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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양양동명서원앞에세운우계양렬공조인벽신도비문飜譯文影印]▣[대광보국숭록대부 용원부원군 양렬공 우계 조선생 신도비명]▣[大匡輔國崇祿大夫 龍原府院君 襄烈公 愚溪 趙先生 神道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3. 22.

[양양동명서원앞에세운우계양렬공조인벽신도비문飜譯文影印]

▣[대광보국숭록대부 용원부원군 양렬공 우계 조선생 신도비명]▣

▣[大匡輔國崇祿大夫 龍原府院君 襄烈公 愚溪 趙先生 神道碑銘]▣

선생의 諱는 인벽(仁璧)이오 號는 우계(愚溪)이며, 또 해월정(海月亭)이라한다. 性은 조씨(趙氏) 貫鄕은 한양(漢陽)이시다. 시조 諱 지수(之壽)는 고려의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僉議中書事)이시고, 그 아들 諱 휘(暉)는 쌍성총관(雙城總管)이시고, 아들 휘(諱) 양기(良琪)는 습작으로 총관이 되시어 나이 十三세에 원(元)나라에 청병하여 동쪽 일본을 정벌(征伐)함에 군사를 온전한 채로 돌아오고 또 합단(哈丹)을 토벌하여 포로를 원나라에 바차니 원세조가 크게 기특히 여겨 비단 도포와 옥띠(지금의 漢陽趙氏家寶/●서울시 동산문화재 나1-계13525호●)를 하사하여 장려(獎勵)하니 선생께 조부.증조부가 되신다.

아버지의 諱는 돈(暾)이신데 처음 처음 諱는 우(祐)라 하였다. 여진(女眞)의 난을 숙청하고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시고 삼중대광 용성부원군(三重大匡龍城府院君)으로 봉하셨다. 비위 군부인(郡夫人)은 간성이씨(杆城李氏) 평리 홍복(洪福)의 따님이시다.

선샌께서는 용진현(龍津縣,現강원도문천시 옥평동일대로 변경)의 세거하시던 댁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시면서 특이한 바탕이 있으시어 어려서부터 슬기와 도량이 남의 생각밖에 뛰어나셨다. 자란 뒤에 학문과 문장을 겸하고 통하여 능히 부조(父祖)의 유풍을 ㅇ;ㅣ으 시고 공민왕을 섬겨 등주(登州)의 十二城을 넓혀 平正하시고 또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邦實)과 더불어 서경(西京)의 백년 동안 빼앗겼던 땅을 토벌하여 회복시켰다. 공민왕(恭愍王)二十一년엔 안함(安咸)·변주(邊州)·북청(北靑) 등지에 도적이 들어 그것을 크게 격파시키고 적 七十여 首級을 베이고 봉익대부(奉翊大夫)를 배수하였다. 우왕(禑王)五年 己未(1379)에 계림에 도적이 들어옴에 강릉도 도원수 겸 부윤을 배수하고 그곳을 다스렸다. 八年 壬戌(1382)에는 강릉도 상원수가 되셔서 부원수 권현룡[[壬戌辛禑八年○大明 洪武十五年]임술신우 8년(1382), 대명 홍무 15년○江陵道上元帥趙仁璧 副元帥權玄龍 與倭戰 斬首三十級。○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으로 더불어 적을 쳐서 대파하고 적의 머리 三十급을 베었다. 十一年 乙丑에 교주도(交州道)에 도적이 들어옴에 사도 도지휘사(四道 都指揮使)를 배수하셨으니 사실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용원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龍源府院君 三司左使 兼 判小府寺事)를 하사 하였다. 그런 뒤에 고려의 운수가 종말을 고하니 조선조 태조(太祖 李成桂)께서 등극하여 남매의 情義로써 세 번 부르시고 일곱차례나 벼슬을 제수 하였으나 모두 나서지 않으시고 망복지의(罔僕之義=신하로 되지 않겠다는 의리)를 굳게 지켜서 관동(關東)의 양양(襄陽)의 시상촌(柴桑村)으로 돌아가 누우셔서 여울물을 노련탄(魯連灘)이라 하고, 돌을 도취석(陶醉石)이라 하여 강해 이장년(江海 李長年). 월촌(月村) 정만(鄭槾)으로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삼아서 바다 위에 작은 집을 짓고 해월정(海月亭)이라 이름하여 바다로 도피한 뜻을 부치고 흰 옷과 백립을 쓰고 거문고 노래를 스스로 즐겨 산수의 사이에 방랑하여 세상밖에 일을 묻지 아니하고 세모의 하늘 아래 혹 대궐을 사랑하고 서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시를 지어 이르기를

 

♠蝶翅勳名薄 (접시훈명박) 龍腦富貴輕 (용뇌부귀경)

♣나비의 날개처럼 공명은 얄팍하고,

♣용의 뇌인 부와 귀도 가벼이 여기노라!

♠萬事驚秋夢 (만사경추몽) 東窓海月明 (동창해월명)

♣만사가 가을 꿈에 놀라듯 사라지고,

♣동창엔 바다 달이 밝게도 비쳐온다.

라 하고 또 이르기를

♠淡淡西山月 (담담서산월) 靄靄空中雲 (애애공중운)

♣맑고 맑은 서산의 달이며,

♣상하게 일어나는 공중의 구름이라!

♠山人不畏虎 (산인불외호) 永夜不掩門 (영야불엄문)

♣산 사람 호랑이 두려워 아니하니,

♣긴긴 밤에 사릿문 닫지 않네!

 

라고 읊으니 세상에서 선생의 시는 질탕하고 호매하여 세간의 때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청풍(淸風)과 높으신 절개(節槪)는 당시의 삼은(三隱 = 圃隱 鄭夢周 牧隱 李穡 冶隱 吉再를 말함)으로 더블어 나란히 아름다움을 같이하여 모진 이도 청념해지고 게으른 이도 서게 하였다. 동해의 황벽한 고을이 화하여 추로(鄒魯=孔孟이 사시던 곳)의 예악학문이 있는 고을이 되었으니 선생의 풍도는 산고수장(山高水長=덕화가 높고 긴 것을 말함)하다할 것이다. 태종조에 추성양절익위 보리좌명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시사 영경연사(推誠亮節翊衛 輔理佐命功臣 輔國崇綠大夫 門下左政丞 判都評議寺事 領經筵事)를 贈職하고, 한산백(漢山伯)을 奉하고 諡號는 양렬(襄烈)이라 下賜하였다.

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는 一男 一女를 낳으니 아들 온(溫)은 개국정사좌명의 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이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繼配 정화공주(貞和公主)는 조선 환조대왕(桓祖大王)의 따님으로를 六男二女를 낳으셨다. 아들 연(涓)은 좌명일등공신(左命一等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이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다음 후(侯)는 지돈령(知敦寧)으로 시호는 안정(安靖)이고 사(師)는 별호(別號)를 가천재(嘉川齋)라 하는데 예에 따라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중추부사(僉中樞府使)를 제수(制守)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양(襄陽)에 가서 양렬공(襄烈公) 모시니 정종(正宗께서 충(忠)과 효(孝)의 두 가지를 온전히 하였다하는 교시(敎示)가 있으셨다.

부(傅)는 동지돈령(同知敦寧)이고, 보(保)와 백(伯)은 무후(無後)하다. 세 따님은 선공감정(繕工監正) 황길원(黃吉源)과 내부부령(內部副令) 임맹양(林孟陽)과 소윤(小尹) 곽왕보(郭王輔)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큰 아드님의 손자 의(儀)는 첨지(僉知)이고, 완(琓)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한풍군(漢豊君)을 봉(奉)하였고, 하(河)는 도제(都制)요, 흥(興)은 참판(參判)이오, 육(育)은 의영고사(義盈庫使)이다. 둘째 아드님(涓)의 손자 모(慕)는 총제(總制)요, 자(慈)는 돈령(敦寧)이오, 혜(惠)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시호는 공안(恭安)이오, 련(憐)은 동지돈령(同知敦寧) 병조참판(兵曹參判)이다. 셋째 아드님의 손자 득수(得壽)는 사정(司正)이오, 넷째 아드님의 손자 맹발(孟發)은 김화현령(金化縣令)이오, 중발(仲發)은 장성현감(長城縣監)이오, 계발(季發)은 녹사(錄事)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의 산소는 개성 흥교면 사관리의 축좌(丑坐) 언덕에 계시다. 사패지(賜牌地:공신에게 주는 땅)의 산판(山坂)이 있으며, 묘비(墓碑)가 있으시다. 정화공주(貞和公主)의 산소는 장단 진서면 전제리 취적교(吹笛橋)의 동북방 五리 자좌(子坐) 언덕에 있고, 역시 사패지(賜牌地) 산판(山坂)이 있으시다. 아아! 우리 선조의 성덕(聖德)과 끼치신 음덕(陰德)으로 자손에게 유택(幽宅)이 흘러서 그 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도학(道學) 문장(文章)과 이름난 공경들이 면면하게 대를 이어서 동국(東國)의 대성(大聖)이 되었다. 그리고 문정공(文正公) 별호 정암(靜菴)과 같은 분은 오현(五賢)의 으뜸으로 동방(東方)의 사표(四表)가 되시니, 이 또한 선생의 끼치신 덕이 아니겠는가?❁

양양(襄陽) 옛 고을의 수석(水石)의 성지(聖地)를 추상하니 선생의 발자취가 이르지 낳은 곳이 없었으나 세상이 멀고 사람이 없어져서 무성한 풀과 보리(麥)가 성하는 탄식이 있을 따름이다. 지난 인조 무진년에 후손 부사 위한(玄谷 緯韓)이 마침 이 고을에 임하여 선세의 자취를 찾아 계술(繼述)하고 동명서원(東冥書院)을 세우니, 고을의 선비들이 또 선생의 큰 절의를 추모하여 서원의 북쪽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우고 조두(俎豆=祭器와 祭物)를 베풀어서 향사(享祀)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 하였다. 대개 향선생이 몰하심에 향사하는 의리이었다. 병화를 여러 차례 겪어서 세웠다 폐했다하기를 수차 있었는데 정종조 병오년에 순흥(順興)으로 옮겨 세웠다가 고종조 신미년(辛未年)에 이르러 온 나라의 사우를 모두 훼철시켰다. 그 후 무술년(戊戌年)에 후손 관찰사 종필(鍾弼)이 양양의 옛 터에 비[東溟書院遺墟碑]를 세우고 각을 세웠다.

철훼된지 이미 백여년(1982년)이 되었는데 광복함에 미쳐서 경향의 종친들이 서원을 복원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차례 상의하고 사림들에게 통해 알리고 아울러 성균관(成均館)에 통고(通告)하니, 당시 관장 이재서(李載瑞)가 선생의 대절(大節)을 크게 사모하여 성의를 같이 하고 협조하여 드디어 옛 터에 다시 세웠다. 시작한 지 三년만에 준공을 고하니 사우가 거듭 새로워졌다. 이에 국내의 진신들이 모두 모여서 분주히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하였다.

다만 그러나 산소는 이북 땅에 있어서 여러 후손들이 성묘(省墓)하거나 향사(享祀)를 할 수 없으니, 맺힌 한이 극진(極盡)하다. 이러므로 모두가 의론하여 말하기를 양양(襄陽) 땅은 선생의 끼친 자취뿐 만이 아니라 후학들이 사우를 세우고 해마다 향사하는 곳이니 마땅히 여기에 단을 마련하여 묘제의 의식을 겸행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하여 드디어 터를 닦고 비를 세우고 아울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마련함에 존중의 여러 선비들이 중형(中衡)으로 하여금 명(銘)을 하라하니 돌아보건대 불초한 후손이 지식이 적고 학문이 없으니 어찌 능히 성한 덕과 큰 행실에 손을 쓸 수 있겠는가. 굳이 사양타 못해서 드디어 그 참남됨을 잊고서 명(銘)을 하였다. 이르되

 

송악(松岳)은 높고높고

용진(龍津)은 맑고맑다.

정기와 영기을 모아

선생을 탄강케 하였도다.

성한 시대 충성스런 신하로

나라 호위 간성(干城)되었다.

등주(登州)를 확대하고

서경(西京)을 회복했다.

백년토록 침노(浸怒)한 땅

일조(一朝)에 되찾았다

요순(堯舜)임금 이루었고

당우(唐虞)세상 만들었다.

왕명으로 작(爵)봉하니

삼중(三重)이요 대광(大匡)이라.

고려(高麗) 운수 다해가니

양양(襄陽)으로 은퇴(隱退)하다.

외로운 신하 나라 망하니

전 임금 잊지 못해.

서산에서 고사리 꺾고

시상촌(柴桑村)서 국화 먹네.

충성심은 해와 달을 꾀어 뚫고

의리는 감상을 중히 한다.

두 임금 섬지기 아니하고

스스로 다스리며 높이 나른다.

홀로서 충성심 보존하고

푸른 저 하늘에 보답한다.

곧은 충성 높은 절개

늠름하기 상설(霜雪)같다.

하늘같이 솟은 빗돌

길가에 세웠도다.

산이 평파하고 바다가 마르도록

만세(萬世)토록 길이길이 창성(昌盛)하리.

 

◐단군기원 四千三百十年 정축 七월 유화절에

二十세손 中衡은 손을 씻고 삼가 碑文을 짓고 誠力으로 建立하다.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17세손 종업(鍾業)은 번역하다.

 

[飜譯文筆寫影印함:嘉川齋公派 24世孫 晛溪 趙炳龍]

[2021.03.22.21:00.斗井軒에서.....]

[사계화도는 2007년도 한풍군파 조성학종친이 1917년도에 발간한 良節公派丁巳派譜를 빌려주고, 프린터로 스캔한 首編山圖에 실린 "四季花圖"를 컴퓨터로 다시 編輯하여 지금까지 私用한 것이다. 앞으로고 계속 이 "四季花圖"를 사용할겄이다! 2021년 3월 대종회에 현주공 조찬한선조님의 문집 "현주집번역서"를 기증할때도 사용하였는데, 이를 꼬투리잡아 다른 사람이름을 도둑질(도용)하여 홈페이지 종인동정란에 기증종친을 언제는지 악의적이고 고의적으로 챙피줄려고 답글에 사기친 글을 올려군요! 관리자인 대종손가 회장이란 자가 1년간 하는 짓걸이가 가관이로군아!!!!!돌조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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