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조선명인전 : 조광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7. 21.
반응형

■이병도(李丙燾):일본식민사학의 대두

1896∼ .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 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웠으나,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잘못 기술하는데 일본에게 유리한 생각으로 기술하여 요즘들이 전통역사학자들에게 지탄을 받고, 지식인들에게 욕을 엄청먹고 있다.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 있음. 요즘엔 왜곡된 한국 고대편, 중세편으로 욕을 엄청 먹고 있다.

 
1

도학(道學) 즉 성리학(性理學 ; 또는 宋學)이 반도에 수입되기는 이미 고려 말기에 시작하여 이래 국학(國學;성균관)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여온 것이지만 연말 선초에는 아직 그것이 학자층 일반에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또 거기에 정통한 유자(儒者)라도 대개는 사장(詞章)의 학(學) 즉 문학을 주로 숭상하였다.

특히 세종, 세조 및 성종의 치대(治代)에는 국가에서 성히 편찬 저술의 업을 일으키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學)을 장려하며 또 그때는 과학의 제(制)가 점점 완비하여 가던 때라 –조선의 과거는 경술도학(經術道學)보다도 제술(製述;文藝)에 치중하던 까닭에-시대의 취향은 더욱 사장을 힘쓰게 되었거니와, 그중에도 출세 입신의 사(士)는 모두 실용적 학문과 사장에 주력하고 임하(林下)에 파묻힌 불우 혹 방랑의 객(예를 들면 金時習·南孝溫·洪裕孫 등)은 왕왕 청담류적(淸談流的) 초속적(超俗的)사상과 사장에 기울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성종 때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점필재)과 같은 이는 야은 길재(吉再)의 문인(門人) 김숙자(金叔滋;江湖)의 아들로 이조 사학(私學)의 대연원을 이은 명유(名儒)이지만 그의 평생 사업은 후일 이퇴계(滉)의 평한 바와 같이 문장사화(文章詞華)에 지나지 못하여 경술도학에 관한 문자는 그의 유저(遺著)에서 찾아볼 수 없고, 그의 문도(門徒)들도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의 두 실천 도학가를 제한 외에는 대개 그리하여 시문(詩文)에 장한 문사들이 많았다.

성종 때에는 사장학이 성하고 문사가 따라 배출되었으며 문사들 사이에는 사우(師友;情實), 지연, 혈연, 사상, 감정, 기타 이해관계로 종종의 파당이 형성되어 반목 암투가 흐르고 있었으니, 김종직 및 그 문도(門徒)를 중심으로 한 일파와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槨) 등을 중심으로 한 일파의 대립은 그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양파의 반복은 마침내 연산 4년 무오사화란 종직(宗直) 문도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동 10년 갑자사화에 걸쳐 종직 문도를 위시하여 다수한 사림이 참벌(斬伐)의 화를 당하고 종직과 같이 이미 사망한 자도 소위 천양(泉壤)1)의 화(剖棺斬屍)를 입었던 것이다.

1)천양(泉壤):구천(九泉)

연산은 원래 학문을 싫어하고 문사를 미워하며 온갖 오락을 탐하던 임금이라, 무오·갑자의 2대 사화 후로는 더욱 거리낌없이 황음(荒淫)2)에 몸을 던져 학문을 전폐하고 태학(성균관)을 유연소(遊宴所)로 삼아 미색 감가(酣歌)3)의 악을 마음대로 할새 정치는 저절로 부패하여 일시 암흑시대를 이루었다.

2)황음(荒淫): (주색에 빠져) 거칠고 음탕함.

3)감가(酣歌):술을 마시고 흥겨워 노래함.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의 거의(擧義)에 의하여 연산은 드디어 폐출되고 그 대신 성종의 차자(次子) 중종이 영립되니 때에 신왕의 나이 19세셨다. 중종은 천성이 어질고 학문을 좋아하여 즉위 후 연산의 폐정(弊政)을 개혁할새, 먼저 학궁(學宮)4)을 닦고 박사(博士)를 복치(復置)하고 경연을 설하는 등 문치(文治)에 뜻을 오로지 하는 동시에, 경술(經術)을 숭장하여 풍화(風化)의 진작을 도모하였다.

4)학궁(學宮): 성균관을 달리 이르는 말.

중종은 앞서 연산 갑자사화에 원주에 유적되었던 사계의 기숙(耆宿) 유숭조(柳崇祖;眞一齋)를 부르시어 성균관 대사성을 삼으시고 6년에는 친히 성균관에 행행하여 숭조로 하여금 「대학(大學)」을 강(講)하게 하실새 숭조는 열심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와 존심출치(存心出治)5)의 요(要)를 반복 설명하여 중종의 경청과 학전(學田) 100결의 특사를 받았고, 익일에는 숭조가 학생을 이끌고 예궐진사(詣闕陳謝)6)함과 동시에 자기의 「대학잠(大學箴)」 및 「성리연원촬요(性理淵原撮要)」 등 책을 바쳤다.

5)존심출치(存心出治):마음을 살펴야 다스림에 나갈 수 있음.

6)예궐진사(詣闕陳謝):대궐에 참내(參內)하여 사례함.

그리하여 중종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시어 곧 간행을 명하셨다.

이 두 책자는 도학 성리에 관한 것으로서 이후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자극을 준 것이라고 사유되며, 따라 전대의 문장 중심의 유학이 이후 도학 중심의 유학으로 전변하는 조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숭조는「대학잠」에 있어 더 일층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요(要)를 강조하였으니 대개 그는 전대 폐정에 깊이 거울한 바가 있어 이 중종유신의 치(治)에 당하여 ‘군심(君心)을 바로잡고 군지(君知)를 치(致)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아 「대학」의 도를 역설한 것이었다.

중종 때에 도학정치 즉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처음으로 주창한 이는 이 유숭조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숭조의 뒤를 이어 그의 이상과 주의를 본받아 후일 정계의 실무대에 나와 도학정치를 실제에 실현하려고 노력하던 이는 당시 성균관의 진사로 숭조의 교도를 받은 -여기에 말할 조광조 그였다. 바꿔 말하면 유숭조는 바로 조광조의 선배요, 중종조 도학정치 주창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니 조광조의 전기를 말함에 있어 먼저 주의할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조광조의 자는 효직(孝直)이요, 호는 정암(靜庵)이며 그 선조는 한양인이니 이조의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현손(玄孫)으로, 부는 사헌부 감찰 원강(元綱)이요 모는 여흥(驪興) 민씨(誼의 딸)요 할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 충손(衷孫)이었다. 성종 13년(1482) 8월 10일에 한양 본제(本第)에서 출생하니 광조의 자질이 수미(秀美)하여 어릴 때부터 성인의 의도(儀度)7)가 있었으며 장성함에 미쳐 학문에 뜻을 세워 성현을 숭모하는 마음이 나날이 증장(增長)하였다.

7)의도(儀度): 예의와 도량.

연산 원년에 부 원강이 어천(魚川;寧邊) 찰방(察訪)에 취임하였을 때 광조는 부를 좇아 그곳에 가 있던바, 4년 지나 무오사옥이 일어나 한훤 김굉필이 점필(김종직) 문도의 일인으로 인읍 희천(熙川)에 유배되매 일찌기 그(한훤) 학행(學行)의 높은 성명을 들은 광조는 곧 그에게 가서 학(學)을 문(問)하였다.

때에 광조의 나이 17세로서 처음으로 위학(爲學)의 대방(大方)을 얻어들은지라, 이로부터 각고면려하여 더욱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및 사서(四書)를 독신(篤信)하여 지조의 견확(堅確)함이 범인에 뛰어났다. 19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고 편모를 받들게 되었으나 조금도 학을 게을리함이 없었으며, 단 사장의 학은 본래 좋아하지 않고 따라서 과거의 업도 힘쓰지 않았지만 중종 5년 경오 생원시에 장원하여 인하여 태학(성균관)에 적을 두게 되었다.

이때 태학의 장(長)은 위에 말한 유숭조 바로 그였으므로 광조는 직접간접으로 그의 도학주의(道學主義)의 사상에 감염됨이 많았으리라고 믿는다. 사학으로는 김굉필의 계통을 잇고 관학으로는 유숭조의 사상을 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광조의 실천체험의 학은 전자에서 얻음이 많았다 하면 도학정치의 이론은 후자에서 배움이 컸을 것이다. 광조의 동지로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이때 대학의 사예사성(司藝司成)의 직을 봉하여(광조 등) 유생의 지도계급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학이란 최고학부는 일종의 과거준비소 혹은 관리양성소에 불과할 뿐더러 사습(士習)8)이 해이하여 실천체험의학을 닦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부적당한 곳이었다.

8)사습(習): 선비의 풍습.

대학에 적을 둔 광조는 이 결함을 보충키 위하여 자기 홀로 가끔 근기(近畿)의 명산심사(名山深寺)를 찾아 심신 수양에 남모르는 고미(苦味)를 맛보면서 주정공부(主靜工夫)에 매진하였으니 개성의 천마(天磨)·성거(聖居)와 지평(砥平)의 용문사는 다 그가 서유(栖遊)하던 곳이었다.

9) 서유(栖遊): 어정거리며 노님.

광조에 대한 촉망은 유생시대에 높아 성균관 및 예조의 누차 특천(特薦)으로 중종 10년(34세)에는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란 6품의 직을 초배(超拜)10)하였다.

10) 초배(超拜) : 관등을 뛰어넘어 임관됨.

광조는 이를 도리어 허예(虛譽)로 부끄러이 여겨

“차라리 과거에 의하여 출사함이 좋겠다” 하고

이해 8월에 알성시 (謁聖試)에 자부(自赴)하여 급제의 영(榮)을 획득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감찰을 역배한 후 동년 11월에는 사간원 정언에 탁제(擢除)되고 익 11·12년에 호·예·공(戶禮工) 3조의 좌랑을 거쳐 홍문관에 승질(陞秩)11)하여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등 직을 역임한 후 13년(37세)에는 통정대부, 부제학, 동부승지를 배수하더니 미구에 사헌부 대사헌이란 중직에 천임(遷任)되었다.

11) 승질(陞秩): 정3품 이상의 품계에 오름. 승자(陞資).

익 14년 기묘(38세) 봄에 재차 옥당(홍문관)에 들어가 부제학이 되었다가 이해 여름에 도로 대사헌에 전임되었다.

이와 같이 광조의 벼슬이 일진월승(日進月陞)하여 불과 3·4년 동안에 요추(要樞)의 지위에 서게 된 것은 중종이 유술(儒術)을 존상(尙)하고 문치에 주력하여 광조에 의중(倚重)하심이 컸던 까닭이거니와 중종의 은우(恩遇)는 실로 나날이 더해 갔다.

광조는 군은(君恩)에 감격하여 자기의 포부와 지식을 기울여 말로 글월로 주달(奏達)하기를 마지 아니하였으며 더욱 성인(철인)정치를 실제 행하려 하여 군심을 격(格;正)함으로써 선무(先務)를 삼아 이르기를

“군심은 출치(出治)의 근본이니 그 근본을 바로잡지 않으면 선정이 나올 수 없고 교화도 행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광조는 경연석상에서 매양 격(물) 치(지) 성(誠;心) 정(正;心)의 법과 조존징심(操存澄心)12)의 요(要)를 반복 설명하고 입지(立志)의 고대(高大), 사장의 불필요를 논하였으며 또 군자 소인의 변(辨)을 역진(力陳)하여

“인군은 군자를 깊이 믿어 써야 하고 소인을 신용하여서는 안 되나니 만일 소인을 쫓아내지 않으면 반드시 군자를 해하고 말 것이며”

“일심(一心)이 공명한 연후에 군자와 소인을 변별할 수 있으니 인군으로 도학의 수양이 부족하면 잘못 군자를 소인으로 혹은 소인을 군자로 아는 수가 있으며”

“군자와 소인은 본래 빙탄(氷炭)과 같이 상용(相容)치 못하여 소인은 주사야탁(書思夜度)으로 군자를 공척(攻斥)하기에 여념이 없어 필경 살육의 결과를 보이고 마나니 만일 소인으로 그 뜻을 얻고 그 술(術)을 행하는 날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화가 일어날 것이라.”

고 하였다.

12) 조존징심(操存澄心):지조가 있어야 마음이 맑아짐.

이는 대개 유자의 항다반 하는 소리라 하겠으나 광조는 무엇보다도 전대 2대 사화에 깊이 징감(懲鑑)13)한 바가 있어 특히 유의(有意)하게 발한 말이었다.

13) 징감(鑑) : 징계의 본보기로 삼음.

광조의 군자 소인의 변석(辨析)은 매양 심각한 동시에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는 이는 청류(淸流;군자)라 하고 반대로 달리하는 이는 소인이라 하기 때문에 도리어 일변인(一邊人)의 악감을 사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타일(他日)의 당화(黨禍)를 초치할 일인(一因)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 광조의 동지로 내외 요직에 처하여 활약하던 이는 김식(金湜;老泉), 김구(白菴), 김정(金淨;沖菴), 기준(奇遵;服齋), 한충(韓忠;松齋), 박훈(朴薰;江叟), 김안국(金安國;慕齋), 김정국(金正國;思齋)등의 소장기예(小壯氣銳)의 사류들이었는데 이들은 생각하기를 ‘이때야말로 도학정치를 행할 천재일우의 호기라' 하여 자기네의 이념을 현실화시키기에 급급하였다. 즉 이들은 선철고현(先哲古賢)의 궤범을 준봉(遵奉)하여 재래 동방의 규습(規習)을 개혁하는 동시에 중국의 구제(舊制)를 부활시키며 혹은 미신 타파, 혹은 교화 보급에 노력하여 일개 이상(理想)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지금 광조 등 일파의 주요한 업치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소격서란 것은 천지성신(天地星辰)을 초제14)하는 곳으로서(고려시대에도 있었지만) 이조 개국 초부터 관을 두어 행하여 오던 것인데, 이때 식자간에 혁파의 의논이 대두하여 대신 이하 여러 사람이 주청한 바 있었으나 중종께서는 조종(祖宗) 전래의 고사(故事)라 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매 13년 8월에는 광조(부제학)가 동료를 이끌고 입대(入對)를 청하여 그 폐를 극론하여 종야(終夜)토록 물러가지 않거늘 중종께서 할 수 없이 이에 좇아 폐지를 명하셨다.

14)초제: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

2) 천거과(薦擧科 (賢良科)의 시설

천거과는 옛날의 소위 현량과로 본시 서한(西漢;전한)의 제도니 과거라는 학술시험에 의하지 않고 관민 중의 재행(才行) 겸비자를 선택 천거하는 것이다. 중종 13년에 광조는 위에 아뢰어 가로되

“과거는 오로지 사장으로써 취하는 까닭에 부박(浮薄)의 습성만 기르기 쉬우니 내외 요관(官)으로 하여금 각각 재행의 사(士)를 천거케 하여 이를 대정(大庭)에 모아놓고 친히 책문(策問)하면 인물을 얻을 수 있다.”

고 하여 현량과의 시설을 청하였던바 대신 중에는 더러 이의자가 있었으나 중종은 광조의 말을 좇아 익 14년에 드디어 이 과를 설(設)하고 장령(掌令) 김식 등 28인을 탁발(擢拔)하였다.

3)교화사업

광조 등 신진 도학자들이 가장 흥미와 관심을 가지던 것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교화사업이었다. 중종 12년에 김안국이 경상관찰사로 있을 때 자소찬(自所撰)인 「이륜행실(二倫行實;諺解도 포함)」과 「소학(小學)」, 「여씨향약(呂氏鄕約)」, 「정속(正俗)」, 「농서(農書)」, 「잠서(蠶書)」 등의 언해와 「벽온방」, 「창진방(瘡疹方)」의 의서(醫書)를 간인(刊印)하여 도내에 퍼뜨리고, 익년에는 지중추(知中樞)의 직으로 이상 제서(諸書)를 각 도에 간포(刊布)하기를 청하였으며, 그 아우인 김정국은 당시 황해관찰사로 있어 경민편(警民) 12조를 지어 권선금악(勸善禁惡)하고 학령(學令) 24조를 지어 학자를 면려(勉勵)한 일이 있었다.

위의 책 중에 특히 「여씨향약」은 이때 신진 사류들 사이에 가장 주의를 이끌던 책이니 이것은 본시 송대(宋代)의 남전(藍田) 여씨의 일문이 향촌도화(鄕村導化)의 목적으로 권덕(勸德), 징과(懲過), 예의(禮儀), 환난상구(患難相救)를 주요 조건으로 삼아 만든 규약인바, 후에 다시 주자에 의하여 증손(增損)된 것이다(「주자대전」 중에 收載됨).

중종 14년에 광조는 김정(金淨) 등으로 더불어 「여씨향약」의 반행(頒行)을 주청하여

“화민성속에는 이 책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고 하여 드디어 국령(國令)으로 이를 중외에 시행케 하였다. 후일에 이르러 퇴계 이황의 향약, 율곡 이이의 향약 등을 위시하여 종종의 조선적 특색을 가미한 향약이 유행되었지만 어떻든 조선에서 향약을 실시하기는 이것으로써 최초의 선구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4) 선유(先儒)의 표창

중종 12년에 광조는 자기의 은사로 연산 갑자사화에 피살된 김굉필과, 굉필의 동문으로 동년에 천양의 화를 입은 정여창의 2인을 각각 추숭(追崇)하기를 계청(啓請)하매 중종이 이내 명하시어 양인에게 우의정의 직을 추증하시고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케 하셨다.

이해에 또 광조는 성균관유생 권전 등을 촉(囑)하여 정몽주,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소청케 하였더니 중종께서 여러 신하를 부르시어 가부를 의논하실새, 대신 중에 이론자가 많거늘 광조 등은 위의 양인 외에 오히려 정여창을 들어 그 공적을 격찬하는 동시에 세 사람이 다 문묘에 종사될 자격자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대신의 의논에 의하여 다만 몽주만을 종사케 하셨다.

광조가 특히 위 3인의 승무를 (직접 간접으로) 운동한 것은 물론 3인이 동방 이학(理學;道學)에 기여 공헌한 바가 크다는 것에 있지만, 또한 이들이 광조의 학적(學的) 연원에 있어 중요인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광조는 일찌기 김굉필에게 종학(從學)하고 굉필과 정여창은 함께 김종직의 문에 유하고 종직의 학은 그 부 숙자(叔滋)에게서 나오고 숙자는 야은 길재를, 또 길재는 포은 정몽주를 사사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즉 광조는 자기의 학적 계통에 있어 특히 도학자로 숭배하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의 세 사람을 문묘에 종사케 하려고 운동하던 것이니 도학의 창명(倡明)을 목적하던 광조 일파의 사위(事爲)는 또한 의의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다.

5) 위훈(僞勳)의 삭제

여기의 위훈이라 함은 앞서 중종반정 때에 별로 큰 공훈도 세우지 못하고 함부로 공신의 호를 받은 자를 일컬음이니 소위 위훈자 중에는 폐왕의 총신도 많이 들어 있었다. 광조 등은 이르되

“국가가 치(治)를 구하려 하는 이때에 당연히 이 일을 바로잡아 이원(利源)15)을 막아야 하겠다.”

하고 드디어 중종 14년 10월에 대간(臺諫)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 정국공신(반정공신)의 남수자(濫受者) 76인을 도태시키기를 청하였다.

15) 이원(利源): 이익이 나오는 근원.

광조 등의 이 주장은 비단 유교주의의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 입각 출발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정국공신 중에는 광조 등 신진 사류와 상용치 못할 광조 등의 이른 바 소인배가 많았던 까닭이다. 이 주청에 대하여 중종께서 처음에는 윤허치 않으시다가 여러 번 강청에 못이겨 나중에는 할 수 없어 청종(聽從)하시게 되었으나 심중에 불유쾌를 느끼셨다. 하물며 도태된 훈신가(勳臣家)의 불평은 상상하여 남음이 있을 것이다. 후술할 바와 같이 기묘사화의 직접 도화선이 여기에 있던 것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3

광조는 당시 신진 유자(儒者群;도학파)의 중견적 영수적 인물로 국사를 의논함에 항상 동지와 더불어 보조를 같이하고 임금 앞에 나가서는 알고서 말하지 않음이 없고 또 말하면 속에 있는 바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그 열성과 웅변은 매양 군심(君心)을 움직여 이미 술한 것과 같은 종종의 난문제라도 필경에는 자기들의 주창대로 통과되어 구규(舊規)와 숙폐(宿弊)를 개혁함에 자못 대담하였고, 더욱 교화의 보급, 도학의 창명을 그 임(任)으로 삼아 일세를 들어 도덕화시키기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소학」, 「향약」은 육재화속(育才化俗)의 방(方)이 되고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은 이학(도학) 지침의 책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 사기가 진작되고 민풍(民風)이 개선되고 조야가 다 그를 외경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때 광조 등 신진 사림 중에는 연소기예(年少氣銳)의 사람이 많아 그들은 조예가 아직 높지 못하고 너무도 이상에 부(富)하여 실사에는 어두운 편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건의시설(建議施設)이 매양 날카롭고 급격하고 우활(迂闊)할 뿐더러 구래 전통적 규습을 무시함이 컸고 항상 언론이 성하여 사람을 공격하면 원(怨)이 골수에 박히게 되고 노성대신(老成大臣)을 가리켜 비부(鄙夫) 혹은 소인이라고 배척하고 동지를 청류(淸流) 혹은 군자라 옹호하여 여기에 선배와 후진 사이에 신구노소의 충돌이 일어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중종 13년에 광조가 경연에서

“조종(祖宗)의 법으로 지금에 맞지 않는 것은 변통함이 좋다.”

고 주언(奏言)하였더니 선배인 안윤덕(安潤德)은 후일 경연에서

“구법은 마땅히 금석(金石)과 같이 굳게 지킬 것이니 변법(變法)의 도(徒;광조 등)가 한갓 시군(時君)의 뜻에 순(順)하려 함은 매우 불가하다.”

하거늘

이에 대하여 신진인 기준은

“전대의 법은 비록 주공(周公)의 제작일지라도 어찌 만세토록 폐가 없겠느냐.”

고 공척(攻斥)하였다는 것이라든지, 중종 14년 9월 (기묘사화 몇 달 전)에 천변(天變)으로 상이 여러 신하에게 미재(弭災)16)의 책(策)을 물으실 때 한충(韓忠 : 신진)이 진주(進)하되

“성상이 비록 여정구치(勵精求治)17) 하시나 비부가 수상의 지위에 있어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니 치도(治道)의 성(成)은 불가망(不可望)이라.”

하고 물러나오매 좌상 신용개(申用漑)는 안색을 변하여

“신진의 사가 상신(相臣)을 면(面)함이 이와 같으니 차습(此習)을 불가장(不可長)이라.”

하였다 함은 다 이때 신구노소 충돌의 일단을 엿보기에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弭: 활끝 미 그치다 미

16) 미재(弭災): 재난을 그치게 함.

17) 여정구치(勵精求治): 마음을 가다듬고 성의를 다해 다스림.

신구노소의 충돌뿐만 아니라 이학사장(理學詞章)의 반목도 있었으니 광조와 같은 신진 도학가는 도학을 편중하는 동시에 사장을 천시하여

“사장은 일종의 기예(技藝)에 불과하고 그것을 힘쓰면 부박(浮薄)에 빠지기 쉽다.”

“인주(人主)는 시를 짓는 것이 불가하고 신하에게도 지어 바치게 하지 말라.”

고까지 하매 선진 문학의 사(士)는 대개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재(時宰) 남곤과 같은 이는 당시 문명(文名)이 높던 선진 문사로 사장의 중요성을 역변하여

“사대교린(事大交隣)에 있어 사장은 중요한 것이니 권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장을 힘쓰는 자 어찌 다 부박하며 경학을 하는 자 어찌 다 부화(浮華)치 않다고 하랴? 사장과 경학은 똑같이 힘쓸 것이니 그 어느 쪽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라.”

고 하였다(「청구학총」제20호 申奭鎬씨의〈己卯士禍의 由來에 關한一考察〉참조).

여기서 우리는 당시 신진과 선진 사이에 종종의 대립이 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신진파는 대개 개혁적이요 급진적임에 대하여 선진파는 거의 수구적이요 점진적이며, 즉 신진파는 이상적이요 적극적임에 대하여 선진파는 거의 현실적이요 소극적이며 신진파는 도학을 중히 하고 사장을 배척함에 대하여 선진파는 도리어 사장을 주로 한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신구노소 양파의 대립과 반목은 확실히 당쟁적 경향을 띠게 되어 신진의 날카로운 공핵(攻劾)을 입은 선진 중에는 광조 등 신진을 거의 사갈시(蛇螺視)하는 일파가 있었다.

▶劾: 핵실하다 핵

▶眷 돌아볼 권

예조판서 남곤, 화천군(花川君) 심정(沈貞), 희빈(熙嬪)의 부 홍경주(洪景舟) 등은 즉 그 일파의 사람으로서 광조 등 신진에 대하여 깊이 분감을 품어 날로 기회와 틈을 엿보고 있었다. 중종은 본래 경술(經術)을 장려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임금이라, 처음 광조 등에 대한 권주(眷注)18) 은우는 기술(旣述)과 같이 비상한 바 있었지만 이들 신진사류의 개혁(또는 급진)주의와 지리장황한 주달(奏達)에 왕은 차차 염권(厭倦)을 느껴 경연석상에서 가끔 흠신(欠伸; 하품과 기지개)하신 적도 있었다. 이에 광조는 왕도의 실현이 졸연(猝然)치 않을 줄을 알고 매양 사퇴를 역청(力請)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도리어 중직이 가하여질 뿐이었다.

18) 권주(眷注): 사랑을 기울여 돌봄.

4

중종 14년 기묘 10월 광조 등에 의하여 정국공신 남수자 도태문제가 일어나매 훈신가의 소동은 물론 왕도 역시 큰 불쾌를 느끼셨다 함은 기술한 바이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틈을 엿보고 있는 홍경주, 남곤, 심정 등에게 호기를 준 것이었다. 즉 경주와 곤, 정 등은 서로 결탁하여 왕의 (광조등에 대한) 불유쾌를 호기로 비밀리에 궁중과 연락하여 정적(政敵)을 타도하려 하였다. 때에 마침 천변(흰 무지개가 해를 꿴), 지변(지진)이 교발(交發)할 새 왕은 이것이 무슨 인사(人事)에 대한 하늘의 경고가 아닌가 혹은 어떤 불길의 조짐이 아닌가 하여 대단히 우구하셨다.

경주는 그 딸 희빈으로 하여금 궁중에 와언(言)하되 일국의 인심이 다 조씨(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심정도 궁녀를 통하여

“조광조 등이 국정을 전담하고 국인(國人)은 이를 환영하여 왕을 삼으려 한다.”

고 무고하고 또 이에 앞서 가만히 사람을 시켜 감즙(甘汁)으로 금원(禁苑 ; 궐내 후원)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넉 자를 써서 벌레가 먹어 글자를 이룬 뒤에 궁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따서 위에 바치게 한 일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는 잎과 벌레가 있을 때의 일이므로 실상 이(겨울 10월·11월)보다 앞서 늦어도 이해 여름·가을경에 꾸민 장난이 아니었던가 한다. ‘주초위왕’은 말할 것도 없이 조씨가 왕이 된다는 말이니 이 사위적 참설(讖說)19)은 국초 이래로 유행하여 오는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이란 참설에서 일전(一轉)된 것일 것이다(走肖大夫筆은 국초의 정승 趙浚을 가리킨 것이라 함).

19) 참설(說): 앞에 올 일을 예언하는 말.

이러한 유언(流言)과 사기는 중종으로 하여금 날로 의구의 염을 더하게 하여 전일 현사(賢士)로 은우비상(恩遇非常)하던 광조를 이제는 망탁(葬卓;王莽,董卓)으로 의심하여 왕의 태도는 가이 급전직하로 변하게 되었다. 11월 11일 정국공신 유순(柳) 이하 76인의 삭제가 정식으로 결정되자 홍경주 등은 훈신가의 불안을 절대의 호기로 하여 극비밀리에 숙계(宿計)를 촉진시켜 궐내와 그 맥을 상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종은 이달 15일 밤에 밀지로써 홍경주, 남곤, 김전(金詮; 지중추부사), 심정, 이장곤(李長坤 ;兵判) 등을 소입(召入)하여 군졸로 경복궁의 안팎을 옹위한 후 이들로 더불어 광조 등의 죄형(罪刑)을 논하고 동시에 금부에 명하여 광조와 그 동지인 윤자임(尹自任;승지), 기준(응교), 이자(우참찬), 김정(형판), 김구(부제학), 김식(대사성), 유인숙(柳仁淑;도승지), 박세훈(朴世薰;좌부승지), 홍언필(洪彦弼;우부승지), 박훈(동부승지) 등 제인(諸人)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이때 곤·정 및 경주는

“일이 급하여 국문할 겨를이 없으니 즉시 광조 등을 궐정(闕庭)으로 잡아들여 박살하자.”

고 주장하매 이장곤, 김전 등은 이에 반대하여

“영상(수상)을 불러 신중히 상의함이 옳다.”

고 하였다.

중종은 이에 노하심이 조금 풀려 곧 영상 정광필 이하 여러 재상을 소입하여 이상 밀소(密召) 제신(諸臣)들로 더불어 광조 등의 죄를 의논케 하시니 여러 재신(宰臣)은 다 유사(有司 ; 관리)에 부하야 치죄하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죄안을 초(草)하되

“광조 등이 붕당을 이루어 사귀며 자기에게 붙는 자를 승진시키고 반대하는 자를 배척하며 명성과 형세가 서로 어울리고 권세의 요직에 기반을 두며 임금을 속이고 행동을 제멋대로 하면서 뒷일을 염려하거나 꺼림이 없으며 후진을 꾀어 언행이 상도(常道)를 벗어나 과격하게 괴이함이 습관이 되어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을 능멸하고 천한 것으로 귀한 것을 방해하여 국세(國勢)를 전도시켜 조정을 날로 잘못되게 하매 조정의 신하들이 남몰래 분한 마음을 품었으나 그 맹렬한 기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고 곁눈질을 하며 두려워서 움츠렸다 운운.” (편집자 역)

이라 하였던바,

광필은 그중의 한 구어를 힐난하여

“이 무리들이 과격한 죄는 있으나 무상행사(誣上行私)한 죄적(罪跡)은 없으니 그것은 고려함이 좋다.”

하매 중종도 그것의 개서(改書)를 명하였다.

죄인은 광조, 정, 구, 식, 자임, 세희, 훈, 준 등 8인 외에는 다 석방케 하고 김전, 이장곤 등을 추관(推官 : 재판관)으로 삼아 8인을 치죄케 하였다.

의외의 변을 당한 광조는 자기의 무죄 억울한 뜻을 공술(供述)하여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믿는 바는 군심이니 자기는 국가의 병통(病痛)이 이원(利源)에 있는 줄로 망찰(妄察)하고 국맥을 무궁히 새롭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요 조금도 다른 뜻은 없노라.”

고 변명하였다.

기타 김정, 김구 이하 제인은 역시 자기네들의 교류가 무슨 당파적 야심과 화부(和附)20)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서로 고도(古道)를 강(講)하여 요순(堯舜)의 치를 실현하려고 함에 있었다는 것을 공술하였다.

20) 화(和附): 부화뇌동(附和雷同)함.

영상 정광필, 우상 안당 등은 중종께 아뢰되 그들의 언론이 과격하다 하여 죄하면 몰라도 탁란(濁亂)21)으로 지목하여 죄하면 온당치 못할 뿐더러 국가의 언로(言路)가 막힐까 염려하니 그 죄를 작량감경(酌量減輕)하자고 청하였다.

21) 탁란(濁亂): 난을 일으켜 흐리게 함.

그러나 왕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추관의 취조 안율(按律)은 역시 엄혹하여 광조, 김정, 김식, 김구의 4인은 참형에,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의 4인은 장류(杖流)에 처하기를 주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종은 광조, 김정에게는 사(死)를 사하고, 그 나머지는 장류에 처하게 하려 하실새 광필이 그 불가함을 반복 논간(論諫)하여 드디어 광조 등 4인은 다 그 고신(告身; 직첩)을 뺏고 장(杖) 100에 처하여 원방(遠方)에 안치하기로 하고 자임 등 4인은 역시 그 고신을 뺏고 속장(贖杖)22) 100하여 외방(外方)에 처하기로 하였다. 이때 광필은 또다시 광조 등 4인의 장형도 속(贖)하기를 청하였으나 처음엔 윤허되지 않았고 광조는 마침내 전라도 능성(綾城;綾州)으로 찬배되고 말았다. 사가(史家)는 이를 기묘사화라고 일컫는다.

22) 속장(贖杖) : 금품을 내고 죄를 면함.

이 광조 등의 처벌에 대하여 사류들 사이에는 자못 논의가 비등하여 성균관 유생 이약수(李若水) 등 150여 인이 궐기하여 상소로써 광조 등의 면(寃)을 항소하다가 도리어 벌을 받고, 대사헌 유운(柳雲), 사간 오결(吳潔) 등도 광조 등의 죄를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광조 등의 정적 일파에서는 그들의 승리를 쾌사로 여기는 동시에 후일을 염려하여 갖은 참언을 조출(造出)하여 광조 등을 위하여 감형을 주장하던 영상 정광필, 좌상 안당은 다 직을 파하고 남곤은 대신 들어가 좌상이 되고 심정은 형조판서를 배하였다(앞서 광조 등에 의하여 도태된 정국공신을 이미 追하고 또 그들의 주장으로 시설된 현량과도 파하게 되었다). 남곤의 입상(入相)과 동시에 광조의 운명은 더욱 험악하게 되어 즉시 사사(賜死)의 처분이 내렸다.

사사의 명을 받들어 능성의 광조 적소에 간 사람은 의금부 도사 유엄이니 이때 광조는 엄에게 대하여

“단지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문(文)은 없느냐.”

고 물으매 엄이 소지(小紙;쪽지)에 적은 것을 내보이거늘 광조 가로되

“내가 일찌기 대부(大夫)의 열에 있었거늘 지금 사(死)를 사(賜)함에 어찌 소지만으로 도사에게 부(付)하여 신(信)을 삼게 하느냐. 만일 도사의 말이 아니면 믿기 어려울 듯하다.”

고 하였다.

광조의 생각에는 도사는 자기를 속이지 않을 것 같으나 혹 중간에 적당인(敵黨人)이 (왕도 모르게) 왕명을 교칭(矯稱)하여 도사에게 부한 것이 아닌가 하여 반복 질문한 바였다. 그리하여 광조는 또 묻되

“지금 정승은 누가 되었으며 심정은 무슨 벼슬에 있느냐.”

고 하매 엄이 사실대로 말하니 광조 가로대

“그러면 나의 죽음은 의심없다.”

하고 재차 묻기를

“조정에서 우리를 어떻게 여기느냐"

고 한즉 엄이 대답하되

“아마 그대들을 왕망같이 말하는 자가 있다.”

하였다.

광조 웃어 가로되

“왕망은 자기만 위하던 자이다.”

하고 곧 도사의 허락을 받아 사후를 부탁하는 가서(家書)를 써서 집에 부치고 또 명명백백한 중심을 토하는 시를 지어

“임금을 사랑함은 아버지를 사랑함과 같다

나라를 걱정함은 집안을 걱정함과 같다

밝은 해가 이 땅에 임하여

충성스런 마음을 비추게 하라”(편집자 역)23)

라고 써놓고 드디어 독주의 사약을 받아 다량으로 마시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23)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때는 중종 14년 기묘 12월 20일이니 광조의 나이 38세였다.

선조 원년에 이르러 영의정을 추증하고 익년에 시(諡)를 문정(文正)이라 사하고 광해군 2년에는 문묘에 종사되어 동방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의 일인으로 숭배를 받아 왔다.

유저로는 그의 시문을 수집한 「정암집(靜庵集)」 약간 권이 세간에 행하여 오니 분량은 적으나 그의 학문사상을 궁구하기에 유일한 문자가 된다.

이퇴계는 정암의 행장(行狀)을 찬(撰)하여 그중에

“유교의 도를 믿는 자에게는 입언수후(立言垂後)24)라는 한 가지 일이 있는 법이다. 이제 선생은 그렇지 못하다. 첫 번째 불행은 정계에 등용되어 크게 내달린 것이며, 두 번째 불행은 물러남을 구했으면서도 되지 못한 바이며, 세 번째 불행은 적소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그 입언수후의 일에 대해서는 또한 이미 좇을 수 있는 바가 없도다.” (편집자 역)

라 하여 '입언수후'의 일사(一事)가 정암에게 결함되었던 것을 큰 유감으로 여겼다.

24) 입언수후(言垂後):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의견을 세우고 뒤에 영향을 미침.

'입언수후’는 즉 도덕학문에 관한 선언가설(善言嘉說)을 많이 저술하여 후인에게 남겨 주는 것을 이름이니, 퇴계는 정암이 출세의 여러가지 불행으로 거기에 미치지 못한 것을 탄식한 것이다.

대개 퇴계는 입언수후로써 유자의 본령본색(本領本色)을 삼고 출세행도(出世行道)를 그 부수적 사업으로 여겨 세상에 나아가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면 물러와 입언수후의 길을 찾는 것이 유자의 본분이라고 사유하였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이 점에 있어서는 정암보다도 유저가 풍부한 영남의 이회재(李晦齋 ; 언적)를 더높이 우러러보아 매양 그의 도학을 칭도하여 마지 않았지만, 특히 회재행장에서 퇴계는

“우리 선생이 수수(授受)의 장소(정계)에 있지 않아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하여 어둠이 날로 밝아지고 덕이 행동에 부합하여 입언수후의 글이 빛났다. 동방에서 그러한 윤리를 가진 자는 거의 없다.”(편집자 역)

라 하여 동방의 제일 유자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퇴계보다 후배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조종(祖宗)인 이율곡은 퇴계와 유자관(儒子觀)을 달리하여 회재보다도 정암을 동방 제일의 유자로 앙시하여 매양 정암의 자질의 절승함과 도학으로 일세를 지도함과 더욱 그 경제(정치)의 재(才)의 탁월함을 일컬어 마지 않았다(단 그 학문의 조예가 깊지 못했던 것은 율곡도 인정하였다).

정암의 정치사상과 그 재국(才局)25)이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아 율곡의 칭송을 그대로 시인할 것이냐 아니냐 함은 별문제로 삼고 어떻든 율곡은 입언수후의 일사만으로는 진유(眞儒)의 여부를 저울질할 수 없고 출처의 의(宜)와 경제의 재를 겸한 이라야 대현(大賢)으로 여겼다.

25) 재국(局): 재주와 국량.

학문이 비록 바르고 저술이 비록 풍부할지라도 이 조건에 결함이 있으면 진유로 치지 않았다. 그래서 율곡은 회재에 대해서는 출처의 의와 경제의 재를 인정치 않아 대현의 열에 넣지 않으려 하였으니 선조 6년 8월에 성균관 유생이 5현(위에서 본)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을 때도 율곡은

“5현 중 김문경(굉필), 정문헌(여창)은 언론풍지(言論風旨)가 미이불현(微而不顯)26)하고 이문원(언적)은 출처에 자못 의(議)할 곳이 있으며 다만 조문정(광조)은 도학을 창명하여 후인을 계유(啓牖)27)하고 이문순(황)은 의리에 침잠하여 일시에 모범이었은 즉 이 2인을 표출종사(表出從祀)하면 누가 불가하다 하리오.” (「경연일기」2)

하였다.

26) 미이불현(微而不顯):미미하여 드러남이 없음.

27) 계유(啓牖): 깨우쳐 일깨움.

회재는 정·김 2현과 아울러 문묘 종사의 자격이 부족함을 말하였다.

퇴계와 율곡의 유자관이 다소 다른 것은 다 그 자질 성향의 각각 반영으로서 퇴계는 성(性)이 온겸침잠(溫謙沈潛)하여 주정(主靜)의 학(學)을 좋아하는 동시에 항상 정치 방면에 활동하기를 싫어하였으나, 율곡은 자품(資票)이 고명통철(高明通澈)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과 규범을 좋아하는 동시에 정계에 나서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어떻든 정암과 율곡은 그 천분에 있어서나 출처에 있어 서로 근사(近似)한 점이 있었던 것과 정암의 사상이 이율곡에 영향함이 컸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