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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자린고비의 전설 : 충북 금왕읍 삼봉리/유포리/유촌리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06.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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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검절약정신에서 생겨난 "자린고비"전설이 실존인물을 배경으로 있었던 이야기로서 충효의 고장인 충청북도 금왕읍 삼봉리에 실제로 살았던 인물을 배경으로 생겨났다고 합니다. 한양조씨 16세조인 "자인고공 휘륵" 어르신으로서,  조선개국공신이신 충정공 조인옥선조님의 11대손으로 평소에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축척하였고, 임진란 후 국가에 기근이 들어 경상도 지방에 민심이 흉흉해 지자 사비를 털어 국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경상도지방민들이 공덕비를 세움에 어질고 인자하신 어르신이란 뜻에서 "慈仁考碑" 라 하였던것이 慈仁考公이라 칭하였으며, 후에 자린고비의 유래가 되였다고 합니다. 
 음성군 금왕읍에서는 자린고비의 훌륭한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자린고비"상을 수여 하고 있고, 생가 뒷산 삼봉리마을에 거주하는 자린고비의 10대손인 조성윤씨가 3회 수상자로 선정되는 현대판 자린고비 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답니다. 
※찾아가는 길 : 금왕에서 대소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쯤 유포리 슈퍼가 있는 삼거리에 "자린고비유래비" 안내 표지석이 있다. 이길로 들어서 다리를 건너 좌측의 공장을 지나 500여m를 가면 좌측 언덕 밑으로 도로변에 흰 화강암으로 된 "자린고비 유래비"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생가는 유래비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기슭 마을의 맨 위집으로 300여년 전에 지어진 집이 라고 전하여 집니다.  


▲유포삼거리에 서있는 자린고비유래비 표지석


▲삼거리 다리건너서 500여m를 가면 저멀리 좌측 길옆으로 유래비가 보임


▲이제는 유래비가 눈에 들어오는 군요!


▲한양조씨 12세조이신 진사공 휘경 유허비와 나란히 조성된 유래비


▲흰 화강암으로 98년 11월 조성한 자린고비 유래비


▲천정에 매단 굴비의 형상을 띠고 있는 유래비


▲좌측으로 나란히 서있는 자인고공 4대조이신 진사공 휘경 유허비


▲유포리/유천리/삼봉리 삼리접경지에 조성(한양조씨 충정공파 집성촌)


▲1998년 11월에 음성군에서 조성한 유래비


▲유래비 앞 삼거리 남향으로 바라보이는 삼봉리 자린고비 생가마을


▲이곳이 좌측 유촌리/우측 유포리/길건너편으로 삼봉리가 만나는 삼리접경지입니다.


 


 


▲삼봉리 생가마을 앞에서 바라본 유포리쪽 전경


▲생가마을 동편 구렁이 고개를 너어가면 안삼봉리 마을의 한양조씨집성촌입니다.


▲삼봉리쪽에서 바라본 유래비

▲현재판 자린고비이신 자인고공 10대손이신 조성윤씨

▲제3회자린고비상패(조성윤씨 수상)

▲현대반 근검절약의 솔선수범을 보이시는 조성윤/이종임종부님!

▲조성윤씨 부부가 살고있는 삼봉리 주택(분홍색지붕)

▲자린고비 10대손인 조성윤씨 집

▲삼봉리에서 되돌아 나와 고개마루에서 바라보이는 유촌리 한양조씨집성촌

▲자린고비 생가앞에 300여년된 느티나무:자린고비어르신이 심었다고 함.

▲자린고비 생가

▲ㄱ자형 자린보비 생가(만석군집치고 검소한 냄새가 풍기는 생가)

 

 

▲생가는 조선개국공신 한양조씨5세조 충정공(자린고비 11대조) 부조묘(유촌리 마을 후)를 바라보고 서있다.

▲생가에서 바라본 유촌리 집성촌(충정공 장손이신 조성도씨가 살고 있다)

 

▲평범하여 보이는 자린고비 생가

 

 

 

 

 

 

 

▲동북동쪽을 향하고 있는 자린고비 생가마을

▲자린고비 생가 소유주인 이씨부부가 밭에서 고추모종을 내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은 언제나 설렌다.  그렇기에 장맛비로 잠수교가 잠기고, 한강이 위험수위까지 올라간다는 불안한 뉴스도 충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번 답사는 ‘중원문화를 찾아서’란 주제로 청풍문화재단지를 시작으로 미륵사지, 탄금대, 창동마애불, 창동5층석탑, 중앙탑, 중원고구려비까지 충주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충주사람들은 충주시가 한반도의 한복판에 있다고 말한다.  지도를 동서로 나누어보면 몰라도 남북으로는 그렇지가 않은데도 한복판이란 말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 조선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 언저리까지 아우르지 못했던 무렵에는 충주가 나라 땅의 한복판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을 때는 나라의 들이라는 국원성으로 불렸고, 신라의 땅이었을 때는 다섯 개의 서울 중에서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중원경 이라고 불렸다.  고려시대에 붙여진 충주라는 이름도 한자로 따져보면 중심고을로 풀이된다. 

  

충주가 나라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자긍심은 지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충청도 양반의 본고장이라는 이곳 사람들의 긍지는  2백 년 전에 이중환이 [택리지]에 썼듯이 “한강 상류여서 물길로 오가기에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가 살 곳으로 많이 정했다.”는 데에도 있다.   그러나 1908년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중심기능을 청주로 넘겨주게 된다.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다’고 한 이중환의 말도 2백년이 지나자 효력을 잃게 되었고, 이때부터 ‘콧대 높은 충청도 양반’은 뒤로 나앉게 되었다.     

  

충주시는 북쪽의 남한강 줄기와 남쪽의 달천이 합쳐지는 곳으로서 예로부터 물길로 서울과 가까웠다.  물론 이곳 구두쇠의 상징으로 실제 인물이었던 자린고비가 파리 다리에 묻은 된장이 아까워 그 파리를 뒤 쫒아 갔다는 길인 경기도 장호원을 지나 이천으로 통하는 육로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물길이 주된 통로 구실을 했다. 

  

이번 답사에선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자긍심의 상징인 중앙탑(충주탑평리7층석탑)등의 문화재의 감흥을 전하는 것보다 그저 지독한 구두쇠로만 치부했던 자린고비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고 싶다.   

 

  

단양팔경의 일부인 제비봉과 구담, 옥순봉이 위치하고 있는 장회리는 조선 영조시대의 자린고비 조륵에 관한 웃지 못 할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자린고비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이야기지만 자린고비의 어원을 저린 굴비로 잘 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린고비는 자비(慈琵)롭고, 인자(仁慈)하고 고매했던 부자의 비석이다.  갑부로서 평소에 자신의 일에는 아끼고, 흉년이나 전쟁 등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쌀을 풀고, 경작비를 받지 않았던 조륵에게 나라에서 내린 비석이 자인고비(慈仁考碑)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고맙고 아름다운 일이라 널리 그의 행적을 기리게 되었고, 자인고비는 세월의 변천에 따라 자린고비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린고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자린고비가 얼마나 구두쇠였는가 하면, 제삿날이 돌아와 굴비를 사오면 제사를 지낸 다음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갈에 한 번만 쳐다보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자린고비의 아들은 도대체 밥이 넘어가질 않아 밥 한 숟갈을 입에 물고 굴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린고비는 아들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짜서 물만 먹힌다. 이놈아!”하는 것이다.  우연히 밖에서 이 소리를 듣게 된 지인이 얼마나 굴비를 좋아하면 오랫동안 두고 먹으려고 저리 궁상을 떠나 싶어 그 길로 굴비 1두릅을 사서 자린고비 집으로 보냈다.  굴비를 받아든 자린고비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화를 내면서 굴비를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밥도둑을 보내서 남의 집 쌀을 축내게 하려고 한다면서 말이다.

 

또한 그는 신발이 닳는다고 벗어서 들고 다니고, 길을 걸을 때는 팔을 젓고 다니면 옷이 닳는다하여 뒷짐을 지고 다녔으며, 평소 식사를 할 때 밥에다 간장 1종지, 더운 여름날에도 부채가 닳을까봐 부채는 가만히 펴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자린고비가 음성에 살 때 장독에 앉았던 파리 다리에 붙은 된장이 아까워 단양까지 쫒아갔지만 물길에 더 이상 파리를 쫒을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는 이야기. 

  

자린고비의 며느리가 생선장수의 생선을 사는 척하다가 잔뜩 주물러 놓고 돌려보낸 후 그 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여 내놓는다.  “국 맛이 특별하다.”는 자린고비의 말에 며느리는 살림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생각에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자린고비가 말하기를 “그 손을 우물에다 씻었으면 두고두고 생선국을 먹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단다.    

  

자린고비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 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자신과 가족들에게는 그토록 인색하고 궁핍한 생활을 강요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정을 베푼 사실이 아름답게만 생각되지 않는다.

   

굴비를 돌려보내며 밥도둑을 보냈다고 화를 냈던 그의 모습과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곡간 문을 열었던 자선사업가의 모습이 하나로 그려지지 않는다.  인색한 모습에서는 놀부나 옹고집이 연상되다 자선가의 인자한 모습을 그리려 하니 어색하기만 하다.

   

나라에서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까지 세웠는데 오늘날 자린고비는 놀부와 옹고집 사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답사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조륵의 이야기를 선택했던 첫 번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고 싶었고, 두 번째로 조륵 자신은 진정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요즘 경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과소비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행복해지기 위한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생하면서 모은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간간이 접한다.  그럴 때 마다 고단했던 그들의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겸손함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인 것이다.  겉에 보여 지는 모습만으로 판단하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처럼 행복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이다. 

  

구두쇠의 상징으로 된 조륵도 스스로 삶에 만족하였다면 행복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라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충주사람들의 긍지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나오듯이 다시 한번 내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면서 살겠다는 중심 마음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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