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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삼별초의 대몽항쟁]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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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는 1230년 고종 17년 무신정권 최우 집권시기에 설치한 야간 순찰과 도성내 치안유지 기능을 하던 야별초에서 시작한다.

이후 규모가 커져 좌우별초로 분리되고, 신의군이 추가로 편성되면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가 된다.

몽골군과 전투에도 삼별초의 전신인 야별초의 기록들이 나온다.

하지만 일부는 최씨 집안의 사냥개라는 표현을 쓰면서 사병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김준이 최씨정권의 마지막 최의의 세력을 제거할 때, 임연이 김준을 제거할 때 정적 제거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1270년 원종 11년 6월 삼별초 해산령에 불만을 품고 개경환도를 거부한다.

당시 개경은 몽고 호위군에 둘러쌓인 원종이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원종이 파견한 김지저 장군이 삼별초 명부를 압수하자 삼별초는 개경에 돌아가서 벌어질 보복을 두려워 하게 된다.

배중손 장군과 노영희가 연합하여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새로운 국왕으로 내세우며 1270년 6월에 봉기한다.

1천여 척의 배들을 이끌고 진도로 향한다.

진도는 수도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경상도와 전라도 세곡들이 조운을 통해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전략적인 이점이 있었다.

삼별초는 진도 용장성을 거점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과 일부 내륙지역과 제주도를 확보하게 된다.

1270년 11월 삼별초는 이문경 부대를 제주로 보낸다.

원래 제주는 대몽항쟁 기간 동안 항몽 거점으로 삼을 만한 지역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무신 정권 말무렵 대몽 항쟁의 연장을 위해 수도를 강화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로 옮기려는 시도를 세차례나 한다.

당시 지정학적 요지였던 제주를 거점으로 삼아 남송과 일본과 더불어서 대몽 연합 전선을 이루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명월포(한림 인근)로 상륙하여 제주시 동쪽 동제원(화북 거로 마을 입구)에 주둔한다.

개경에서 보낸 제주 관군들을 송담천 전투에서 격파하고 조천포를 확보한다.

당시의 상황을 김태현 묘지명에 써있는 내용을 보면 제주 사람들은 당시 개경의 관군보다는 삼별초를 지지하고 도와 주었음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제주사람들은 관군과 삼별초간의 싸움에서 많은 피해를 보게 된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1271년 김방경, 흔도, 홍다구의 여몽 진압군이 공격에 배중손과 왕온이 희생된다.

김통정과 일부 삼별초는 제주도로 후퇴하고 방어진지 구축에 힘을 쏟고 해상권 확보에 노력하여 31개월 동안 제주를 거점으로 활동하게 된다.

방어시설로 삼별초 지휘부가 있었던 해발 150-200m에 길이 6km 면적 34만 4000여 평의 항파두리성, 삼별초 수군 병력의 거점이자 항파두리성에 이르는 주요 관문인 애월포에 설치한 애월목성, 제주 해안선을 따라 전체적으로 둘러싼 3백리 장성인 환해장성을 건설한다.

다시 세력을 키워가던 삼별초는 경상도와 전라도 연안까지 진출하며 세곡 약탈을 한다.

1273년 김방경, 흔도, 홍다구를 주축으로 병선 160척, 1만-1만 2천여 명(고려군 6,000 명, 몽골군 2,000 명, 한족군 2,000 명)의 병력으로 삼별초가 있는 제주를 20일 동안 공격하여 3년만에 삼별초를 완전히 진압한다.

제주에는 원나라 군사 500명을 거주시키며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이 된다.

몽골은 몽골의 국립목장인 동아막과 서아막을 제주에 설치한다.

삼별초의 항전을 정부에 대한 반역으로서 대몽 항쟁보다는 단순히 고려 정부에 대한 항전이었다고 보기도 한다.(조선시대, 일제시대 일본학자들 주장)

하지만 현재 대다수 국사학자들의 입장과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시각으로 계속 이어지는 민족적 대몽항쟁과 민중들의 저항의식의 결집과 동조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삼별초가 여몽 진압군의 우세한 전력에도 3년간 버틸수 있었던 이유가 경험 많고 매우 우수한 삼별초군의 전투능력과 함께 당시 몽골에 의지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왕과 귀족세력들에 대한 반감으로 남부지역의 백성들의 적극적인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전의 결과로 반몽골적 정치 세력이 일소되고, 친원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출처: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jus898&logNo=221858905712&parentCategoryNo=&categoryNo=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한국사. 삼별초의 대몽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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