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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기대승의 ‘실천선비정신’ 깃든 광주 월봉서원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0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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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의 ‘실천선비정신’ 깃든 광주 월봉서원♠

[오마이뉴스 유길수 기자]

요즘 대한민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기호지방하면 충청도만을 떠올린다. 서울 포함 수도권은 이미 지방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동시에 기호학파하면 율곡 이이 선생만을 일단 생각해낸다. 그 뒤에 영남지방은 경상남북도, 영남학파의 거두는 퇴계 이황 선생, 그리고 이이와 이황이 우리 민족 사림문화 ‘두 대표’로 ‘교통정리’하기 일쑤이다. 게다가 호남지방하면 전라남북도 지역, ‘남도’하면 전라도 지방으로 지레짐작한 뒤에 곡창지대, 풍류의 고장, 특별한 예술문화지역쯤으로 예단해 버린다. 시간이 허락되면 동학란, 광주학생의거, ‘5월 18일의 광주’ 등은 의로움의 한 상징으로 덤인심 쓰듯 ‘호남해석’을 해버린다.   역사적으로 호남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행정구역 명칭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이병도 선생은 호남지방의 경계선은 충북의 제천 의림지로 해석했다. 후백제의 땅이었다는 ‘호남’지방의 경계선은 차령 이남으로 지금의 천안지방까지 북상할 정도였다. 현재의 충남 논산 땅과 금산 고을이 전라도 겉옷을 벗고 충청도 속옷을 입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5·16혁명 정부 즈음의 일이다. 남도란 단어는 경기도 이남의 지방을 지칭한다고 국어사전에도 명쾌하게 기록돼 있다. 호남과 영남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16세기 중반부터의 일로 추정된다. 호남사림 또한 기호사림의 한 ‘파트 사림’이 결단코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사림과 호남사림 양대 세력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역사적 기록 또한 한 치의 의심조차 없을 정도로 명확하기만 하다.호남사림이 형성된 역사적 큰 줄기는 3단계로 대별된다. 첫 번째는 조선 건국 당시 전주 이씨들의 피묻은 장군의 칼 등이 싫어 남하한 사대부들로 광산 김씨, 울산 김씨, 금성 범씨, 천안 전씨, 하동 정씨, 옥천 조씨 등이다. 두 번째로 한양을 출발, 남행을 감행한 사림들은 삼촌이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왕자리를 차지하면서 내세운 수양대군의 골육상쟁 합리화에 치가 떨린 씨족의 남도 입향 시조들로, 김종서 장군의 순천 김씨, 진주 정씨, 남평 문씨, 충주 박씨, 무안 박씨, 충주 김씨, 영광 김씨, 함평 이씨, 전주 최씨, 여산 송씨, 고령 신씨, 경주 이씨, 함평 노씨, 함평 모씨, 원주 이씨, 문화 류씨, 홍주 송씨, 양성 이씨 등이다. 세 번째로 호남사림문화에 합류한 세력들은 연산군의 폭정과 훈구파 등에게 힘이 밀려 관복을 벗거나 붓은 잠시 동안 놓은 분들이 대부분으로 탐진 최씨, 신평 송씨, 경주 이씨, 하동 정씨, 고령 신씨, 서흥 김씨 등이다. 이러한 사림세력들이 훈구세력(조선왕조 개국세력, 세조 등극 협조세력, 중종반정 공신세력 등)에 강력 대항한 역사적 사건은 조광조의 도학정치 실현이 하이라이트. 그러나 이상은 현실을 거푸 뛰어넘지 못하고 만다.기대승(1527-1572)은 조광조와 도학정치를 소망하다 실패한 작은아버지 기준을 둔 행주(경기도 고양시) 기씨 가문에서 태를 이었다. 아버지 기진이 동생 기준(기묘 8명현) 등의 선비들의 사화가 멸문의 화로 치닫자 가솔을 데리고 광주로 피난했다. 광주로 이주했던 기씨 집안의 터잡기 사정은 1519년쯤의 일로, 기진의 외가인 나주의 오씨가와 처가인 영광의 진주 강씨가의 도움 덕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기진은 이곳 광곡땅(너브실)에다 기씨 터밭을 일구면서 기대승을 낳았다. 그후 기씨들은 호남땅에다 고려시대 중앙 명문가의 힘찬 가풍 흐름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호남 기씨 집안으로 안착한 기씨들은 그후 조선조 성리학 6대가인 기정진, 한말 의병장 기삼연, 을미 호남 창의 대장 기우만 등을 배출하여 광주 전남권에서 드높은 선비정신과 의로움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기대승은 1527년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8세가 되던 중종 29년에 모친상을 당하면서 삶과 죽음이란 철학을 일찍 익혀야 했다. 다음해부터 시작된 효경 등의 독서로 학문의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1549년 생원 진사 양시에 소과 합격하고 1558년 문과에 대과 합격해 벼슬의 길로 나아갔다. 그 뒤 예문관 등에서의 관직생활과 사가독서 탄핵 등으로 이어지는 사대부의 길을 올곧게 걸었다. 고봉 기대승의 이런 사대부의 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문화는 ‘기고박의 고장’이란 광주의 예전 양반문화가 분명해 보인다. '기'는 고봉의 본가인 경기도 고양의 행주발 광주착 기씨가, '고'는 광주 압보촌의 제주 고씨가, '박'은 광주 방하동의 충주 박씨 집안을 지칭한다. 광주 고씨가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연합의병 대장 고경명으로, 광주 박씨가는 호남사림정치를 연 눌재 박상과 영의정 박순 등으로 가문의 영광 명성이 오랜 세월 동안 자자했다. 고봉은 퇴계와의 사단칠정논쟁으로 유명한 성리학자이다. 사단칠정이란 4단(사람의 본성인 理, 인의예지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7정(사람의 감정인 氣, 희노애락애오욕)을 일컫는다. 성리학 연구의 중심은 인간의 문제였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행동을 어떻게 하나로 일치시키느냐 하는 논리의 전개는 대학자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명분주제’였을 것이다. 그 뒤 사칠논쟁은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으로, 주리파 주기파라는 ‘철학집단’으로 학파 분류된 다음에 동서분당으로까지 이어졌다. 사단은 정이다 칠정 또한 정이다(四端情也 七情亦情也) 모두 정인데 어떻게 사단과 칠정의 다른 이름이 있겠는가.(均是情也 何以有四七之異名耶) 그러나 ‘고봉사상’은 이런 인성론보다는 그의 경세론에서 빛난다는 광주지방 후학들의 평가가 요즘은 북상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촌시대 이후 기호와 영남이라는 양 지방에 인구를 빼앗기다시피한 ‘호남인구’의 현저한 축소는 호남학의 부존재로까지 악영향을 미쳐서일까.2004년 현재 광주의 위상은 사람 숫자로만 봐서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 초라함은 한때 호남을 대표했던 광주시의 옛날 전성기를 생각하면 슬퍼지기까지 할 정도이다. 부산시에 공장 허가증 내기에서부터 밀리고 대구시에 섬유도시 명성 빼앗기고 인천시에 아들딸들 살림집 내주고 대전시에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놓아 전국 몇 대 도시 운운했던 옛 시절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밀 정도이다. 그런 속사정은 광주의 아픔으로 악화되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공약한 ‘문화수도’란 단어가 어폐가 있다는 지역내 여론도 드높기만 하다. 차라리 ‘농림수산부 수도 광주시’로 명함을 바꾼다면 ‘그럴 듯하다’라는 말까지 들린다. 사람이 없는데 머리 숫자가 부족한데 수도권 2천만명의 10% 미만인 광주시민이 ‘문화수도민’이 된다는 ‘문화수도 천도설’은 사기극의 극치로까지 폄하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광주란 단어에는 엄청난 파워가 등재돼 있다는 데에 대해 부정하는 한국인은 드물기도 하다. 그 뿌리가 어디일까. 그 파괴력이 어디에서 발산되는 것일까.호남사림의 큰 계보는 조광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학계와, 송순과 정철로 대변되는 서정적 문학계, 고경명 김천일의 위엄이 돋보이는 절의계, 유형원 정약용으로 이름값이 유용한 실학계 등으로 4대분 할 수 있다. 고봉 기대승을 굳이 계파 분류하자면 도학계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고봉사상은 사단칠정논쟁보다 덜 알려진 ‘고봉 경세관’에서 찾아야 된다는 학자들의 목소리 또한 크기 만하다. 고봉은 퇴계와 당당하게 인성론을 논할 당시에도 나라를 바로 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선비의 근본 정신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고봉은 명종 19년에 경연에 참석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 달려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달려 있으니, 경연의 중요성은 재상과 비견된다”라면서 임금의 경연을 중차대한 국가 대사로 여겼다. 또한 “언로를 열어 직간을 받아들이고 뜻을 펼수 있게 하라”고 선비의 바른 입으로 임금의 바른 행동을 주문했다. 광주의 정신은 불의를 보면 뒷짐지지 않은 ‘나섬의 미학’에서 일단 찾을 수 있을 성싶다. 나섬이 이로움이 되든가 해로움이 되든가는 생각머리조차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돈이 되고 이기적인 득이 되고의 ‘계산속’은 일단 제쳐놓고 말이다. 이런 광주정신이 경제제일주의를 살아내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단어로까지 판단될 법도 하다.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599번지 고봉학술원에는 고봉 정신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학술원은 고봉의 후손인 기세훈 이사장이 1991년 설립한 것이다. 그리고 기씨 집성촌인 너브실 마을과 월봉서원 귀후재 학술원안 애일당 등에도 고봉의 실천적 학문의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광곡마을 고샅길을 나오면서 450여년 전의 일들이 회상됐다. 조광조의 개혁정신에 이은 고봉의 실천선비정신, 왜란과 호란 양란에 의병봉기로 충절을 다했던 호남인들의 애국정신, 사회적 모순이 노정될 때마다 던졌던 비판의 날카로움, 그리고 실학의 산실이었던 드넓은 들판의 풍요로움과 선각자들의 땀내음. 한국의 근대와 현대사에서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한말 의병항쟁, 일본압제시대 광주학생운동, 군사독재시대 5월의 광주민주화 운동 등의 민중성 실천 현장이, 고봉의 백성 위주 지치주의 정치사상과, 일맥상통함을 동시 감응했다면, 여행인의 일시적 착각일까. 하늘의 해와 달이 낮과 밤의 주인공인 것처럼 고봉 기대승 선생의 정신은 한국사람들의 편견과 맹종, 심지어 그들의 오만까지도 골고루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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