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맹사성(孟思誠)시호/호=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6. 24.
반응형

맹사성(孟思誠)시호/호

문정(文貞)
고불(古佛), 동포(東浦)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후세인들은 맹고불이라 하면 검은 소 등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노인을 연상할 정도로 친근한 존재였다.

성격이 소탈했던 그는 외출할 때면 소 타기를 즐겼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다. 집에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해 맞이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했다.

▲맹사성

실록에서는 그를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조정의 큰일이나 관직에서 일을 처리할 때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황희는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이 전해지지만 맹사성은 상대적으로 그 업적이 확실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서의 소박한 삶과 진솔한 인품만이 부각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음률에 대한 지식과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강호사시가〉를 통한 문학적 재능은 성군 세종이 그를 왜 중용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

역성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맹사성(孟思誠)은 1360년(공민왕 9년) 7월 17일 수문전제학 맹희도의 맏아들로 온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창,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혹은 동포(東浦)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렸다.

그의 탄생과 어린 시절은 두 가지의 야담으로 전해진다. 아버지 맹희도는 어린 시절부터 정몽주와 절친한 친구였다. 1359년 정몽주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자신은 낙방하자 절간에 들어가 절치부심하고 과거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 맹유는 며느리 조씨로부터 뜨거운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급히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 결과 조씨는 맹사성을 잉태했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맹희도는 과거에 급제하는 겹경사를 안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한 마을에 살던 최영이 낮잠을 자다가 짙은 안개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배나무에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보니 어린 맹사성이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최영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맹유에게 찾아가 자신의 손녀딸과 혼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맹사성은 고려 말의 명장이자 충신 최영을 처조부로 모시게 되었다.

그 무렵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과 세제의 문란, 권신들의 전횡으로 인해 국운이 날로 쇠약해져 갔다. 공민왕이 중용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조정에 일대 개혁의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할아버지 맹유는 이부상서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아버지 맹희도는 정치와 거리가 먼 수문관 제학의 직위에 있었으므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권근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맹사성은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10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정신적으로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뒤늦게 마음을 다잡은 그는 25세의 늦은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단 1년 만에 전 과목 합격증서인 조흘첩(照訖帖)을 받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1386년(우왕 12년)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정8품 춘추관 검열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쳤지만 1392년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이 연합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사수하려던 최영의 사돈이었던 그의 집안에 모진 풍파가 몰려왔다.

할아버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일원으로 은거하다 불타 죽었고, 함께 두문동에 머물던 아버지 맹희도는 충청도 한산으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아산에 있는 최영의 집에 금곡서원을 세워 유학 전파에 몰두하는 한편 아들 맹사성에게 출사를 종용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너는 아직 젊으니 미래를 찾아 가거라.”

태종 시대의 우여곡절

맹사성이 조정에 나오자 인재난에 허덕이고 있던 태조 이성계는 반색을 하며 그에게 수원 판관을 제수했다. 그가 최영의 손녀사위라고 해서 연좌시킬 만큼 이성계는 옹졸한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맹사성은 면천 현감을 거쳐 예조 좌랑으로 승진했고, 1406년(태종 6년)에는 정3품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인 1407년(태종 7년)에는 예문관 제학을 겸직했는데, 그해 4월 18일에 실시된 친시에서 황희와 함께 대독관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세자가 명나라에 갈 때 시종관으로 동행한 맹사성은 예문관 제학, 한성부윤을 거쳐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이 되었다. 그처럼 조선 조정에서 승승장구하던 맹사성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임하던 1408년에 목인해의 밀고로 역모 혐의를 받은 부마 조대림을 취조했다가 큰 낭패를 겪었다.

조대림은 개국공신이며 당시 영의정 조준의 아들이었는데 자질이 경망스러웠다. 조대림의 집 여종 한 사람이 관노 출신의 호군 목인해라는 자의 아내였다. 목인해는 그 인연으로 조대림과 자주 만나 태종의 신임을 받을 계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무사를 꾀어 궁궐에 침입하게 한 다음 사전에 잡아내 공을 세우고자 했다. 한데 목인해는 이 계책을 조대림의 역모로 뒤바꾸어 밀고했다. 사안이 사헌부에 이첩되자 대사헌 맹사성은 직권으로 조대림에게 국문을 가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대노하여 왕실을 능멸했다는 구실로 사헌부 관리들을 모조리 하옥하는 한편 최고책임자였던 맹사성을 죽이려 했다. 하찮은 모리배의 간계가 왕실을 농락한 일대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러자 영의정 성석린과 황희, 권근, 하륜, 성석린, 조영무 등 공신들이 나서서 일제히 그를 변호했다.

“맹사성은 모반한 것도 아니며 무고한 것도 아닌데 극형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심합니다.”

그러자 태종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차후 왕실을 모독하는 짓은 어떤 일도 용납하지 않겠다.”

그렇게 해서 맹사성은 장 1백대를 맞고 한주에 있는 향교로 유배됐다. 기실 이 사건은 태종이 신하들을 제어하기 위해 맹사성을 시범케이스로 삼은 것이었다. 이듬해인 1409년(태종 9년) 태종은 그에게 직첩을 돌려주고 외직으로 전근시키는 한편 미두 20석을 하사하며 위로했다.

1411년(태종 11년) 12월 9일, 태종은 맹사성과 유정현, 이승상 등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었고, 이듬해 그를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그러자 영의정 하륜이 태종을 말렸다.

“지금 예악을 바로잡는 것이 시급한데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외직에 보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부디 예조에 머물러 악공들을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맹사성은 예조에 계속 머물다 1416년(태종 16년)에 예조판서, 이듬해인 1417년(태종 17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만큼 태종은 맹사성을 신임하고 있었다. 그해에 생원시의 시관으로 권채 등 100인을 뽑았으며 임금이 친림한 문과복시에 득권관이 되었다. 당시 맹사성이 중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이어서 호조판서에 임명된 뒤 재차 사직을 청하자 태종은 그를 재임 중에도 간병하기 편하도록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내의원에 명하여 탕약을 하사했다.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거듭나다!

▲맹사성

1418년(태종 18년) 아버지 맹희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공조판서 겸 세자우빈객으로 삼았다. 얼마 후 세자 이제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으로 격하되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다음 곧바로 보위에 오르자 맹사성은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세종은 예술적 품성이 뛰어난 맹사성의 능력을 존중해 관습도감 제조를 겸하게 했다. 이후 예문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 판주군 도총제부사 등의 요직을 역임한 맹사성은 1427년(세종 9년)에 이르러 우의정이 되었다.

당시 그는 원칙주의자인 허조와 일벌레 황희 사이에서 원만하게 사안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수많은 천재들이 등장하여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과학입국의 미래를 다져나가던 그 시기에 맹사성은 신료들의 개성과 자율 속에서 드러내기 쉬운 아집과 독선을 조율해주는 따뜻한 존재였다.

세종은 즉위 이후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황희와 맹사성, 윤회 등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나누어 담당하게 했다. 성격이 분명하고 강직한 황희에게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부드럽고 섬세한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사교성이 뛰어난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다. 과거를 통한 인재 등용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시켰다.

이에 따라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진력했고,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했다. 맹사성은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에 종사했다. 윤회는 외교 문서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그들은 맡은 분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종종 업무를 분담하거나 공유하면서 효율성을 높였다.

맹사성은 평생 임금의 뜻에 따라 조용히 소임을 다했지만 마냥 예스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이 말년에 소헌왕후와 영응대군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려 하자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내세우며 신료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세종이 권도를 내세우며 완강하게 내불당 건립을 밀어붙이자 임금의 친위세력이었던 집현전 학사들까지 끌어들여 맞섰던 것이다.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兼判吏曺事世子傅贈諡文貞孟公之墓’"

▣예악의 정비에 앞장서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이 편안해서 즐거우면 정치가 조화롭게 된다. 이 때문에 성(聲)으로 음(音)을 알고, 음을 살펴 악(樂)을 알고, 악을 살펴 정치를 알게 되어 정치의 도리가 갖추어진다.’

《예기》에서 음악과 정치의 상관관계를 설파한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순 임금이 거문고를 타니 봉황이 와서 놀았으므로 태평성대가 도래할 것을 알았고 정나라의 타락한 음악이 유행하니 천하가 어지러워질 줄 알았다고 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창업 초기부터 예악을 매우 중요시했다. 예(禮)는 천지의 질서이고 악(樂)은 천지의 마음이므로 한 나라에 예악이 잘 갖추어져야만 백성들이 선악의 이치를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와 악을 함께 지니면 덕이 있다고 한다. 곧 덕은 예악을 지니는 것이다.”

세종은 이런 《예기》의 정신을 신봉했고 자신의 시대에 조선의 독자적인 예악을 완비하고자 했다. 유교에서 예악이란 본래 군자를 대상으로 했다. 곧 학문을 배우고 익혀 세상을 다스릴만한 인재들의 덕목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세종은 신생국 조선에서 무엇보다도 궁중예악의 완비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세종은 등극하자마자 우의정 맹사성에게 예악의 정비를 총괄하게 했다. 그의 음악 실력은 《태종실록》에서 악보에 바르다고 상찬할 만큼 조정에서 공인된 것이었다. 어명을 받은 맹사성은 박연, 남급, 정양 등과 함께 채원정의 《율려신서》, 주자의 《의례경전서》, 임우의 《석전악보》 등을 깊이 연구하면서 예악 확립에 골몰했다. 박연은 음악에 관한 한 당대 제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고, 정양은 박연과 악기를 만든 악사였으며, 남급은 악기제작 전문가였다.

맹사성은 우선 궁중의식에 쓰이는 아악(雅樂)의 정비에 돌입했다. 아악은 통상 전통음악으로 문묘제례악을 가리키지만 넓은 뜻으로는 의식에 쓰이는 당악(唐樂), 향악(鄕樂) 등을 포괄한다. 실무자인 박연은 고대 주나라에 가까운 아악으로 복원하여 음악의 기초를 확립했다. 1430년(세종 12년) 윤12월에는 제사 아악보와 조회 아악보를 완성하는 등 각종 악보를 만듦으로써 조선의 공식의례음악을 완성시켰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평소 궁중의례에 우리 음악인 향악을 쓰지 않고 당악을 쓰는 데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박연을 비롯한 실무관료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맹사성은 전통 음악과 중국 음악을 조화하고 융합하는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양측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세종은 1447년(세종 29년) 6월, 〈용비어천가〉 중에서 봉래의 7곡, 정대업 15곡, 보태평 11곡, 발상 11곡을 직접 작곡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용비어천가<용비어천가> 권10(왼쪽), 권9(오른쪽). 약간의 수침으로 인해 얼룩과 훼손이 있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후대에 권별로 분책되고 개장되었다. 보물 제1463-1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계명대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종은 아악의 정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정확하게 연주할 우리의 악기 제작을 독려했다. 1423년(세종 5년) 정양과 남급의 노력에 힘입어 금, 슬, 대쟁, 생, 봉소 등의 악기가 만들어졌다. 이듬해에는 화, 우, 피리, 훈, 지 아쟁,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도 완성되었다. 한데 이들 악기의 기본음이 통일되지 않아 소리가 어색했다.

본래 고려 예종 때 송나라 황제 휘종이 제례악에 쓰이는 종(鍾), 경(磬) 각 1채와 여러 악기들을 각각 2부씩 내려주었는데 매우 정밀했다. 하지만 홍건적의 침입 때 대부분 유실되고 늙은 악공이 종, 경 두 악기를 연못 속에 던져 넣어 조선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그 뒤 명나라 태조와 태종이 또 종과 경을 보내주었지만 모양이 거칠고 소리도 좋지 않았다.

1425년(세종 7년) 경 예조에서 제향에 사용하는 석경(石磬)은 송나라의 것 하나뿐이어서, 임시방편으로 기와로 만든 와경(瓦磬)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종의 모양도 제각각이고 숫자도 부족해 소리가 어지러웠다.

이에 대하여 세종이 불만을 터뜨리자 맹사성은 그 동안 연구한 《율려신서》를 바탕으로 박연과 함께 석경 제조에 나섰다. 때마침 석경의 재료인 경석이 남양 지방에서 생산되었고 소리를 조율하는 검은 기장이 해주에서 났으므로 좋은 징조였다. 그런데 정작 석경을 완성해놓고 보니 기본음인 황종음이 중국의 그것보다 높았다. 하지만 세종의 격려에 힘입은 박연은 1427년(세종 9년) 드디어 1틀에 12개 달린 조선식 석경을 완성했다.

박연은 석경의 황종음을 기준으로 응종까지 3분씩 자르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을 써서 12개의 해죽으로 된 율관(律管)을 만든 다음 검은 기장으로 조율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각종 악기를 그 소리에 맞추도록 했다.

맹사성은 그 후 세종이 정간보를 제작하는 데도 일조했다. 당시 악보는 입소리로 기보하는 육보와 중국에서 들어온 율자보, 공척보 등 세 가지가 있었는데 모두가 음의 높이는 알 수 있으나 시가(時價)는 알 수 없었다. 악보는 어떤 음악이든 연주할 수 있도록 간편하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세종은 고심 끝에 음의 시가와 박자를 모두 표기할 수 있는 정간보를 고안해 냈다.

정간보는 1회 32정간, 또는 16정간으로 나누고 각 칸 속에 율명을 써서 음의 높이를 나타낸다. 또 그 옆줄에 고법, 박법, 가사 등을 적은 총보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정간보는 음이 비교적 단순한 당악이나 아악에는 소용되지 않았지만 복잡한 리듬을 가진 향악과 고취악에는 필수적이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예악의 정비에는 학구파 군주 세종과 실무자 박연의 활약이 필수적이었지만 천재적인 그들의 독선을 조정하고 양보를 이끌어냈던 총괄책임자 맹사성이 없었다면 심각한 마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저강 정벌을 주도하다

세종 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방 영토가 확정됐다.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그 무렵 건주여진의 일파인 올량합 부족은 추장 이만주를 따라 파저강 유역과 회령 북쪽 두문 지역에 분산하여 살면서 중국 요동 지역과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수시로 침범해 노략질을 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군사요충지인 여연 지역은 매우 민감한 분쟁지역이 되고 말았다.

1422년(세종 4년) 10월, 2백여 명의 여진족들이 경원 부회환을 습격했다가 첨절제사 전시귀에 의해 쫓겨났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상호군 김효성을 함길도 조전 첨절제사에 임명하고 함길도 출신의 금군 23명을 데려가 함길도 병력을 지원하게 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여진족들은 압록강 쪽 여연, 강계, 의주 쪽으로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습격해 양식을 탈취해갔다.

이후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들은 점차 부족들이 연합하여 공격해 왔고, 조선의 회유정책도 잘 통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경원부를 옮기자는 논의까지 나왔지만 요소요소에 목책을 세우고 둔전군을 배치하면 된다는 공조판서 이천의 반대로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함길도 쪽에 대한 방어 대책은 가닥을 잡았지만 평안도 쪽은 여전히 골치가 아팠다. 여진족 거주지역이 명나라의 영토였으므로 함부로 월경하기가 찜찜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1433년(세종 15년) 평안감사가 급보를 알려왔다.

“야인 4백여 기가 여연군에 침입했는데 여연절제사 김경과 강계절제사 박초가 맞서 싸워 26명을 사로잡고 말 30필, 소 50마리를 되찾았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13명, 부상 25명입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홍사석에게 사건 조사를 맡겼다. 그 결과 파저강 인근에 자리잡고 있던 올량합족 추장 이만주가 작은 추장 임할라를 보내 야인 4백 명을 올적합 족처럼 위장해 공격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조선군을 죽이고 수많은 포로를 잡아간 뒤 조선군의 대규모 보복이 두려웠던지 주민 7명을 돌려보내며 이렇게 변명했다.

“이번 일은 올적합의 소행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포로 64명을 빼앗았으니 곧 돌려드리겠습니다.”

사건의 내막을 파악한 세종은 분개했다.

“참으로 비열한 작자로다. 저들이 변경을 침범해 내 백성들을 죽이고 사로잡아가는 데도 가만히 있다면 조선은 나라가 아니다. 경들은 야인 토벌에 대해 논의하라.”

그러자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문제는 현재 여진족 거주지를 공격하려면 압록강을 넘어야 하는데, 그곳은 명백한 명나라의 영토라는 점이었다. 영의정 황희는 방어를 위한 군사행동이므로 사대하는 의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보고를 미루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좌의정 맹사성은 돌다리도 두드려 본 다음 건너가야 한다면서 아무리 다급해도 명나라의 추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때 허조와 최윤덕은 보고 자체가 명나라에게 국정간섭의 빌미를 주는 것이라며 아예 거병 자체를 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이에 세종은 맹사성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로 하여금 여진 정벌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맹사성에 의해 여진족 정벌 시기, 군사 규모,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 조직, 7개 부대에 의한 동시다발적 기습 작전 등이 확정되었다.

2월 21일 세종은 최해산에게 명하여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는 한편 박호문과 박원무를 이만주에게 보내 포로 소환을 핑계로 적정을 탐지해 오도록 했다. 명을 받은 두 사람은 파저강 건너 올량합 부락으로 가서 이만주를 만나 올적합 족으로부터 조선인 포로를 빼앗은 공을 칭찬하면서 방심을 유도했다. 그들은 현지에서 이틀 밤을 묵으며 그곳의 지형과 군사배치상황을 알아낸 다음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3월 7일, 세종은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의 건의를 받아들여 토벌군을 1만여 명으로 증강했다. 또 갑작스런 조선의 대규모 군사행동으로 인해 동북 방면의 알타리 족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추장인 동맹가티무르에게 이번 야인정벌의 목적을 알렸다. 동시에 좌승지 최치운을 명나라로 보내 여진 정벌의 취지를 보고하자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내 일찍이 변방의 족속들에게 제 땅을 지키고 서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임금이 기회를 보아 단속하라.”

이렇게 해서 야인 정벌 준비는 모두 끝났다. 디데이인 3월 17일,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은 평안도 군대 1만, 황해도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중군 절제사 이순몽, 우군 절제사 이각, 좌군 절제사 최해산, 조전 절제사 이징석, 김효성, 홍사석 등 6명의 장수들과 함께 4월 10일 장도에 올랐다. 조선의 대군은 강계부에 모여 전열을 정비한 다음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군의 갑작스런 총공세에 여진족은 혼비백산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궤멸되고 말았다.

당시의 전과를 살펴보면 야인 생포 236명, 사살 183명, 노획한 마소는 총 177마리인데 비해 정벌군의 피해는 사망 4명에 부상 25명이었다. 큰 전과는 아니었지만 일방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이렇듯 세종의 결단에 의해 치러진 야인 정벌은 5월 19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파저강 정벌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맹사성은 모든 공을 최윤덕에게로 돌려 그를 우의정으로 제수해 달라고 건의했다. 한데 문관이 대부분이었던 조정 신료들은 무장인 최윤덕의 파격적인 승진을 고까워했고, 허조까지 원칙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맹사성은 자신이 맡고 있던 좌의정 직을 내놓겠다는 강수를 두어 최윤덕의 우의정 승진을 관철시켰다. 마냥 유연하게만 보였던 맹사성이 고집을 부리자 깜짝 놀란 신료들이 물러섰고, 세종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최윤덕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청백리의 자취를 남기다

맹사성은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지만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다. 일찍이 김종서의 자질을 알아본 그는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따져 물음으로써 방종을 경계함으로써 북방의 사자로 조련했다. 이후 그는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했으며, 자신의 뒤를 이어받을 정승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맹사성 고택 /충남 아산군 배방면 중리 맹씨행단(사적 제109호)

1435년(세종 17년) 76세의 고령으로 조정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향리 온양에서 노후를 보냈다. 청백리답게 그의 말년은 소박했다. 바깥 출입은 언제나처럼 소를 타거나 걸어 다녔고, 식량은 조정에서 지급하는 녹미(祿米)로 만족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람 정승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노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맹사성은 벼슬을 놓은 지 3년 뒤인 1438년(세종 20년) 10월 4일,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실로 그는 황희와 함께 세종 시대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역으로서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관리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따뜻한 인간미로 조정 신료들은 물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아름다운 어른이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