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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仁川上陸作戰55周年記念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06.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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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108.daum.net/_c21_/bbs_read?grpid=uEi0&mgrpid=2475[펌]

정치/안보관련 토론장 | 한미 정치 및 안보 관계 토론장입니다
인천 상륙 작전 사진들.....
번호:2475 글쓴이:전초대장
조회:14 스크랩:0 날짜:2005.09.25 14:41
 ;;;;;;;;;
仁川 上陸 作戰  

仁川 上陸作戰 大勝 55 周年 記念




맥아더 장군의 용단

맥아더원수가 인천상륙 작전을 계획했을 때,
미군 수뇌부는 동경회의('50년 8월 25일)에서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와 항공지원의 항속거리 밖에
있다는 이유 등으로 크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 때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 지휘관들도 당신들과 같이 훌륭한 장군이다.
여러분이 인천상륙작전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북한군의 장군들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것이며,
따라서 인천은 방비가 소홀할 것이다.
고로 이 허점을 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사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 미 제5해병연대의 출동(샌디에고 항에서 승선)



 

▲ 상륙작전부대 부산항 승선 :

1950년 9월 12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될 국군 해병대와
제17연대. 미 해병대가 부산항에 집결해 배에 오르고 있다.
일본 요꼬하마에서는 미 7사단이 고베에서는 미 해병1사단,
사세보에서는 화력지원함이 출발했다


▲ 마운트 매킨리 함상의 맥아더 :
9월 15일 261척의 대수송단을 이끌고 인천앞바다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이 그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 :인천에 상륙하기 직전 미 수송선 함교에서
상륙 명령을 기다리는 손원일 제독


▲ 함상에서 17연대장 백인엽 대령


▲ 월미도와 인천 해안의 모습


▲ 월미도의 엄체호 속의 북한군 76밀리 곡사포


 

▲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감행하다 9월 12일 261척의 대 수송 선단으로 인천 앞 바다에 도착 한
상륙작전 부대인 제 10군단은 9월 15일 2단계로 나누어 작전을
개시하였다. 9월 16일 01:30 해두보를 완전 확보하였다

▲한국해병의 인천상륙 신현준 대령이 이끄는 한국군 해병대가
해안에서 육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 월미도의 화염방사기


 

▲ 월미도에 상륙한 미 해병대

▲ 인천항에 발을 내디딘 맥아더 원수 9월 16일 01:30 인천해두보를 완전 확보하게 되자
맥아더는 인천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 바다물이 완전히 빠진 부두에 드러난 LST인천상륙작전시 상륙부대를 괴롭혔던
인천만의 간만의 차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 한국군 인천시가 진입

 

▲ 인천탈환 기념식 인천 상륙작전 후 인천 시가를 탈환한 아군은
인천 시청에서 인천탈환 기념식을 가졌다


▲고위 수뇌들을 위한 브리핑이 1950년 9월 17일 미 제1해병사단사령부(인천)에서 열렸다.
우측으로부터 맥아더 장군, 사단장 스미스 소장, 스트러블 제독,
위트니 장군(민정참모부장), 라이트 장군(작전참모부장)

▲ 미 제5해병연대가 김포비행장을 점령 후휴식을 취하고 있다

▲ 서울진격전에 지뢰로 사망한 미군

▲ 경인가도에 산재된 파괴된 북한군 전차

▲ (위) 서울로 미 해병

 

▲ 한강변의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서울로 진격하기에 앞서
전선을 바라보고 있는 맥아더

 

▲ 125고지에서 심한 사격을 받고 있는 미 제5해병연대

▲ 한강변에 도달한 미 제1해병대원이파괴된 한강철교를 바라보고 있다

▲ 한강 도하작전


 

▲ 폐허로 변한 서울 시가지

 

▲ 서대문 일대에서의 시가전 모습

 

▲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기 위해 장충동 일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시가전에 대비하고 있는 유엔군

▲ 적의 바리케이트를 제거 후시내로 진입하는 유엔군 전차

 

▲ 충장로에서 투항하는 북한군 1950년 9월 26일

 

▲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중화전 앞에 주둔한 미군. 포격으로
중화전의 지붕이 무너지고 경내는 온통 잡초 밭이다

 

▲ 파괴된 서울역

 

▲ 폐허가 된 광화문

 

▲ 폐허가 된 종로 거리

 

▲ 파괴된 수원 북문

 

▲ 서울 중앙청에 감격의 태극기 게양1950년 9월 27일, 맨 처음 중앙청에 진입한 국군
해병 제2대대 6중대 용사들이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인민군 치하 90일만에 서울을 수복한 국군 해병


▲서울 수복 기념식 1950년 9월 29일, 중앙청 홀에서 거행된 수도탈환 경축식



맥아더장군 동상을 사수하자!










'맥아더논란', 부끄러운 자화상

인천사회정책연구소 소장/칼럼니스트 조창용

맥아더동산 철거논란이 한창이다. 이제는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을 넘어 이념갈등과 반미투쟁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주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린 ‘미국강점청산국민대회’가 이 같은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집회였다. 이 집회에서 민중가수 박성환씨가 부른 ‘맥아더’ 노래가 이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노근리의 양민들을 쏴죽이라 명령했던 그자 맥아더/신천의 양민들을 기름으로 태워 죽인 그자 맥아더” 맥아더장군을 약탈과 양민학살 책임자로 규정한 노랫말 일부다. 특히 맥아더장군의 발언으로 소개하고 있는 나레이션 부분은 더 심각하다.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1950년 9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맥아더’ 노랫말은 史實왜곡

문제는 이 노랫말의 사실(史實)왜곡이다. 1950년에 일어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전쟁 중에 미군의 오폭이나 인민군 소탕을 위해 무고한 양민이 희생당한 경우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이 맥아더의 명령에 의했다는 단정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전쟁 중 피난민 대열에 숨어든 인민군들로 인해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실제 노근리 사건도 미군이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 유격대에 당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미군은 피난민들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게 명령이 하달됐고 이를 어기면 발포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이 사건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사정 하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인 셈이다.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 사건은 이와 다르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하던 1950년 10월 17일부터 52일 동안 무려 3만5천여명의 주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신천 출신 월남인사들의 일관된 증언은 전세(戰勢) 장악에 따라 좌․우익이 벌인 양민간 복수 살육전이라는 것이다. 당시 신천은 인민군 점령 하에서 인민군에 의해 무고한 양민이 무수히 학살당했다. 이에 숨죽이던 우익은 연합군의 북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우익 치안대가 중심이 되어 좌익을 색출해 처형했다. 다시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재역전되자 이번에는 좌익이 우익과 미처 피하지 못한 피난민을 상대로 살육전을 전개했다. 좌․우 세력은 살아남기 위해 점령군 틈바구니에서 어느 편이든 속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번갈아가면서 학살을 한 것이다. 그 탓에 신천출신 월남 인사들은 지금도 이산가족상봉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반목과 불신,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깊다는 얘기다. 이를 보더라도 이 사건이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주장은 신뢰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맥아더 발언 부분은 전혀 근거가 없다. 이 발언이 기록된 것으로 밝혀진 원전은 북한에서 펴낸 <미제국주의자는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 책의 한국판을 바탕으로 누군가 맥아더 발언에 대한 글을 썼고 이를 박씨가 참고해 노랫말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책의 원전마저 맥아더 발언에 대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맥아더 발언이 북한의 선전선동을 위해 조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반미인사들은 이 발언을 사실인양 둔갑시켜 맥아더를 폄하하는 데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의도는 자명하다. 박씨는 자신의 사이트에 “같은 민족, 동포들을 괴롭혀오는 미국과 함께 저와 북한동포 김정일 국방위원장님 그리고 해방을 원하시는 남쪽 동지들께 이 노래가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고 밝힌 데서 엿볼 수 있다. 적어도 맥아더 동상철수가 반미운동과 ‘사회주의식 통일’의 디딤돌이 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거논의, 시민자존심 상처

맥아더동상은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인천시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기념물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지 7년째 되는 1957년 9월 15일의 일이다. 당시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인천시민들은 기꺼이 성금을 보탰다. 그런 이유로 보존과 철거는 인천시민의 몫이다. 그럼에도 요즘엔 동상건립에 성금 한 푼 안낸 사람들의 철거 목소리만 높다. “이게 무슨 은인이냐 끌어내려 살인자의 동상 맥아더”라는 노래 소리가 자유공원을 유린해도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다. 인천에 주인이 없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그 많던 지도자며 원로들은 다 어디에 갔는지…. 인천시민의 자존심이 한껏 짓밟히는 현실이다. 요즘처럼 인천시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진 적은 별반 없을 성 싶다.

200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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