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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진주] 오방리 조선조 고분군[영의정 호정 하륜 묘]
호정 하륜(浩亭 河崙)
1347(충목왕 3)∼1416(태종 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공진(珙辰)의 후예로, 식(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 시원(恃源)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윤린(允潾)이다. 어머니는 증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1347년 고려시대 순흥부사를 지내고 있던 하윤린(河允潾)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지만 신돈과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하여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올랐다. 밀직사첨서사(密直司簽書事)를 거쳐, 1388년(우왕 14) 최영(崔瑩)의 요동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楊州)로 귀양갔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경기도도관찰사가 되어 무악(毋岳) 천도를 주장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이듬해 중추원첨서사(中樞院簽書事)에 전보되었다.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표전문(表箋文)이 불손하다고 트집잡자, 1396년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해명하였다.
1398년 충청도도관찰사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고, 이방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권력의 실세로 군림했다. 그해 명나라 태조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가서 정종의 왕위승습(王位承襲)을 승인받고 귀국하였고, 문하부참찬사에 오르고 다시 의흥삼군부 판사(義興三軍府判事)를 거쳐 우정승으로 진산백(晉山伯)에 진봉되었다.
그해 태종(이방원)의 즉위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보고하게 만들었으며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재정의 확충을 도모하였고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좌정승(左政丞)에 복관, 승추부판사를 겸하였다. 그해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사(登極使)로 가서 조선왕조의 완전인준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이첨(李詹)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1409년 의정부영사가 되어 군정(軍政)을 개정한 데 이어 춘추관영사로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을 지휘하고, 1412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1416년(태종 16) 70세로 치사(致仕)하였다. 진산부원군에 진봉되어 왕명으로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문집에 《호정집》이 있다. [출처] 하륜 [河崙 ] | 네이버 백과사전
영의정 호정 하륜묘(후)와 배위 성주이씨 묘 전경-배위는 성주이씨로 문열공 성산후 李兆年의 증손 예의판사 李仁美의 따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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