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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록서당(月麓書堂)]
1630년 이전에는 주씨(朱氏)가 살았으나 1630년 한양인(漢陽人) 조전(趙佺) 선생이 이 마을에 처음오로 들어와 정착한 뒤 매한(梅寒)이라 하였고, 1700년 무렵 매계(梅溪) 혹은 매곡(梅谷)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주곡(注谷)으로 부르게 된다.
마을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용골 · 논골 · 성지골 · 새미골 · 감북골 · 앞 산골 등의 골짜기가 서로 맞닿아 있어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 또는 주곡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유형문화재인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이 마을에 있다.
이 고장은 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고향이기 때문에 최근 그의 시비를 마련하여 세웠다. 이 곳의 조씨(趙氏)를 흔히 주실 조씨라 부른다.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마을 전체 분위기와 짜임이 다른 마을과는 달라 학자와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조진영(74) 제보).
앞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주실-매계-매한-매곡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감북- 법곡으로 맞물려 있는 땅 이름의 흐름으로 볼 때, 이는 물 곧 장군천 혹은 반변천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大山先生文集卷之四十四/記■
[月麓書堂記]
日月之山。鬱然爲嶺之東紀。旁枝南走數十里。環抱而成一洞。其蜿蜒旖旎之氣。鍾而賦於人。至滄洲趙公先生兄弟者。以文章德行重於世。其流光賸馥。藹然被於一方。至今彬彬有君子之風焉。其孫運道,聖際與其二弟。皆秀而有文。間嘗過余而言曰。先故寖遠。所居僻奧。子弟後生。懼其無所觀效而能自振也。遂與宗族隣里。議就洞口溪上之盤石。規而爲燠室凉軒。旣成而洞之父兄與其子弟者遊。使讀書講業於其中。庶幾其有進矣。而所以導迪之方。則幸吾子之惠一言也。余惟黨庠家塾之制廢而書堂作。鄕里之間。在處有之。顧其所以爲敎則異乎先王之法矣。今諸公之用心已勤矣。然只如世俗之工文藝競葩藻。以資其進取。則象也不閑於此事。固無所辱命。若有意於庠塾之敎。則聖賢所以示人者具在。亦不可以他求也。幼而習於灑掃應對與夫六藝之術。長而進乎竆理正心成己淑人之法。學聚問辨。以博其理義之趣。體驗完養。以極其踐履之實。體用全而不倚於一偏。本末該而不躓於後先。急迫以求。則懼其揠而助也。徐緩以待。則恐其嬉而荒也。遵陟遐自邇之序。懷有初鮮終之戒。行之以篤厚。持之以悠久。則積累飽飫之餘。行解互資。理事相涵。逢眞源於造次。體妙用於酬酢。是則孟氏所謂深造自得而樂則烏可已者。古人所以玩樂而終身者已倏焉而在我矣。學之有得於敎養者如是。今堂成而敎始矣。未知父兄之所以詔。子弟之所以學者。果能出於此乎。苟舍此而惟文藝之是攻。進取之是圖。則棄甜桃而摘醋棃。避康莊而尋曲徑。用功愈勤而壞其心術者愈甚固。知諸公之不爲此也。象也未能一造其堂而與諸公揖。感二三公之屬意而爲之說。異日者聞嶺海之間有茂才異等者騈肩而立。亦足以自信吾言之不妄矣。若其溪山巖壑之勝。花卉魚鳥之樂。在齋居諸君。自得之耳。又奚待於余言。是爲記。
[월록서당기문]〔月麓書堂記〕
일월산(日月山)이 성대하게 영동(嶺東)의 벼리가 되어 그 옆으로 뻗은 가지가 남으로 수십 리를 달려가다가 빙 둘러 감싸서 골짝 하나를 이루었는데, 그 구불구불 성대하게 뻗어 나간 기가 모여서 이곳 인물에게 부여되었으니 바로 창주(滄洲) 조공(趙公) 선생 형제이다. 조공 형제는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의 추중을 받았으며, 그 전해 오는 광휘와 남은 향기가 성대히 한 지역을 뒤덮어 지금까지도 문질(文質)을 고루 갖춘 군자의 유풍이 남아 있다.
그 후손인 성제(聖際) 조운도(趙運道)와 두 아우가 모두 뛰어나고 문장이 있는데, 근자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조와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사는 곳이 궁벽하니, 자제와 후손들이 그 보고 본받는 바가 없어서 스스로 떨치지 못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마침내 일가, 이웃들과 의논하여 마을 어귀 시냇가의 반석에다가 규획하여 따뜻한 방과 시원한 마루를 만들었습니다. 낙성한 뒤에 마을의 부형들이 자제들과 함께 종유하며 그 안에서 독서하고 학업을 강구하게 하여 거의 진보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을 이끌어 주는 방법을 그대가 한마디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향리의 당상(黨庠)과 가숙(家塾) 제도가 없어지고 나자 서당이 생겨 마을과 동네 곳곳마다 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보면 선왕의 법과는 다르다. 이제 공들의 마음 씀이 부지런하기는 하나 단지 세속에서 하는 것처럼 문예의 솜씨를 닦고 문장의 화려함을 경주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데에만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진실로 부탁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옛날 당상과 가숙에서 했던 가르침에 뜻을 둔 것이라면 성현이 후인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 책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또한 달리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려서는 청소하고 응대하는 예절과 육예(六藝)의 방법을 익히고, 자라서는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성취하고 남을 선하게 하는 공부에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물어서 사물을 분별하여 의리의 취향을 넓히고, 체험하고 사려를 온전히 길러서 실천하는 실제를 지극히 하여야, 체와 용이 완전해져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본말이 다 갖추어져 선후에 차질이 없게 되는 것이다. 급박하게 구하면 맹자가 말한 것처럼 묘를 뽑아 조장(助長)할까 싶어 걱정스럽고, 느긋이 기다리면 놀기만 하다가 황음(荒淫)에 빠질까 염려스럽다. 먼 곳에 오를 적에는 가까운 곳서부터 시작하는 순서를 따르고, 처음은 잘하지만 끝을 잘하는 이가 드물다는 경계를 유념하여야 한다. 독실하게 행하고 오랫동안 지켜 나간다면, 충분히 축적된 뒤에는 행 공부와 지 공부가 서로 바탕이 되고 이치와 일이 서로 함양하여 급작스러운 순간에도 참된 근원을 만나고, 수작하는 사이에 오묘한 쓰임을 체득할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이른 바 ‘깊이 나아가 자득하는 것’이요, ‘즐거우면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니, 옛사람이 ‘완상하고 즐기어 몸을 마친다.’라는 경지가 어느새 나에게 있게 될 것이다. 학문이 가르치고 기르는 데서 얻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이제 서당이 완성되어 가르침이 시작되었는데, 모르겠지만 부형이 가르치는 바와 자제가 배우는 바가 과연 이런 방침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것을 버려두고 오직 문예만을 전적으로 공부하여 진취하기만을 도모한다면, 달콤한 복숭아를 버리고 신 돌배를 따는 격이며 사통팔달의 큰길을 피하고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찾는 격으로, 부지런히 공부할수록 더욱 굳게 그 심술을 무너뜨릴 것이니, 공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을 줄 안다. 내가 한번 그 당에 나아가 공들과 인사를 나누지는 못하였으나 여러 공이 부탁한 뜻에 감격하여 그 설을 지은 것이다. 훗날 영해 사이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탁월한 인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배출된다면, 또한 내 말이 망녕되지 않았음을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산수와 바위, 골짝의 형승 및 화초, 조어(鳥魚)의 즐거움은 학재에 사는 제군들이 스스로 터득할 것이니, 또 어찌 내 말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에 기문을 짓는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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