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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義兵隊▣

바이칼 호수, 중앙아시아에서 기후의 변화로 남하한 한민족의 역사

by 晛溪亭 斗井軒 2020.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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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지도상 고조선 역사지역은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 식민사관 호로개잡놈들이 만들어진 지도임을 발킴을 공개합니다!

바이칼 호수, 중앙아시아에서 기후의 변화로 남하한 한민족의 역사

서양의 사학자들은 흉노의 오리진을 신라인으로 생각한다.

헝가리에서 출토된 토기와 경주왕릉에서 출토된 토기가 동일하기때문이다.박,석왕조후에 김씨는 금씨이며,스키타이인은 금과 여자를 좋아했지....훈족은 마상에서 몸통을 360도로 회전하며,그들 특유의 활을 쏘면화살은 로마군의 철갑을 뚫고 깊숙이 밖힌다. 훈족의 왕 아틸라는 유년시절 서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성장하여 동서,로마을 유린 했으며, 파리근교까지 공략 했다. 반도인은 저 넓은 툰두라지역을 횡단하여,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따라서 달릴 것이며,역사는 반복 할것이다? 여호와의 지시되로 갈데아우르를 떠나 가나안땅으로 이동한 아브라함 보다 더 일찍히 메스포타미아 평원을 떠난 유인원의 무리들이 코카사스 산맥을 횡단하여 흑해연안을 따라 우크라이나 대평원에 이르르 메머드 무리을 사냥하며 그가죽으로 매서운 북풍을 막으면서 한무리는 서쪽으로 이동현재 핀란드의 랩족이 된다 이무렵 네안데스탈인은 크로마뇽인에 의해서 멸족된 상태로 본다.

http://cafe.daum.net/kphpi21/BTGy/10?q=%EC%83%A4%EC%95%88%EC%82%B0%EB%A7%A5(3%2C491m)%3A%20%E9%9F%93%E6%B0%91%E6%97%8F%EA%B3%A0%ED%96%A5%EC%82%B0%20%E2%87%92

 

바이칼 호수, 중앙아시아에서 기후의 변화로 남하한 한민족의 역사

바이칼 호수, 중앙아시아에서 기후의 변화로 남하한 한민족의 역사 서양의 사학자들은 흉노의 오리진을 신라인으로 생각한다. 헝가리에서 출토된 토기와 경주왕릉에서 출토된 토기가 동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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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로 남하하가 시작한 한민족(韓民族 )

 

동쪽초원 지대을 횡단하여 볼가강을 넘어 우랄산맥 남부 준평원지역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호모사피언스의 무리들이 빙하기(약2만년전)를 맞이하여 대부분이 멸종하지만 서시베리아저지 예니세이강을 넘어 天海까지 진출한 무리들은 바이칼호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는 여진 그리고 해저에서 분출하는 용암으로 따뜻해진 수온,대기 온도로 ,병풍처럼 드리워진 서쪽의 샤안산맥(3492m)의 석회동굴에서 기거하며 1만년이상 간빙기까지 종족을 유지 할수 있었고, 그 고유의 몽고리안의 모습을 유지 할수 있었다서쪽에서 의 유럽 코카시안의 혈통과 혼합되지 않는 한민족(韓民族 ),북방민족(몽고리안)이 탄생 한것이다샤안산맥은 아메리카 인디안 그리고12이( 夷)족의 고향이며 빙하기에 베링거 해협을 넘어 아메리카로... 1만오천년전 간빙기가 시작 되면서 12夷족이 남쪽으로 남하한다.

 

*夷(큰활을 쏘는 어진사람)

우리선조 의 고향산,샤안산맥제

 

4기 홍적세 최종빙기 1만오천년을 전후 하여 사얀산맥 그리고 天海(바이칼호)주변의朝蘚족 (순록의 먹이인 습지에에 자라는 이끼을 찿아 이동하는 유목민)의 인구가 증가 하면서전나무,잣, 가문비 낙엽송 푸른솔로 어우러진 타이가숲 하얀백사장,유리처럼 투명한 바이칼호를멀리하면서 서남쪽 저멀리 만년설이 아득히 보이는 한가이, 천산, 알타이산맥 북쪽 즉 천산북로로 이동서남부 靑藏고원(청해티벳트 해발 4000~5000m)에 정착 야크를 치며 한냉작물을 경작(총칭 西夷족)

 

*朝(아침조가 아니고 ~을 향하여가다) 蘚(이끼선)

 

빙하기 사얀산맥 골짜기를 떠나 바이칼호를 거쳐 야블로노비산맥 남쪽 아무르강 연안을 따라 베링거 해협을 넘어 북아메리카 남서부로 이주한 투바족(투르크계의 유목민)의 후손 아파치족의 결혼 축시

 

제목 :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두 사람 앞에는 오직하나의 인생만이 남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오랫동안 행복하리라.

우리 선조가 도하했던 아무르(흑룡)강

 

한국,韓國 시대 (환국,桓國)

 

桓은 ‘韓’과 마찬가지로 순 우리말 ‘한’을 이두식 한자로 적은 것

 

날씨가 따뜻해지자 바이칼호 주변의 여러부족은 몽골초원(해발고도1600m)을 흐르는 셀렝가 강변을 따라올라 대초원을 뛰노는 야생말을 길드려 남쪽으로 올라가지만 서쪽은 불모지 고비사막, 동쪽은 톱니처럼 펼쳐진 인산산맥에 부딛쳐 약 1000m의 깍아지른 절벽 첩첩산들이 발해만으로 내려앉은 연산산맥 저 멀리 연초록의 화북평원과 유유히 흐르는 황토빛의 강으로 내려갈수 없어발길을 돌린 부족들은 강을 따라 동쪽 낮은구릉지대(550m)로 내려간다.

 

강가에는 붉은가지 버드나무(柳花)와 온갖 강렬한색의 크지않은 들꽃과 어울려 봄을 만끽하고 바람은 차거웠지만 햇쌀은 따갑게 피부를 자극한다.후빙기 초기 한반도의 임진강가에는 아열대동물인 물소가 노닐고 서해 바닷가에 열대 바닷거북이 알을 낳고, 반도 남쪽바다에 산호초가 자랄만큼 따뜻할 즈음 아무르강(黑龍江)을 따라 남하하든 부족들은 송화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이 푹푹 파이고,처음보는 파충류에 대부분 동쪽 연해주로 가는 길을 멈추고송화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올라가니 끝없이 펼쳐진 둥베이평원(東北)그리고 하얀눈이 덥혀있는 신성스러운 백두(不咸)산,산,산 장백산맥이 남으로 달리고 있었다. 송화강가(하얼빈)에서 신석기인들이 운집하니 동아시아 최초의 神市가 열린다.

 

#아래의 지도상 고조선 역사지역은 식민사관 호로개잡놈들이 만들어진 지도임을 발킴을 공개합니다!

韓國,九黎 배달국 시대 (BC 3897 ~ 2333 1,565 년간)

 

신시(神市)배달국 시대가 열리고 수도는 태백산(太白山) 신시(神市)이다. 태백산은 지금의 중국 서안(西安)의 남쪽에 있는 태백산이다후에 산동성 태산근처로 옮겨 청구 배달국으로 이시대를 배달국 시대라 불림한편 아무르강 저지대를 이동하던 부족은 해안평원을 횡단하여 연해주 푸른바다를 쳐다보며해안선을 따라서 남하... 바다로 유입되는 여러줄기의 강을 보며 중간의 큰섬(鹿屯島)에서잠시 머무른다신석기후반 북반구의 온도는 급격히 냉각되고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은 굶주림과 추위로 살아가기 힘들어 집단으로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흑해연안의 인도아리안계의 힛타이트족(Hatti BC3000~1300)은 카스피해 서안을 따라 코카사스산맥을 넘어 메스포타미아평원을 침공 하려 했으나 청동기문화로 강성해진 앗시리아(BC2500~BC612)을 우회하여 타우루스산맥을 따라 소아시아,에게해 연안국을 통일, 이집트 람세스II세와 동맹하여 앗시리아를 견제한다. 힛타이트는 갑작히 사라지는데호전적인 지중해 해적(발칸반도 깊숙히 거주하든 야만족 도리아인의 후손)은 에게해의 미케네왕국을 멸망시키고 철기군으로 무장한 힛타이트군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한다암흑기 몇백년후 강력한 지중해 도시국가 트로이(Troy)가 뜨 오른다.

 

중앙아시아의 이란인,스키타이인,소그드인은 카스피해 동안을 따라 이란북부로 이동 하는데 이에 쫓긴 인도아리안부족은 두파로 나누어져 한부족은 서쪽,메스포타미아 북부 산악지대에 정착한다(쿠르드인)동쪽으로 이동한 부족은 아프카니스탄-인도 인더스강-간지스강으로 들어가 베다문명(BC1500~BC600)을 꽃 피운다.서아시아의 청동기문명이 유라시아 초원을 거쳐 거침없이 몽골고원 ,북만주로 들어오는데알타이 천산산맥 사이 타르바가타이산맥의 이밀강 주변에 크다란 틈새초원이 있어 가능 했든것이다. BC3000~2000경 티벳트고원- 돈황-하서주랑-서안(장안)-낙양 의 길은 신석기시대에는 개발도 되지 않았으며 목슴을 건 험난한 길 이었기에 청동-철기문화가 이쪽으로 들어올수 없었다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동아시아 몽골,북동만주지역 부족들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천산산맥

 

별이 떨어지다

 

서아시아및 인도로의 아리안족의 이동은 수럽민족의 이동이지만 신석기말 발해대륙은 온대기후에서 급작스런 홍수로인한 해수면의 상승 한냉한 기후로 농경사회를 영위한던 부족들의 대이동이 있었다신석기말 중원은 동이제족의 무대 이었으며 모계씨족사회를 영위한던 토착민인 지나족(월족)은 광동지역에서 복건,절강 지역으로 장강유역에서 쌀농사를 지으며

일부 중원으로 이동하여 동이족장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요동지역이 늪지대로 변하고 둥베이평야가 목초지로 변하자 동이족족장 치우 蚩尤(뿔이달린 청동투구쓴 전쟁의 신)는 부족을 거너리고 산동성 황허하류로 이동하여 토착민인 묘족(동이족의 한부류)의 족장이된다 (chiefdom) 섬서 황토고원(낙양분지)의 토착부족의 족장이 된 헌원(산동곡부가 고향인 동이족)은 황허중류의 족장인 炎帝신농씨의 부족연맹과 연합하여 하북지구 탁록전투에서 치우부족을 쳐 부슨다.

 

그후 사마천은 황제헌원이라 사기에 저술하며 그백성을 華夏족(만리장성 이남에 거주하는 아름답게 불타 오르는,번영하는 중원사람)이라 칭하며 漢무제이후 漢족으로 명한다三皇五帝는 모두 동이족 이지만 이들의 후손이 건국한 殷(상)나라(state)는西周 무왕(화하족)에게 멸망하고 춘추전국시대까지 그 갈등이 이어진다송화강변 둥베이평야기후변화에 의한 발해대륙의 동이족이 중원으로 대~이동후 400년이상 둥베이평야는 목초지로 버려져 있었다.

 

 

단군조선시대가 열리다

 

단군 王儉 조선시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시대: 초대 단군왕검∼21대 소태(蘇台) (B.C.2333∼1286 : 1048년간)

기후가 점차 회복하자 송화강변 하얼빈에 王儉조선(아사달시대)을 개국 하지만 바람기운이 냉기가 돌고 ,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토양이 척박하여 농사짓기에 부적합하고, 강줄기가 북쪽으로 흘러 교통이 불편하여 10년후 심양(봉천)으로 천도한다.

 

백악산 아사달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색리국, 탁리국 시대 라고도 함 (22대 단군 후 색불루 단군 시대)(B.C.1285∼426 : 860년간)

 

왕검조선은 貊(사냥족)인 색불루의 혁명으로 단군이 되어 수도를 장춘(상춘)으로 천도한후 전성기를 맞이한다.(BC1984~1286)

황허강 상류까지 진격하여 은(상)나라를 제후국으로 만든다이때 왕검조선의 영토는 番汗(북경~요하사이) 진한(만주중북부,요동반도) 馬汗(한반도 황해도 이북)에 비왕을 두고서 통치했다殷(BC1766~1122)폭군주왕은 애첩달기와 더부러 폭정을간하는숙부을비참하게 참살하니 그동생 箕子와 주왕의 이복동생 미자는 산동반도로 은둔 한후 西周(BC1122~1027?256) 개국후 무왕이 미자를 송나라 제후로 봉한후 기자는 송나라에 은둔한다(기자는 조선에 간적이 없다

 

*사마천의 실수*))유목과 반농반목하던 흉노는 bc2177년 3대 단군 가륵이 단군자리를 차지하기위해 반란을 일으킨 동생 색정을 약수(흑룡강)흉노지역에 보낸 것이 최초입니다. 색정은 흉노의시조가되어 단군족을 괴롭히게 됩니다.西周가 戎(흉노족의 선조)의 공격으로 낙양에서 동쪽으로 천도후(東周) 그 통치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중원의 소국(chiefdom)이 1000개나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150개로 통합되고 춘추오패(晋,초,오,월,송,秦)이 등장하나, 춘추시대(BC722~481) 晋나라가 韓,위,조나라로 분열되어 BC403~221년 사이에 전국7웅의 전국시대가 전개된다한편 발해대륙의 왕검조선은 BC425년 융안 수렵족 우화충의 반란으로 심양(백악산 아사달)에서 요하유역 장단경(開原)으로 천도하여 해성을 개축하여 평양성이 라 명명하고 국호를 대부여라 한다.

 

그러나 통치하에 있는 胡(유목족) 貊(사냥족)이 이탈하여 약화되자 연쇄적으로 번조선 비왕 읍차箕侯가 스스로 왕이라 하고 독립(BC296)하자(安市城근방) 대부여 단군은 스스로 왕권을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한다

 

*사마천은 번조선의 기씨정권을 잘못, 은나라귀족 기자조선으로 표기 하므로서 일제 식민사관이 이를 이용한것이다*箕씨정권의 번조선은 燕(BC1027~222,선비-퉁구스)의 장군 진개의 공격으로 번조선지역 대부분(난하서쪽 5개군)을 침략 당하고 요하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다진시황의 통일후 중원의 인구는 약 500만명 정도로 북쪽에서 침입하는 흉노족을 막는데만 관심이 있었지

동쪽 발해대륙에는 무관심 이였다. 진시황의 폭정으로 동이족 국가 제,조,연나라 유민이 수천명 번조선(기씨조선) 으로 들어 닥치기 시작한다.

 

#아래의 지도상 고조선 역사지역은 식민사관 호로개잡놈들이 만들어진 지도임을 발킴을 공개합니다!

발해만으로 뻣어내린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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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산을 뽑을만 하고 기운은 세상을 덥을만 하구나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 마져 가지 않는구나가지 않으니 난들 어찌하리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하리

(해하결전에서 項羽 BC23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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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고조 통일후 燕왕,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위협을 느낀 관리들중 위만이라는 자가 모양새는 상투를 틀고 만夷복장을 하구서 패수(난하)을 건너와 연,齊,조나라 유민을 규합하여 그 세를 불리매

번조선왕 箕準이 그를 외신으로 임명하여 점차 왕을 위협하는 수준에 오르자 번조선의 각료 最리라는 자가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몰래 동쪽 한반도로 건너가 청천강(살수)이남에 낙랑(浪=國)을 건국한다. 위만은 기만술로 번조선왕 기준에게 흉노족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번조선(속칭 기자조선)을 멸망 시킨다.

 

番조선왕 기준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한반도 막(마)조선으로 들어갔으나그 토착 韓무리에게 전사하고 그 부하 탁장군이 한수를 넘어 홍성,금마(익산)에 정착하여 中 마한(월지,목지국)을 일으킨다.衛滿정권은(BC194~180) 漢武帝로 부터 흉노를 막는다는 조건으로 군비를 받아 주위 소읍들과 진번,임둔을 복속 시킨다.

 

위만은 우거라는 자에게 축출되고 자칭 우거왕이라 하며 한무제에게 반기를 드매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수군 7000 육군 6만으로1년간의 전쟁으로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사군을 요서 安市근처에 주둔시킨다한사군(낙랑,진번,임둔,현토)가 요서에 들어선후 발해대륙과 한반도는 열국시대로 들어선다(북부여,동부여,북옥저 동옥저 ,낙랑 ,졸본부여,가야연맹 중마한(목지국),낙랑,금성,읍루(숙신)

#아래의 지도상 고조선 역사지역은 식민사관 호로개잡놈들이 만들어진 지도임을 발킴을 공개합니다!

#아래의 지도상 고조선 역사지역은 제가 편집하여 만들어본 지도임을 발킴을 공개합니다!

익산 왕궁리;마한의 도읍지 ,고구려 멸망후 많은 유민이 이주했다.

 

前漢14대 평제의 외척 왕망이 정권을 찬탈하여 新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15년만에 멸망하고 중원은 혼란상태에서 남양호족출신 유수가 곤양전투에서 승리한후 後漢광무제로 즉위하면서 북흉노(일명 훈족)는 아랄해로 쫒겨 점차 흑해연안으로 흘러가버리고 남흉노는 대부분 선비족에 흡수되어 버린다한편 흉노가 사라진 내몽골지역과 시라무둔강유역은 대싱안령산맥 깊숙히 알선동에서 돼지를 키우거나 수렵을 하던 선비-퉁그스의영역이 되고 남하하여 요하유역으로 정착한다선비족은 점차 강성해지자 고구려와 북부여를 침략하고 그 후손은 북중국의 통일왕조 北魏(AD439)를 일으킨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대싱안령산맥 동쪽 기름진 둥베이평야의 북부여 후국으로서 졸본부여 즉 고구려의 건국초기는 빈약한 농경지로 배고품을 채우려는 주위국가의 기습 그리고 약탈의 시작 이었다.後漢광무제는 AD22고구려3대 대무신왕11년 후한요동태수를 선봉으로 고구려군을 단단대령동쪽으로 밀어 붙친다 . 단단대령(길림에서 무순방면의 만주중앙을 길게 가로지르는 산줄기)또한 고구려의 팽창을 견제 하기위해서 AD32 낙랑국(대무신왕의 서자 호동왕자가 낙랑공주를 눈물짖게하고 뺏은나라)의 우리수 소마시를 협박하여 살수(청천강)이남에 요동에있는 낙랑군의 속현 낙랑현을 세우니 함경도의 동옥저도 고구려로 부터 이탈한다.

 

*퉁그스; 돌궐어로 돼지를 키우는 민족

 

둥베이평야와 몽골고원은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한다중원의 통일과 혼란에 따른 발해대륙과 한반도의 정세는 시시각각 변화했다 後漢光武帝에 의한 흉노족의 이간정책으로 북흉노는 카스피해 흑해지역으로 이동했지만 남흉노는 노예 혹은 왕실의 불모로 잡혀 세대가 흘러갔다.흉노가 떠난 공백지역(내몽골,요하강변)을 선비-퉁그스가 차지하고 고구려(5대 모본왕)와 동맹하여 북경근처 12개성을 공략 고구려성을 쌓았다.그러나 선비는 후한의 이간전술로 고구려를 여러차례 공격한다(6대 태조왕은 선비연맹및 후한군에게 단단대령서쪽을

완전히 빼앗긴다(AD53~146)AD184년 황건적의 란으로 後漢의 혼란상태는 극에 달했다.

 

이때 황해도 둔유현 황지 대방고지에 청명한 가을 치우기성이 각항에 나타났다즉 퉁그스-예맥족의 조상인 치우천왕의 꼬리해성처럼 뒤가 꼬부라진 깃발이 나타났다(부여군의 깃발)이는 後漢말 요동태수인 공손도(선비족)가 혼란기를 틈타 낙랑군을 흡수하고 산동반도를 공격 평주 17개군 170개 현을 차지한후 현도태수 공손탁은 그 지배영역에 있는 부여왕 위구태을 사위로 삼아 아들 공손강과 함께 한반도 대방고지를 공격 대방군을 설치하고 위구태는 부여 기마군을 이끌고 한반도 남쪽의 여러소국을 공략한다이때 대방고지에서 南夫餘(仇台백제)를 건국했다(AD191)AD205년 仇台백제는 임진강이남 溫祚백제왕조(온조의 형인 沸流는 인천지역에 비류백제를 세우지만 농사가 되지않아 백성들이 대부분 온조백제로 이주하여 결국 자살한다)의 왕통을 끊고

구태백제의 왕족을 비왕으로 임명한다(5대 초고왕때 부터)구태백제는 수도를 固麻성(웅진성,공주)에 두고 홍성,금마 마한을 정복한후 신라와 동맹한 아라가야를 제외한 7가야를 정복한후

수군은 임나가라(대마도),야마대연맹(AD97~103년에 일본열도에 세운 소국연맹)의 신공왕후를 비왕으로 복속 시킨다 .

 

그리고 나머지 정복지는 담로(행정구역장)을 두었다.AD208 구태백제과 야마대연맹(왜)연합군은 내해이사금13년 신라을 공격한다구태백제는 실존의 우리역사 입니다온조백제의 왕계표에서1 온조2 다루 3기루 4개婁까지 고구려 고주몽의 후처 소서노(召西努)의 2남 온조의 왕계이고 5대 초고(肖古)부터 17대 아신왕까지(AD392)는 구태백제 왕족입니다16대 진사(辰斯)왕은 AD392에 광개토대왕에게 죽고 구태백제는 금강으로 상륙한 고구려 수군에게 멸망하고 구태백재의 왕이 일본으로 도망가 응신조 倭의 응신천왕이 됩니다구태백제의 역사를 일본식민사관이 감추어버려 우리는 자세히 모릅니다AD220년 조조가 사망한후 조비는 後漢헌제로 부터 강제로 양위를 받아 魏문제로 등극한후 촉漢은 AD223년 황제유비가 관우의 패사에 격분,이릉전투에서 대패한후 병사하고 오장원에서 사마중달과의 긴전쟁으로 재갈량이 병사한후 환관 황호의 첩자질로 황제 유선은 魏군의 대공격에 멸망한다(AD263)사마예는 사마중달의 손자로 魏원제에게 촉한과의 전쟁의 책임을 물어 멸망시키고 西晋을 건국한다.(AD265~316) 吳나라는 손권의 손자 손호의 공포정치로 약화되어 西晋에 멸망한다.(AD280)

 

중원대륙을 통일한 西晋은 초기에는 검소한 국정관리를 했지만 귀족특권을 옹호하는 정책으로 청류파지식인의 위선적인 사치와 방탕한 생활과 외척 가씨와 양씨의 권력투쟁은 八王의 싸움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노예로 팔려왔거나 왕실에서 불모로 성장한 유목민족의 민족의식을 촉발시켜 영가의 란으로 이어진다.西晋이 멸망후 北魏가 북중원을 통일(439)하기까지 130년간 오호16국시대가 전개되는데 그시작은 남흉노의 후손 유연이 西晋으로부터 오부선우로 책봉된후 흉노군 5만을 거느리고 산서지방 태원에서 北漢을 건국한다(AD308)

 

그 아들 유총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인구1/2을 죽이고 西晋을 멸망시키고그손자 유요가 국명을 前趙로 고치니 북방유목민족 선비.갈(흉노별종)저, 강(티벳트계)의 무대가 된다.

 

北漢;남흉노 유연

 

前趙;남흉노 유요 漢족 위주로 정책을 펴 토박이 흉노의 반감을 산다.갈족(흉노별종)인 석록에게 피살

 

後趙;갈족 석록의 아들 석호가 지나치게 흉노식으로 정치. 후손의 골육상쟁으로 漢인 염민에게 멸망(319~351)

 

염魏; 漢족 염민 제위 3년 漢족을 부추겨 흉노족 20만명을 주살하니 서쪽으로 도망가 훈족과 합류한다선비족 모용각에게 멸망(353)

 

前燕;선비족 모용황은 東晋의 후왕 칭호를 버리고 낙양을 점령 스스로 後燕왕 이라 함(AD364)

 

前晋;돌궐-몽고계의 저족 부건이 건국. 아들 부견이 前燕을 멸망시킴부견은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의 왕조를 지향했으며,고구려와 동맹을 맺고불교를 전달했고,

북중국을 통일한 前晋은 100만대군으로 東晋과비수결전에서 대패 .혼란을 틈타 강족출신 요장이 부견을 모살(351~394)

 

後晋;강족 요장 그아들 요흥은 東晋의 명장 유유(훗날 宋건국)에게 멸망

 

後燕;전연의 왕족 모용수 서연을 흡수하고 동북부를 장악하고 後晋과 대립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고국원왕의 원수인 연나라을 침공하여 대승을 거둔다

만리장성 밖의 같은 선비족인 탁발씨가 산서성 북쪽에서 처들어와 평성에 수도를 두고 代라는 국명으로 後燕을 멸망시키고 북중원을 통일탁발규는 국명을 北魏로 바꾼다. 또 그들의 후예들은 수, 당왕조을 건립한다AD208년 구태백제와 야마대연맹왜 기마군이 가야땅을 통해서 육로로로 진격 했으나 내해이사금13년(신라10대왕)의 군사가 막았다. 조그만 소국이 남부여(구태백제)의 기마군을 막았다니?유라시아대륙 가장 변두리 푸른동해안을 끼고 작은 서라벌에서 천년의 신라가 탄생했고 현재까지 한반도의 패권을 잡고 호전적인 이유??한반도의 산맥과 강은 백두대간을 정점으로 반도에 어울리지않은 높은산맥과 큰강으로 단군이래 차단되어 삼한시대에는 진한,변한의 말과 마한의 말이 달라 소통이 힘들었다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 두만강이 나타나나 하구는 여러개의 개울이있어 기마군이 충분히 녹둔도로 넘어 갈수 있으며 연해주에서 두만강변을 따라 송화강변을 따라 흑룡강(아무르강)변을 따라 몽골초원 바이칼호로 들어가는 오르콘강변에 접어들면 넓은 몽골초원에서 저멀리 눈덥인 알타이,천산산맥이 가로막아 초원을 절단한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카타이의 이밀강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 나타나며 아랄해 주변으로 통해 카스피해연안 그리고 흑해연안을 따라 항가리 평원 도나우강가에 도달했다.

 

영남지방의 지배세력은 주로 해양세력과 북방의 기마민족에 의해서 부족을 형성하고 국가의 형태로 발전했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동해안을 따라서 영남으로 침입할수는 있으나 500m 이상의 소백산맥을 통하여 또한 천해의 방어선 낙동강을 도강하여 침입하기는 힘들었다예를 들어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압록강을 넘어 막조선의 한무리에게 전사하고 그휘하 장군이 익산 금마로 배를 타고 내려 갔을 정도로 남쪽 영남으로 내려가기는 힘들었다

 

1.영남의 구석기인은 주로 아무르강변의 유목민(후에 숙신,읍루->말갈->여진)이 두만강을 넘어 동해안을 따라 영남지방에 들어왔다

 

2.진시황 만리장성 축조시 주로 산동성의 유민

 

3.고조선유민 박혁거세 무리가 동해안을 따라 감포읍 나정리 방면에서 서라벌로 들어와 BC57년 斯盧(사로)국 건국

 

4.석탈해 울릉도 동남쪽 오키제도쪽에서 도래한 아이누족 (만리장성 축조를 피하여 가야지방에 도래한 소호금천씨 후손의 무리가 구주 왜로 넘어가 왜의 본토로 침략, 건국과정에서 토종인 아이누족을 대학살로 인한 망명인)의 무리가 감포읍쪽에서 처들어와 박혁거세 패위된지 6개월만에 죽음(AD57)

 

5.前漢을 멸망시킨 新(AD8~23을 건국한 왕망이 김알지(경주김씨의 시조)의 이모부 김알지의 조상은 C122 한무제는 곽거병으로 하여금 감숙지방의 이치선우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의 흉노군을 대패시키자 책임을 물어 두왕을 죽이려 하자 투항을 망서리는 휴도왕을 혼야왕이 죽이고 휴도왕의 큰아들(일제) 동생(윤) 어머니가 한무제의 포로가 되나 발탁되어 한무제에게 제천금인(김씨 성을 하사 받는다)

 

즉 김일제가 된다 일제는 거기장군이 되어 한무제의 경호를 맡는다김일제의 5대손 성환왕이 김알지이며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5대손이 김수로가 된다김일제의 후손은 後漢광무제에 의해서 철저히 제거 되는데 대부분 몽골로 도망가 왕씨로 살았으나 한반도 김해 제주도에 왕망시대의 화패 五銖錢이 대량 발견.왕족이 대부분 김알지의후손이다

 

6.AD342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 요서있던 東晋의 후왕인 선비족 모용황의 특공대 장군 왕우,장사외 만여명의 기마병이 고구려군을 피해서 개마고원 함흥평야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침입 법흥왕 募泰가 그후손이다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유린하고 고국원왕의 부인과 어머니를 인질 잡아가고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간다.

 

어머니는 고구려가 前燕의 후왕이 되는 조건으로 15년만에 귀국한다모용황은 내몽골의 우문씨를 복속시키고 염민魏를 멸망시키고 낙양에 도읍 前燕을 건국한다(AD364)고구려군 주력 5만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장군)이 모용황군대 주력군(4만)이 평원지대로 침략 할것으로 예상하고 대기했으나 모용주력군은 고국원왕 경호군 1만이 경계하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공격하여 환도성은 유린 당한다. 모용황 특공대 1000기는 평원의 고구려주력군(4만)을 피해서 한반도로 도망가 서라벌로 침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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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해석

 

홍적세 [洪積世, Pleistocene Epoch]

 

지질시대 신생대 제4기의 전반의 세를 말하며 플라이스토세, 갱신세, 최신세라고도 한다.

화산활동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인류의 조상이 나타난 시기가 홍적세이다.

[출처] 홍적세 [洪積世, Pleistocene Epoch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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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의 결전 [ 垓下- ]

중국 진(秦)나라 말기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사이에 벌어진 결전. 해하는 현재의 안후이성[安徽省(안휘성)] 링비현[靈璧縣(영벽현)] 남동부의 지명이다.

 

시황제가 죽고 군웅(群雄)이 할거하자 항우와 유방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BC 206년 항우는 초왕(楚王)이 되어 패왕(覇王)이라고 자칭하며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방과 항우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한·초 전쟁이 시작되었다. BC 202년, 유방은 병력이 피폐하고 식량도 부족한 초군을 추격하여 해하에서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들은 뒤 무운(武運)이 다한 것을 깨닫고 세상을 하직하는 <해하가(垓下歌)>를 지은 다음, 일전을 벌였으나 유방에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유방은 한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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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충(于和沖)

우화충(于和沖)은 고조선의 사냥꾼이였다. 43세 단군 물리 36년-기원전426년-에 일어난 융안(隆安)의 우화충(于和沖))은 사냥꾼 출신으로 장군이라 칭하고 수만명을 이끌고 서북 36군 함락하였다. 진한은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를 진압한 백민성 욕살 구물이 그 공으로 제44대 단군이 되었다. 물리 단제시절에 학문이 번창하기도 하였으나 임금 말년에 이르러 우화충(于和沖)의 난으로 나라가 쇠하여 장자에게 세습치 못하는(제21세 단군 소태왕검에 이어) 두 번째의 왕이 되었다. 43대 물리 단군 때 사냥꾼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단군이 해성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붕어했다.

 

 

-마한(馬韓)의 역대 연대기-

1. 제1대 무강왕(武康王:기준(箕準):서기전194년~서기전193년)

<번조선(番朝鮮)의 멸망>


서기전194년 정미년(丁未年)에 번조선왕 기준(箕準)은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수유(須臾)는 수유족(須臾族)이 사는 곳을 가리키며, 수유족은 소위 은(殷) 기자(箕子) 서여(胥餘)의 후손인 기후족(箕侯族)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수유는 수유족의 근거지인 번조선 땅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기준왕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기준왕이 위만의 속임수에 빠져 번조선을 잃고서 회복하지 못하고 멀리 떠난 것을 가리키는데, 역사적으로는 서기전194년에 기준왕이 번조선을 떠나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갔던 것인 바, 처음에는 서기전195년에 최숭(崔崇)이 먼저 정착하여 세웠던 낙랑국(樂浪國)이 있는 지금의 평양(平壤)에 도착하였으나 토착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다시 남하하였던 것이고, 이에 한반도의 남서쪽 금마(金馬)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며, 스스로 마한왕이 되었으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붕(崩)하였던 것이다.

이에 번조선 출신의 상장군(上將軍) 탁(卓)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월지(月支)에서 중마한(中馬韓)을 세웠는데, 금마(金馬)의 마한(馬韓)을 이어 제2대 왕이 되었던 것이며, 서기전194년부터 서기9년에 백제에게 멸망할 때까지 후삼한의 마한(馬韓)은 합 10대왕 203년의 역사를 가진다. 여기서 월지(月支)는 목지(目支)를 다르게 적은 글자가 된다. 중마한은 마한 땅의 중부지역이 되는 지금의 직산(稷山)을 중심으로 한 나라이기 때문에 붙여진 국명이 된다.

<마한 땅의 후삼한>

서기전194년 위만(衛滿)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긴 번조선왕(番朝鮮王) 기준(箕準)은 배를 타고 마한(馬韓) 땅의 낙랑(樂浪)에 들어갔으나, 토착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쫓겨나니,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마한 땅의 서쪽 지역인 금마(金馬)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마한(馬韓)인 것이며, 금마는 지금의 익산(益山)이 된다.

이리하여 기준왕(箕準王)은 마한(馬韓)의 제1대 무강왕(武康王)이라 하며 1년만에 붕하니, 목지(目支:月支)에서 중마한(中馬韓)을 세운 탁(卓)이 제2대 마한왕이 되었다. 월지(月支)는 목지(目支)의 오기(誤記)가 된다. 목지는 천안과 평택 사이에 위치한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2. 제2대 강왕(康王:卓:서기전193년~서기전189년)

서기전194년 번조선이 망하자 오가의 무리들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마한땅 서쪽 지역에 있는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서기전193년에 기준왕의 뒤를 이어 제2대 마한왕이 되니 강왕(康王)이라 한다.


마한 땅에 기준왕(箕準王)과 탁왕(卓王)의 마한이 세워지기 전인 서기전209년에 동쪽에 진한(辰韓)이 세워지고, 이때 남쪽에는 변한(弁韓)이 세워졌는데, 이후 진한과 변한은 마한(馬韓)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즉 마한의 임금인 마한왕(馬韓王)이 진한과 변한을 모두 아우르는 진왕(辰王)이 되었고 진한과 변한은 왕이라기 보다 비왕(裨王)인 한(韓)인 것이다. 이는 진한(眞韓) 즉 진조선(眞朝鮮)의 임금인 단군이 천왕(天王)으로서 마한(馬韓) 즉 마조선(馬朝鮮)과 번한(番韓) 즉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진한(眞韓)-진조선(眞朝鮮)의 임금이 진왕(辰王)으로서 본왕(本王) 즉 상국(上國)의 왕인 천왕(天王)이며,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과 번한(番韓)-번조선(番朝鮮)은 비왕(裨王)이 다스린 것이다.

3. 제3대 안왕(安王:龕:서기전189~서기전157)

4. 제4대 혜왕(惠王:寔:서기전157~서기전144)

5. 제5대 명왕(明王:武:서기전144~서기전113)

6. 제6대 효왕(孝王:亨:서기전113~서기전73)

7. 제7대 양왕(襄王:燮:서기전73~서기전58)

8. 제8대 원왕(元王:勳:서기전58~서기전32)

9. 제9대 계왕(稽王:貞:서기전32~서기전16)

<백제(百濟)의 건국>

서기전18년에 마한의 제9대 계왕(稽王)이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에게 한강유역 땅을 떼어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였다. 이에 온조는 서기전18년에 한산(漢山) 아래 한강의 남쪽 즉 하남(河南)에 위지성(尉支城:위례성)을 쌓았다.

위지성(위례성)은 13년간 백제의 초기 수도로서 지금의 풍납토성 자리가 되며, 서기전5년부터 서기271년까지 276년간 수도가 된 한성(漢城)은 해자를 갖춘 몽촌토성(蒙村土城)이 되고, 서기371년부터 서기475년까지 약100년간 수도가 된 한산(漢山)은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 자리가 되는데, 지금의 서울 즉 한성(漢城)에서의 백제역사는 서기전18년부터 서기475년까지 총493년이 된다.

10. 제10대 학왕(學王:서기전16년~서기9년)

서기9년에 백제에게 망하니, 이로써 후삼한의 마한은 10대 203년이다.

마한의 계왕이 서기전18년에 온조에게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한강유역을 떼어 주면서 배려하였으나, 서기9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던 것이 된다.

- 마한 54국 -

[마한54국]

마한은 한반도의 서쪽에 있으며 모두 54국이 된다. 북쪽은 낙랑과 연결되고, 남쪽은 왜와 연접되며, 동쪽은 진한과 접한다. 진한 12국과 변한 12국을 합하면 마한 관할에는 모두 78국이 있는 것이 된다.

마한 54국은 아래와 같다.

원양국(爰襄國), 모양수국(牟襄水國), 상수국(桑水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록국(優休牟淥國), 신분첨국(臣濆沾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남국(怒藍國), 자지국(自支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고리비국(古卑離國), 신첩국(臣疊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곡(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만국(古滿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매로국(邁盧國), 군비리국(群卑離國), 전사오차국(田斯烏且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우반국(友半國), 구소국(狗素國), 정로국(挺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랑국(古榔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神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원지국(爰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이다.<삼국지 동이전 韓>

[마한의 관제]

작은 고을 즉 별읍(別邑)마다 우두머리로 거수(渠帥)가 있다. 큰 고을에서는 우두머리를 신지(臣智)라 하고, 그 아래에 검측(儉側)이 있고, 그 아래에 번지(樊祗)가 있고, 그 아래에 살해(殺奚)가 있으며, 그 아래에 읍해(邑偕)가 있다<후한서 동이전 韓>.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리고, 신지(臣智)에게는 우호신운견지보안사숙지분신리아불례구사진지렴(優呼臣雲遣支報邪叔支濆臣離兒不例狗邪秦支廉)이라는 칭호를 더하기도 하였다.

벼슬에는 위솔선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伯), 장(長), 후(侯) 등이 있었다.

각 나라마다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고 한다.

여기서 별읍(別邑)은 소도(蘇塗)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소도에는 큰 나무가 있어 방울과 북을 매다는데 절(寺)과 같은 말이 된다. 큰 나무는 신단수 즉 당산나무를 가리키는 것이 되고, 절과 같다는 말은 종교행사 장소인 신성지역임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마한의 소국(小國)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는 담당자를 천군(天君)이라 하는 바, 이로써 목지국(目支國:月支國)의 왕인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소국들의 본왕으로서 천왕격(天王格)의 임금이 된다. 여기서 월지국(月支國)은 목지국(目支國)의 오기가 된다.

소도의 수장은 거수(渠帥)이다. 소도를 관장한 사람은 국선(國仙)이 되는데, 곧 국선이 거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된다.

신지(臣智), 검측(儉側), 번예(樊濊)의 다른 표기가 되는 번지(樊祗)는 공후백자남의 제후에 해당하고, 그 아래의 살해(殺奚)는 지방의 최고장관인 욕살(褥薩)에 해당하며, 읍해(邑偕)는 읍차(邑借)의 오기(誤記)로서 읍(邑)의 수장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인구수>

큰 나라는 만여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된다. 총 10여만호가 된다.

마한의 관할에 속하는 진한과 변한을 합한 총 78국의 땅을 모두 합치면 약4,000리(里)가 된다. 이는 가로와 세로 각 약 2,000리 즉 방(方) 2,000리라는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의 1주(州)에 해당하는 방(方) 1,000리의 땅이 4개가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후삼한 시대의 마한 관할은 실제로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이 되는데, 즉 지금의 한강유역에서 남쪽으로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되며, 사방 둘레가 약4,000리로서 방(方) 1,000리의 땅이 된다.

1호당 식구를 약10명이라고 계산하면 10여만호의 총인구수는 약100만여명이 된다. 즉 지금의 한강 이남으로 약100만명이 살았다는 것이 된다.

한편, 단군조선 시대인 서기전1666년경에는 36주(州)와 은(殷)나라 9주(州)를 합한 총 45주(州)에 총 1억8,000만명이 살아, 평균적으로 1주(州)에 해당하는 방(方) 1,000리에 약400만명이 살았던 것이 되어, 후삼한 시대에 비하여 인구밀도가 약4배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계산된다. 물론 단군조선의 영역은 45주 밖으로 일반 조공국까지 합하면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땅이 되어 서기전1666년경에 1억 8,000만명이 살았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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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2세). 한문화재단(桓文化財團) 사무총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1. 홍익인간(弘益人間) 천부(天符)의 역사는 마고성(麻姑城:파미르고원)의 마고(麻姑)시대인 서기전70378년 계해년(癸亥年)부터 시작되었음을 최초로 밝혔음.
2. 역법(曆法)이 시작된 해는 마고성(麻姑城)의 황궁씨(黃穹氏) 시대인 서기전25858년 계해년(癸亥年)임을 밝혔으며, 서기전70378년 계해년이 마고(麻姑) 기원(紀元:천부 天符)임을 밝혔음.
3. 황궁씨를 이은 나반(那般:那般尊者:獨聖者)이 한국(桓國)시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임금이던 유인씨(有因氏)이며, 한인씨 7대(代)가 약1,000년을 다스렸다는 것임을 밝혔음.
4. 윷놀이판의 모습이 천부경(天符經)의 무한조화순환역(無限造化循環易), 음양오행(陰陽五行),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구조를 나타낸 것임을 밝혔으며,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배달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수리역(陰陽五行數理易)이며, 태호복희 8괘역과 윷놀이판의 역이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기반으로 한 역(易)임을 밝혔음.
5. 천제(天帝), 천황(天皇:天王),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위계질서를 최초로 밝히고, 천제자(天帝子)와 천자(天子)의 차이점을 최초로 밝혔으며, 태호복희씨(太皞伏羲氏)가 일반 천자(天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권한을 가진 제사장인 천군(天君)임을 밝혔음.
6. 아리랑(阿里嶺) 민요의 원천이 되는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있었던 당요(唐堯)의 전란(戰亂)으로 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동북 아사달로의 이동과정임을 밝혔음.
7. 고대중국의 천자로 불리는 요순우(堯舜禹)와 고대일본의 신무왕(神武王)이 단군조선의 반역자(反逆者)이면서 제후인 천자(天子)임을 밝혔음.
8. 우비(禹碑:우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의 비문을 국내 최초로 역사적 해석을 하여, 서기전2267년 이후 우(禹)가 치수에 성공한 후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해 준 단군조선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겨 남악(南嶽) 형산(衡山)에 세운 것임을 밝혔음.
9. 일본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사당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소장된 원시한글 축문을 국내 최초로 완벽 해독하고, 요하유로 기록된 천조대신이 단군조선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의 후손임을 밝혔음.
10. 명도전(明刀錢)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加臨土) 해독의 검증에 참여하여 첨수도(尖首刀), 명도전이 단군조선의 화폐이며 새겨진 문자가 단군조선의 상형 및 표음 문자임을 밝혔음. 그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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