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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조선 건국 비화 이성계는 여진족인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06.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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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비화 이성계 여진족인가?

솔직히 현재 전주이씨의 직계라 할수있는 동북출신 이성계가문은 조선건국 당시 몇십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조선초의 총인구가 500~600만 정도 였고 현재 남북한 및 해외동포 의 총 인구가 8000천만..

 

자연인구 증가로 20배정도 늘어난데 비해 전주 이씨는 몇십명이던것이 수백만으로 늘어나는 기현상을 나타내죠..
아무리 왕족이고 부귀영화를 누렸다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수준이라는거죠...왕족프리미엄을 더해준대도 불가사의한 숫자죠.

그러니까 현재 전주이씨라는 수백만명중 1~2%정도인 몇만명만 진짜 전주이씨라는 거죠..나머지
98%는 가짜라는 건 초등학생이 봐도 알수있는 거죠..

한국의 성씨중 대부분이 이런상태죠..이런점을 주지하신 다음에 아래글을 읽어 보세요...

이성계의 고조부는 고려에서 몽골으로 귀화한 인물이고, 이성계의 부는 몽골에서 고려로 귀화한 인물이라 했다. 이성계의 부 자춘은 공민제 4년에 처음으로 쌍성총관부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내조하러 왔다고 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고종 때 사람으로 몽골에 귀화, 다루가치가 되어 여진족을 다스렸고, 이자춘까지 몽골에서 벼슬을 살았다.

이성계 가계의 특징은, 한 마디로 기회주의자들의 집안이라는 것이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국적을 바꾸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안사가 고종 때 지의주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출세를 위해 과연 국적까지 바꾸었단 말인가. 그래서 지방 관리의 탄압을 받아 도망쳤다고 날조했다. 고작 지방 관리의 보복이 무서워 고려 영토를 벗어나 도망 갔다는 거다.

이성계의 고조부모의 능인 덕릉과 안릉은 타타르인이 주 활동 거점지 달단동(鍵輯洞)에 있었다고 조선실록은 쓰고 있고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영홍에는 성(萬里長城)이 통과하고 있었으며 (쌍성총관)부(府)의 장성근처라고 적고있다

이안사는 언제 출생했는지 알 수 없고 1274년까지 살았으므로 이미 이성계가 고려 황위를 찬탈할 당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성계가 자신의 고조부 이안사가 몽골에 귀화하기 전까지 고려인이며 “고종 때 지의주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고 얘기한다면 모두가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지의주사를 지낸 이안사라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다면, 더욱 신빙성을 더해주겠지만, 이안사의 출생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전주이씨 족보에도 안 올랐던 사람이다. 고려인 이안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안사가 몽골에 귀화한 후 다루가치가 되어 살았던 동녕부는 여진이 집단으로 이주해 우리나라의 감시를 받으며 천년 동안 살던 채달목분지다. 여진족이 중토로 들어간 후 채달목분지에는 고려인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여진족이 채달목분지로 재차 이주했을 때는 고려인과 같이 살았다.

그러나 고려사와 세종실록에서 규원사화에 이르기까지 여진족과 이성계의 가계를 기록한 모든 기사는 이안사와 이성계가 고려인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다.

이안사는 여진족이었던 것이다. 이자춘이 고려로 귀화한 것은 이성계가 21살 때였다. 이성계도 여진족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성계의 외가도 여진족이라니까, 이성계는 순수 여진족 혈통이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서 권력탈취를 위해 위화도 회군했을 당시, 동북면이 아니라 서북면의 여진족 천여 명이 밤낮을 달려와 지원했던 것이다.

이안사는 고려인이 아니나 고종 때 몽골에 귀화한 것은 맞다. 고종 때 여진족이 세운 금이 몽골에 망했다. 이안사는 금이 정복된 것을 계기로 몽골인이 되었다. 귀화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멸망하고 몽골땅으로 변했으니, 그냥 몽골인이 된 거다. 이안사가 몽골인이 될 당시는 썽성총관부는커녕 동녕부도, 8첩도 설치되기 전이다. 그래도 다루가치까지 된 걸로 보아 몽골에 적극적으로 충성한 모양이다. 이자춘이 고려로 귀화한 때는 몽한이 쇠약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공민 때다. 이성계의 집안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가계였던 것이다.

‘李’는 이자춘에 이르러 공민제로부터 받은 사성이기 때문에 이안사는 이안사가 아니고, 이행리는 이행리가 아니며, 이춘은 이춘이 아니다. 이안사는 금나라식 이름과 몽골식 이름이 있었고, 이행리와 이춘은 몽한식 이름밖에 없었다.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이 빠이앤티무르? 몽골은 자신의 딸을 대대로 고려 황제에게 시집보내는 수법으로 고려를 통치한 나라다. . 고려 황제가 그런 몽골의 이름을 가졌겠는가. 고려 황제가 우리나라말을 할 줄 모르는 몽골 황제의 손자가 되다 보니까, 몽고식 이름도 하나 붙여줄 수는 있어도, 정식 이름은 아니다.

이성계는 여진족이고, 몽골로 귀화한 금나라인 이안사를 고조부로 뒀으니까, 정식 몽고식 이름이 있었다. 근데 도저히 이성계의 몽고식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 .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으로 살다간 사야가도 있다. 사야가의 영정을 보라. 거기서 왜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가.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 같이 생겼다. 사야가 김충선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정신까지도 조선인이었다. 사야가의 호는 중국을 그리워한다는 모화당이었다. 우리나라 가문의 족보책을 뒤져본다면, 이씨조선이 얼마나 사대주의에 썩어빠진 나라인지 알 수 있다. 이성계와 그 후손들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여진족인 사실이 드러나면 아무도 이성계를 우리나라 통치자로 추대할 사람은 없다. 여진족은 우리나라 땅에 등장한 기원전 19세기부터 조선시대까지도 줄곧 우리나라에 의해 멸시받던 종족이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면서 신돈의 자식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우왕의 아들을 옹립했다. 결국 이성계는 신돈의 자식임을 알면서도 옹립했다는 모순에 빠진다. 고려황제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해서 황위를 계승할 수 없다고 이성계 스스로 말했으니까, 고려인도 아닌 여진족은 당연히 우리나라 황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이성계는 고조부가 고려인이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그런데 여진족은 이성계만이 아니다. 이성계의 동족도 있고, 명으로 넘어간 여진족도 있었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란 사실은 명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란 사실은 이성계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는 오직 하나의 결격사유였다. 고려로 귀화한 여진족은 이성계가 고려인인 척하고, 또 이성계가 권력을 잡으면 그들에게도 유리하니까, 입 다물고 있었지만, 명으로 간 여진족은 다르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을 주원장에게 알려야 그들의 출세길이 열리는 것이다.

쿠데타후 이성계는 10살인 창왕을 시해했다. 어린아이를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공양왕을 옹립해 3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역시 폐위시키고 시해했다.

정도전, 권근 등이 이성계가 여진족이었음을 몰랐을까? 이성계가 여진족임을 알았든, 아니든 쿠데타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정도전, 권근 등 소위 이씨조선의 개국공신들은 모두가 매국노다. 하지만 정도전과 권근 등은 일신의 영화를 위해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에게 영토와 역사를 모두 다 주었다.

고려사는 고려에서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고, 이씨조선이 창작했다. 고려 역사책은 실록과 사초밖에 없었다. 삼국사기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씨조선은 고려사를 편찬한다는 구실로 고려사를 축소할 수 있었다. 이성계의 즉위(1392년)와 동시에 작업에 들어가 1451년에 일단 완성되었다. 60년이나 걸렸다.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를 기본 자료로 했다면서, 무려 6번이나 고쳐 썼다. 이씨조선의 시각에서 유교에 입각하여 동아시아의 고려를 중원에 대한 사대주의국가로 만든 것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모든 성씨(姓氏)의 족보는 高麗때부터 기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초기 때 부터 이다.高麗 말기는 이미 몽고의 지배 하에 있었고 명(明)나라의 강한 세력에 압박당하고 있었기에 혈통(血統)을 중요시한 족보 따위는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朝鮮王朝가 점차 안정을 찾는 태종(太宗 AD. 1418년)말경부터 세종(世宗 AD. 1419년)초에 이르러 모든 성씨(姓氏)의 씨족(氏族)들이 혈통(血統)의 중요성을 느끼고 그때부터 족보(族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족보의 역사를 삼한(三韓)으로 기준하고 高句麗, 百濟, 新羅, 高麗를 거쳐 朝鮮王朝초까지 인맥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족보를 기술할 당시는 한반도에 漢字의 地名이 모두 행정의 편이상 바꾸어진 상태였다.

상고시대(上古時代) 때부터 고려(高麗)때 까지는 모계사회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어서 굳이 혈통(血統)을 고집하여 똑같은 성(姓)을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 모계사회서 파생된 성씨(姓氏)는 혈통(血統)과 관계없이 그때 그때에 따라 성(姓)을 하사받게 되거나 봉작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관직을 받을 경우와 王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굳이 血統을 고집하고 성을 이어온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뿐이다.

태종(太宗 AD. 1401~1418년)말 이후 세종(世宗)때 이르러 조선 왕실은 자신들 불분명한 가문의 전주이씨 족보(族譜)를 편찬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全北 全州)에 태조 李成桂의 사당을 짖고 영정을 모시는 과정에서 全州를 본관(本貫)으로 했다는 이야기 이다.

고로 전주이씨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지어낸 것이며 全州李氏라는 것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없는 것 이었다.

오늘날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대종보(大宗譜)에는 新羅의 35대 경덕왕(景德王)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년)때 사공(司空) 벼슬을 하였던 이한(李翰)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에 실려있다.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은 1958년 장여화(藏勵 )가 편저한 중국지명대사전과 맥을 같이 하는 책이다.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인 으로 대륙에 있을 때 사관(史官)으로서 사공(司空)의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중국인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주요내용을 요약하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 447쪽에는 이한(李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한(李翰)의 아버지는 이화종(李華宗)이다. 李翰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AD. 742~756년)말 때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고 적고 있다. 태어난 곳은 휴양( 陽)이라 했다.

누가 봐도 중국 역사책보고 적당히 자신들의 조상을 이어 붙였다는 보이지 않는가..?
이씨 조선이란 이름도 거짓이다 .... 성계 조선 이라함 정확한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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