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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충북 괴산의 우암 송시열선생묘(청천면소재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4.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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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암송시열(1607-1689년)선생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는 장군대좌형(將軍臺座形)이라 불리는 우암 송시열(1607-1689년) 선생 묘가 있다. 원래 묘소는 숙종(肅宗) 15년(1689)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정읍에서 사사된 후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8년이 지난 후 숙종 23년(1697)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청천은 송시열이 벼슬을 물러난 후 은거했던 화양동계곡과 노론사림(老論士林)의 중심인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자리는 장군대좌형인데 주변 산세에 졸병에 해당되는 산들이 없으므로 발복(發福)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시설자금 300냥을 기부하고 청천시장을 개설하여 사람들이 몰려들게 하였다. 그러자 마을도 번창하고 송씨 가문 후손들도 번창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우암 송시열의 생애는 교과서나 사극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이다.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에 빗대어 송자(宋子)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직 당리당략(黨利黨略)에만 치우친 당쟁(黨爭)의 원흉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팔풍사 회원들 간에도 그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생전에 못할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절대 명당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오늘의 답사주제는 그 말을 확인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오전8시40분 서울을 출발하여 10시 정각에 진천에 도착하였다. 안내를 맡아줄 진천군청에 근무하는 서상석 회원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지방 회원들이 합세하였다. 진천을 출발한 버스는 34번 도로를 따라 초평저수지를 지나 두타산 고개를 넘고 증평 읍내로 들어섰다. 반탄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올라가더니 증평읍사무소에서 우회전하여 읍내를 빠져나온다. 증평리 삼거리에서 청안, 화양구곡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592번 도로로 들어선다. 그리고 청안에서 다시 화양구곡, 청천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달린다.

괴산군(傀山郡)은 신라가 삼국통일 무렵 가잠성을 지키다 순사한 찬덕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김춘추가 괴주(傀州)라는 명칭을 하사하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산 모양들이 정말 괴(傀)하게 생겼다해서 글자그대로 괴산(傀山)이라 한 것 같다.



 

청안면(淸安面)을 지날 때는 칠보산(540m)자락이 청안천과 어울려 만든 산수(山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때 음성에 사시는 최대규 선생께서 이곳이 전국에서 진사(進士)가 가장 많이 나온 고장이라고 알려준다. 나중에 안 내용이지만 조선 숙종이 청안현 출신 생원과 진사 50여명이 사마방(司馬榜)에 급제하자 이것을 기념하고자 청안사마소(淸安司馬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감 23명, 생원과 진사 91명을 배향(配享)하였다. 이 경치를 보고 가만있을 수 없었던지 문학박사인 유영봉 교수가 차안의 마이크를 잡더니 특유의 입담으로 이곳 지형을 설명해준다. 속리산 연맥들이 일구어낸 산들 즉 두타산, 보광산, 백미산, 칠보산, 좌구산, 설운산 등은 경치가 아름답고 신비로워 모두 불가나 도가를 연상시키는 산 이름이다. 그리고 이곳 산 속에는 지금도 도를 닦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버스가 좌구산(657.4m)자락 질마재를 힘겹게 넘더니 19번(청주-충주)도로와 교차하는 백봉 사거리를 직진한다. 여기서부터는 37번 도로가 된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회전하면 화양구곡 가는 592번 길이고, 우회전하면 37번 청천 가는 길이다. 청천 길로 들어서 조금만 오면 아주 작은 분지가 나오는데 바로 청천면소재지다. 청천 사거리에서 청천초등학교 쪽으로 우회전하여 약200m정도 올라가면 송시열 선생 신도비가 보인다.

여기다 차를 주차하고 주변 산세를 살피면 청천(靑川)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산과 물들이 사방으로 둘러 쌓여 있다. 먼저 묘지 전설에 나오는 청천 시장이 있는가하여 살펴보았는데 깊은 산골임에도 쾌 큰 시장이 있었다. 묘지 입구에서 보이는 우암 산소의 주산은 탐랑(貪狼) 귀인봉(貴人峰)으로 아주 잘 생겼다. 묘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높지만 계단이 잘 정비되어 있어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다. 산등성에 다 오르면 커다란 봉분 하나가 나타나는데 바로 우암 송시열 선생 묘다. 묘에는 문인석과 정조임금의 어필인 "유명조선좌의정문정공우암선생묘(有明朝鮮左議政文正公尤菴宋先生墓) 정경부인이씨부좌(貞敬夫人李氏부左)"라고 적혀있는 묘비가 있다.

 

간단한 묵념으로 참배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니 경치는 정말로 아름답다. 묘 뒤 주산 현무봉은 탐랑 목성으로 기세 있어 보이고, 앞쪽에는 10여 개가 넘는 귀한 봉우리들이 키 재기라도 하듯 일렬로 우뚝우뚝 솟아있다. 마치 출진(出陣)을 알리는 깃발 같기도 하고, 크고 작은 붓을 세워놓은 필진사(筆陣砂) 같기도 하다. 주변 산세로만 본다면 과연 송시열 같은 문명 높은 대학자가 묻힐만한 자리다. 그러나 풍수지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용(龍)과 혈(穴)이다.

 

백두대간 속리산(1057,7m)에서 분맥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시루산(482,4m)과 선도산(547,2m), 상당산성, 구녀산(484m)을 거쳐 좌구산(657.4m)을 만든다. 정맥은 질마재를 지나 계속 북상하고 아래로 뻗은 산맥 하나가 청천의 주산인 설운산(588m)을 기봉(起峰)하였다. 좌구산은 이곳의 태조산(太祖山)이 되는 것이다. 청천면 가운데를 흐르는 박대천을 사이에 두고 우암 산소 쪽은 한남금북정맥이고 건너편 봉우리들은 백두대간에서 기봉한 것들이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두 산맥 사이로 화양구곡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달천이 되었다가 충주호로 합수하여 남한강을 이룬다. 두 산맥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서 작은 보국(保局)을 이룬 것이 청천이다. 이러한 곳에 대혈(大穴)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아쉽게도 우암 산소는 아니다.

 

주산에서 내려온 산 능선은 힘은 있어 보이나 활발한 변화가 없다. 특히 묘 뒤 과협처(過峽處)는 약20m정도가 일자로 쭉 뻗었다. 과협이 길면서 일직선으로 곧장 나가면 마치 죽은 뱀이 일자로 뻗은 것과 같다하여 혈의 결지는 기대할 수 없다. 과협이 길더라도 중간이 학의 무릎처럼 기운이 한번 뭉치거나 벌의 허리처럼 잘록하다면 생룡(生龍)이 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 영송사(迎送砂)는 뚜렷하게 있어 생룡 여부를 판단하는데 다소 혼란이 된다.


그러나 혈장을 보면 혈이 아님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 묘지 바로 뒤 입수도두처럼 생긴 곳을 자세히 보면 주산에서 내려온 용이 여기서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룡의 행룡(行龍)이 멈춘 곳이 아니라 양분하여 나가는 곳이다. 그 사이에 묘소가 있으니 생기가 모일 수 없다. 두 산줄기가 갈라지면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묘 앞을 보면 많은 흙으로 축대를 쌓았지만 본래는 계곡이었을 것이다. 계곡은 물이 곧장 앞으로 나가므로 지기가 모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재산도 곧장 빠져나간다고 본다. 또 밤낮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음곡풍(陰谷風)은 계곡을 따라 불면서 묘지에 큰 피해를 준다.
이처럼 원진수(元辰水, 용맥을 따라 온 물)가 앞으로 곧장 나가는 것을 두고 고전(古典)은 `원진당심직출(元辰當心直出) 미가언흉(未可言凶)`이라 하였다. 즉 원진수가 혈 앞으로 곧장 흘러나가면 그 흉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다.

 

주변 산세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정답게 이곳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강 건너 10여 개가 넘는 귀한 봉우리들도 똑바르게 이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이곳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봉우리를 향해 안산을 삼고 장군대좌형이라 이름하였다. 누군가 그럴듯한 전설까지 만들어 우암 선생의 명성을 더욱 빛나게 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역사적인 유명인물이라 하여 그 묘지가 명당이라는 선입감은 버려야 한다. 특히 우암은 풍수지리에는 문외한이었던 것 같다. 그가 자리를 정해 주어 이장했다는 송강 정철의 묘는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다. 이곳처럼 높은 산 능선에 자리했는데 용이 지나가는 과룡처(過龍處)다. `과룡지장(過龍之葬)은 삼대내절향화(三代內絶香火)`라 하여 가장 꺼리는 곳이다.

 

우암의 풍수지리관을 가장 잘 나타내는 역사적 기록이 있어 살펴보았다. 북벌을 준비하다 갑작스럽게 숨진 효종대왕의 장사를 지낼 때 송시열은 국상(國喪)의 자문을 맡았다. 송익필, 김장생, 김집, 송시열로 이어지는 자타가 인정하는 조선 예학의 거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의 관이 시신보다 작아 널 판을 잇대 관을 크게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임금의 관(棺)은 관 자체가 궁(宮)이라 하여 재궁(梓宮)이라 한다. 성리학과 예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 관을 너덜너덜하게 잇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후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이는 송시열이 효종의 염을 빨리 못했기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처음 효종의 장지를 결정한 인물은 당시 풍수에 능한 예조참의(禮曹參議) 윤선도였다. 윤선도(1587-1671년)는 서인(西人)인 송시열과는 반대되는 남인(南人)의 거두였다. 그는 수원부 청사 뒷 산등성이를 명당이라고 지목했다. 청사 뒤 산이 용혈(龍穴)로서 앞산과 물이 모두 좋아 천리 이내에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주장하였다. 세종대왕의 영릉 다음가는 곳이니 주자(朱子)가 말 한대로 종묘(宗廟)의 제사를 영구히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다른 지관들도 그곳이 길지(吉地)라고 호응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수원부 청사 뒤를 장지로 정하면 수원부를 옮겨야 하므로 군사들과 백성들의 고통이 클 것이다라는 이유를 달았다. 그러면서 "장지를 결정하는데 풍수설을 쫓을 것은 없고, 그 땅이 도로가 되거나, 집터가 되거나, 수해가 있는 등 오환(五患)만 일어나지 않는 땅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특히 송시열은 "효종은 군사들을 특별히 사랑했는데 7천 병력이 주둔하는 고을을 철거하고 그 농토와 가산을 파괴하여 능을 조성하는 것은 대왕의 뜻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효종 장지 문제에 대한 송시열의 반대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과 반대 당파인 사람이 주장했다고 해서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문제를 가지고 치열한 당쟁이 시작되었으니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윤선도가 지정했던 그 지리는 공교롭게도 약100년 후 효종의 현손인 사도세자의 능이 조성되었다. 이때 정조가 내탕금으로 이주비용을 마련해주자 군사들과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특히 수원은 더욱 발전하여 행정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송시열이 우려했던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을 비추어 볼 때 송시열이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능했다고 알려진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청천 분지는 평탄하고 원만한 명당이다. 이 깊은 산골에 이만한 분지가 형성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자연이 아니면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절경이다. 청천은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복지(福地)의 땅이 분명하다. 이러한 땅을 만들려면 용맥을 통하여 산천정기를 이어 받아야만 가능하다. 아마도 우암 선생 묘 뒤 볼록한 곳에서 갈라진 맥이 각각 평지로 낙맥(落脈)하여 청천이라는 양택지를 이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암 선생 묘는 명당 물은 우측에서 나와 좌측으로 흐르는 우수도좌(右水倒左)인데 자좌오향(子坐午向)을 놓았다. 이상하다 싶어 물 나가는 파구(破口)를 측정하니 손사(巽巳) 방위다. 이는 팔십 팔향법 중에서 가장 흉하다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에 해당된다. 오향(午向)을 가지고 향상작국(向上作局)을 하면 인오술(寅午戌) 삼합(三合)은 화국(火局)이 된다. 화국에 손사(巽巳) 방위는 임관궁(臨官宮)이다. 이곳을 물이 치고 나가 파구(破口)되니 그 집안에서 가장 똑똑한 자손이 화를 당한다는 향이다. 또 향의 바로 좌측 궁위는 재물과 관련된 녹(祿)방위다. 녹 방위를 물이 치고 나가면 소황천(小黃泉)이라 한다. 하루아침에 재산이 망한다고 하는 향이다. 이처럼 귀와 녹을 한꺼번에 물이 치고 파구되도록 향을 놓는 것을 살인대황천이라 하니 이곳이 그렇다.


경치가 아름답다고 이곳을 장군이 앉아있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 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 경치가 좋아도 용의 기운이 뭉쳐 혈을 맺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주변 산과 물 역시 혈지를 감싸주지 못하면 좋은 산수(山水)라 할 수 없다. 우암 손시열 선생 묘가 좋은 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암 송시열! 주자학(朱子學)의 거유(巨儒), 도학(道學)정치의 대노(大老 : 대현군자로 크게 높혀서 존칭하는 칭호)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宋子)로 불림.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당쟁(黨爭)의 표본(標本)


우암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그를 일컫는 칭호만큼이나 다양하다. 조선왕조실록에 한 사람의 이름이 3천 번 이상 나오기는 오직 우암 뿐이며, 전국 42개 서원(書院)에 배향되어 이 부문에도 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나라 정치와 학계를 30여년간 한 손에 쥐고 흔든 인물이며,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사약을 마시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다.


우암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열한 당쟁의 시대에 살았고 그 자신이 최대의 당쟁가였다. 살아생전은 물론 죽은 후에도 끝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에서는 도학과 의리의 표본인 성현(聖賢)으로 추앙하고,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에서는 저주와 증오의 대상이다. 이러한 논란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팔도풍수지리사랑회 회원들은 어느 묘를 답사하던지 그곳에 묻힌 분에 대한 예의 표시로 간단한 묵념을 한다. 종교를 떠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송시열 선생 묘에서만은 "절을 하고 싶은 사람만 합시다"라는 말과 함께 몇 명은 끝내 절을 하지 않았다.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탓에 적이 많고 주변과 끊임없는 불화를 일으킨 송시열이다. 이것이 개인적인 일로 끝나지 않고 꼭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 시켜 당쟁으로 이어졌다. 말년에는 가장 촉망하는 제자였던 윤증(尹拯, 1629-1714년)과도 불화하여 끝내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는 계기도 만들었다.

 

 

 

 

 

 

 

 

 

 

 

 

 

 

 

 

 

 

 

 

 

 

 

 

 

 

 

 

 

 

 

 

 

 

 

 

 

 

 

 

 

 

 

 

 

 

 

 

 

 

 

 

 

 

 

 

 

 

 

 

 

 

 

 

 

 

 

 

 

 

 

 

 

 

 

 

 

 

 

 

 

 

 

 

 

 

 

 

 

 

 

 

 

 

▼묘역아래에 위치한 청주한씨재실 숭모재

(내부로 들어가 보니 한때 손님들로 북적였을 재실이 텅비여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러 집기들은 먼지로 뒤 덥혀있고, 건물은 쓰러지기 일보직전 모습, 쌀 뒤주의 크기로 보아 한때 권세가 대단한 문중으로 여겨진다.)

인생만사 세웅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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