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元秀 申師任堂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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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묘갈명
1670년(현종 2년)에 경기도 파주시 천현면 동문리 동문리 산 5-1에 건립된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묘갈이다. 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썼다. 그런데 묘갈 끝에 “묘표 가운데 청송처사 성공 수침(聽松處士成公守琛)은 마땅히 여성위 이암 송공 인(礪城尉㶊菴宋公)으로 고쳐야 하며 그 아래 청송(聽松) 두 글자도 마땅히 이암(㶊菴)으로 고쳐야한다. 아마 당초 글을 청한 사람이 잘못 알려 주어서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이제 따로 이일을 기록하면서 이를 정정하는 바이다. 1691년(숙종 17년) 5월 일에 반남(潘南) 박세채(朴世采)가 삼가 썼다.” 고 하고 있다. 묘갈에 의하면 신사임당(1504∼1551년)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자품이 절이(絶異)하여 예를 익히고 시에도 밝았으며 서화에 있어서도 묘경(妙境)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편은 이원수(李元秀)로 그는 음직으로 들어가 벼슬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가 셋째 아들인 이이가 귀하게 됨으로 찬성(贊成)에 증직되었고 신씨도 정경부인에 봉함을 받았다. 뒷부분에는 신사임당과 이원수의 자녀들의 가계까지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신사임당을 비롯하여 이이의 신상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묘갈이다.
신사임당 묘갈명 전문 申師任堂 墓碣銘 全文
파주(坡州)의 두문리(斗文里)에 감찰 이공(李公)과 신씨(申氏)가 부장(祔葬)된 묘소는 율곡 선생(栗谷先生)의 황고(皇考) 비(妣)의 묘소이다. 지문(誌文)이 있는데, 이는 청송 처사(聽松處士) 성공 수침(成公守琛)이 지은 것이다. 거기에 의하면, ‘공은 곤핍(悃愊)하여 사치함이 없었고 남과의 경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아름다이 선(善)을 즐기는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신씨는 평산(平山)의 큰 성씨(姓氏)로써 기묘명헌(己卯名賢) 명화(命和)의 따님이다. 자품(資稟)이 월등하게 뛰어나 예(禮)를 익히고 시(詩)에도 밝았다. 서화(書畫)에 있어서도 묘경(妙境)에 이르러 이것을 얻은 자는 구슬을 안은 듯이 보배로 여겼다. 공은 이 현숙한 부인을 얻어서 대현(大賢)을 낳았다. 옛말에 ‘황류(黃流)는 와기(瓦器)에는 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의 잠덕(潛德)이 청송(聽松)이 말한 것에서 그치지는 않음이 아닐런가.
공의 휘(諱)는 원수(元秀)요, 자(字)는 덕형(德亨)이니, 음직(蔭職)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가정(嘉靖) 신유년 5월 14일 갑자에 61세로 사망하였는데, 선생께서 귀하게 됨으로 인하여 찬성에 증직(贈職)되었고, 신씨도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봉(贈封)되었다. 그 선계(先系)는 모두 선생의 모표(墓表)에 실려 있다.
장남 선(璿)은 참봉이요, 차남은 번(璠)이며, 율곡 선생이 셋째이고, 막내는 우(瑀)인데 그도 또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사위는 직장 조대남(趙大男), 첨사(僉使) 윤섭(尹涉), 사인(士人) 홍천우(洪天祐)이다. 참봉은 아들 경진(景震)과 경항(景恒)을 낳았는데 모두 참봉이요, 딸은 별좌(別坐) 조덕용(趙德容)에게 출가하였다. 번은 경승(景升)과 경정(景井)을 낳았다. 율곡 선생은 측실(側室)에게서 교관 경림(景臨)과 경정(景鼎)을 낳았고, 딸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측실이 되었다. 우는 경절(景節)을 낳느니 벼슬은 사의(司議)였다가 승지에 증직되었고, 딸은 정유성(鄭維城)과 권상정(權尙正)에게 출가하였는데, 권상정은 찰방이다. 욱(稶)은 경진의 소생이고, 운(秐)은 전부(典簿)인데 경항의 소생이며, 익(翊)은 부사인데 경승의 소생이다. 또 숙(䎘), 굉(翃), 상(翔), 빈(䎙), 핵(翮)은 경정의 소생이며, 군수(郡守) 집()과 교(穚), 균(稇)은 경절의 소생이다. 내외(內外)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매우 번성하였고, 군수의 아들 동명(東溟)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종신(侍從臣)을 지냈다.
동명이 경외(京外)의 유신(儒紳)들과 의논하기를, “율곡 선생의 묘소는 공의 묘소 뒤에 있는데, 선생은 낙건(洛建)의 연원을 잇고 동로(東魯)의 통서(統緖)를 천양(闡揚)하여 앞으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것이니, 공의 이름도 선생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 그러나 의리(衣履)에 간직한 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드디어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숭정(崇禎) 경술년 윤2월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기술(記述)하고, 송준길(宋浚吉)은 공경하게 쓰다.
묘포(墓表) 가운데 ‘청송처사 성공 수침(聽松處士成公守琛)’의 여덟 자는 마땅히 ‘여성위 이암 송공 인(礪城尉㶊菴宋公寅)’으로 고쳐야 하며, 그 아래 문장의 ‘청송(聽松)’ 두 글자도 마땅히 ‘이암(㶊菴)’으로 고쳐야 한다. 아마도 당초 글을 청한 사람이 잘못 알려 주어 그렇게 된 것이리라. 이제 별도로 이 일을 기록하면서 오류를 바로잡는 바이다.
경술년으로부터 22년 뒤인 신미년 5월 일에 반남(潘南) 박세채(朴世采)는 삼가 쓰다.
申師任堂墓碣銘
坡州之斗文里曰監察李公申氏祔葬墓者栗谷先生之皇考妣也有誌文焉聽松處
士成公守琛作也有云公悃愊無華不與物竸休休樂善有古人風噫盡之矣申氏平
山大姓己卯名賢命和之女姿禀絶異習禮明詩至其書畫之類亦臻其妙得之者如
寶拱焉公得此賢配克生大賢語云黃流不注於瓦哭意者公之潜德不止於聽松
所稱歟公諱元秀字德亨以蔭入官止司憲府監察嘉靖辛酉五月十四日甲子周而
卒以先生貴 贈賛成申氏亦 贈貞敬夫人其系出俱在先生墓表男長參奉次
璠栗谷先生其第三而季曰瑀亦有名於世女壻直長趙大男僉使尹涉士人洪天祐
參奉生景震景恒皆參奉女適別坐趙德容璠生景升景井栗谷先生側出敎官景臨
景鼎女爲金文敬公集側室瑀生景節官司議 贈承旨女適鄭維城權尙正權察訪
也稶景震出秐典簿景恒出翊府使景升出䎘翔䎙景井出郡守穚稛景節出
內外曾玄甚蕃而郡守之子東溟文科侍從東溟與京外儒紳議曰栗谷先生之葬在
公墓之後先生承洛建之淵源闡東魯之統諸將與天壞無窮則公之名亦與之無窮
然衣履之藏不可以不識遂立石于其前
▨崇禎庚戌閏二月 日恩津宋時烈謹述
恩津宋浚吉敬書
墓表中聽松處士成公守琛八字當作礪城尉㶊菴宋
公寅下文聽松二字亦當作㶊菴盖以當初請文者不
免誤告而然也今別記其事如此庚戌後二十二年辛
未五月 日潘南朴世采謹書
신사임당의 詩: 사친(思親)/친정어머니(母親)을 그리며.....
천리가산만첩봉(千里家山萬疊峰)
귀심장재몽혼중(歸心長在夢魂中)
한송정반쌍윤월(寒松亭畔雙輪月)
경포대전일진풍(鏡浦臺前一陣風)
산이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자나깨나 꿈 속에서도 돌아 가고파
한송정 호수에 외로이 떠있는 달
경포대에 부는 한줄기 바람
사상백로항취산(沙上白鷺恒聚散)
파두어정각서동(波頭漁艇各西東)
하시중답임영로(何時重踏臨潁路)
채복반의슬하봉(綵服斑衣膝下縫)
갈매기는 모래톱에 모였다, 흩어졌다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밟아
색동옷입고 어머니 슬하에서 바느질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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