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고려의 대몽항쟁과 강화천도] 죽음을 각오한 항전을 위한 요새(항파두리 토성)와 해안 성벽(환해장성)을 쌓는 일은 섬사람의 몫이었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7. 2.
반응형

https://brunch.co.kr/@lsuchul/17

 

올레7 코스

월평 아왜낭목 | 1월 5일 수요일 오전 9:46분부터 올레 7코스를 걸었다. 이 날은 특히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제주 기상은 변화무상하기에 각자가 우산, 우비, 판초우의 등을 준비해야만 했다. 올레7

brunch.co.kr

 

까마귀 혹은 물새들이 이 돌아 앉아서 똥을 싸기에  희게 보인다 하여 흰돌이라고 한다. 밑은 아래라는 말인 사진의 가운데 몇몇 바위 들이다. 이 바위들은 흔적은 없지만 환해장성터라고도 한다.

 

외돌개에서 강천항쪽으로 걷을 때도 계속해서 범섬을 보게 된다.(사진 맨가운데 위) 이 범섬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목호의 잔당 세력을 처단하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제주에 온 판관 하담은 자신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뇌가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당시 참상이 두 줄로 묘사되어 있는데 섬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어갔다고 한다. 제주 돌들이 구명이 숭숭 나있는 이유도 그때 죽은 원혼들의 한 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목호의(牧胡의 亂) 난:1374)

 

저 멀리 범섬이 보인다. 고려 땅이 모두 몽고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친몽파인 고려 문신들이 대몽 항전파 무신 정권을 무너 드리고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골과의 전쟁은 끝나는 듯하였는데 고려는 원나라 속국으로 전략한다. 무신정권의 최후 세력인 삼별초가 몽골과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강화에서 진도, 진도에서 다시 남쪽 제주로 퇴각을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고려 파견 관료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고 수탈을 당하면서 삼별초는 그들의 수호신으로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항전을 위한 요새(항파두리 토성)와 해안 성벽(환해장성)을 쌓는 일은 섬사람의 몫이었다. 1273년 4월에 이르러 2년 동안 엄청난 공사에 동원되어 피와 땀을 흘렸지만 삼별초의 용맹은 고려와 몽골 1만여 병사에 손을 들게 된다.

 

삼별초가 토벌된 후 몽골군 일부가 섬에 남고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바뀐다. 독립국가 탐라가 고려에 흡수된 지 170년 만에 다시 몽골인들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골(원나라)에게는 제주는 2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첫 번째는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최적의 위치였다. 두 번째는 '말'을 키워서 공급받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제주는 그 이후에 100년간 몽골제국(원)이 가진 14개 목마장 중 하나로 운영되며 수탈되어 간다. 이 기간에 고려 관료들도 파견되지만 더 상급 세력으로서 원 제국의 말 사육 전문가들인 목호(牧胡)들이었다. 목호는 몽골이 제주도에 말을 사육하기 위한 몽골인(胡)이다. 고려 관료뿐만 아니라 몽골의 목호들 양쪽에서 수탈을 당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대륙은 주원장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다. 고려는 지는 해인 원나라보다는 명나라를 섬기야만 했다. 명은 이에 제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말을 2천 필 요구하고 고려는 제주로 사신을 보내 명이 요청을 전한다. 100년 동안이나 섬을 지배해온 원나라의 묵호 세력들이 이에 응할 리가 만무했다. 대신 고려가 보낸 조정의 사신을 죽이고 고려 공민왕은 최영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묵호 토벌대를 제주로 보내는데(목호의 난) 전함이 314척, 군사 25,600명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삼별초 진압 여몽연합군의 군사보다 2배가 넘었다. 100년 전 삼별초 항쟁 이후 다시 제주에 피바람이 불었다.

 

제주에 있던 목호는 겨우 1,700명이는데 당시 최영 장군의 토벌대는 제주 전체 연구에 맞먹는 숫자였다. 고려 조정은 섬 전체가 이미 100년이 흐르면서 몽골인과 한통속이라고 판단했다. 제주에 상륙한 토벌대는 목호 세력을 중간 산악 지역으로, 한라산 남쪽으로 퇴각하고 대다수의 목호는 토벌대에 의해 죽어간다. 살아남은 일부들은 서귀포 앞바다에서 범섬으로 건너가 일본이나 남송으로 탈출한 생각이었지만 이 섬을 포위한 고려군 전선에 의해 진압되고 대부분은 수직으로 깍아내려진 범섬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을 하고 생포된 자들은 즉결 사형되었다.

고려의 제주도 남쪽 서귀포 앞에 있는 범섬은 몽골이 점령하면서 말을 키웠던 목호들의 최후의 섬이었다.

 

<한국사. 고려의 대몽항쟁과 강화천도>

 

출처: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jus898&logNo=221857415721&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topReferer=https%3A%2F%2Fsearch.daum.net%2Fsearch%3Fnil_suggest%3Dbtn%26w%3Dtot%26DA%3DSBC%26q%3D%25EC%2582%25BC%25EB%25B3%2584%25EC%25B4%2588%25EB%258C%2580%25EC%259B%2590%25ED%2595%25AD%25EC%259F%2581%25EC%258B%259C%2B%25EC%2599%2595%25EC%259C%25BC%25EB%25A1%259C%2B%25EC%25B4%2588%25EB%258C%2580%25ED%2595%2598%25EC%2597%25AC%2B%25EC%25A7%2584%25EB%258F%2584%25EC%2597%2590%25EC%2584%259C%2B%25EC%25A3%25BD%25EC%259D%258C%2521%2521%2521&directAccess=false>

1206년 칭기스칸 몽골 통일

1231년 몽골의 고려 1차 칩입

1232년 고려의 강화 천도,

몽골의 고려 2차 침입

1234년 중국 금나라 멸망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1236년 고려 팔만대장경 판각

1236년 몽골의 유럽원정

1247년 몽골의 4차 침입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1254년 몽골의 6차 침입

1270년 삼별초 대몽항쟁

1274년 몽골과 고려의 일본 정벌이 태풍으로 실패

12-13세기 치열하게 벌어진 농민과 천민들의 무력항쟁이 몽골의 고려침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은 이제는 고려의 지배층이 아닌 외세인 몽골군과 싸워야 했다.

몽골은 그들이 정복 과정 중에 저항하는 정복민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는 정책을 폈다.

이런 정복정책으로 몽골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세계 정복사업 진행할 수 있었다.

몽골은 고려 고종 11년(1224년)에 발생한 저고여 피살 사건을 이유로 고종 18년 (1231년) 8월 몽골의 1차 침입을 시작해서 6차례 침입을 고려에 감행한다.

1차 공격은 1230년 시작한 중국 금나라 공격의 배후세력으로 고려가 활동할 수 없도록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두개의 경로로 침입한 몽골군에 대항하여 고려는 4개월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내륙으로 침투한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 장군의 활약으로 진격을 막고 있었지만 서해안으로 침투한 몽골군에 수도 개경이 포위를 당하자 결국 고려 조정에서 강화 요청을 하게 된다.

몽골은 다루가치 72명과 잔류병력은 남기고 철수한다.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1232년 6월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그해 7월, 10일 동안의 짧은 시간동안 장마비 속에 약 10만 호의 개경 백성들을 강화도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리고 다루가치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살해한다.

강화도의 지리적 이점으로 첫번째 강화 앞 바다의 물살이 매우 세고, 암벽 지형들이 많아 배를 대기가 어렵다.

두번째 수상전에 약한 몽골군과 당시 강력한 수군을 보유한 고려군과 전국 각지에서 해로를 통해 안전하게 세금을 받을 수가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1232년 8월, 몽골의 2차 침공을 받지만 12월 16일 처인성(지금의 용인) 전투에서 김윤후가 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하자 회군하며 마무리된다.

하지만 2차 침입 당시 대구 부인사의 대장경이 불타 사라져 버린다.

이로 인해 고려 최우 정권은 팔만 대장경 제작을 마음을 먹게 된다.(1236년부터 1251년까지 끈기와 정성(?)으로 마침내 완성한다.)

1234년 금나라를 무너뜨린 몽골은 1235년 고종 22년 고려에 강력한 3차 공격을 감행한다.

<지도상 고려북방은 식민시관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지도임을 발킨다!>

만주지역과  요동쪽이 고려국경이다.

 

5년이라는 오랜기간 동안 고려의 전 국토를 유린한다.

1238년 고종 25년 경주까지 진출한 몽골군은 643년 신라시기에 세워진 당시까지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던 80m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과 황룡사를 불태워 버린다.

결국 고려는 몽골에 군사 활동 중지를 요구하고 신안공 왕전이 몽골에 입조함으로 전쟁이 종결된다.

그 이후 8년간 고려와 몽골은 소강 상태가 지속된다.

당시 강화도의 고려 정부의 왕과 귀족들은 안락하고 화려한 생활을 지속한다.

이는 바닷길을 통해서 본토에서 세금을 꾸준하게 거둘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금보의 시에 '장안에 잘사는 집에 가보니 금은보화와 곡식들이 넘쳐났고, 쌀밥을 지어먹고도 남아서 말이나 개에게도 준다.' 정도로 강화도 지배층들은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을 즐겼다.

몽골은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며 몽골 왕실 정세가 혼란에 빠져 타국을 침략하는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이 요구했던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왕실이 안정이 되자 마침내 1247년 4차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귀위크 칸의 갑자스런 사망으로 4차 공격은 중단된다.

1253년 고종 40년 다시 몽골은 두가지 요구가 이행되지 않음을 이유로 5차 공격을 시행한다.

이때부터 몽골군은 이전 공격때와는 다르게 지역 주민들이 피신한 섬과 산성을 지나치지 않고 끝까지 공격한다.

당시 6개월간 장맛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피신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몽골은 끝까지 저항했던 황해도 양산, 춘주, 동주의 경우 10세 이상의 모든 남자를 살해하고, 부녀자를 포로로 잡아가는 등 잔혹함을 보인다.

다음해 1254년 6차 침입 때는 고려의 주민 206,800 명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쯤부터 고려 백성들 민심의 큰 변화가 생겨 몽골군들을 환영하거나 고려 관리들을 죽이고 몽골군에 적극적인 투항(투몽)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최씨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

하지만 결국 내부의 분열로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지면서 1258년 고종 45년, 마침내 고려는 다음해 1259년 태자 왕전(원종)의 몽골 입조를 약속하면서 28년간의 전쟁은 마침내 끝난다.

1259년 태자 왕전이 항복문서를 가지고 윈나라에 가는데 마침 당시 몽골은 황제 계승을 두고 내분이 있던 상태였다.

차기 황제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 간의 갈등이 컸다.

고려의 태자 왕전이 항복 문서를 들고 쿠빌라이를 찾아가자 '고려는 1만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로 당태종이 직접 공격해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한 나라이다.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항복하러 내게로 왔다'면서 쿠빌라이가 무척 기뻐한다.

고려와의 화친(?)이후 아리케 부케를 제압한 쿠빌라이는 1260년 원 세조로 즉위한다.

쿠빌라이는 칭기스칸의 손자로 몽골제국의 5대 황제에 오르고 1271년 국호를 '대원'으로 선포한다.

'세조 구제'라고 원세조 쿠빌라이가 고려와 맺은 6가지 옛 약속으로 불개토풍, 고려의 독자성을 인정하며 국체를 보전하고 독자적인 내정운영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이후 고려와 몽골과의 유대관계를 위해서 고려 태자와 원나라 공주를 혼인을 시킨다.

고려는 이렇게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다.

충렬왕 6년에 원이 일본정벌을 위해 고려에 설치한 특별기구 '정동행성'은 일본정벌이 태풍으로 실패로 끝나자 고려 내정 간섭기구의 역할을 하다가 공민왕때 마침내 폐지된다.

1270년 무신정권의 임유무가 살해되면서 마침내 원종의 개경환도가 결정나지만 개경환도와 몽골에 항복을 반대하는 세력이 남아 있었다.

몽골과의 전투와 치안 유지를 담당했던 삼별초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현종의 8대손 왕온을 왕으로 받들며 끝까지 대몽항쟁을 계속한다.

강화도(강화산성)에서 진도(용장산성), 제주도(항파두리성)까지 3년 동안 항쟁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진압당하며 몽골에 대한 고려 항쟁은 끝이 난다.

당시 30여 년간을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몽골의 공격에 버틴 고려는 세계 전쟁사에도 남을만큼 드문 경우였다.

그리고 다소 재수가 좋았던 고려의 화친 시기와 30여 년간의 끈질긴 대몽 항쟁의 결과로 '세조구제'라는 특혜(?)를 받아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거의 없었던 강화에 있는 집권세력과는 대조적으로 본토에서 엄청난 고통과 수난을 겪었던 일반 백성들과 의병들의 죽음들은 다시 한번 대몽항쟁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출처:<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jus898&logNo=221857415721&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topReferer=https%3A%2F%2Fsearch.daum.net%2Fsearch%3Fnil_suggest%3Dbtn%26w%3Dtot%26DA%3DSBC%26q%3D%25EC%2582%25BC%25EB%25B3%2584%25EC%25B4%2588%25EB%258C%2580%25EC%259B%2590%25ED%2595%25AD%25EC%259F%2581%25EC%258B%259C%2B%25EC%2599%2595%25EC%259C%25BC%25EB%25A1%259C%2B%25EC%25B4%2588%25EB%258C%2580%25ED%2595%2598%25EC%2597%25AC%2B%25EC%25A7%2584%25EB%258F%2584%25EC%2597%2590%25EC%2584%259C%2B%25EC%25A3%25BD%25EC%259D%258C%2521%2521%2521&directAccess=false>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