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한묘 ㅡ 문산읍 장산리 산75-23 : 네이버 블로그
조위한묘 ㅡ 문산읍 장산리 산75-23
조위한은 박세채 외조부이다ㅡ 조유한, 조위한, 조찬한 3형제가 모두 유명하다ㅡ 그중에도 조위한은 1592년...
blog.naver.com
조위한(趙緯韓.1567.명종 22∼1649.인조 27)
조선 인조(仁祖) 때 문신.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본관은 한양(漢陽). 참판 방언(邦彦)의 증손. 1601년(선조 34)에 사마(司馬),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613년(rthkdgorns 5)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의 무옥(誣獄)에 연좌하여 체포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사성(司成)을 거쳐 장령(掌令)ㆍ집의(執義)가 되어 호당(湖當)에 선출되었고, 이괄의 난(1624)ㆍ정묘호란(1627)에 참전하였다가 공조참판이 되었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본관은 한양(漢陽). 임진왜란 때에는 김덕령(金德齡)을 따라 종군하였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3년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구금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되어 사성ㆍ장령ㆍ집의에 오르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참여하였고, 정묘ㆍ병자호란 때에도 출전하였다. 동부승지ㆍ직제학ㆍ공조참판을 지내고 80세에 자헌대부에 올라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민생고를 그린 <유민탄(流民嘆)>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그 내력만이 <순오지(旬五志)>에 적혀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참판 방언(邦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옥(玉)이고, 아버지는 증판서 양정(揚庭)이며, 어머니는 한응성(韓應星)의 딸이다. 유한(維韓)의 아우이며 찬한(纘韓)의 형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김덕령(金德齡)을 따라 종군하였으며, 1601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주부(主簿)ㆍ감찰 등을 지냈다. 1613년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의 무옥(誣獄)에 연좌되어 여러 조신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상의원정을 거쳐 장령ㆍ집의에 제수되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 뒤 양양군수가 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에 참여, 서울을 지켰으며, 정묘ㆍ병자호란 때에도 출전, 난이 끝난 뒤에 군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 뒤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며, 여러 차례 연석(筵席)에 나가서는 권신들의 실정을 계옥(啓沃)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ㆍ직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공조참판에 이르렀으며, 80세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해학(諧謔)에도 능하였다.
【소설】<최척전(崔陟傳)>
【저서】<유민탄(流民嘆)> <현곡집(玄谷集)>
[玄谷 趙緯韓 散文의 양상과 글쓰기 방식의 지향]
Aspects of Hyun-gok Jo Wihan’s Prose and Aim of the Writing Style
한의숭 /Han, Eui-Soong 전남대학교
초록
본고는 玄谷 趙緯韓의 문집에 수록된 산문의 양상과 의미를 살펴본 것에 해당된다. 현곡은 당대에 문장력을 인정받았고, 이는 문집인 『玄谷集』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현곡은 문집보다 한문소설인 <崔陟傳>으로 주목받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룬다. 본고는 전통시대 문인의 학문적 정수인 문집을 통해 접근하는 것으로, 조위한의 문집인 『현곡집』을 대상으로 현곡의 문학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현곡집』을 살펴보면 漢詩가 450제에 이를 정도로 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散文은 30여편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많지 않다. 본고는 현곡의 한시와 산문 전반에 걸친 본격적인 연구가 일천한 상황에서 현곡 문학에 접근하기 위한 일환으로 산문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현곡집』의 산문은 권11∼14에 수록되어 있는데, ‘敎書’, ‘批答’, ‘疏’, ‘檄’, ‘策題’, ‘序’, ‘記’, ‘跋’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祭文이 10편으로 가장 많은 편이다. 『현곡집』에 수록된 산문의 수가 많지 않고 문예적 성향이 두드러진 작품 또한 적은 관계로 현곡 산문의 특징을 심층적으로 논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현곡의 산문이 지닌 특장은 현곡의 생애와 관련지어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현곡의 산문 가운데 策問에서는 당대 정치의 폐단과 구제의 방안으로 ‘誠’을 통해 虛實의 문제를 논하였고, <叢桂堂集敍>에서는 ‘隱逸君子’에 대한 지향을 드러냈으며, <題浴川酬唱卷後>에서는 궁벽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을 표출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현곡은 산문을 통해 삶에 대한 허무와 불안의 정서를 노정함과 동시에 정치 현실을 진단하고 자신의 경세 의지를 펼치는 것으로 산문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게 확인된다. 본고는 현곡의 문학에 접근하기 위한 일환으로 산문을 주목한 것이다. 현곡의 산문은 작품 수가 많지 않기에 현곡의 문학을 대표하기는 어려우나, 16∼7세기 한문학에서 조위한이 지닌 위상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현곡집』을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본고는 조위한 문학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향후 현곡 문학의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문집이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This article is an examination of the form and meaning of the prose in the collected works of Hyun-gok Jo Wihan. Hyun-gok was recognized for his literary skills in his time, and this can be seen in the works included in his literary collection, 『Hyun-gok-jip』(玄谷集). However, Hyun-gok has garnered more attention as a Korean novel, 『Choi Chok-jeon』(崔陟傳), than as a literary collection, and research on it has become mainstream.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literature of Hyun-gok through the lens of a literary collection, which is the scholarly quintessence of the literati of the traditional period. There are more than 450 poems in the 『Hyun-gok-jip』(玄谷集), but the number of prose poems is small, only about 30. In the absence of a comprehensive study of both the poetry and prose of Hyun-gok, this book attempts to shed light on the prose as part of an approach to Hyun-gok literature. The prose of 『Hyun-gok-jip』(玄谷集) is contained in volumes 11 through 14, which consist of ‘Gyoseo’(敎書), ‘Bidap’(批答), ‘So’(疏), ‘Gyok’(檄), ‘Checkje’(策題), ‘Seo’(序), ‘Gi’(記) and ‘Val’(跋) and have the largest number of epigraphs 10. Since the number of prose in the 『Hyun-gok-jip』(玄谷集) is small and the number of works with a strong literary tendency is small, it is somewhat difficult to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prose in depth. However, the characteristics of Hyun-gok's prose can be examined in relation to Hyun-gok's life. In his prose, Hyun-gok discusses the problems of truth and false in ‘Seong’(誠) as a way to abolish and remedy the politics of the time, reveals his orientation toward ‘EunIl-gunja’(隱逸君子) in 『Chonggyedangjipseo』(叢桂堂集序) and expresses his regret for his own life in 『Jeyokceonsu- changgeonhu』(題浴川酬唱卷後). In other words, Hyun-gok appropriately uses prose to diagnose the political reality and express his consciousness of the Economy, while exploring the emotions of futility and fear of life through prose. This paper focuses on prose as a way of approaching the literature of Hyun-gok. Although the prose works of Hyun-gok are not representative of the literature of Hyun-gok due to the small number of works, it is necessary to focus on the Hyun-gok collections in order to discuss the status of Jo Wihan in Korean literature from the sixteenth to the seventeenth centuries. As part of an attempt to seriously study the literature of Jo Wihan, this paper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the collection in identifying the characteristics of Hyun-gok's literature in the future.
[현곡 조위한 산문의 주요 특징]
◐策問: 당대 정치의 폐단과 구제의 방안을 논하며, '성'을 통해 허실의 문제를 분석하는 등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드러냅니다.
<叢桂堂集敍>:
'은일군자'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며,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망과 이상을 보여줍니다.
<題浴川酬唱卷後>:
궁벽한 삶에 대한 회한을 표출하며, 개인의 고뇌와 삶의 무게를 드러냅니다.
◐유민탄 流民歎 : 조선 광해군 때에, 조위한(趙緯韓)이 지은 가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읊은 것으로, 가사는 전하지 않고 유래만이 ≪순오지≫에 전한다. ‘현곡 조위한이 지은 것으로 어두운 조정 정령(政令)의 번거로움과 열읍(列邑)들의 세금징수의 가혹함을 자세히 서술했으니 정협의 〈유민도〉와 서로 표리(表裏)가 됨직하다’라고 평설하였다. 또한 홍만종은 송시열이 찬한 조위한의 ‘신도비명’에도 조위한이 지은 〈유민탄〉이란 가사에는 백성들의 고통과 집안이 무너지는 슬픔을 그대로 기술했는데, 임금이 이를 찾아내라 했으나 찾아내지 못했고 훗날 광해실록을 수찬할 때 자신이 그것을 보고 사실로 믿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로 보면 조위한과 같은 조선조 사대부들은 불쌍한 백성들을 걱정하며 그들을 보살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애민사상의 소유자들이었고, 부조리한 정국을 고발하며 이를 광정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대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조의 사회문화가 세계적이었다는 문화사가들의 평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 전북지방에서 그러한 훌륭한 사대부들 예컨대 신경준, 장복겸, 조위한 등이 가렴주구의 무자비한 세곡징수과 부조리한 정정(政情)을 바로 잡아야만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나라가 된다는 상소를 하는 한편, 이를 자신의 작품에 담아 많은 저술활동을 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다만 조위한의 가사 〈유민탄〉이 실전되어 안타깝지만, 어무적이란 사람이 지은 동명이작의 〈유민탄〉이란 한시를 보면 이 작품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蒼生難蒼生難(창생난창생난)백성의 어려움이여, 백성의 어려움이여!
年貧爾無食(년빈이무식)흉년들어 너희들은 먹을 것이 없구나.
我有濟爾心(아유제이심)나는 너희들을 구제할 마음 있어도
而無濟爾力(이무제이력)너희들을 구제할 힘이 없도다.
蒼生苦蒼生苦(창생고창생고)백성의 괴로움이여, 백성의 괴로움이여!
天寒爾無衾(천한이무금)날씨가 추워도 너희들에게는 덮을 이불이 없구나.
彼有濟爾力(피유제이력)저들은 너희들을 구제할 힘이 있어도
而無濟爾心(이무제이) 너희들을 구제할 마음이 없구나.
願回小人腹(원회소인복)원컨대 소인의 마음을 돌려서
暫爲君子慮(잠위군자려)잠시 군자를 위하여 염려를 해보노라.
暫借君子耳(잠차군자이)잠시 군자의 귀를 빌려
試聽小民語(시청소민어)백성의 말을 시험 삼아 들어보라.
小民有語君不知(소민유어군부지)백성이 고통의 말을 해도 임금은 모르고
今歲蒼生皆失所(금세창생개실소)오늘날 백성들이 모두 살 곳을 잃었구나.
北關雖下憂民詔(북관수하우민조)대궐에서 임금이 비록 근심하는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도
州縣傳看一虛紙(주현전간일허지)지방 관청에서 받아보는 것은 헛된 종이 한 조각
特遣京官問民瘼(특견경관문민막)특별히 서울 관리 보내어 백성의 고통 물으려
馹騎日馳三百里(일기일치삼백이)역마로 날마다 삼백 리를 달려도
吾民無力出門限(오민무력출문한)우리 백성들은 기운이 없어 문을 나서는데도 한계가 있다.
何暇面陳心內事(하가면진심내사)어느 겨를에 면전에서 마음 속 일을 펼쳐내겠소?
縱使一郡一京官(종사일군일경관)한 고을에 서울 관리 한 사람씩 보내온다고 해도
京官無耳民無口(경관무이민무구)서울 관리는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네.
不如喚起汲淮陽(불여환기급회양)급회양을 불러일으킴만 같지 못하니
未死孑遺猶可求(미사혈유유가구)죽지 못해 외롭게 남은 백성 오히려 구해봄이 좋겠구나.
억만창생들은 입을 옷가지 하나 없이 헐벗고, 아무리 추워도 덮을 이불 하나 없이 힘들게 살아가는데 구제할 힘이 있는 나라의 관료들은 탐관오리들뿐이라는 부조리한 참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고발한 시이다. 어무적(魚無迹)이라는 작자도 실명을 은익한 사대부일 것으로 보인다. 행동이 기민하지 못한 ‘어물쩍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어무적’이라고 지은 필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안목을 지닌 사대부들의 작품들, 예컨대 장복겸이 임금께 올린 ‘구폐소’와 연시조 〈고산별곡〉, 장현경의 가사 〈사미인가〉,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과 가사 〈유민탄〉, 신경준의 〈시칙〉 등은 우리 한국문학사상 보배로운 국문학적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조 사대부들의 비판적 지성의 사회문화로 인해 조선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상위그룹에 오를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도 더욱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토록 훌륭한 사대부들을 전북이 낳고 또 그런 사대부들이 이 고장에서 살아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도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출처: https://sugisa.tistory.com/15720106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문장력: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으며, 문장력과 함께 그의 글쓰기 방식은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줍니다.
◐지향: 당대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현실 탈출을 동시에 추구하며, 개인의 고뇌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글쓰기를 선보입니다.
◐글쓰기 방식:
◐현실 비판: 당대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드러냅니다.
◐이상 추구: 은일군자'에 대한 지향을 통해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상을 표출합니다.
◐개인적 고뇌: 궁벽한 삶에 대한 회한을 통해 개인의 고뇌와 삶의 무게를 드러냅니다.
◐깊이 있는 문장: 뛰어난 문장력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깊이 있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곡 조위한 산문의 의미: 현곡 조위한의 산문은 당대 사회의 현실과 개인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담고 있으며,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글쓰기 방식은 한국 고전문학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漢陽人문화유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년04월29일 은천군 따님이신 숙부인전주(완산)이씨 묘역 방문 (0) | 2025.05.28 |
---|---|
■始祖 中書公 諱之壽, 二世祖 摠管公, 三世祖 副元帥公, 四世祖 龍城府阮君, 五世祖 襄烈公壇碑文■ (0) | 2025.05.25 |
★한양조씨대종회 100년사 발자취(1908년~2008년)★ (0) | 2025.05.15 |
《 모계공(慕溪公) 조강(趙綱) 한글 묘비 제막식 안내 》 (0) | 2025.05.10 |
通訓大夫行敦山郡守兼 慶州鎭兵馬同僉節制使 漢陽趙公諱瑋 配淑人完山李氏之墓(태종 증손녀 숙인 완산이씨) (0) | 2025.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