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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조광조,학포양팽손◑

심곡서원추향제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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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16862

(지번) 상현동 203-2

경기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심곡서원(深谷書院):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 ▶국가사적 제530호 지정

 

심곡서원추향제례축문(대축:심곡서원학장 조성달,초헌관 용인시장 김학규님)

이상일 용인시장 “나랏일을 자기 집 일처럼 조광조 정신, 용인공직자 모델로"

[데일리엔뉴스 이종성 기자] 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은 1일 심곡(深谷)서원 추계 향사에 참석해 정암 조광조 선생의 정신을 기렸다.

수지구 상현동에 위치한 사적 제530호인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과 학포 양팽손(1488~1545)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심곡서원 추향제 분정기]
▲초헌관 권오성 ▲아헌관 이건구 ▲종헌관 조성홍 ▲대축 이영섭 ▲집례 정연국 ▲전사 김종규 ▲진설 잔관희 ▲사준 인경환 ▲내봉작 주경식 ▲외봉작 이장환 ▲전작 박창석 ▲봉향 송시봉 ▲봉로 김석빈 ▲찬인 박장순 ▲도기 이인열‧유재권

심곡서원은 1650년(효종 1년)에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됐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는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향사는 돌아가신 분의 넋을 기리며 음식을 바쳐 정성을 표현하는 의식이다.

이 시장은 심곡서원의 역사적 가치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삶과 업적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시장은 “정암 선생은 나랏일을 자기 집 일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다. 정암의 개혁 정신을 우리 시대에 맞게 잘 이어받아야 한다”며 “용인특례시 공직자들도 시민들을 위한 행정서비스를 자신의 일인 듯 여겨서 최선을 다해 일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이날 추계향사를 보기 위해 현장에 방문한 문정중학교 학생들을 격려하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이 시장은 “전통의 소중함과 가치가 희미해져 가는 요즘 시대에 심곡서원이라는 문화유산이 용인에 있다는 것은 큰 자랑”이라면서 “미래의 주인공인 학생들이 용인의 소중한 역사를 잘 지켜 나가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심곡서원(深谷書院) 강당기(講堂記) - 송시열/송자대전143권

(임인일기 2022. 01. 13)

지난 인종(仁宗)ㆍ명종(明宗) 두 조정(朝廷) 이래로 선생(靜庵 趙光祖)의 도(道)가 세상에 크게 밝아져서 비록 부인네나 아이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외고 그의 덕을 칭송(稱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 후에는 비록 말을 잘하는 선비가 있어도 다시는 말을 덧붙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태학(太學) 유생(儒生) 강유선(康惟善.1545년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암의 신원 복작을 호소하여 관철시켰다)의 소장(疏章)이 바로 원한(寃恨)을 풀고 도를 밝힌 첫 번째의 문자(文字)였으나, 선생의 연원(淵源)을 논한 것은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그가 포은(圃隱. 鄭夢周)을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삼은 것은, 대개 포은이 맨 처음 정주(程朱)의 학설로 우리나라를 계도(啓導)했는데, 그가 종횡(縱橫)으로 설화(說話)한 것이 이학에 부합하여 어김이 없었으니, 그를 이학의 조종이라 이른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야은(冶隱. 吉再)이 포은한테서 전해 받은 학문을 사예(司藝) 김숙자(金叔滋)가 그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金宗直)에게 전수(傳授)해서 김 문경공(金文敬公. 한훤당 金宏弼)에게 내려왔다가 드디어 선생에게 미쳐 왔다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 되지 못한 듯하다. 선현(先賢)이 주고받은 계통(系統)을 후학(後學)이 감히 논의할 바 아니나, 여러 노선생(老先生)의 언론(言論)과 선생의 풍지(風旨)로써 본다면, 중간 두어 분은 다만 그 단서(端緖)를 계발(啓發)했을 뿐이고, 오직 문경공(김굉필)에게서 수학(受學)했음만이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대개 선생은 특출한 자질을 가지고 문명(文明)한 기회를 만나서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 없이 홀로 도의 묘리(妙理)를 깨쳤다. 염락관민(濂洛關閩.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주희 등의 출신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의 학문을 말미암아서 위로 《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의 논지(論旨)를 구했는데, 규모가 정대(正大)하고 공부가 엄밀(嚴密)하여 순수한 성현의 도이고 제왕(帝王)의 법이었다. 비록 한 시대에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후세에 전해서 더욱 오래되어도 폐단이 없을 만하였다. 아,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의 간여할 바이겠는가. 하늘이 실상 계시(啓示)한 것이다. 조정에서 이미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토록 했으니, 그를 보답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그런데 서울과 외방 선비들이 또 그의 무덤 곁에 사당(경기도 용인 소재 심곡서원)을 세우고 신위를 봉안했으나, 강당(講堂)은 미처 짓지 못하였다가 그 후에 장보와 진신이 다시 의논하고 재목(材木)을 모아, 기해(1659)년 3월에 시작해서 신축(1661)년 2월에 준공하였다.

이리하여 공부하고 휴식하는 장소가 대략 완비되었다. 선생의 5대손인 지금 삼수 군수(三水郡守) 위수(渭叟)가 여러 학생을 위해서 나에게 기(記)를 청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선생이 우리나라에 탄생한 것은 염계(濂溪. 주돈이)가 송나라에 태어난 것과 같다. 어찌 반드시 구슬을 꿰듯이 차례로 주고받아야만 이 도학(道學)의 전통(傳統)이 되는 것이랴. 무릇 후인으로서 이 강당에 오르는 자는 한갓 선생의 용색(容色)과 성음(聲音)만을 상상하지 말고 반드시 선생의 학문한 바를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다. 대저 선생의 학문은 가깝게 정주(程朱) 학문의 정맥(正脈)을 종주로 삼고 위로 수사(洙泗.공자의 연원을 일컬음)의 오묘한 지의(旨意)를 구한 데에 불과하였다. 대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왔으나,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는 것은 선생이 매우 부끄러워하던 바였는데, 하물며 겉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버릇이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서원을 설치한 것은 송나라 때에 가장 성했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를 권장(勸奬)한 말로는 장남헌(張南軒. 張栻)의 악록기(岳鹿記)만큼 구비한 것이 없다 한다. 세밀(細密)하기로는 음식(飮食)ㆍ기거(起居)의 절차. 비근(卑近)하기로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실상과, 현미(玄微)하기로는 천리와 인욕의 즈음까지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따로 할 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회옹(晦翁. 주자)은 오히려 ‘하학(下學)들의 공부에 대해서는 궁구하지 못했다.’ 하여 반드시 발(發)하기 전에 수양하고 발하는 즈음에 살펴서 선(善)은 확충(擴充)시키고 악(惡)은 이겨서 없애도록 하였다. 대저 두 부자(夫子)의 설은 곧 선생이 복습(服習)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학문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이것을 버리고는 딴말이 있을 수 없다.

선생의 유사(遺事)로서 여러 글에 빠진 것이 있다. 선생이 문경공(한훤당)을 따라서 희천(煕川)에 갔을 때 나이가 겨우 17세였다. 문경공이 맛좋은 음식 한 가지를 구해서 모부인(母夫人)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간수하는 자가 소홀히 하여 솔개가 움켜가 버리므로 문경공의 꾸중 소리와 기색이 자못 엄숙하자 선생이 앞에 나아가서, “선생께서 봉양하려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하지마는, 군자(君子)의 말과 기색은 잠시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문경공이 듣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으로 걸어서 선생의 손을 잡으면서,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고, 네가 실상 나의 스승이다.”

하고는, 종일토록 칭찬해 마지않았다.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진실로 고금에 뛰어났지마는, 문경공의 선에 복종(服從)하는 도량(度量) 또한 선생과 서로 계발(啓發)된 바 있었다. 희천의 고로(古老)가 지금까지 이 일을 미담(美談)으로 전하는데, 이것을 이 당에 게시(揭示)함이 마땅하므로 아울러 나타내었다.

계축(1673)년 10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쓰다.

* 이 달의 선비 정암 조선생에 대한 자료로 신도비문(노수신 찬, 1579년)을 올리려 하였으나 행장(퇴계 찬, 1564년)을 쓴 동시대의 평가 보다는 한 세기가 지난, 후 세대의 평가는 어떠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송시열의 강당기를 골랐습니다.

강당기를 지은 이 때(1673년)는 자신의 수제자인 윤증의 아버지이자 친구인 ‘윤선거의 묘갈문’을 지은 시기입니다.

“대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왔으나,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는 것은 선생이 매우 부끄러워하던 바였는데, 하물며 겉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버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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