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문화유적❀

◐사은정(四隱亭) [한양조씨/한산이씨]◑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6. 16.

●사은정[四隱亭]보존회 2022년도정기총회 :22.6.15.수.11:00●[1]

●사은정[四隱亭]은 용인시 향토유적 제50호로 2001년 3월 1일 지정되어 있습니다. 위치는 용인시 기흥구 사은로 161(지곡동 615)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은정  이정표가 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50m만 산을 끼고 돌아가면 왼쪽으로 보입니다. 

왼쪽 좁은 도로로 올라가면 차량을 주차할 공간이 충분하게 있답니다. 

사은정은 조선 중종조의 명현이며 성리학의 대가이자 동방사현 중의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하여 중종 때의 유학자로 식견이 높기로 유명하였던 방은 조광보, 기묘명현 회곡 조광좌 그리고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정암 조광조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화를 당한 음애 이자 선생 등과 도의로 친우를 맺고 은거하여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사은(四隱)이라는 이름은 밭 갈고 나무하고 낚시질하고 나물캐는 네가지 ♥경(耕), ♥신(新), ♥조(釣), ♥채(菜)의 즐거운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정조 20년(1796)에 정암과 음에, 회곡 선생의 후손들이 힘을 합하여 정자를 중건하였는데 서재를 다시 짓고 방도 만들었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습니다. 

고종 13년(1876)에는 정자가 지은 지 오래되어 훼손되었으므로 후손들이 중창 하였으며 1925년에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그 후 1988년에 후손들이 현재의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사은정은 한국민속촌 옆 야산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자 뒤쪽 언덕 위에는 소나무 사이로 바위가 드러나 있으며 전면으로는 지곡리의 들이 펼쳐지고 낮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어 풍광이 매우 좋다고 합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익공계 팔작집인데 방과 대청을 좌우에 나란히 놓았으며 전면에 개방된 툇간을 두고 계자각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대청 안에는 중건, 중수기, 현판이 걸려 있답니다.

◈陶 菴 詩 (도암시)◈
♠陶菴詞外野花悠 (도암사외야화유)
♣정암사 뜰엔 들꽃이 한가로운데,
♠細徑榮回岩庚幽 (세경영회암경유)
♣가는 길 바위 감돌아 산 더욱 깊고나!
♠流水忽驚成自影 (유수홀경성자영)
♣흐르는 물에 문득 그림자 드리워지니,
♠靑山應自識前遊 (청산응자식전유)
♣청산도 저절로 전날 노닐던 일 아는 듯하네!
※이 재(李縡,1680~1746):본은 우봉, 자는 희경,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 시호 문정. 조선조 영조 때의 학자, 대제학, 이조참판을 지냄. 성리학 연구에 전념. 사례편람, 도암집 등이 있음.

 

▣古溪文集卷之六 / 墓碣銘

■성명 : 이휘령(李彙寧)

■생년 : 1788년(정조 12)

■몰년 : 1861년(철종 12)

■자 : 군목(君睦)

■호 : 고계(古溪), 죽서(竹栖)

■본관 : 진보(眞寶)

●成均進士趙公墓碣銘 幷序● 하담고택 조시벽(趙是璧, 1670~1753) (양경공-병참공파)

[DCI]ITKC_MO_1187A_0060_010_0150_2017_B119_XML DCI복사 URL복사

趙之氏漢陽。自高麗僉議中書事之壽。龍原府院君襄烈公仁璧。漢平府院君良敬公涓顯。四世至贈參判源。娶于嶺之英。因家焉。又二世同樞任。有諱是璧。諱白圭。諱尙鏞。諱虎臣。俱有學行。實惟公高曾祖祖若考。妣載寧李氏。恒齋先生玄孫䂓遠女。嘉惠有婦行。以英廟癸巳生公。諱弘復。字穉重。幼聦穎端重。語默動止。若老成人。甫舞勺。已博通經史。尤熟讀小學書。旣冠遊陶山。得聖學十圖。摹寫爲屛。常目展省。癸亥魁鄕解。有一官人愛公詞賦。要與就公車而不屈。誣以事。謫關西。公不槪懷。日哦詠于樓㙜山水間。乙丑宥還。丁卯擢司馬。辛未遭李氏喪。持制依家禮甚謹。甲戌遊太學。矜擧止愼交際。有時譽。歸卽屛擧杜門。恒侍側講討經旨。大人公喜曰。兒講說。可以忘吾老已吾疾。己丑大人公歿。公已老矣。哀號若嬰兒。葬而祭盡誠禮。與弟常同居。有疾病。必自煗粥煮藥。實古人之篤友也。甞値歲儉。家有盜。公曰。勿火燭。此鄰里窮餓者。不如不識面而使自去也。閭外有一僵死人。公貰佩刀以揜埋。家甚窶。同堂共爨。和氣融如也。人有不堪窮約者。公曰。貧者士之常。當安之而已。晩築亭于先壠側。扁曰望雲以寓慕。日晨興拜家廟。退坐讀聖贒書。於晦庵書㝡用力。有蒙士願學者。隨才善誨。咸底成就。有好賓客至。日吟詩講書不知勞。其自警詩所謂。老去都無天下事。閒來時有卷中人者。卽觀化前絶筆也。以憲宗辛丑卒。壽六十九。葬于元塘圖馬洞負坎原。配聞韶金氏。大司諫邦杰五世孫始精女。二子。彦宅,彦翊。二女。南麟煥,南有鐸。甲戌春。余赴南省。公時在庠。一瞻風儀。可知爲文學篤行人也。其歸。泮之贒士大夫。咸稱公南州高士。有爲序以送者。今觀公之狀。始知公閑居讀書之樂。非區區名利所可易者。則向之深藏林壑。不迹京國。盖有以也。日。公之胤彦宅甫。請銘于公之墓。非余爲能言。以甞辱知于公也。遂不忍辭。銘曰。

公之行。是有得乎小學一書。

公之學。倘有受乎聖學十圖。

于世不市。公實樂此圖。

馬之麓。有過必式。

嗚呼南州高士之碣。

 

●한천서원 寒泉書院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노곡(노루실)에 있었던 서원.

▶요약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이재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이재(李縡)의 강학처인 한천정사(寒泉精舍)가 모체가 되어 조선 정조 때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802년(순조 2)에 ‘한천(寒泉)’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태학지(太學志)』
・ 『서원등록(書院謄錄)』
・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史蹟)』

....................

●한천서원(寒泉書院) -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가실목)
●한천서원(寒泉書院)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 1동(한정)

오운(吳澐)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竹牖先生文集秊譜

二十一秊 我宣祖二十六秊 癸巳 先生五十四歲。

○九月聞大駕自海西回鸞京師。○是歲除尙州牧使。赴任未幾。以病辭歸榮川草谷。先是家眷避亂榮川地。先生因居焉。 ○撰龍蛇亂離錄。今失傳

四十三秊 光海七秊 乙卯 先生七十六歲

燕居之室。竅作小牖。命曰竹牖精舍。因以自號。先生喜其暗去而明來。取朱子竹牖向陽開之語以名之。時李蒼石守豐基。趙玄洲纘韓宰本邑。相與從遊唱酬。○蒼石詩曰歲歲吾何幸。叨忝左席榮。玄洲詩曰執經高講幄。便養邇專城云。 ○是歲與金栢巖議建書堂於聖齋山東。以爲後生肄業之地。書堂名山泉

正宗大王十秊丙午。士林建祠于山泉舊址。山泉書院。改號寒泉書院。
●한천서원(寒泉書院)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871

....................

宋子大全附錄卷十二 / [年譜] / 年譜[十一]

[崇禎九十一年戊戌]

九十一年戊戌○五道儒生相繼上書請從祀。

黃澗諸生建書院于寒泉

송환기(宋煥箕) 1728년(영조 4)~1807년(순조 7)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
性潭先生集卷之三十一 / 附錄 / 年譜

戊子先生四十一歲。

七月與宗兄往拜黃澗之寒泉書院。仍省曾祖考墓。還到沃川謁滄洲書院。

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 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 ㆍ김시창(金始昌) 호는 풍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 ㆍ송시열(宋時烈)

송계서원(松溪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다. : 남지언(南知言) 호는 삼괴당(三槐堂), 참봉을 지냈다. ㆍ박유동(朴惟東) 호는 일석(一石)이며, 참봉을 지냈다.

한천서원(寒天書院) 정유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한천서원(寒天書院) ->泉

*원문이미지 泉

宋子大全附錄卷十二 / [年譜] / 年譜[十一]

[崇禎九十一年戊戌]

九十一年戊戌○五道儒生相繼上書請從祀。

黃澗諸生建書院于寒泉


....................

2 도암 이 선생  이재(李縡, 1680~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ㆍ한천(寒泉),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며 황경원의 스승으로 형조 참판ㆍ승문원 제조ㆍ부교리ㆍ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ㆍ《도암과시(陶菴科詩)》ㆍ《사례편람(四禮便覽)》ㆍ《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강한집(江漢集)

3 문정공(文正公) 도암 선생(陶菴先生)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재(李縡, 1680~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1702년 알성 문과에, 1707년 문과중시에 급제했다. 1722년 임인옥사(壬寅獄事) 때 중부 이만성(李晩成)이 옥사하자 사직하고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뒤 복직하여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18세기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 계열의 대표적 인물이며,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도암집(陶菴集)》 등이 있다. 강한집(江漢集)

.....................

순조실록 4권, 순조 2년 1월 28일 庚子 2번째기사 1802년 청 가경(嘉慶) 7년  

고 참찬 이재의 한천 서원에 사액할 것을 명하다
 
고(故) 참찬(參贊)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의 한천 서원(寒泉書院)에 사액(賜額)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용인(龍仁)의 유생(儒生) 정규채(鄭奎采) 등이 상소(上疏)하여 사액하기를 요청하므로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영부사 이병모(李秉模) 등이 말하기를,

"이재의 도학(道學)과 명절(名節)은 울연(蔚然)히 일세(一世)의 존앙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그 제사하는 장소로 인하여 선액(宣額)의 전례(典禮)로써 요청한 것은 많은 선배들의 공의로서 끝내 아무래도 저지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命故參贊文正公 李縡 寒泉書院賜額。 時, 龍仁儒生鄭奎采等, 上疏請額, 問于大臣, 領府事李秉模等以爲: "縡之道學名節, 蔚然爲一世之所尊仰。 因其祭祀之所, 請以宣額之典, 多士公議, 終恐難遏。" 從之。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