예교(紅霓橋)는 길이 15.5m, 너비 3.6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4.5m, 경간 9.1m의 단경간이며 하류의 홍예교(紅霓橋)는 길이 22m, 너비 2.9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3.1m, 경간 6.2m의 단경간이다. 건봉사의 홍교 및 송광사의 삼청교(三淸橋) 등도 홍예교(紅霓橋)로 준공되었다.
도로와 교량을 외세침략의 통로로 인식하던 조선 전기와는 다르게 조선 후기에는 도로 개설의 목적이 정치 · 군사적인 기능에서 경제적인 기능으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을 위한 일반교량의 건설이 활발하였다.
이 당시 건설된 홍예교(紅霓橋)로서 전라남도 강진군에 소재한 병영홍교는 길이 27m, 너비 3.4m의 단경간이고, 전라남도 보성군에 소재한 벌교홍교(보물, 1963년 지정)는 길이 27m, 너비 4.3m, 홍예교의 높이 3.9m, 경간 7.8m의 3경간이며, 경상남도 창녕군에 소재한 영산 만년교(보물, 1972년 지정)는 길이 18.3m, 너비 3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4.3m, 경간 8.3m의 단경간이다. 이 밖에도 충청남도 논산시에 소재한 원목다리, 안양의 만안교, 강경의 미내다리, 영산의 유다리 등이 현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성곽교량 중 고대 석조 홍예교(紅霓橋)는 대체로 화성천도 계획 또는 잦은 외침에 대비하고자 하는 국방정책에 의하여 성곽의 일부로서 건설되었으며, 일부 교량은 두 지점을 연결하는 교량 본래의 기능 이외에도 수문기능을 겸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성곽교량인 화홍교는 길이 28m, 너비 8.3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1.3m, 경간 2.6m의 7경간이며, 수원시 장안구 매향동에 위치한 수원성의 일부로 준공되었다.
그리고 전라남도 고흥의 고흥홍교는 상류와 하류에 단경간의 홍예교(紅霓橋)가 있는데 하류의 교량은 너비 2.9m, 홍예교의 높이 3.3m, 경간 6.5m이며, 상류의 교량은 너비 1.9m, 홍예교(紅霓橋)의 높이 2.9m, 경간 4.3m이다. 이 밖에도 강화의 홍교와 북한산성의 일부로서 건설된 오간대수문이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홍예교(紅霓橋)는 긴 역사 동안 건설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많이 건설되고 있는 교량형식이다. 특히, 재료의 발달이 미미하였던 과거에는 대개 인장력에 비하여 압축력에 대한 저항능력이 우수한 암석이 교량의 재료로 쓰였기 때문에 큰 압축력을 받을 수 있는 홍예교(紅霓橋)의 건설이 빈번하였다. 또한, 미관이 아름답고, 형교에 비하여 긴 지간의 교량건설이 가능하였으므로 홍예교(紅霓橋) 건설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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汪氏宗祠是一处建于明代的家族祠堂建筑,属于汪氏家族祭祀祖先和先贤的场所。位于安徽宏村。整个建筑平面呈"凸"字形,面阔24.40米,进深32.70米,脊高10.20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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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西县青天乡汪氏宗祠,80多年前见证国共言和共同抗日https://baike.baidu.com/item/%E6%B1%AA%E6%B0%8F%E5%AE%97%E7%A5%A0/12507577?sefr=sebtn?fromModule=search-result_le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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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徽省 황산(黃山)=
황산시黄山市 Huangshan, 안후이성安徽省Anhui. 굉촌宏村. 홍촌洪村 Ancient Villages Hongcun.
始建于明代的宏村汪氏宗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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简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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汪氏宗祠是一处建于明代的祠堂建筑,属于祭祀祖先和先贤的场所。位于安徽宏村。整个建筑平面呈"凸"字形,面阔24.40米,进深32.70米,脊高10.20米。正厅七开间,中有天井,前有围廊,门旁有抱鼓石。全饲布柱70根,属"满堂柱"建造。正厅四根前檐柱粗大厚实,呈棱形。明间金柱也为梭形。前檐柱及廊柱均有"柱斗科",柱头科之间有"平身科",均为二跳斗拱。前檐斗拱比廊檐斗拱粗大,柱头科16朵,平身科18朵,转角铺作"小拱头"。曲梁与柱子衔接处均有丁头拱承托,拱眼如单幅云。斗拱、梁架、梭柱等镂刻精细,体现了古代劳动人民的才能和和艺术创造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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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ory.kakao.com/_jAh9C8/GNPVatEY0fA(▼조동윤씨)
황산과 홍춘2 - 황산에서 리시엔을 거쳐 옛마을 홍춘에 도착해 연못을 건너가다!
여행 4일째인 10월 22일 黃山(황산) 의 베이하이 삔관 北海宾馆 에서 일어나 일출 을 보고, 배낭을 메고는 시신봉 을 거쳐 신백아령에서 케이블카 를 타고 운곡사 로 내려옵니다.
버스로 황산풍경구 탕커우 黄山风景区 汤口(탕구) 환청중씬 换乘中心(환승중심) 터미널에 도착해 황산백천호텔 黃山百川大酒店 에 체크인 하고 배낭을 넣고는 터미널로 돌아옵니다.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리시엔 黟县(이현) 행 버스를 타고 한시간을 달려서는 종점 인리시엔에 도착해서는 마을 버스로 갈아타고 30분만에 홍춘 (宏村 굉촌) 마을에 내립니다.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이 가는 오른쪽 길을 150m 쯤 가니 매표소가 나오기로 표를 끊는데 성인은 104원, 60세 이상 노인과 학생은 52원 그리고 70세 이상은 무료 입니다.
200원을 내려다가 50% 할인 이 되지 싶어 여권까지 내보이는건 귀찮은지라 주민등록증과 함께 100원만 건네니..... 입장권 표와 함께 148원을 거슬러 줍니다! 뭐야? 직원이 방금 내가 200원을 들고 있는 것을 본 탓에 그만 착각했나 보네요?
순간의 갈등..... 100원을 어떻게 한다? 망설이다가 한국인의 자존심을 생각해 100원(1만 9천원)을 되돌려 주니 직원이 어리둥절 합니다? 돈을 돌려준데는 또 옛날 "베트남에서 지폐로 사기" 당한게 떠올랐던 것이니....
후에시 교외 응우옌 왕조 카이딘 황제릉에 들어가는데 입장료는 1인당 5만5천동(3천300원)이니 4명은 22만동이라 우선 10만동 지폐 2장을 건네고 나머지 2만동을 잔돈으로 줄까? 아니면 10만동을 주고 거스럼 돈을 받을까? 주저하자 그 사이 여직원이 뭐라고 하는데....
결심하고 잔돈으로 2만동을 주니 아가씨가 다시 뭐라고 하는데 보니 손에 10만동 지폐 두장이 아닌 한장만 들고 있는게 아닌가? 귀신이 곡할 일입니다!!! 아니면 내가 원래 10만동 지폐 한장 밖에 안준 걸까? 밤에 호텔에서 결산을 하니 10만동 지폐 한 장(6천원)이 모자랍니다!
조금후 왕궁의 미술관 에서 10만동 지폐 를 건네고 잔돈을 기다리는데 여직원이 뭐라기에 보니 1만동 지폐 를 쥐고 있는게 아닌가요??? 원래 10만동은 초록색 이고 1만동은 붉은색 이라 구별이 되는데 여직원이 내보이는 1만동은 특이하게도 붉은색이 아닌...
이 1만동 지폐는 푸른색 으로 10만동 보다 크기만 작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바꿔치기 한 걸까요? 아니면 그전에 박물관에서 10만동을 냈더니 잔돈이 없다고 해서 되돌려 받았었는데 그때 바꿔치기 당한걸까요? 이런 엣날 생각에 100원을 되돌려 줍니다!
이날 밤에 황산의 호텔에 돌아와 계산 을 하는데 100원이 모자라는 것 이 아닌가요? 이런 드엉신.... 땅을 쳤더니 나중에 보니 바지 주머니에서 100원이 나오네요??? 멍~~~
여긴 마을 앞에 가로놓인 연못 난후 (南湖 남호)인데 연못 한 복판으로 가로질러 놓인 홍예교가 아름다운데 연꽃도 볼만합니다. 또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그리는 젊은 처녀들이 많이 보여.... 어깨 너머로 그림 구경하느라 심심하지가 않네요?
그런데 지금 12시인데 가장 큰 문제는 여기 홍춘에서 다시 황산 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리시엔 黟县(이현) 에서는 막차가 13시 30분이라? 그러니 버스가 없다면 13시 30분 버스를 타려면 13시 10분 전에는 리시엔으로 출발해야....
12시 50분에 리시엔으로 되돌아 가는 차를 타자면 관광 시간은 겨우 50분 정도이네요? 버스가 있는지 확인이 급하니 우리가 들어온 옆문이 아니라 대형 주차장이 있는 정문으로 나가면서 표를 받는 직원이 보이길래 황산행 버스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없을거라고 말하면서도 스마트폰 을 꺼내 바이두에선가 어디 한참 검색을 하더니 한글로 변환해 보여주며 없으니 택시를 타라며 옆에 앉은 사람(택시기사?)을 소개해 주는데.... 아니 여기서 황산은 차로 한시간 거리인데 얼마나 달라고???
해서 나중에 다시 보자며 발길을 돌려 이미 연못을 건너간 마눌을 뒤쫓아 갑니다. 사실 버스가 없고 리시엔 버스마저 놓친다면 황산시(툰시) 나 혹은 황산고속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서 다시 다른 버스로 환승하면 되는데 이때는 미처 몰랐으니?
연못에는 연꽃도 예쁘고 그 위에 놓인 홍예교 다리며 흰색 고풍스러운 집들이 예쁘건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고 마눌을 찾기 바쁩니다.
다시 마눌을 만나서는 골목길로 들어가니 南湖書院(남호서원)인데.... 많은 대학생들이 관람을 하고 있어 헤치고 지나느라 마음이 바쁩니다.
그러고는 다시 골목으로 나와 수로가 흐르는 좁은 길 을 걷는데.... 옛날풍의 치마를 입은 처녀들이 여러명 앞서 가기에 궁금해 집니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원형 연못 月沼(월소)가 있는 넓은 광장 인데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좋은 위치를 잡아 사진 을 찍느라 열심이네요?
▼여기 연못가에 둥글고 납작한 바구니에 콩을 말리는 풍경이 이색적인데.... 원래 일상 생활 인지 아님 관광객 보라고 그런지 분간하기 쉽지가 않네요?
그러고는 아주 고풍스러운 솟을 대문 집으로 들어가는데 문패가 “汪氏宗祠(왕씨종사)” 라 그럼 종갓집인가? 아님 사당....(汪氏宗祠:사당)
집에 들어서니 건너편 벽에 세사람의 초상화가 큼직하게 모셔져 있고 방의 이름을 보자니 樂叙堂(낙서당) 이라.... 무어 음악을 즐긴다는 뜻은 아닐테고....
월소에 비친 왕씨종사(汪氏宗祠)가 데칼코마니다. 명나라 말기인 만력제 시대에 건축했다. 3중 처마로 꾸민 문루가 화려한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처마 끝마다 오어(鰲魚)와 용두(龍頭)가 휘날리고 있다. 성은을 받아 주홍색으로 쓴 은영(恩榮)에 두 마리 용이 구슬을 빼앗는 쌍룡창주(雙龍?珠)를 조각했다. 기린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 봉황이 마주 보고 있다. 바로 아래에 세덕발상(世德發祥)이라 적었다. 대대로 덕을 쌓아 좋은 일이 생기라는 말이다. 사자가 수놓은 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도 있다. 길상을 뜻하는 조각으로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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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촌 왕씨종사 낙서당에 호씨 부인 초상화가 걸려 있다. ⓒ최종명
당호는 낙서당(樂叙堂)이다. 왕씨 시조와 더불어 휘주와 굉촌에서 각각 자리를 잡은 조상 3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문중에서는 온 가족을 이끌고 이주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역사다. 사당을 건축할 당시 가장 부유했던 왕신이 비용의 절반 이상을 출자했다. 서체에서 시집온 왕신의 부인 호씨(胡氏)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자금을 많이 낸 공로 때문이 아니다. 놀랍게도 소 부위를 착안해 마을을 설계한 장본인이 호씨부인이다. 마을의 원형을 이해하고 지리학을 원용하는 지혜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유명 관광지가 됐으니 추앙을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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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촌 승지당의 상자문. ⓒ최종명
굉촌을 대표하는 저택은 승지당(承志堂)이다. 월소 서쪽 문을 지나 북쪽으로 2~3분 거리다. 염상인 왕정귀의 저택으로 청나라 함풍제 시대인 1855년에 건축했다. 작은 중문과 양쪽 쪽문을 두고 목조로 화사하게 꾸민 공간이 나온다. 이를 상자문(商字門)이라 부른다. 휘주 건축이 지닌 특징 중 하나로 상(商)을 연상시킨다는 말이다. 휘주 상인의 대담한 자신감도 내포하고 있다. 평민이나 고관대작이나 문에 해당하는 입(口)으로 오가는 사람은 모두 상인 아래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휘주 상인은 재력과 권위를 두루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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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촌 승지당의 백자료원소도 일부.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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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당의 기둥 사이 통통한 들보인 헌량과 탱공 .ⓒ최종명
목조는 20여 명의 목공이 4년에 걸쳐 작업했다. 비용만 60만 량이 소모됐다고 한다. 표면에 금가루를 칠해 찬란했다. 지금도 흔적이 남아서 여느 목조에 비해 고품격이다. 색이 많이 바랬지만, 자부심만큼이나 화려하게 꾸몄다. 마름모꼴 파란색 바탕에 금색으로 쓴 복(福) 자가 눈길을 끈다. 바로 위에 100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조각이 있는데 백자료원소도(百子鬧元宵圖)다. 정월 대보름날인 원소절에 시끄럽게 노는 모습이다. 용등(龍燈), 징, 북, 폭죽, 장대로 걷는 고교(高?) 등 놀이기구도 다양하다. 기둥 사이의 작고 통통한 들보를 헌량(軒梁)이라 한다. 양쪽에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화려하기 그지 없다. 기둥 윗부분에서 대들보 받침을 하는 탱공(撑?)이 많다. 모두가 상자문의 품위를 드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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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촌 승지당의 당숙종연관도.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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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당 당숙종연관도의 일부. 귀를 후비는 관원도 있다. ⓒ최종명
승지당 창문과 처마, 대들보 곳곳에 빠짐없이 조형 예술을 남겨 놓았다. 2m 길이 중간에 50cm만큼 조각도가 파고 들어간 대들보가 있다. 새긴 내용은 당숙종연관도(唐肅宗宴官圖)다. 당나라 숙종 시대 연회를 담당하는 관원 30여 명이 등장한다. 모두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팔선(八仙) 탁자가 등장하며 거문고를 튕기거나 바둑을 둔다. 책 읽고 그림 그리는 모습도 보인다. 흥미로운 장면은 양쪽 귀퉁이에 있다. 왼쪽에 귀를 후비는 모습과 오른쪽에 화로로 물 끓이는 모습이다. 허드렛일을 하는 관리의 일상까지 속속들이 드러난다. 궁중 물건이나 동식물도 있고 인물의 동작도 생기발랄하며 보존 상태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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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굉촌 승지당의 곽자의상수도.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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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전 동책의 강남목조관에 있는 '곽자의 축수' 대들보. ⓒ최종명
곽자의상수도(郭子儀上壽圖)도 눈길을 끈다. 곽자의는 당나라 시대 안사의 난을 평정한 장군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다복의 대명사로 꼽히는데 아들이 7명이고 사위가 8명이다. 장수를 축하하는 만찬을 열었으니 어찌 역사에 남지 않았겠는가? 아들과 사위가 모두 참가해 축복을 비는 모습이 부럽다. 곽자의는 일평생 큰 복을 누렸고 관운도 좋았으며 85세까지 장수했다. 승지당 주인도 곽자의가 부러웠다. 강남 수향인 우전(烏?) 동책(東柵)에 가면 목조관이 있다. 곽자의의 축수(祝壽) 장면을 새긴 대들보가 전시돼 있다. 곽자의와 부인, 아들과 사위, 심부름하는 여자아이 넷, 조정 대신 셋까지 모두 24명이 등장한다. 보고 있으면 그저 감동의 물결이다. 중국인 모두 곽자의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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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굉촌의 월소 호반과 홍등이 불을 밝힌 야경. ⓒ최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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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굉촌 월소에서 마신 휘주 술. ⓒ최종명
어둠이 시작되면 월소로 간다. 마을 안에 있는 객잔을 먼저 잡는다. 휘주 분위기를 연출한 객잔이 많다. 성수기가 아니면 고르고 골라 하룻밤을 보내도 좋다. 요즘은 미리 인터넷에서 사진을 살펴본 후 예약해도 된다. 숙소를 정했으면 월소 옆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안후이성의 약칭이 완(?)이다. 완주 한 병 들고 가서 잔을 따른다. 야경에 취하면 시인이 된다. 이백을 불러내 한잔하자고 ‘장진주(將進酒)’를 읊조린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은 마땅히 마음껏 즐거워야 하느니
莫使金樽空對月 금 술잔 비운 채로 달을 바라보지 말라
시인 이백의 '장진주'
휘주문화를 되새김질한다. 소박하고도 화려하다. 담백하면서도 강렬하다. 상인인데 고관대작도 떠오른다. 복록수로 범벅인 문화도 등장한다. 물을 복이라 한다. 무엇보다 참 좋은 여행이다. 권주가 불러주는 이 없어도 스스로 잔을 들게 된다. 금잔이면 어떻고 유리잔이면 어떤가? 밤 깊어 검게 변한 호수도 홍등의 향연에 취하고 있다. 소리 없이 녹는 백주에 비몽사몽 된다 해도 쉽사리 자리를 떠나기 어렵다.
여기 홍춘(宏村 굉촌)은 안휘성의 리시엔(이현)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황산 남서쪽 기슭에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 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송나라 때 마을이 처음 건설되었고 현재와 같은 구조를 갖추게된건 15세기 명나라 라는데 “계획마을”인 이곳은 소 모양 으로 만들어졌다 해서 우형촌(牛形村) 이라고도 합니다.
인근의 언덕이 소의 머리 에 해당되고 언덕 위의 나무가 소의 뿔 주택가가 소의 몸통, 하천 위에 네 개의 다리가 소의 다리 에 해당한다나요?
하천에서 물을 끌어온 인공 호수 난후(南湖 남호)는 소의 위 에 해당하며, 마을을 구불 구불 관통하는 인공수로는 소의 장 을 본 땄다고 합니다.
인공수로는 마을 안의 모든 집을 거치게 설계 되었는데 이는 용수 문제뿐 아니라 화재의 위험까지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홍춘에는 현재 명청시대 전통 건축물 150여 채가 남아 있는데.... 중국 곳곳의 전통건축물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것들 입니다.
대표적인 청즈탕 (承志堂 승지당)은 호화로운 목조건축물로 과거 대상인 저택인데 건물 곳곳의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 이며 내부에는 작은 박물관 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또 연못 月沼(월소)와 乐敍堂(악서당) 사당이 볼만한데....... 이 마을 전체가 2,000년 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습니다.
안휘성은 문방사우 고향으로 붓글씨 쓰는 종이 화선지는 안휘성 선주의 것을 최고로 치고 묵도 안휘의 묵을 상품으로 알아주며 죽간에 글씨 새긴 것이 기념이 된다고 합니다.
마을의 집들은 한결같이 고풍스러운데 주윤발과 장쯔이가 주연한 영화 와호장용의 촬영지 홍예교 다리가 있고..... 석양 무렵에는 더욱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안 감독은 “와호장룡”을 찍을때 최고 무술영화를 목표로 삼았는데 그 결과물의 예술적 완성도와 성공을 보면 목표를 이룬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각본가 제임스 샤머스는 중국의 민담을 참고해 액션, 판타지, 로맨스를 섞었고 일류 배우 외에 무술계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원화평을 무술감독으로 선택합니다.
원화평은 중국 무협영화에서 얻은 영감으로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와이어로 배우들을 자유자재로 끌어올려 나무 위에서도 싸우게 하고 돌을 밟듯 물 위를 뛰어다니고...
벽으로 달려 올라가고 공중에서도 충돌하게 만들었는데 이런 공중 발레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의 관객들에게 달빛 아래서 마을의 지붕 위를 달리는 추격장면은 매혹적이었습니다.
주윤발과 양자경 그리고 신예 장지이는 각자 역할에 필요한 초자연적 신체 동작들을 가뿐히 소화 했으며 그들의 연기도 인상적인 액션장면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와호장룡”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인물 표현과 플롯을 중시했기 때문이니 두가지 모두 연기보다는 격투장면을 강조해온 전형적인 무술영화에서 등한시 되어온 것이라?
주윤발은 도둑맞은 청룡검을 찾으려는 무사이며 예전에 사랑한 양자경이 그 일을 돕는데 장지이가 검을 훔친 일에는 명예와 복수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감독은 중력을 무시하는 스턴트와 사이사이 터져 나오는 독창적인 폭력 장면에서도 세 중심 인물에 대한 초점 을 한시도 놓치지 않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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