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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陶祖 이삼평(李參平)公像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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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요(李参平窯)홈페이지 http://toso-lesanpei.com/index.html

▣陶祖 이삼평(李參平)公像▣

 

 

 

 

 

 

 

 

 

 

 

 

 

 

 

 

 

 

 

 

 

 

 

 

 

 

 

 

 

 

 

 

 

도산신사(陶山神社) : 1917년 이삼평을 도조로 추앙하고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를 세우도록 추진한 일본도조송덕회(日本陶祖頌德會) 회장 후카가와 로쿠스케 (深川六助) : “심천육조옹지상深川六助翁之像)”의 동상도 도산신사 경내 아래쪽 데미즈야(洗手帶, 手水舎, temizuya) 왼쪽에 있다.

 

 

 

 

深川六助

 

 

 

 

 

 

 

陶 祖 李 參 平 

도자기의 시조 이삼평 비

 

我我陶祖李參平公以下朝鮮忠淸道金江出身である

우리 도자기의 시조 이삼평공(이하 공으로 씀)은 조선 충청도 금강 출신이다.

 

文祿元年(1592)豊臣秀吉公文祿肥前藩從軍した

1592년 도요또미히데요시공이 벌인 임진왜란 때 히젠번은 종군했다.

 

この非常協力した

이 때 공은 우리 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慶長元年(1596)肥前藩祖鍋島直茂公歸陣れて歸化させた

1596년 히젠번조인 나베시마나오시게공이 귀국시 공을 데리고 돌아와 귀화시켰다.

 

その家臣多久安順面倒せた

그 뒤 가신 다꾸야스요리에게 보살피도록 맡겼다.

 

金江出身であったから小城郡多久村まわせ磁器製造技術っていた陶業めたがつからなかった

공은 금강 출신이므로 가나가에라는 성을 주고 오기군 다꾸촌에 살게 하였고 자기제조기술을 갖고 있던 공은 도자기 굽기를 시작했지만 좋은 흙을 찾을 수 없었다.

 

元和年間(1615-24)松浦郡有田鄕亂橋同地泉山最良磁石發見した

1615-24년 마쓰우라군 아리따향 미다레바시에 왔고 같은 곳 이즈미야마에서 가장 좋은 고령토를 발견했다.

 

同地白川移住めて純白磁器製造成功した

같은 곳 시라까와로 이주하여 처음으로 순백의 자기제조를 성공했다 .

 

これはにおける白磁器製造めである

이는 바로 우리 나라에 있어 백자제조의 첫걸음이다.

 

以來その製法繼承して今日有田燒繁榮がっている

이후 그 제법을 계승하여 오늘날 아리따야끼의 번영으로 이어져 있다.

 

うに有田陶祖であることは勿論のこと國窯業界大恩人である

생각컨데 공은 우리 아리따의 도자기 시조인 것은 물론이고 우리 나라 요업계의 대은인이다.

 

現在陶磁器關係從事するその恩惠かっているその偉業をたたえここに

현재 도자기관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은혜에 하고 있고 그 위업을 기려 여기에 삼가 제를 지낸다.

 

 

▣아리타(有田) 야끼(燒) [조선도공 이삼평]▣

임진왜란 정유재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역사에서는흔히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한다. 선진문물의 약탈을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도공만이 아니었다. 금공(金工) 석공(石工) 목공(木工)은 물론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한국만 갖고 있었다. 조선 백자에 군침을 흘리고 있던 일본은 이를 직접 만들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들이 경쟁적으로 도공들을 잡아갔다. 그러나 백자는 당시 조선에서는 흔하게 사용했던 투박하고 소박한 도자기였다.

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본에서 백자의 세계를 연 이삼평. 그는 아리타(有田)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발견하였다.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기에 그는 지금도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영주들의 극진한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살릴 수 있었다.

기술을 천시하던 당시 조선에서 천민 대접을 받으며 자기가 만든 작품에 이름도 새기지 못하였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 명의로 된 도자기를 빚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을 시켰다. 조선 도공들은 큐우슈우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자신의 혼을 담은 백자, 청자를 만들면서 일본의 도자기 수준을 높였다.

지금도 아리타 마을에 가면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 앞에는 영광스럽게도 도예의 조상으로 추앙하는 도조(陶祖)라는 말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이삼평기념비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다. 4백년 전의 조선인 이삼평을 기리며 꽃마저 그의 조국의꽃 무궁화를 심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산 정상에 거대하게 '도조 이삼평 기념비'를 세우고 또한 신사(神社)까지 만들어 이삼평을 추앙하고 있다.

 

규슈 가현 아리타...

간이역 같은 작은 역에 하루 몇 번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그뿐, 적 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은 겹겹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폭설이라 도 만나면 꼼짝없이 갇혀 버릴 형국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에나 나옴직한 이 요새 같은 천연의 도요 지에서, 고향 떠나 끌려 온 조선 도공들은 야반도주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검은 기와지붕마다 푸르스름한 이끼 덮인 도자기 가게 거리를 걸으면 시간의 숨결과 옛 조선 도공들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낄수 있다. 그러면서 한편 쓸쓸하다. 왜 아리타 자기의 스승 나라인 한국에는 이런 「시간의 앙금」, 「세월의 숨결」을 찾을 수 없는가. 왜 강진, 여주, 이천은 오랜 도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급조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가.

왜 우리에게는 아리타가 없고 경덕진(중국의 유명한 도요지)이 없 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되 전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리라. 대대로 천황의 어용식기와 다완을 공급해왔다는 유서 깊은 고란샤 가 있는 아리다야키의 성지 아리타.

인구 일만 삼사천에 도자기 가마만 이백여개에 이르고, 삼백여곳이 넘는 도포(도자기 가게) 중에는 13,14대를 이어온 고포가 예사로이 있는 곳.

이삼평가는 이곳에서 사백여년을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도자기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임란 때 조선에 원정온 이곳 번주 니베시마 나오 시게에 의해 하카다 앞바다로 끌려온 한 조선 도공은 이곳에서 아리타 자기의 조상이 되고, 종로에는 「신」으로 떠받들어진다. 그리하여 이 제는 그가 발견했다는 백자광「이즈미야마 자석장」과 가마터「텐구 다니」는 물론, 그가 눕고 앉은 곳마다 모두 사적이 되어 있었다.

한일 양국의 새로운 우호친선을 바라는 아리따조오의 주민의 모금기부에 의해서, 도조 이삼평공 기념비가 1990년 10월 한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산 33-1번지에 새로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아리따조오 유지로 구성되는 도조 이삼평공 기념비 건설위원회가 한국의 사단법인 한국도자기 문화진흥협회에 건립장소 선정, 비문작성, 비의 제작 등을 위탁해서 건설한 것이며, 이후 매년 방한 연수하는 아리따조오 소학교 6학년 전원이 이곳을 방문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는 등, 후세를 위한 교육자료로서 이용되고 있다.

공주는 또 하나의 아리타인 셈이다. 태생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이삼평의 비석이 서게 된 것은 바로 그의 혼이 시켜 서 된 일이 아닐까. 뼈는 이역에 묻혀 이미 그곳의 흙이 되었지만 혼 만은 이곳에 돌아와 깃들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리타에는 현재 이삼평 13대(가네가에 산페이·76)와 그의 아들인 14대(쇼헤이·35)가 함께 도예작업을 하고 있다. 살림집에 딸린 비좁은 작업장에서 조선자기의 혼을 이으려 노력하고 있다.

홍익명경비

[전면][후면][번역문]

〈韓國公州 「李參平碑」關連歷史碑文〉

李參平公は, 陶藝の技を以て韓日友好に功を殘した朝鮮の陶工であゐ.

文祿·慶長の朝鮮出兵の折, 捕えられ日本に渡り, 白磁技術を傳え日本磁器の始祖と呼ばれゐようになった.

その發祥の地であゐ日本國九州の有田町には, 1917年に建立された李參平記念碑があり, 以來每年五月には, 公に對すゐ住民の感謝の思いがめられた陶祖祭が營まれていゐ. しかし, この碑文には, 李參平公死後子孫により書かれた金ケ江參平由緖書の記述に基づいて,“我カ陶祖李參平氏ハ朝鮮忠淸道金江ノ人ナリ. 文祿元年豊公征韓ノ役ニ方リ我軍ノ爲ニスルカラサリシカハ, 慶長元年藩祖直茂公凱旋ノ際携ヘテ歸化セシメ… 本邦窯業界ノ大恩人ナリ…”と刻まれており, 李參平公の功績を稱えながらも, その一部が見ゐ者によっては, 公が祖國を裏切って日本軍に協力したかの如く受け取れゐ表現であゐ事は, 極めて殘念であゐ.

 

一方, 長い間葛藤を續けてきた兩國の關係に近年回復の兆しが見え國民の交流も活潑になり, 有田町で開かれゐ陶祖祭に參列すゐ韓國窯業界關係者も多くなっていゐ. 兩國の新たな友好親善を願う有田町住民の募金寄付によって陶祖李參平公記念碑が, 1990年10月韓國忠淸南道公州市反浦面溫泉里山33-1番地に新たに建立された. これは, 有田町有志で構成すゐ陶祖李參平公記念碑建設委員會が韓國の社會法人韓國陶磁器文化振興協會に, 建立場所選定, 碑文作成, 碑の製作等を委託して建設したものであり, 以後每年訪韓硏修の有田町小學校6年生全員がここを訪れ感謝の意を述べゐ等, 後世の爲の敎育資料として利用されていゐ.

 

しかし, この碑文にも, 日本側の認識を根據に兩國の歷史を歪曲していゐと思われゐ表現があり, 韓國民の自尊心を著しく害すゐ事は無論, 有田町民の李參平公への報恩の尊い趣旨が歪められゐ恐れがあゐという事實に對すゐ配慮が欠けていゐと言わざゐを得ない.

 

このような狀況を踏まえて, 我は, 四百年前捕われの身で日本の地において望鄕の歲月を余儀なくされた李參平公始め多くの朝鮮陶工の名譽を守り, その靈を慰めゐとともに, 歷史を正しく傳え民族の精氣を宣揚し, 韓日文化同源の歷史觀に基づく未來志向的弘益人間文化の確立を目指して, ここに, 友好かつ平和的意義の碑を建て, 弘益明鏡碑と命名して後世に傳えゐものであゐ.

 

李參平에 대한 다른 기록

 

일본에서 오랫동안 모든 사람의 꿈은 조선이나 중국과 같이 자기(磁器)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망은 결국 처참한 7년간의 전쟁 끝에 성취하게 되는데, 이른바 ‘도자기 전쟁’이라 일컫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분로쿠.케이쵸의 전역(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자기의 시대를 열게 된다. 그후 17세기 전반 경에 규슈의 아리타에서조선 도공(陶工)들의 손에 의하여 탄생된 자기는 산너머 이마리 항구에서 선적되어 유럽으로 대량수출되면서 ‘이마리야끼’로 불리워져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삼평(李參平), 자기(磁器)를 만들다.

 

우리가 흔히 도자기(陶磁器)라 편의상 부르지만 도기와 자기는 엄연히 구분된다. 도자기는 흙을 구어 만들어내지만 자기는 돌울 소성하는 것이다. 도기는 점토 즉 산화알루미늄이 주체가 되지만 자기는 주성분으로 규산이 든 고령토라는 장석 계통의 흙이 필요하다.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도기와는 달리 자기는 광택이 보석같이 빛나는 표면에 두들기면 금속성이 난다. 일찍이 이와 같은 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나라는 세계를 통틀어 중국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이미 3세기 경에 질이 좋은 자기를 만들었다. 특히 당대(唐代)에 꽃피운 월주자기(越州磁器)는 ‘비색청자’라 불리워져 시인묵객의 칭송을 들었으며, 일본 헤이안조 귀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중국의 청자기술은 고려(高麗)에 전해져 본 고장 중국인들까지 놀라게 한 고려청자를 탄생시켰다. 한국에서 이러한 도예전통은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 ‘인류 도자의 정점이라 할 조선백자’를 만들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도자기술은 결국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에 전해지게 된다. 이 시대 일본은 다도가 성행하여 명기의 찻잔은 다이묘들이 하나의 성을 주고서라도 획득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때 출병한 무장들은 계획적으로 조선의 도공들을 초빙 해 귀국했으므로 ‘도자기 전쟁’이란 별난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일본 서남부에 있는 다이묘들의 영지에서는 요업이 일순간에 활기를 띠게 되 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호소카와의 <아가노야끼> 구로다의 <다카도리야끼>, 모리의 <하기야끼>, 시마 즈의 <사쓰마야끼>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베지마라는 무장이 데려온 도공으로, 여기에서 일본도자사에 혁명적인 과업을 성취한 이삼평(李參平)이란 조선인이 등장한다.

 

일본 이름으로 ‘가네가에 산뻬에’라고 불리운 이 조서인은 도공 이삼평은 그 고향이 조선의 어디인지, 또는 가계가 어떠한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으나 분명한 것은 나베지마 나오시게에 의해 일본에 와서 그의 영지에서 도업에 종사하면서 일본에서 최초로 자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삼평은 모든 일본인들이 바라는 자기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찾아 들과 산을 헤메다가 드디어 가미시라카와의 덴구다니에서 태토를 발견하고 가마를 쌓아 자기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 시기는 여러 가지 문헌을 종합해 1616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도 그동안 일본에서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으나 근래에 와서 연구와 발굴의 결과 이삼평의 위업을 누구도 부인 못할 뚜렷한 증거들이 속속 들어났다. 즉 1965년부터 1970년에 걸쳐 아리타 시에서 덴구다니의 고요지를 본격적으로 발굴한 결과 여섯 개나 되는 승염식요를 찾았으며 그 개요 시기를 17세기 초로 보았다. 또한 1967년에는 이삼평에 관한 또다른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월창점심 가미시라카와 산빼에 위령 묘오이란 구절에서 이삼평의 법명이 ‘월창정심’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마리(伊萬里)의 융성

 

사가 현 니시마쓰우라군 아리타 마을에 백자 광산이 발견되어 일본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청화백자가 아리타 마을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소성되기 시작한 것은 모모야마에서 에도 초기였다고 문헌과 사료는 전하고 있다. 유포되어 있는 통설은 <다구가문서>와 <가네가에구기>에서 말하는 겐나 2년 설로, 일본에서의 이름을 가네가에 산뻬에라고 하느 귀화 도공 이삼평이 이끄는 집단이 고심 끝에 아리타 시라가와 덴구 계곡에서 청화 백자 창시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베시마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에이 2년의 명산대관구기각서에 의하면 그보다 일찍 일본인이 덴구다니에서 요를 축성하고 난킨야기 즉 자기를 굽는데 종사하고 있었다는 전승을 남기고 있지만 본격적인 자기는 아니었다.

 

이와 같이 귀화도공에 의해 시작된 이마리야키는 간에이 14년에 나베시마번의 명을 받아 이마리아 아리타에 귀화도공을 주체로 한 도업 조직을 세웠다. 이상과 같이 이마리야키의 기원 시기에 대해서는 사료 비판과 고고학적 조사라고 하는 두 가지 면에서 연구되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초창기의 이마리야키가 만들어 낸, 일반적으로 ‘초기 이마리’라 불리고 있는 제품의 작품 에서 그 작풍을 전개하였는가하는 미술사적 측면의 고찰은 완전하게 잡히지 않았다. 거기에도 초기 이마리야키의 발상과 양식의 성립, 변천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중국 강서성경덕진요가 세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청령한 인상을 주는 청화백자 기술을 완성한 것은 원시대 후기인 14세기 전반의 일이었다. 그 이래 경덕진요는 명청시대에 걸쳐 조직적인 생산 체제를 갖추고 세계를 향해 청화를 수출하고 있었다. 이 신선한 남빛무늬의 청화는 조선.베트남.이란.터어키.이집트 나아가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구 도요에 큰 영향을 끼쳐 각지에서 청화가 구워지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한반도 침략 정책이 큰 계기가 되어 일본의 규슈 일대에는 도래해 온 많은 귀화 도공이 각지에 요를 쌓고 그때까지 전통이 없었던 이 지방을 일대 제도지로까지 진전시켰다는 것은 이미 정설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가라쓰야키를 비롯한 도기요였음에 비해 아리타 센잔에서 백자광을 발견한 이삼평 일파는 고향에서의 작 제작경험을 살려 자기요를 일으킴으로서 기형, 문양 모두 다른 독자적인 청화자기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초기의 청화자기 양식은 조선풍이었다고 하는 것이 연구자들의 정설로 정착되어 있다.

 

세계로 뻗어가는 이마리야키

 

조선인에 의해 이룩된 이마리의 자기들은 일본 국내의 보급은 물론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어, 중국에 이어 동양자기의 매력을 세계에 과시하게 된다. 지금 네덜란드, 인도네시아에 남아 있는 동인도회사의 제 기록과 에도 전기의 교토 긴카쿠시의 봉림선사의 일기 <격명기>는 이 시기의 수입 청화자기를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되어 있다.

 

이마리야키의 특징

 

<격명기>에 이마리 청화 기사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간에이 16년은 나가사키항이나 히라도항에 대량으로 중국도자기가 선적되어 중국도자기 수입이 가장 활기를 보인 전성기였다. 그 중국도자기란 출토품으로 보는 한 경덕진계 자기로는 조잡한 청화백자 소품을 중심으로 용천요의 청자가 상당향 수입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약간의 고스아카에, 고스소메쓰케, 삼채, 녹유, 갈유, 흑유 등 제조요를 알 수 없는 화남의 제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이 시기에 건너온 전래품에는 경덕진요의 제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을 야기 시킨 배후에는 당연히 소모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중국 도자기와 진중하고 특수한 가치가 부여된 중국도자기라고 하는 이면성이 수입 중국도자기 속에 처음부터 심어져 있었던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른바 고소메쓰케가 명말 천계.숭정 년간을 중심으로 한 17세기 전반에 경덕진요에서 소조된 일본용의 특수한 소메쓰케이며, 공기접시류에ㅜ 찻잔, 쟁반, 주발, 문방구라고 하는 중국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그릇류와 명확하게 일본 다도인들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으리라 생각되는 향합, 향로, 꽃병, 물그릇, 수발, 술병 등 다도구류로 대별되는 것은 이미 여러 학자가 말한 대로이며, 초기 이마리야키가 고소메쓰케의 도안을 모방하여 시작한 것도 고소메쓰케가 일본인들의 독특한 취향에 맞았다는 것을 반영해주고 있다.

 

 

李參平에 대한 다른 기록(2)

 

조선도공 이삼평

 

일본 도자기 시조로 열렬히 추앙

 

일본 규슈의 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는 일본에서 '도자기의 고향'으로 불린다. 인구 1만4천여명에 불과한 작은 산골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4㎞의 길 양쪽에는 무려 650곳에 이르는 도자기 전문점이 줄지어 있다. 이곳의 가마는 200채 가까이 되고 5월 도자기 축제 때에는 전국에서 20여만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일본 근세 도자기를 대표하는 아리타 도자기는 17~18세기 유럽에 수출되어 유럽 자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도 높다.

 

이처럼 화려한 아리타 도자기의 명성 이면에는 망향의 한을 달래며 흙과 불과 씨름하며 도자기를 구워낸 조선 도공들의 혼과 땀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왔던 수백명의 조선도공이 아리타에 정착하여 가마를 열고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이 '일본 도자기'의 시발점이 된 것.

 

△무차별적인 조선 도공 연행=임진왜란시 조선에 출정한 일본의 다이묘(大名·지역 영주)들은 조선 도공들을 붙잡아 가는데 열을 올렸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일본에서는 다도가 성행함에 따라 조선에서 수입되는 다기가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조선 도공들은 일본군의 표적이 되었다.

 

다이묘들은 뛰어난 도공들을 수백명씩 데려와 각자의 영토 내에 가마를 열고 특색있는 도기를 만들어 내도록 했다.

 

조선 도공들이 가져온 발 물레와 가마 제작기술을 통해 일본 도자기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에도(江戶) 시대 중기에는 나가사키항을 통하여 서양에 수출되어 유럽 귀족들을 매료시키기에 이르렀다. 기록에 따르면 1653년부터 100년간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100만점을 넘었을 정도의 번성기를 구가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규슈 출신이 주력이었고 그들이 조선도공을 무더기로 데려온 탓에 규슈의 유명한 도자기 산지는 모두 조선도공들이 시작한 가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구워낸 곳이라는 의미로 도자기 산지를 야키(燒)로 칭하는데 지명과 함께 불러 도자기를 구분하고 있다.

 

예컨대 아리타 도자기는 '아리타 야키'로,역시 사가현의 가라쓰(唐津)에서 구워낸 것은 '가라쓰 야키'로 부른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도공 심수관은 '사쓰마(薩摩) 야키' 계열이다.

 

현재 이들 지역에는 아직도 자신을 조선도공 아무개의 12~14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조선 도공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다.

 

△추앙받는 도조(陶祖) 이삼평=조선도공 중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리타에 정착한 이삼평(李參平)이다.

 

1594년 혹은 1596년께 일본에 끌려간 그는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산(泉山)에서 자기를 굽기에 알맞은 백자광을 발견하여 시라카와텐구(白川天狗) 계곡 부근에 가마를 짓고 정착했다. 그의 휘하에는 조선도공 155명이 있었다. 그들은 아리타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삼평에 의해 표면이 거친 도기가 감촉이 매끈한 자기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 도자기에 있어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처음 아리타 야키에는 조선의 문양이 그대로 사용되었다가 나중 가키에몽 등 3가지 고유 양식으로 발전되는데 이로써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특히 가키에몽 양식은 일본 황실에 독점 공급될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삼평에 대한 아리타 사람들의 존경심은 각별하여 그를 도조(陶祖)로 우러르는 것도 모자라 신격화하여 모실 정도다. 아리타의 도산(陶山)신사는 천황·다이묘와 나란히 이삼평을 모시고 그를 추앙하고 있다.

 

신사 뒤편의 산 정상에는 '도조 이삼평비'라고 새겨진 큰 기념비가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 석비 뒷면에 이삼평을 '대은인'이라고 적고 있다. 석비 건립시기는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17년. 당시 조선 멸시 분위기를 감안해 보면 아리타 사람들이 얼마나 이삼평을 우러르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난 1990년 이삼평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남 공주 계룡산국립공원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에는 '보은과 감사의 뜻을 다하고 국제친선과 문화교류의 상징'으로서 건립했다고 취지를 새겼다.

 

이삼평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왔으나 일본에서 찬란한 도자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는 일본 호적을 갖고 일본 도공으로서 죽어갔고 그의 자손은 지금 14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물론 역사의 굴절에 안타까움이 없지 않지만 이삼평을 통해 조선도공의 삶과 업적이 기억되고 국적을 초월해 추앙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도산(陶山)' 시비, 1918년 니시마츠우라(西松浦)군수 가시타 사부로(樫田三郞)

眼底家如櫛 (안저가여즐)

눈 아래 집들은 빗살처럼 늘어섰고,

窯煙起脚間 (요연기각간)

가마 연기는 발 아래에서 퍼지네.

松風自落事 (송풍자낙사)

솔바람이 절로 불어내리듯,

李祖鎭陶山 (이조진도산)

도조께서 도산을 지키시네.

이삼평의 14대손 : 도예가 가나가에 쇼헤이(江省平)

도조 이상평요 공방

844-0008

佐賀県西松浦郡有田町稗古場丁目9-36

도조 이상평요 갤러리

8440005

佐賀県西松浦郡有田町幸平2-1-3

TEL / FAX05010999432

도조 이삼평 요() 홈페이지

http://toso-lesanpe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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