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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옥천집(玉川集)-조덕린(趙德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3. 30.

◈옥천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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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집(玉川集)-조덕린(趙德鄰)◈

●형태서지:권수제

●옥천선생문집(玉川先生文集)

●판심제:玉川先生文集

●간종:목판본(木版本)

●간행년:1898年刊

●권책:18권 9책

●행자:10행 20자

●규격:20.1×17.2(㎝)

●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한46-가1280

●총간집수:한국문집총간 175

●저자:성명 조덕린(趙德鄰)

●생몰년:1658년(효종 9)~1737년(영조 13)

●자:택인(宅仁)

●호:옥천(玉川), 창주(滄洲)

●본관:한양(漢陽)

▣특기사항:권두경(權斗經), 이재(李栽) 등과 교유

[가계도]

趙廷珩

趙頵 將仕郞

豐山柳氏

柳世長의 女

趙德純

趙德鄰

安東權氏

權壽夏의 女

趙喜堂

趙喜常

趙喜尙

李元鳳

晉山姜氏

姜必明의 女

趙德臣 出

趙德賓

李壽春

柳錫台

◈기사전거 : 行狀(李象靖 撰), 趙頵墓表(趙德鄰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

[기사]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1 12월 1일, 英陽縣 注谷里 집에서 태어나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20 진사시에 합격하다. ○ 金應祖의 외손 安東權氏와 혼인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27 강원도 都事에 제수되어 떠나는 柳世鳴에게 送序를 지어 배웅하다.

숙종 16 1690 경오 康熙 29 33 부친의 명으로 葛庵 李玄逸을 뵙고 조부 趙廷珩의 碣文을 청하다. ○ 伯兄 趙德純이 文科 殿試에 壯元하다.

숙종 17 1691 신미 康熙 30 34 文科에 及第하여 승문원에 들어가다.

숙종 18 1692 임신 康熙 31 35 영의정 權大運의 천거로 史院에 들어가다.

숙종 19 1693 계유 康熙 32 36 伯兄 趙德純의 喪을 당하다. 喪轝를 고향으로 호송한 뒤 벼슬에 뜻을 버리다. ○ 부인 權氏喪을 당하다. ○ 濟源驛丞이 되다. ○ 시강원 설서가 되다.

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37 예조 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39 10월, 부친상을 당하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47 5월, 모친상을 당하다.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51 江原 都事가 되다. ○ 五臺山, 金剛山, 淸平山을 유람하다. ○ 파직된 뒤 安東 召羅洞 玉泉山 아래 卜居하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52 孤山(禮山) 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숙종 37 1711 신묘 康熙 50 54 黃海 都事가 되다. 이듬해에 체차되어 돌아오다.

숙종 42 1716 병신 康熙 55 59 忠淸 都事가 되다. 겨울에 그만두고 돌아오다.

경종 1 1721 신축 康熙 60 64 戶布, 口錢, 遊布, 結布의 施行 便否에 대한 경상도 관찰사의 물음에 답하다.

경종 4 1724 갑진 雍正 2 67 弘文錄에 들다.

영조 1 1725 을사 雍正 3 68 수찬이 되다. 사직하면서 陳戒하다. ○ 5월, 필선에 제수되다. 이후 교리와 필선에 누차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가지 않다. ○ 10월, 사간이 되다. 安東에서 상소하여 明聖學, 修實德, 精選任, 正名實 등 10條를 진달하다. 당쟁의 폐해를 논하고 老論의 득세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인해 집권 노론 세력의 탄핵을 받아 仕版에서 삭제되고 鍾城에 定配되다. ○ 鍾城 配所에서 「周易」을 읽으며 지내다.

영조 3 1727 정미 雍正 5 70 丁未換局으로 少論이 집권하자 풀려나, 7월에 집의에 제수되다. 돌아오는 길에 응교로, 다시 사간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사은한 뒤 즉시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다. ○ 9월, 교리가 되다. 이어서 수찬, 사간이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다.

영조 4 1728 무신 雍正 6 71 1월, 李光佐가 천거하다.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3월, 湖西에 李麟佐의 亂이 일어나자 嶺南上道號召使가 되어 安陰, 居昌의 諸賊들을 招諭하다. ○ 6월, 동부승지가 되다. 참찬관으로 召對에 참여하다. ○ 우부승지, 병조 참의와 참지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이후 洛東江 상류에 滄洲精舍를 짓고 5~6년 지내다. 이후 다시 安東 召羅洞에 眄柯軒을 짓고 지내다.

영조 12 1736 병진 乾隆 1 79 가을, 을사년 상소의 내용에 대해 다시 老論 臺臣 金漢喆의 탄핵을 받아 鞫問을 당하다. 석방된 뒤에도 論啓가 계속되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

영조 13 1737 정사 乾隆 2 80 여름, 교리 金聖鐸이 스승 李玄逸을 伸救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엄한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金挺潤이 發啓하여 을사년 상소의 일을 뒤미처 다시 논하다. 이제 濟州에 安置하라는 명이 내리다. ○ 7월 20일, 濟州로 귀양가던 도중에 康津縣 海倉의 候風館에서 졸하다. ○ 10월, 豐山縣 烏赤村에 장사 지내다.

영조 14 1738 무오 乾隆 3 - 5월, 사면되다.

영조 26 1750 경오 乾隆 15 - 9월, 관작이 회복되었다가 환수되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 관작이 회복되었다가 환수되다.

정조 12 1788 무신 乾隆 53 - 11월, 全釋되다. ○ 이즈음 李象靖이 행장을 짓다.

순조 3 1803 계해 嘉慶 8 - 2월, 관작이 추탈되다.

고종 35 1898 무술 光武 2 - 문집이 간행되다.(年譜)

고종 36 1899 기해 光武 3 - 특명으로 復官되다.

[기사전거] : 年譜, 行狀(李象靖 撰), 墓碣銘(蔡濟恭 撰),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시문은 1788년(정조 12)경에 저자의 손자들에 의해서 수습된 것으로 보인다. 李象靖이 지은 행장에 “公의 손자 趙運道가 遺文을 수습하고 行蹟을 纂次하여 나에게 행장을 청하였다. …府君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가 이미 사오십 년이 지났다.”고 하였으며, 蔡濟恭이 1788년경에 지은 묘갈명에는 “선생의 손자 趙述道가 大山 李公(李象靖)이 지은 行錄을 가지고 와서 묘갈을 청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면, 저자의 관작이 회복되고 全釋의 命이 내려진 1788년경에 저자의 손자들이 시문을 수집 정리하였으며 李象靖과 蔡濟恭 등이 묘도문자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黨爭의 와중에서 저자의 乙巳疏가 그 이후로도 계속 조정의 논쟁거리가 되어 관작의 회복과 환수가 반복되었으므로 문집의 간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뒤 1898년에 후손들이 저자의 손자 趙進道의 문집인 「磨巖集」과 趙運道의 문집인 「月下集」을 간행하였는데, 그에 앞서 저자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1898년 봄에 族後孫 趙承基가 쓴 「磨巖集」 발문에 “이제 玉爺의 文集이 간행되었으니 이에 부군의 遺稿도 함께 간행하여 후세에 전하게 한다. …刊役을 마치고 부군의 玄孫 趙秉禧와 胄孫 趙晉容이 나에게 발문을 청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같은해 여름에 從玄孫 趙秉禧가 쓴 「月下集」의 발문에는 “정유년(1897) 가을에 의견을 모아 先祖 玉川 文集의 刊役을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일을 마치고, 이어서 부군의 遺稿를 간행하였다. …嗣孫 趙演容이 나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라고 하였다. 1897년 가을부터 1898년 여름까지의 기간에 저자의 문집과 저자의 손자 趙進道와 趙運道의 문집에 대한 刊役이 차례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68년에 완성된 年譜에는 “손자 趙運道와 趙述道가 遺文을 수습하였다. …갑오년(1894)에 頤齋 權璉夏, 龍山 李晚寅, 傍裔 南洲 趙承基가 召羅의 四未亭에 모여서 校勘하여 9책을 만들었는데, 이때(1898)에 비로소 간행되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저자의 문집은 1788년경에 손자 趙運道와 趙述道 등이 수습하여 家藏해 왔으며, 후손 趙承基, 趙秉禧(6세손), 趙晉容, 趙演容 등이 1894년경에 權璉夏, 李晚寅 등의 교감을 거쳐 1897년 가을에 刊役을 시작하여 1898년 봄에 18권 9책의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초간본》 현재 규장각(奎5613), 장서각(4-6304),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280),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397)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重刊 기록은 없고, 1987년에 10代孫 趙大鳳이 시문을 증보, 재편하고 年譜를 추가하여 驪江出版社에서 영인출간한 바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98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年譜, 行狀(李象靖 撰), 墓碣銘(蔡濟恭 撰), 磨巖集跋(趙承基 撰, 磨巖集), 月下集跋(趙秉禧 撰, 月下集)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 문집은 18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에 총목록이 있고 서문과 발문은 없다.

 

◈권1~2는 詩이다. 240여 수가 대략 연도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그중 60여 수가 挽詩이다. 권1에는 1692년경 벼슬살이를 시작할 때로부터 1725년 鍾城에 定配되기 이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權斗經, 權斗紀, 吳三達 등의 시에 대한 차운시, 1708년에 江原 都事로 부임하여 原州 客館, 大關嶺, 佛影寺, 望洋亭, 鏡湖, 襄陽, 高城 海山亭, 正陽寺, 麟蹄 客館 등에서 지은 시, 1722년에 李存道와 함께 淸凉山을 유람하고 지은 시, 벗 安鍊石의 〈七懷詩〉에 대한 차운시, 柳世鳴, 金聲久, 李嵩逸, 李徽逸, 金台重, 李玄紀, 權斗望, 權斗寅, 李萬敷 등에 대한 挽詩가 들어 있다. 권2에는 1725년 鍾城에 定配된 이후부터 사면되어 돌아와 졸할 때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配所에서 1727년에 70세가 되어서 지은 〈七十吟五絶〉을 비롯하여 같은해 7월에 사면되어 돌아오면서 지은 시, 1730년에 滄洲精舍를 완공하고 지은 시, 그 이후로 滄洲精舍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 天運, 天禮, 天道, 天命에 대해서 지은 시, 奉化의 避炎亭을 읊은 시, 洪萬朝, 成文夏, 吳命恒, 李宜晚 등에 대한 挽詩가 들어 있다.

 

◈권3~4는 疏 14편, 箋文 2편, 狀 6편이며, 疏 뒤에는 兩朝敎批筵說이 첨부되어 있다. 권3에는 1693년의 시강원 설서 사직소, 文元公 李彥迪과 文純公 李滉을 제사하는 嚴谷書院에 賜額할 것을 청하는 소, 文節公 金淡을 제사하는 丹溪書院을 훼철하지 말 것을 청하는 소, 1725년의 수찬, 필선, 교리 등의 사직소가 실려 있다. 권4에는 1725년의 사간 사직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修實德, 愼庶獄, 恢公道, 正名實 등 10條의 陳戒와 당쟁의 폐해를 비판하는 내용이 별첨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乙巳疏’로서, 저자는 이 상소로 인하여 老論의 공척을 받고 鍾城에 定配되었다. 이어서 1727년에 사면된 뒤 잇달아 제수된 집의, 응교, 사간의 사직소, 1728년에 號召使의 임무를 마치고 陞資된 것을 사양하는 소, 동부승지, 우부승지의 사직소 등이 실려 있다. 첨부된 兩朝敎批筵說은 저자에 대해서 영조와 정조가 내린 傳旨, 備忘記, 傳敎, 批答 및 정조 때에 筵席에서 저자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모아놓은 것이다. 箋文은 1708년에 강원 감사를 대신해서 지은 〈誕日箋文〉과 1716년에 충청 감사를 대신해서 지은 〈冬至箋文〉이다. 狀은 1728년에 嶺南 號召使로 있을 때에 올린 狀啓와 1708년에 江原都事로 있을 때에 監司에게 馳報한 장계이다. 이 장계에는 口訣이 들어 있다.

 

◈권5~6은 書 100여 편이다. 沈檀, 洪萬朝, 朴文秀, 李栽, 權斗經, 李光庭, 金聖鐸, 陶山士林 등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대개 1인 1편씩 인물별로 편차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권7은 雜著 4편과 序 10편이다. 잡저에 있는 〈政院盆蓮說〉은 1692년 여름에 假官으로 政院에 들어갔을 때에 지은 것이며, 〈關東錄〉은 1708년 江原 都事 시절 4월 16일부터 5월 1일까지 首比를 거쳐 越松亭, 望洋亭, 蔚珍, 佛影寺 酒泉臺, 三陟, 竹西樓, 羽溪, 江陵, 五臺山 月精寺, 橫城, 原州 集勝亭 등을 유람한 紀行錄이며, 〈續關東錄〉은 같은해 9월에 다시 高城, 三日浦, 金剛山, 狼川, 淸平山 등을 유람하고 春川으로 돌아왔다가 量田을 하기 위해 다시 楊口, 麟蹄를 거쳐 杆城에 돌아온 紀行錄이다. 〈招諭義旅文〉은 1728년에 號召使가 되었을 때에 叛亂軍을 치기 위해 義兵을 모집하는 檄文이다. 序는 藥圃 鄭琢, 近始齋 金垓, 寶白堂 金係行, 修巖 柳袗의 문집에 대한 서문, 凝溪 玉沽의 實紀에 대한 서문, 1684년에 강원도 도사로 부임하는 柳世鳴을 배웅하는 送序 등이다.

 

◈권8은 記 13편, 跋 8편, 銘 2편이다. 記는 英陽 鄕校의 育英樓, 豐基 客館의 齊雲樓, 義城鄕校의 興學齋에 대한 기문, 沈檀의 追尤堂, 吳三達의 醉隱堂, 朴萬普의 養拙軒, 姜順伯의 守瓜窩, 그리고 저자 자신의 書齋인 四未堂 등에 대한 기문이며, 跋은 孝行錄, 書帖, 圖帖, 「三禮補考」 등의 뒤에 붙인 後敍이다. 銘 2편은 모두 거문고에 대해 지은 것이다.

 

◈권9는 上樑文 5편, 祝文 14편, 祭文 20편, 哀辭 1편이다. 상량문은 聾巖 李賢輔의 影堂, 文溪書院, 英陽 客舍 등에 대한 것이며, 축문은 嚴谷書院을 移建하고 晦齋 李彥迪과 退溪 李滉을 奉安하는 글, 汾江書院에 溪巖 金坽, 九峯精舍에 杜谷 洪宇定, 洛濱精舍에 孤山 李惟樟, 梅林 鄕賢祠에 梅軒 郭壽岡과 寒溪 吳善基를 봉안하는 글 등이고, 제문은 葛庵 李玄逸, 松月齋 李時善, 恒齋 李嵩逸, 權斗經, 李浹, 權斗紀, 表兄 鄭堯天, 表弟 柳敬時, 伯兄 趙德純, 亡室 權氏와 姜氏, 女婿 李元鳳 등에 대한 것이다. 애사는 權莆에 대한 것이다.

 

◈권10~14는 碑文 3편, 墓碣銘 42편, 墓表 6편, 墓誌銘 5편이다. 비문은 趙威明의 묘비명, 李鏶의 신도비명, 宋遠器의 碑陰記이며, 묘갈명은 鹿門 趙威鳳, 海堂 權旭, 拙窩 權以時, 李惟樟, 權斗寅, 金聲久, 朴敬祉 등에 대한 것이다. 묘표는 權大載, 先考 趙頵, 伯兄 趙德純 등에 대한 것이고, 묘지명은 錦翁 金學培, 守分窩 金九成, 5代祖 趙源, 趙光仁 등에 대한 것이다.

 

◈권15~17은 行狀 9편이다. 雲川 金涌, 南坡 洪宇遠, 聾齋 李彥适, 悔堂 柳世哲, 懶隱 李東標 등에 대한 것이다.

 

◈권18은 附錄이다. 李象靖이 지은 行狀, 蔡濟恭이 지은 墓碣銘, 權榘, 柳升鉉 등이 지은 祭文, 柳聖和, 裵行儉이 지은 挽詞가 실려 있고, 이어서 北遷贈行詩와 康津易簀時事蹟이 첨부되어 있다. 北遷贈行詩는 저자가 鍾城으로 귀양갈 때에 吳光運, 李萬維, 權萬 등이 지어준 贈別詩이며, 康津易簀時事蹟은 저자가 濟州로 귀양가던 도중 康津에서 졸할 때에 당시 康津縣監으로서 저자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洪重夔가 한 말을 權相一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박헌순(朴憲淳)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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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공 조덕린 문집

   옥천집 ( 玉川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玉川先生文集 판심제  玉川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98年刊 권책  18권 9책 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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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叔父成均生員三秀堂公(諱頍)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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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頍。字子冕。號三秀堂。趙氏。其先漢陽人。始祖諱之壽。仕高麗。爲僉議中書事。子諱暉。封雙城摠管。子諱良琪。襲爵。以副元帥。破哈丹兵。元世祖賜錦袍玉帶以襃之。至孫諱仁璧。以我太祖大王姊壻。麗季典重兵。見邦運將訖。天命有歸。退居襄陽。堅不事二姓之志卒。國朝贈左政丞,漢山伯,諡襄烈。子諱涓。仕我朝。佐太宗。爲右議政,諡良敬。間兩世。而至淸河縣監諱琮。娶于嶺南之榮川。遭文正公己卯禍。

無意西歸卒。而葬於滎。其子孫遂爲嶺南人。孫諱源。娶英陽吳氏。生二子。因居焉。早卒。於公爲高祖。曾祖諱光義。掌隷院判决事。有子二人。長諱健。無育。季諱佺。直長。號壺隱。直長府君有二子。長諱廷珩。進士。季諱廷瓛。懷奇負雋。與兄進士公。丙子後不復應擧。人士多慕與之交。直長府君命。後兄處士府君。是爲公皇考。妣東萊鄭氏。進士榮邦之女。鄭公從遊愚伏鄭先生門下。修身飭行。爲鄕里所宗。夫人擩染家訓。婉順有賢行。以崇禎庚午十一月二十四日生公。公生質粹美。幼而穎悟。書過目輒成誦。出言有意致。府

君甚奇愛之。少長。出就外傅。略通大義。歸而劬學績文。治擧業。中庚子生員。府君命之入太學。朋遊益附。所交多知名士。癸卯。丁府君憂。哀毁盡禮。制旣終。不樂進取。嘆曰。吾尙可及先人存就一名。今無及矣。豈可復治筆硏。爲身榮計耶。况得不得未可知。假令今得。不足自貰。吾其休矣。葢公早喪先妣。繼妣亦先府君歿。已有年。遂絶意不赴擧。閉門靖處。取經史百家語讀之。至老不倦。壬午十月十二日。考終于正寢。享年七十三。葬英陽縣北杏田乾坐之原。配孺人權氏。碩忠之女。冲齋先生橃之玄孫。貞靜賢淑。與公白首

相莊。前四年歿。筮宅于杏田。至是合葬焉。有二子。德培,德淵。女皆嫁爲士人妻。曰金鼎元。曰李杺。曰李華翼。內外孫曾總畧干人。德鄰以一家後生。不及公幼少時。而以耳目之所覩記。公天分端整。韻氣閒雅。不見其有一點浮華輕惰之容。性至孝。事親逢將承迎。有順無違。府君峻整方嚴。見有不可意者。家人子姪。皆抑首縮氣。莫敢仰視。公婉容柔聲。起敬起孝。使之心悅而意喩。其有不安節。不脫衣帶。致養勤劇。先妣有羸疾革。截指和藥。而不可救則毁瘠骨立。易戚俱盡。其奉祭祀也。潔蠲齊宿。必誠必敬。不懈益虔。與一

弟。友于和樂。人無間言。中遭家禍。弟及兩姪相繼殞命。至不安家室。轉徙棲泊。而公收其妻孥。盡心經紀。歸女敎男。使不失其處所。禍家忘亡。視遷如歸。家素饒溫。僮手指僅千。田畝近萬。推與弟妹分去。不以一毫自厚。奉身尤儉約。恒自給而已。不取羸餘。不喜芬華。舊蓄聲妓絲竹之具。一倂罷去。不復近。晨起櫛洗冠。淨掃一室。左右圖史。俯讀仰思。至忘寢食。經傳子氏。靡所不熟究。而尤深於朱子綱目。筆削之嚴。王伯純駁。事功成敗。忠賢邪佞。任用得失。至人物出處。蠻夷姓氏。刃迎縷解。羅列淹貫。無不會諸心而得其旨。

爲文溫雅縝密。切於事情而非空言也。早歲成進士。自是屢試屢中。而亦不屑也。遂輟而敎於家。子弟皆醇謹少過。鄕人皆信服。有大議論。必咨問以决。雖其家事。必相戒曰。吾公聞之。得無不可於意否。咸勑勵從化而善。邑令之來。有意於民者。皆屈干旄。問所興革利否。無遺策。輒歎曰。惜乎。其不用於世也。嘗入薦剡。不果收用。知公者欲强起之。亦知公雅尙不强致也。平居無事。垂簾據几。寂然若無人。客至。淸坐相看。談古今道寒燠。各得其歡心。至族黨子弟來問學者。亦隨其器質。告語成就。亹亹不厭。聞人善。若己有之。

人有過惡。非形顯者。隱而不宣。其在所親厚若一家。其人不可棄。而其過不可不言者。亦循循戒誘。辭意藹如。宛解潛消。開其自新之路。人之聽之。易從而無㤪言。一切世好如洗。於家事。了不經意。而絶口不言財賄。惟恐凂汙。世之所趨利達聲勢之交。亦未嘗中艷而外慕。泊然無所累。德鄰兄弟猥叨顯仕。公每戒之曰。小子勉之。物禁太盛。得之固難。持之實難。惟恭惟勤。可以寡過。因稱先世之遺及謙益滿損之義以詔之。嗚呼。公潛深伏隩。㗳焉終日。與世若無營。而方物出謀。動合事宜。人莫能易也。寡笑與言。油然自由。

與人若無心而謹厚子諒。誠意懇至。人莫能忤也。謙虛退讓。頹乎其順。與物若無競而引經斷義。嶷嶷有立。人莫能奪也。其表裏交養。動靜相須。持己接人。皆有法度。驩然其有恩也。粲乎其有文也。安靜端詳。左右俱宜。不惟其天姿之近道。兼有得於家庭師友之間。有如此者。抑公未嘗以此學自任。人亦未嘗以此名歸之。然涵而揉之。內外完好。色夷氣淸。可畏而親。其視夫佔畢呻吟。沾沾自喜。而輕儇浮惰。釣聲名利祿者。何如哉。世之論者。以公有志不見售。懷才不克展。以爲公恨。且以爲知己者之羞。德鄰曰。不然。公志

非不如古人。才豈不如今人。然履道守貞。終始不渝。乃可貴耳。若衒耀聲名。借助形勢。蘄以自見於世。此乃市道之事。又何足貴乎。且公自少時。淸羸善病。晩而就靜便。居處順適。無飢寒之憂。充養有道。無外誘之汩。至老神明不衰。膚革充盈。子姓滿前。旣秀而蕃。箕範五福。兼有而身享之。天之報施爲不嗇矣。豈以自外至者。論公哉。遇不遇。命也。於公道猶若也。庸何恨。蓋公少嘗從石溪李公學。與其子存齋,南嶽兩先生遊。若兄弟。公雅慕說敬不衰。而講聞道義。契許深重。南嶽先生每呼公爲異姓天倫云。公之懿行淑德。

難遍以疏擧。姑著其大畧如此。以俟仁人君子垂賜編錄。不沉泯於後幸矣。然非公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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