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8년(인조 6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온 조위한趙緯韓(1567-1649, 호는 현곡玄谷, 양절공良節公의 8세손, 후에 예조판서가 되었음)은 인재를 기르는 것을 제일 급한 일로 삼아 향교를 중창重創하고 재사齋舍를 개조하고 학전學田을 마련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 철거할 계획이었던 대포진大浦鎭의 옛 청사廳舍와 만호萬戶가 살던 구舊 관사官舍를 유생儒生들의 학당學堂으로 삼고 동명서원東溟書院이라 현판懸板하니 제생諸生이 모두 감사하였다.
조 부사가 " 무릇 서원을 세우는 데는 반드시 그 지방의 명현이나 덕이 높은 분을 모셔서 사당을 지어야 하는 것이니 이 고장에도 또한 사당에 모실만한 선현이 있는가 ? " 하였더니 정언正言을 지낸 노경복盧景福이란 선비가 " 이 부府는 멀리 떨어져 큰 고개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예전의 어진 이로 손 꼽을 만한 분은 들은 적이 없으나 고장 부로父老들의 전하는 말에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조趙 아무개라는 분이 국초國初에 이 땅에 와 숨어 살았는데 그의 남긴 풍습과 혜택이 매우 크니 조공趙公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조 부사가 두렵고 놀라 이르기를 " 용원부원군은 나의 8세조이시다. 그 분의 사업, 공훈과 벼슬하고 물러간 일은 세대가 멀어져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가승家乘을 상고해 보면 공公은 고려 조정에서 예전에 세운 공훈으로 명망이 세상을 뒤덮었는데 마침 고려의 운은 다 하였고 진인眞人(새 임금)은 한 집안에서 일어났으므로 벼슬하지 않고 물러가 동해 가에 숨어 있었으니 그 높은 풍도와 큰 도의심은 지금까지 세상에 빛나니 마침 사당을 지을만 하나 나는 그 분의 먼 자손으로 감히 이 예절을 거행하는데 앞장 서서 할 수는 없다." 고 하여 세 번이나 머믓거리면서 사양하였다.
그러나 부로와 제생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말하기를 " 용원부원군의 절의節義는 전해 온지가 오래 되었는데 우리 양양사람들은 그 남아 있는 말만 듣고도 감동하였으니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 그 분의 덕택이니 한 고을의 의논이 다 그러한데 어찌 부사는 자기의 선조라고 혐의할 것이 있는가." 하여 드디어 유림대표 최정립崔挺立, 이현일李賢一을 시켜 서원 북쪽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조공趙公(용원부원군. 양렬공襄烈公)을 향사하게 함에 사연을 기록할 것을 청하니 조 부사가 창건기創建記를 쓰고 제염부製鹽釜(소금 굽는 가마 솥)와 어선漁船 한 척과 둔전屯田 7석石지기를 마련하여 춘추향사의 밑천과 제생이 공부하는데 쓸 양식으로 삼도록 하면서 "옛날 군인이 적을 막던 곳이 오늘날 선현을 향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후일에 인재와 선비들이 쏟아져 나와 조정에 벼슬하는 사대부가 대를 잇게 되면 태령밖의 거칠고 궁벽한 시골이 공맹孔孟의 도를 지키는 지방이 될 것이니 원컨대 제생은 힘 쓸지어다." 라고 훈계하였다.
그 후 병화兵火로 소실된 서원을 1786년(정조 10년) 순흥順興 와란臥丹에 옮겨 세우면서 진사 조정趙貞(양경공良敬公의 5세손으로 호는 단구丹邱이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도임)을 같이 배향하고 후학後學 성언근成彦根이 이건문移建文을, 김굉金宏(1739-1816, 예조참판, 문장과 서예에 능했음)이 향사축문享祀祝文을 지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고 후손인 강원도 관찰사 종필鍾弼(1840-1915, 후에 공조판서가 되었음)이 1898년 동해 순찰시 옛 모양대로 복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터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을 세워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 유허비각도 1975년 고속도로구역에 편입되어 철거되었다가 양양유림의 동명서원복구추진위원회와 후손들의 성력誠力으로 1982년 서원을 재건, 양렬공과 추가로 배향하게 된 가천재공嘉川齋公의 위패를 봉안하고 봉화奉化의 후손들이 영주시 순흥면 와란리(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412-5)로 모셨던 충현사 편액扁額을 다시 옮겨 달고 이재서李載瑞 성균관장이 중건비문重建碑文을 썼다.
그 후 한양조씨대종회(회장 조종익趙鍾益)에서 7천 8백여 만원의 성금을 모아, 1982년 재건 후 훼손된 사당祠堂, 강당講堂, 삼문三門, 담장을 보수하고 1999년 11월 20일 준공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강원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543
※강원 양양군 양양읍 서원길 44-9
海月亭遺詩
※1636년-2005= 정묘호란전소 369년후.....
※1787년-2005=218년 봉화와란복원후.....
※1871년(고종8)-2005=134년 흥선대원군 훼철되였서.....
1628년구舊 관사官舍를 유생儒生들의 학당學堂으로 삼고 동명서원東溟書院이라 현판懸板
1786년(정조 10년) 순흥順興 와란臥丹에 옮겨 세움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고
1898년 유허비각遺墟碑閣을 세워 표시하였다.
1982년 서원을 재건
1999년 11월 20일 사당祠堂, 강당講堂, 삼문三門, 담장등 보수준공
2005년 전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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