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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만성집(晩醒集)박치복(朴致馥)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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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집(晩醒集)박치복(朴致馥)

생년몰년

1824년(순조 24)
1894년(고종 31)

형태서지

권수제판심제간종간행년권책

만성선생문집(晩醒先生文集)
만성선생문집(晩醒先生文集)
목판본(木版本)
1925년 간행
원집(原集) 16권, 부록(附錄) 2권 합 10책

기사전거 : 

年譜, 行狀(盧相稷 撰), 墓碣銘(曺兢燮 撰), 墓誌銘(李容九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박치복(朴致馥)晩醒先生文集跋○趙漢元]  

日朴君正善踰嶺而西。訪余於龍仁田舍。言其仲父晩醒先生遺集重刊事甚悉。要余一言以實其蹟而重世好。緬惟先生於吾家。吾先大父旣推奬之不遺餘力。先父不敢友而實師之焉。而不肖亦嘗從事左右而聞命矣。至先生之文章。固非膚淺末學如不肖者所可得闚其涯涘而論其得失者。而以聞諸長老者。則先生之文。根據六經。汎濫百家。紆餘曲折。汪洋𩃎霈。而要必大㱕于正。盖先達所謂橫說竪說無不當理者。先生似其人焉。使天假之時。佐鳴國家之盛。陶鑄文化。賁餙太平。於先生何有。而晩暮旌招。位不稱德。此固足爲邦家恨。而謂先生之不幸則非也。况先生雖遠。而遺文具在。後之讀者。猶可以想見其經綸之富學術之正。而知先生之所以爲先生矣。嗚呼。世遭滄桑。耆舊宿德凋零殆盡。所可觀感而寓慕者。亦惟其咳唾儀刑之未盡泯滅者。而此亦付諸不問。則後死者之罪也。朴君之不憚艱勞也有以夫。今玆之役。嶺中人士尸其事而蕫其工。其樂善好賢之誠。其又可感也云爾。乙丑十二月癸酉。後學漢陽趙漢元謹識。

찬및간행

저자는 조선 말기 영남 지역의 유학자로 定齋 柳致明과 性齋 許傳의 제자이다. 저자는 찬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중년 이후의 詩文은 문인 金鎭祜, 李正模와 아들 朴熙善이 저자 생전부터 收錄하고 있었다. 저자가 졸한 1894년 9월 김진호와 金象淳이 박희선에게 讕稿를 넘겨주며 遺文의 정리를 당부하였는데, 박희선은 곧 繕寫를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하였다. 그러나 격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 單帙의 草本이 망실될 것을 염려한 박희선은 김진호를 방문하여 간소하게나마 활자로 문집을 인출하여 同志들과 공유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찬동한 김진호는 약간 권의 稿本을 后山 許愈(1833~1904)와 校勘하여 1896년 丹城 麗澤堂에서 목활자로 13권 6책의 문집을 인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321), 규장각(古3428-153, 奎11989),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654),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박치복/만)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박희선이 저자의 문인들과 遺蹟을 정리하여 年譜를 편찬하려 하였으나 간략하게 條例만 나누었을 뿐 중도에 졸하였다. 저자의 從子 朴正善은 연보를 당대의 名士들에게 廣訂하여 완성하고 盧相稷, 曺兢燮, 李容九로부터 행장과 묘도문자를 받은 뒤에 문집을 原集 16권, 附錄 2권으로 修整하여 저자의 嗣孫 朴永喆 등과 함께 1925년 達城의 廣居堂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654),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25-284), 장서각(D3B-2457),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810.819-박86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從子 朴正善과 嗣孫 朴永喆 등이 1925년 達城의 廣居堂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중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영인저본 중 권1의 제44판은 板次가 ‘三十六’으로, 권15의 제12ㆍ13판은 卷次가 각각 ‘十二’ㆍ‘十三’으로 誤記되어 있고, 권9의 제25판은 권차가 漏落되어 있다.

跋(趙漢元 撰), 舊跋(金鎭祜ㆍ朴尙台ㆍ朴熙善 撰), 年譜, 行狀(盧相稷 撰), 墓碣銘(曺兢燮 撰), 墓誌銘(李容九 撰)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原集 16권, 附錄 2권 합 10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 目錄과 趙漢元이 1925년에 지은 跋, 金鎭祜ㆍ朴尙台ㆍ朴熙善이 지은 舊跋이 있다.

원집 권1~3은 詩(218題)이다. 시에 명승을 보고 감상을 읊은 것, 차운시, 만시 등이 많다. 권1~2는 燕京으로 사신 가는 洛坡 柳厚祚를 전송하며 지은 것, 洋船 2척이 京江으로 들어왔다 물러간 후 울분을 참지 못해 遊軒 張錫龍, 鍾山 沈英慶과 술 마시며 술회를 읊은 것, 宜春을 지나며 孝女의 旌閭가 퇴락한 것을 마음 아파하며 지은 것, 水原 遲遲臺를 지나며 正祖의 효성에 대해 느낀 것, 선조 朴震英에게 武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延諡한 것, 花潭 徐敬德이 遊息하던 逝斯亭에 올라 지은 것, 新羅人이 學琴 30년에 玄鶴이 와 춤췄다는 玉寶臺에 대한 것, 島潭溯의 벽면이 열려 여러 척의 배를 감출 만한 隱舟巖에 대한 것, 1884년 갑신년은 회갑이 되는 해인데 전해인 계미년 除夕에 감회를 읊은 것, 동짓달 초순에 麗澤堂에 盆梅가 꽃을 피운 것을 보고 지은 것 등이다. 만시는 柳致明, 李命允, 盧德奎, 朴馨述, 韓啓轍, 朴奎東, 申佐模, 河慶祚, 崔台鎭, 金成洛 등에 대한 것이다. 권3은 〈大東續樂府〉이다. 〈대동속악부〉는 1861년에 〈大東樂府〉가 단군부터 고려 말까지만 稱述되어 있는 것을 한으로 여겨 조선 건국부터 영조까지 王政, 烈行, 忠節, 學行, 孝行 등의 史話를 수용하여 褒貶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 徙海歌, 定朝鮮, 海州黍, 御天龍, 蕩春臺, 關顯聖, 報恩錦, 后妃諫, 大明松, 大報壇 등 28수가 실려 있다.

권4는 疏(4)이다. 時弊에 대한 것, 佔畢齋 金宗直과 濯纓堂 金馹孫을 文廟에 종사하기를 청한 것, 南冥 曺植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한 것, 衣制를 변경하지 말 것을 청한 것 등이 있다.

권5~7은 書(112)이다. 〈上定齋柳先生〉은 십여 년간 憂戚으로 인해 스승을 찾아뵙지 못하고 讀書만 하고 있다가 1855년 7월에 智島로 귀양 간 유치명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자 답장한 것이다. 〈上李判書〉는 아들을 잃은 李源祚를 위로한 것이다. 〈答許退而〉는 許愈와 未發之說에 대해 논한 것이다. 〈答金致受〉는 金鎭祜에게 근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어떤 사람과 講討를 하는지,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등을 물은 것이다. 〈答郭鳴遠朱子語類疑目〉은 郭鍾錫과 「朱子語類」에서 ‘大轉’, ‘標月’, ‘富貴不離其身’ 등 41개 조항에 대해 논한 것이다. 〈答李明賚問目〉은 李祥奎에게 ‘太極之理’, ‘冠禮를 행하지 않은 童子에게 首絰이 어떠한가’ 등의 물음에 답한 것이다. 〈答盧士維問目〉은 盧純容에게 ‘孔子의 喪에 제자들이 心喪 3년을 입고 돌아가고 子貢만이 6년 동안 여막을 지키다 돌아갔는데 三千弟子 가운데 자공만 6년을 행한 것은 어째서인가’에 대해 답한 것이다.

권8~10은 雜著(36)이다. 권8은 〈明德辨〉, 〈太極動靜辨〉, ‘太極函動靜’ㆍ‘啓蒙心太極’ㆍ‘陰陽穉盛’ㆍ‘伏羲八卦圖’ 등을 풀이한 〈讀書隨箚〉, 〈斥洋邪論〉 등이다. 〈척양사론〉은 洋術을 배척하는 방법으로 ‘明正學ㆍ正士習ㆍ公選擧ㆍ察民隱ㆍ嚴武備’를 제시한 것이다. 권9는 三政의 문란에 대해 올린 책문, 丙寅洋擾 때 지은 斥邪文, 士林들이 모여 許傳의 장례 지낸 일을 기록한 것, 金基鎔에게 ‘警發振勵’ㆍ李炳台에게 ‘專精實學’ㆍ金明出에게 ‘堅固不遷’ 등 제자들에게 지어준 四字符 등이다. 권10은 許穆이 三陟 府使로 나가 지은 〈陟州東海碑頌〉을 註解한 것, 陶淵明이 南朝의 宋 武帝 劉裕에 의해 폐위된 零陵을 애도하는 〈述酒詩〉를 풀이한 것 등이다.

권11은 序(40)이다. 許傳이 지은 「字訓」, 大瑕齋 金景謹의 實記, 燕京으로 가는 李根弼과 任應準을 전송하는 것, 張錫裕가 꿈에 三山을 유람하고 기록한 「夢遊三山錄」, 「性齋集」을 간행할 때 수개월 동안 仁智齋에 모여 理氣心性을 논한 것을 기록한 「仁智齋同話錄」과 白鳳來의 「九龍齋集」에 대한 서문, 新昌盧氏ㆍ晉陽鄭氏의 族譜, 晉陽姜氏派譜에 대한 것이다.

권12는 記(39), 跋(10)이다. 기는 行塢 金士衡의 尙友齋, 李有載의 楚亭, 李性敏의 如如亭, 효자 朴興枝의 旌閭, 炳燭室, 卞萬栻이 守家ㆍ守分ㆍ守心ㆍ守口의 의미로 지은 四守堂 등에 대한 것이다. 발은 허전의 「성재집」, 선조 朴震英의 문집, 光州盧氏의 世稿에 대한 것이다.

권13은 箴(1), 銘(2), 箋(1), 婚狀(1), 字辭(1), 哀辭(4), 上梁文(6), 祝文(5), 祭文(15)이다. 잠은 鄭龍基를 위해 지은 讀書箴이다. 명은 拱北門에 대한 것과 친구 曺欽一이 室의 이름을 ‘博學審問愼思明辯篤行’이라 짓고 명을 청해 지은 것이다. 전은 翼宗大王에게 尊號를 追上하고 대왕대비에게 존호를 加上할 때 稱慶하고 陳賀하며 大殿과 대왕대비전에 올린 것이다. 혼장은 아들 朴熙善의 것이다. 字辭는 李正模, 애사는 魚在淵, 이종 형제 金魯漢ㆍ金鎭漢, 李基瑞, 安元贊의 것이다. 상량문은 이택당, 咸安趙氏 兩世의 旌閭를 중수하는 것, 烈婦 金海許氏 旌閭, 陶山齋室, 龜淵書院, 慶州李氏 양세의 정려에 대한 것이다. 축문은 선조 朴震英을 大報壇에 追陪한 후 別廟에 고하는 것, 雷龍亭에서 조식에게 釋菜禮를 행할 때의 고유문, 龜淵書院의 터를 여는 문, 黃梅山에 지낸 祈雨文 등이다. 제문은 유치명, 허전, 족형 朴致璜, 內弟 林坤, 金聲禹, 동생 朴致晦 등의 것이다.

권14는 碑銘(3), 墓碣銘(19)이다. 비명은 啞堂 朴調, 菊軒 李守亨, 高麗의 司宰令 李日善과 부인 李氏의 것이다. 묘갈명은 雲塘 李琰, 月華堂 盧克復, 靜軒 金德龍, 農隱 朴道元, 聽秋軒 許祚, 新齋 安相奎 등의 것이다.

권15는 墓表(12), 墓誌銘(5)이다. 묘표는 孫應祿, 孝婦 許氏, 聚蘭 許巘, 幽巖 李彦明, 新亭 曺洞振, 默忍堂 許致仁 등의 것이다. 묘지명은 愚谷 朴身潤, 慕菴 許允翰, 霞叟 崔瀧, 斗齋 安俶 등의 것이다.

권16은 行狀(9), 行錄(1), 傳(4), 遺事(1)이다. 행장은 安濯, 永慕齋 崔震樞, 安窩 李在瓚 등에 대한 것과 先祖 朴震英의 家狀이다. 행록은 부친 朴俊蕃의 言行總錄이다. 전은 孝子 吳以源, 崔東泰의 처 烈婦 李孺人, 柳處子, 열부 韓氏에 대한 것이다. 유사는 吾山 崔台鎭에 대한 것이다.

附錄은 권1에 年譜, 권2에 盧相稷이 지은 行狀, 曺兢燮이 지은 墓碣銘, 李容九가 지은 墓誌銘, 嗣孫 朴永喆이 지은 〈文集告成文〉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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