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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기획인물재조명6]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6.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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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물재조명6]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 조명묘소

천안하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조 충신 조명(趙銘)이라는 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조명에 대해 재 조명해 보자.

조선조 세조(世祖)가 된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유 字는 粹之)는 권력에 눈이 멀어 나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을 권좌에서 내치고 그도 모자라 사약(死藥)을 먹여 죽였다. 이 때 이 일을 주도한 간신배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많은 충신(忠臣)들이 분연이 일어나 단종 복위에 목숨을 내놓았다.

조명의 부친인 순생(順生)이 이에 연루 됐다 하여 전라도 고성으로, 그의 아들인 명은 금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조명(?~1478) 관향은 한양(貫鄕 漢陽)이며, 자는 경부(字 警夫), 호는 인촌(號 仁村)이다. 부인은 회덕황씨(懷德黃氏)이다.

태조 이성계 묘정(太祖 李成桂 廟廷)에 배향된 개국공신 인옥(開國功臣 仁沃)의 증손이다. 지 돈녕부사(知敦寧府事) 뇌(?)의 손자이고 이조참판(吏曹參判)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원주 원씨(原州元氏)로 사정을 지낸 유용(有容)의 따님이다.

명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16세의 어린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문과에 급제해서 병조정랑이 있었던 1453년(단종 원년)에 한명회 일당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아버지 순생과 함께 죄를 물어 금산에 관로로 유배 됐다.

순생은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단종을 지키려다 전라도 고성으로 유배됐고 그도 모자라 사약을 먹고 죽었다.

안평대군 용(瑢)에게 아부해 매일 왕래하면서 한명회 일당이 세운 새로운 왕조 세조에게 역도의 죄를 지었다 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손들은 죄를 물어 귀향, 아녀자들은 재상가의 노비로 삼았다.

세조의 실록엔 조순생의 부인 원주 원씨는 처음에 전 부사직 이몽가(府使直 李蒙哥)의 노비로 보냈다가 임자번(林自蕃)의 노비로 주었다 기록하고 있다.

아들 조명은 아버지 순생(順生)이 귀향 갈 때 연좌제(緣坐制)의 죄를 물어 금산에 유배(流配)됐다. 그러고도 세조 일당들은 불안했던지 당시 계유정란에 가담된 자들에게 모두 사약 먹여 죽였다.

그러던 어느 날에 세조(世祖)가 속리산과 온양에 산양과 온천을 왔을 때 어느 신하가 역도들은 다 죽고 왕좌가 안정됐으니, 역도 조순생의 아들 조명이 적소에 있으니 부자의 죽음으로 한 집안의 대를 끊을 수 없다고 간해 명을 풀어 줬다.

명은 정치에 환멸을 느껴 아버지가 죽은 고성 땅과 단종이 죽은 영월을 돌아보고, 목천 신기(新基)에 정착하게 됐다.

순생의 묘소와 명의 묘소는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있고, 인군(引郡)에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 보아 인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천 신기에 살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뒷산에 올라 단종이 승하 하신 강원도 영원을 향해,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성을 향해  망배통곡(望拜痛哭)하기를 폭우뇌성과 북풍한설(暴雨雷聲 北風寒雪)에도 멈춘 날이 없었다. 조명은 16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20살 전후로 정랑에 오른 인재로 그 알량한 왕좌의 싸움에 회생된 조선시대가 낳은 충신중의 충신이다.

▶또 다른 천안의 청량포 ‘정랑봉’= 천안시 성남에 전해오기를 조명이 단종을 추모하며 매일 올라 통곡망배 하던 망향산이 있다는 구전을 듣고, 천안향토회 김종식연구사는 수차례 이곳을 방문해 찾았지만 없었다.

그의 노력끝에 수신면 망경산을 수차례 오르다 석곡리에 정랑봉에 추모비가 있다는 지인의 안내로, 사진작가 이종덕과 함께 올라보니 이곳은  김종식 연구사가 조명의 비를 찾기 위해 수차례 다니며 지나쳤던 곳이다. 

향토사학자 김종식과 이종덕 작가는 몇 시간의 노력으로 비석부근에 우거진 나무와 풀을 베어 보니, 정랑봉 추모비(正郞峰 追慕碑)라는 4자 짜리의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지난 2006년 여름의 일이다. 당시작가 이종덕작가  김종식연구사와 금석문 발굴에 늘 함께한 인물이다. 며칠 뒤, 천안 전통문화 연구회 회원들이 답사, 탁본을 떠 번역을 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정랑봉 추모비명 (正郞峰 追慕碑)’ 우리나라 땅 수천리에 여러 산들이 줄지어 서있고, 만천봉우리가 있으니 명칭이 얼마나 많을까 마는, 역시 그 처음 심상으로 이름 지어진 것에 불과하되 오직 대륙의 정랑봉(正郞峰)은 그렇지 않다.

봉우리는 현의 남쪽 대양동(縣 南 大陽洞)에 있는데 후에 단종조의 명신(端宗朝 名臣) 정랑 조공(正郞 趙公)의 충효(忠孝)서 이름이 지어지게(作名) 됐다.

조공의 휘는 명(趙公 諱 銘)이요. 호는 인촌(號 仁村)이며 한양이 세가(漢陽世家)이다. 단종 조 이조참의(端宗 朝 吏曹參議)를 지낸 파서선생 휘 순생(坡西 先生 諱 順生之 子)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해 청현(淸顯)을 두루 거치고 계유정란(癸酉靖亂)에 일문이 구찬지화(九竄之禍)를 당했다.

공이 이때 정랑(正郞)으로 금산(錦山)에 유배됐다가 상왕(上王 단종을 말함)께서 해(害)를 당함과 부공(父公)의 소식을 듣고 애통하고 원통해 생에 의욕이 없었다.

후에 생의 환멸(還滅)을 느껴 본 현 세성산 서쪽(本 縣 細城山 西)에 살았는데 지금의 대양동(大陽洞)이 이곳이다.

임금과 부친이 비명(匪命)에 돌아가심을 애통히 여겨 하루 세 번씩 집 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상 동으로 절하고 남으로 울부짖음을 일상으로 했다(東拜南號).

장릉은 영월(寧越有 莊陵)에 있고, 고성(固城)은 후명(後命)으로 부친이 귀향을 가서 사사(賜死)된 곳이다. 얼마나 그러했는지 사립문이 달아 없어질 지경이 됐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정랑(正郞)이라 하니 정랑이라는 명칭(名稱)이 여기서 시작된다.

인에 마음을 둔 선비와 유람하는 나그네로 자연에 임하여 마음을 시로 읊지 않음이 없다. 본 현의 수장(本縣 首將)이신 안정복(安鼎福)이 ‘정랑봉(正郞峰’세자를 써서 걸었고, 암행어사 김이성(暗行御史 金履成)은 “단묘건곤이 다만 이 한 봉우리라는 구절은  진실로 광세의 감흉을 일으킨다.” 그 “첨피고봉 영세청풍(瞻彼高峰 永世淸風”이라는 것은 강제 송 선생(剛齊 宋先生 祝辭)이 축사(지은 글) 한 것이다.

봉우리 동남쪽 십 여리쯤 또 누대(樓臺)가 있는데 망경대(望京臺)라고 한다. 대개 공이 매일 의복을 갖추어 입고 홀기를 들고 서울을 바라보며 절하며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조(仁祖) 때에 이르러 공에게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사림(士林)들은 충열사(忠烈祠)를 세워 제사하고 또 후에 숙묘전(肅廟殿)에 제사했다.

공이 살았던 마을은 공이 산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이 인촌(仁村)이라 칭(稱)하였으며 이것이 또한 공의 호(公之號)가 되었다. 후에 대양(大陽)으로 이름을 고치니 현재는 천안군의 치하에 속한다. 봉우리는 지금 유씨(柳氏)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아! 세월이 바뀌어 강산이 여러 번 변했는데 오직 이 우뚝한 봉우리는 마모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만천봉의 기상을 띠어 우뚝 솟아 있어 부녀자들과 선비들이 전하여 쇠하지 않아 후손이 추모함이 깊도다.

장자께서 물은 차마 땅을 폐하지 못하고 차마 황폐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신 뜻으로 곧은 옥돌(비석)을 세워 이를 표하노니 그 논의를 주도한 것은 후손 형원(後孫 炯元)이다.

아! 공의 남기신 발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이 봉우리에 있을 것이며 그 명칭의 자세함을 알고자 한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천 백세가 지나더라도 이 비석으로 인하여 공의 큰 절개를 알게 될 것이다.

오호라! 자규(서쪽새)가 우는 그믐날이면, 공의 꽃다운 영혼이 반드시, 봉우리 위를 배회할 것이며, 한스러움이 또한 무궁 할 것이다. 지금 그 먼 후손 철형(喆衡)이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하거늘 나는 이 봉우리 아래 사람이라 매양 이곳에 올라 탄식 한 것이 오래 되었다.

나의 조부 제학공(祖父 提學公)께서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정랑봉이 북쪽에 있으니 조 선생을 추모하노라”하셨다. 가만히 느낌이 있어 드디어 이렇게 쓰노라 이때는 단묘 이후 아홉 번째 갑술년 중추절이다.

가선대부 전행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안동 김경규는 삼가 짓고 전 장릉참봉을 지낸 완산 이석영은 삼가 쓰노라.(嘉善大夫 前行 奎章閣 副提學 安東 金敬圭 謹撰 前行 莊陵參奉 完山 李錫永 謹書)라고 기록돼 있다.

김헌규 기자 always20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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