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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영양군/ 일월면 한양조씨 문중 유적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7.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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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13세 호은(壺隱) 조전(趙佺)(配전주최씨)雙封

➋14세 석문(石門) 조정환(趙廷瓛) 配東萊鄭氏墓所(單墓)

➌12세 약산(約山) 조광의(趙光義)(配영양남씨)雙墳

➍13세 연담(蓮潭) 조건(趙健)(配영양남씨)雙墳

조숭도(趙崇道, 1748~1820) 

자는 성유(聖由), 호는 가암(佳巖)이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정환(趙廷瓛, 1612~1663)의 후손으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정종로(鄭宗魯), 조술도(趙述道) 등과 교유하였고,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 『가암집(佳巖集)』 2권이 있다.

◈영양가암고택(英陽佳巖古宅) ⇒월잠종택(月岑宗宅)

가암(佳巖)조숭도(趙崇道,1748~1820)

주강정 사고종택(柱江亭 및 沙皐宗宅)

지번주소) 영양군 영양읍 상원리 475-1

도로명주소)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상원로 234-4

 

월담헌/사월종택(月潭軒─沙月宗宅)

지번주소)경북 영양군 영양읍 하원리 205-1

도로명주소)경북 영양군 영양읍 원당길 2-1

 

하담고택(荷潭古宅) 하담(荷潭) 조언관(趙彦觀,1805~1870)

도로명주소)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삼지길 88

지번주소)경북 영양군 영양읍 삼지1리 315-1

 

조동흥가옥英陽 道溪里 趙東興 家屋

도로명주소)경북 영양군 일월면 향교길 36-6

지번주소)일월면 도계리 613

♣약산당(約山堂) 조광의(趙光義, 1543~1608)芝山書堂

지번주소)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197

장례원 판결사 조광의(1543∼1608)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영양 망운정 (英陽 望雲亭)

도로명주소)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상원로 607-21

지번주소)경북 영양군 일월면 곡강리 399

망운 조흥복은 조선후기 영양지역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한 선비로 학문과 인품이 고결했다고 한다. 관리자(관리단체)조형수

영양군 일월면 곡강리-망운정

#1. 곡강리 망운정

 

일월면 곡강리에 위치한 망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정건물로 조선후기 독특한 서당 양식을 보여준다. 망운이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망운정 현판

일월산에서 흘러내려온 반변천이 흥림산(興霖山) 줄기의 바위벽에 부딪힌다. 남으로 향하던 물길은 그예 몸을 뒤틀어 동북쪽으로 향하니 그 천변의 마을을 굽은갱이 또는 곡강(曲江)이라 했다. 숙종 때인 1692년에 현감(縣監) 정석교(鄭錫僑)가 곡강에서 시회를 열었는데 그 첩첩 곧게 솟은 바위벽을 보고는 ‘비단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하다’하여 척금대(滌襟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척금대를 바라보는 물길 건너편 고즈넉이 작은 갯마을의 높은 지대에 망운정(望雲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영양 삼지리에 살았던 망운(望雲) 조홍복(趙弘復)이 1826년 선조의 묘소 옆에 터를 잡아 만년을 보낸 곳으로, 망운이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조홍복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중(穉重)으로 1773년에 태어났다. 사월(沙月) 조임(趙任)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쌍괴당(雙槐堂) 조호신(趙虎臣),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의 증손인 이규원(李規遠)의 딸이다.


◆망운정
‘망운’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
조홍복이 1826년 선조 묘 옆에 터 잡아
가운데 두칸 대청방…좌우측은 온돌방


조홍복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동생 조남복(趙南復)과의 우애가 남달랐다 한다. 20세 때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도산시회에서 연 3일 장원을 차지해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향시에서도 장원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문장을 아끼고 중히 여긴 군수가 성시(省試)에 같이 응시하여 글을 대신 지을 것을 강요하자 그는 거절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군수의 모략으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순조 5년인 1805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1807년에는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오직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출사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구휼하고 후진을 기르는데 힘썼다. 그리고 만년에 선영 근처에 망운정을 짓고 선조들의 무덤을 지키며 책으로 양식을 대신했다고 한다.

망운정은 약간 기울어진 대지 위에 높직이 자리한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터를 다듬었고 사방으로 와편 토석담장을 두르고 가운데에 일각문을 세웠다. 정자의 기단은 잔디를 깐 마당 안쪽에 자연석을 2단으로 쌓아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다.

망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정건물로 기단 위에 자연석주초를 놓고 누하주를 세워 상부의 사각기둥을 받도록 했다. 전면과 좌측면에는 쪽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우측면에는 자연석 계단을 두었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으로 전면에는 각각 판벽을 세우고 두 짝 여닫이 띠살청판문을 달았다.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정면에 두짝 여닫이 띠살문,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문과 걸창을 내었다. 망운정에는 원래 관리재사가 있었지만 1960년경 소실되었다.

조홍복의 조카 조언관(趙彦觀)이 지은 ‘망운정기(望雲亭記)’에 따르면 1841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 상사(上舍) 김양범(金養範)이 주창하고 후배 17인이 추종하여 족제(族弟)인 조언익(趙彦益)과 조언홍(趙彦弘)이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조홍복이 머물던 정자를 이때 고쳐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자에는 조홍복의 망운정 시판이 걸려 있다.

‘예로부터 은자들 뭍 골짜기에서/ 새로 작은 정자 차지하니 넓은 동천이라/ 산은 큰 들을 에워싸서 둥근 형국 이뤘고/ 층층바위 부딪치는 물결 굽은 고리 같네/ 반평생 세월 헛되이 보내며 늙어가나/ 한 구역 구름에 비로소 한가로움 틈타네/ 노닐며 보는 즐거움뿐 아니라 학문을 닦고/ 책상머리 앉아 남은 생을 계획하네.’

조홍복은 비록 나물죽이나 미역국조차 배불리 먹지 못할 정도로 곤궁하였지만 책으로 양식을 대신할 만큼 자기성찰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고 전한다. ‘시골 산속 집은 늘 찾는 이가 없어서 단지 구름과 달을 벗했다’는 그는 자신의 뜻에 따라 한결같은 삶을 살았다는 고결한 인품의 선비였다.

 

영양 숙운정

자헌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사월(沙月) 조임(趙任) 선생이 세웠다.

 

한양조씨 삼수당종택[학초정(鹤樵亭)]

영양군 영양읍 감천 2리 591-1,2번지, 조선 효종 때 삼수당(三秀堂) 조 규(1630-1679)가 지은 정자와 살림집으로 당시 정자를 삼수당이라 하였으나 1910년 경에 소유주가 바뀌면서 학초정(鶴樵亭─正寢)으로 부르고 있다. 박종만이 소유·관리하고 있으며, 삼수당은 잔디가 빛이 나서 일년에 3번씩 아름답다는 뜻이다.

학초정(鹤樵亭)영지동천(英芝洞天)수성인하(壽城烟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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