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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 아(阿) 신도비명(神道碑銘)
始祖 文成公 諱 阿 神道碑銘
資憲大夫原任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眞城李孝淳謹撰
後孫秉心謹書
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海平尹用求謹篆
粤若有大人者稟二氣之粹挺萬類之表其生也補世長民得其尊榮其死也垂蔭庇昆永享馨瞃百世之報無有窮己者如商之阿衡周之太公是也我東崔文成公爲完山崔氏之始祖抑亦所謂大人也歟謹按公諱阿字衡之高麗忠肅王朝等第官至門下侍中平章事封完山君諡文成以淸德懿行顯于世有四子長曰龍生文科按廉使仲曰龍角文科檢校大護軍叔曰龍甲文科判事季曰龍鳳中郞將孫曾益繁以迄我朝聞人達士項背相接以道學行誼與爼豆之列者十六以忠孝節烈表里閭者數十其餘文章德業科宦勳閲(閥)不可勝數苟非公積仁累義有以篤慶者能如是乎夫侍中大官也文成美諡也竊想公之茂績宜有磊軒一世者而家牒蕩然無所考徵其見于史則但有在贊成時掌試得李嵒等三十七人世稱得人又曰公之文章得秦漢以來古法此曷足爲公一班然文獻未備者亦豈太史氏失其職也盖當革除灰刼之時雖金櫃玉版尙多遺逸況其餘乎公之墓在於全州所陽面粉土洞周德山酉坐原而碣已毁誌無徵故正廟丁巳築壇于塋北歲一薦祭其後更據單卷譜十一卷譜及遺事家乘諸錄哲廟甲寅復修墓祀竪石以表焉昔朱制置使瓌封瑩奉守不虔至爲他人所有晦庵先生始崇土伐石而告曰敢辭其譴夫以晦翁爲孫而其祖猶不免有此則其前後晦顯豈亦有數存者也耶鳴呼公之去世已屡百年而內外族姓衣冠之盛愈益未艾又能受報於後苾芬將事旣壇而墓自墓而碑其不昩之精靈將應陟降默佑有與此山同其悠久而不朁也歟銘曰
於赫崔氏冠冕古族浮于淸河籍于完邑緜緜厥緒振振東域顯允文成爲麗名碩紆謨嘉勣曷不密勿繄天申之毓慶之篤其慶維何四龍騰趠其孫伊何不千不億乃文乃武有質有學錫以孝類弼我王國於萬斯年永垂厥澤屹屹周德首陽之東爰有玄堂佳氣葱籠我銘載石昭示無窮
庚申四月 日
宗孫仁鎬
都有司圭勛奇洪寅洪
掌財鎭洪秉元興烈洛文圭翼圭華銓永琪洪秉轍宗烈秉奎圭東洛千守烈圭薰璟鎬
■자헌대부 원임 형조 판서 겸 지경연사 춘추관성균관사진성이씨 효순 삼가 지음.
■후손 병심 삼가 씀.
■숭록대부 원임 이조판서 해평윤씨 용구 삼가 두전을 씀.
무릇 대인이라 하면 하늘과 땅으로부터 순수한 기운을 받아서 세상 모든 것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살아서는 세상을 도와 사람들을 다스리며 높은 자리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죽어서는 조상의 음덕을 자손에게 물려주어 100세대가 흐를 때까지 영원토록 제사가 그치지 않는 것이니, 상나라 아형이나 주나라 강태공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고, 우리 동방의 최 문성공도 전주최씨의 시조로서 우러름을 받으시니 역시 그와 같은 대인이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아요, 자는 형지<1>이니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2>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3>에 이르고 완산군에 봉하여 졌으며, 시호는 문성공이니 그 맑은 덕과 올바른 행실이 한 시대에 뚜렷하였다.
아들 4형제를 두셨으니 장남은 용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이며, 둘째는 용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 대호군이며, 셋째는 용갑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이며, 넷째는 용봉으로 중랑장이다.
손자와 증손들은 더욱 번성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인과 달사가 끝없이 이어졌고, 도학과 행의로 사당이나 서원에 배향된 사람이 16명이고, 충효와 절열로 표창을 받아 살고 있는 마을 앞에 정려를 세운 사람이 수십 명이며, 그 외에도 문장과 덕업, 과환과 훈벌이 셀 수 없이 많으니, 진실로 공의 어짊이 쌓이고 의로움이 쌓여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면 어찌 두터운 경사가 이와 같이 무성할 수 있겠는가?
무릇 문하시중은 큰 벼슬이며 문성은 아름다운 시호이니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공의 무성한 업적이 한 세대에 크게 들어났을 것이건만 족보가 없어져 고증할 수 없게 되고 말았는데, 역사를 살펴보면 다만 공(公)이 찬성사로 있을 때 과거를 관장하여 이암 등 37인을 뽑았는데<4>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잘 뽑았다고 칭찬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의 문장이 진(秦)나라와 한나라 이래의 고법을 얻었다고 하지만 어찌 그것에 만족하여 공의 일반적 업적으로 삼을 것이며 문헌에 기록이 없는 것 역시 어찌 역사학자의 잘못으로만 돌릴 것인가?
대개 혼란한 혁명의 시기를 만나면 비록 금궤 안에 들어 있는 옥판 같은 소중한 보물마저도 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그 외의 물건들은 물어 무엇 하리요.
공의 묘소는 전주 소양면 분토동 주덕산에 동쪽을 향하여 있으나 비석이 훼손되고 지석의 증거도 찾을 수 없으므로, 1797년(정조 21) 묘소 북쪽에 제단을 쌓고 해마다 한 번 제사를 모셔 왔다.
그 후 [단권보]<5>와 [가경보] 및 [연촌유사]와 [동은공가승] 등 여러 기록을 근거 삼아 1854년(철종 5)<6>에 묘제로 바꾸어 모시고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다.
옛날 [중국]의 주씨 가문에서 묘소 관리를 잘못하여 조상의 묘소가 다른 사람 소유로 돌아가 버린 것을 회암(주자) 선생이 나서서 묘소를 복원하고 비석을 세운 다음 여쭙기를 “감히 그 꾸지람을 청한다.”하였으니 심지어 주자같이 훌륭한 후손을 둔 할아버지마저도 이와 같은 일을 피하지 못하였으니 그 전후로 묘소를 잃어버리고 다시 찾은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아! 공(公)이 떠나신지 이미 수백 년이 흘렀지만 내외 족성의 벼슬이 무성함이 더욱 더하고, 또 후손들이 보응을 받아 제사를 받들기에 정성을 다하여 이미 단제로 모시다가 묘소를 찾아 묘제로 바꾸어 모시고 묘비까지 세웠으니, 어둡지 아니하신 정령께서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시며 감응하시여 묵묵히 도우심으로 이 산과 더불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명(銘)을 적어 가로되
빛나도다! 최씨여! 높은 벼슬한 뿌리 깊은 가문이라
청하에서 흘러와 전주를 본관으로 삼았도다.
그 뿌리가 끊임없고 동방에서 떨치었네.
진실로 뚜렷하신 문성공은 고려에서 뛰어나신 분으로
빛나는 공적은 어찌 부지런히 힘쓴 결과가 아니리요
하늘이 보답하여 기쁨이 넘치는구나.
그 기쁨이 무엇인고? 용(龍) 네 마리<7>가 뛰어 오르고
그 후손이 얼마인가 천(千)도 억(億)도 넘는 구나
문무를 아울러 갖추었으며 질박한 학행이 있어
효행하는 지팡이가 되고 우리 왕국을 도우니
무궁한 세월동안 덕택을 다하도다.
우뚝 솟은 주덕산은 수양산의 동쪽이라
묘소가 여기 있어 상서롭고 맑은 기운이 가득 서렸구나
이 명(銘)을 돌에 새겨 무궁토록 밝히리라.
1920년 4월 일
종손 인호<8>
도유사 규훈 기홍 인홍
장재 진홍 병원 흥열 낙문 규익 규화 전영
기홍 병철 종열 병규 규동 낙천 수열
규훈 경호
<각주>
<1> 19세기까지 문헌에서 문성공의 자(字)는 발견되지 않는다. 문성공의 자는 신도비를 비롯하여 20세기 이후 묘제파 문헌에서 처음 발견되므로 종중이 묘제파와 단제파로 나누어진 후 묘제파가 문열공계와 통합을 추진하면서 최재(崔宰)의 자가 재지(宰之)인 것에 착안하여 <천자문>의 “磻溪伊尹佐時阿衡(반계이윤좌시아형)”을 인용하여 지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2> 문성공은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것이 아니라 최고 높은 벼슬에 올랐다.
<3> 문하시중은 수상(首相)에 해당하고 평장사는 부수상(副首相)에 해당하는 벼슬로 두 관직을 함께 기록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는 방법이다.
<4> 1313년(충선왕 5) 이암 등 37인이 급제할 때 지공거(知貢擧) 즉 시험관은 안동권씨 권한공(權漢功)과 사도공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로 문성공이 아니었으며 오기이다.
<5> [단권보] 즉 [강희보]에는 문성공 묘소에 관하여 아무 언급도 없다.
<6>1854년(철종 5)은 묘제/단제 사건이 일어난 해로 그 해부터 묘제파에서 묘제를 모시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종중이 묘제파와 단제파로 완전하게 나누어진 것은 1857년(철종 8)의 일이다.
<7> 용생, 용각, 용갑, 용봉 네 아들을 이르는 말.
<8> 안렴사공파, 고성종회 통덕랑공(흥호)파 24세. 통덕랑공(흥호)파의 종손으로 말하자면 11세 판서공(判書公) 휘 운철(云哲)의 종손인데, 판서공에게는 참봉공(參奉公) 휘 운걸(云傑), 운덕(云德) 두 형이 있고 휘 운덕 후손이 무과공(용호)파로 전해오고 있으므로 문성공 혹은 안렴사공의 종손으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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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소재 문성공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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